"익숙하다고 여겼던 공간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2026년 01월 15일
아트선재센터 첫 전시는 철거 앞둔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한옥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싹》(1995)이었습니다. 이후 미술관만의 전시 방법론 기초가 돼준 장소 특정적 전시였는데요, 현대식 미술관이 들어설 옛터에 한국의 미와 정신을 담아낸 기념비적인 전시로 회자됩니다. 2~30대 '젊은' 축에 속한 17명 국내 작가는 발랄하면서도 당시로선 다분히 파격적인 설치 작업으로 대중을 맞이했습니다. 《싹》(1995) 참여 작가였던 이불, 최정화, 이동기 작가 등은 세계가 주목하는 동시대적 작가로 우뚝 섰습니다.

최정화, <현대미술의 쓰임새: 컬러 컬러 컬러>, 1994, 색깔 전구, 미니어처 의자, 센서 / ≪싹≫ 전시 전경 / 사진 김우일
≪싹≫ 30주년이었던 2025년, 아트선재센터는 미술관 건물을 하나의 조각적 생태계로 전환하는 대규모 장소∙환경 특정적 프로젝트를 선보였습니다. 아르헨티나-페루 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첫 한국 개인전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인데요, 건물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전관에 이르러 제도적 장치와 구조를 해체한 것이 특징입니다. 국내 미술전문지 ‘월간미술’이 선정한 2025년 올해의 최우수 전시에 꼽힌 해당 전시는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본 전시를 기획한 조희현 아트선재센터 전시팀장님을 서면으로 만났습니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던 이불 작가 개인전(2012)의 영국 런던 순회전(2014)을 보조했던 것이 전시 일의 첫 출발점이었다는 조희현 팀장님. 아트선재센터 합류부터 이번 전시 기획 배경,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전시팀과의 비하인드 일화에 관해서도 두루 여쭤봤습니다.

조희현 전시팀장이 작년 9월 6일 토요일, 아트선재센터 한옥정원에서 열린 '아티스트 토크: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 사진 남서원
Q. 팀장님, 아트선재센터와 첫 만남이 궁금합니다.
런던의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인턴십을 하며 전시 일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당시 보조했던 전시가 2012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던 이불 개인전의 순회전이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인연이 참 신기하게 느껴져요. 이후 아시아문화원 소속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정보원 일을 하다가, 2017년에 아트선재센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Q. 한옥과 양옥에서 열렸던 《싹》(1995)은 어떠한 전시였으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작가와는 어떠한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보시나요?
아트선재센터의 첫 전시였던 《싹》(1995)은 지금의 미술관 건물이 지어지기 이전에 있던 한옥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전시였어요. 겉모습은 한옥이었지만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내부 구조는 일본식이었고, 생활하면서 증축한 별관은 또 서양식으로 지어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건축 양식이 뒤섞인 건물은, 당시 한국 사회가 모호한 국가 정체성 속에서 빠르게 변화하고 성장해 가던 시대적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죠.
당시 이 전시의 큐레이터였던 김선정 예술감독님은 작가들에게 신작을 커미션하여 화이트 큐브가 아닌 주거 공간 안에서 실험적인 형식의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싹》은 전시의 형식에 대한 실험이자, 작가들의 예술적 비전과 실험 정신을 지지하는 미술관의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전시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싹》이 제시한 방향성은 지금까지도 아트선재센터의 정체성처럼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2025년은 《싹》의 30주년이 되는 해였고, 다시 한번 동시대 미술관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어떤 공간이 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2025)는 미술관을 단순히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제도적 공간으로 바라보지 않고, 끊임없이 분해되고 변화하며 다시 생성되는 하나의 생태적 존재로 바라봅니다. 이러한 시선은 전시가 취할 수 있는 보다 급진적인 형식과, 미술관이 예술과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며, 미술관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마치 30년 전 《싹》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죠.
Q.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작가가 한국의 수많은 미술관 중 이곳 ‘아트선재센터’ 생태계에 집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김선정 예술감독님과 오랜 인연을 이어온 작가입니다. 두 분은 리얼 DMZ 프로젝트와 광주비엔날레를 함께하며 협업해 왔고, 그 과정 속에서 작가와 아트선재센터 역시 서로의 활동을 10년 넘게 지켜봐 왔습니다. 아트선재센터의 30주년을 그냥 넘기지 않고, 충분히 축하하고 기념해야 한다고 독려해 준 것도 바로 작가였어요. 미술관이 걸어온 30년의 세월을 귀하게 여겨준 그 마음 덕분에 이번 전시가 열리게 된 것이죠.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시도한 작업은 미술관의 구조적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술관 입장에서는 매우 큰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전시장 안의 모든 안내 정보를 제거하고, 조명과 온·습도 제어 장치를 멈추는 것은 물론, 가공되지 않은 방대한 양의 흙과 돌, 식물을 공간 안으로 들이고 가스불을 실제로 피우는 시도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미술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들을 실험의 영역으로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와 아트선재센터가 쌓아온 깊은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신뢰가 깊을수록 전시는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큐레이터와 작가 사이에 이러한 신뢰가 없다면, 서로의 방향을 믿고 끝까지 밀어붙이기가 결코 쉽지 않을 테니까요.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2025). / 사진 아트선재센터
Q. 이번 전시는 2/1(일)가 되면 곧 막을 내리는데요, 관객분들이 어떠한 질문 안고서 귀가하기를 희망하시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작가는 미술관 건물 자체를 하나의 작업 대상으로 삼아 매우 철저하게 분석하고, 전시 공간을 정교한 방식으로 설계했습니다. 관람 중에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벽이나 통로, 문 하나까지도 우연히 만들어진 요소는 없습니다. 기존의 것을 그대로 둘지, 변형할지, 무엇을 더하고 덜어낼지, 마감의 범위와 빛의 유입 정도에 이르기까지, 이번 전시는 건물의 모든 면적과 개별 요소를 예민하게 검토하고 결정한 결과물이에요. 파격적인 변화도 있는 한편 그 변화가 아주 미묘해 관객의 입장에서는 쉽게 인지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런 작은 디테일들을 발견해가며 봐도 좋을 것 같아요.
또 이번 전시는 한 번 보았을 때와 시간이 지나 다시 보았을 때의 경험이 굉장히 다르게 느껴지는 전시이기도 합니다. 거꾸로 뒤집힌 2층의 무성한 덩굴과 푸르던 소나무가 점차 말라가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새로운 잎이 자라나기도 하는데, 날씨에 따라 공간이 만들어내는 냄새 역시 매우 다채롭습니다. 이처럼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전시를 통해서 익숙하다고 여겨왔던 존재와 공간, 환경,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바라보는 경험이 되었으면 합니다.
Q. 한편, 1층 전시장 흙 위에 놓인 과일 종이 다양해 보였습니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작가 작업팀의 요청 아래 과일을 교체하기도 하나요?
매일 식물에 물을 주며 이들의 상태와 성장을 계속 돌보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외부 환경에 따라 작업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시간이 지나며 발생하는 변화들을 꾸준히 관찰하고 있어요. 이때 관찰된 물리적 변화를 그대로 수용할 것인지, 혹은 초기 상태로 되돌릴 것인지는 작가 스튜디오 측과 함께 주기적으로 논의하며 대응하고 있습니다. 수박이나 호박을 교체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프로세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요. 변화의 상태와 맥락에 따라 협의해 결정하는 것이죠.
Q. 팀장님께서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전시 층과 전시물은 무엇이었는지요?
저는 텅 빈 폐허처럼 어두운 지하 공간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올라오다가, 마침내 지상층에 도달했을 때 눈에 담기는 장면을 이번 전시에서 가장 좋아합니다. 자연광이 스며들고, 흙과 식물 같은 생명력 있는 자연 요소들이 드러나고, 또 유리문 너머로는 여전히 활기차게 돌아가는 현실의 풍경이 한꺼번에 겹쳐지는 장면이에요.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가상인지, 어디까지가 작업이고 어디서부터가 환경인지가 모호해지면서 인공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뒤섞이는데, 그때 동시다발적으로 발현되어 교차하는 감각을 좋아해요.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2025). / 사진 아트선재센터
Q. 다음 전시 일정에 관해서도 살짝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트선재센터가 꾸준히 관심 갖고 탐구해 온 생태적 사고를 2026년에는 자연환경을 넘어 정체성과 존재 방식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확장하려고 해요. 먼저 3월에는 국내외, 여러 세대의 LGBTQ+ 또는 이를 주제 삼는 7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대규모 기획전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이 열립니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퀴어 미술의 다층적인 지형을 조망하고, 트랜스적 존재 조건과 퀴어적 시공간성을 탐구하는 전시예요. 워낙 많은 작가들이 참여하다 보니, 마치 축제나 운동회가 열리는 기분이랄까요.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서도호: 스페큘레이션스》 기자간담회에서 조희현 전시팀장이 작품에 관해 소개하고 있다. / 사진 남서원
Q. 끝으로, 팀장님만의 좌우명이 있다면요?
내일보다는 오늘을 가장 잘 보내려 합니다. 이건 동료들과 함께 일할 때나 가족, 지인들과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을 건강한 마음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과 온기 있게 잘 보내면, 자연스레 더 건강하고 발전적인 내일이 따라온다고 믿어요.
정리 마케팅커뮤니케이션팀 김준성 대리
"익숙하다고 여겼던 공간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2026년 01월 15일
아트선재센터 첫 전시는 철거 앞둔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한옥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싹》(1995)이었습니다. 이후 미술관만의 전시 방법론 기초가 돼준 장소 특정적 전시였는데요, 현대식 미술관이 들어설 옛터에 한국의 미와 정신을 담아낸 기념비적인 전시로 회자됩니다. 2~30대 '젊은' 축에 속한 17명 국내 작가는 발랄하면서도 당시로선 다분히 파격적인 설치 작업으로 대중을 맞이했습니다. 《싹》(1995) 참여 작가였던 이불, 최정화, 이동기 작가 등은 세계가 주목하는 동시대적 작가로 우뚝 섰습니다.

최정화, <현대미술의 쓰임새: 컬러 컬러 컬러>, 1994, 색깔 전구, 미니어처 의자, 센서 / ≪싹≫ 전시 전경 / 사진 김우일
≪싹≫ 30주년이었던 2025년, 아트선재센터는 미술관 건물을 하나의 조각적 생태계로 전환하는 대규모 장소∙환경 특정적 프로젝트를 선보였습니다. 아르헨티나-페루 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첫 한국 개인전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인데요, 건물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전관에 이르러 제도적 장치와 구조를 해체한 것이 특징입니다. 국내 미술전문지 ‘월간미술’이 선정한 2025년 올해의 최우수 전시에 꼽힌 해당 전시는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본 전시를 기획한 조희현 아트선재센터 전시팀장님을 서면으로 만났습니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던 이불 작가 개인전(2012)의 영국 런던 순회전(2014)을 보조했던 것이 전시 일의 첫 출발점이었다는 조희현 팀장님. 아트선재센터 합류부터 이번 전시 기획 배경,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전시팀과의 비하인드 일화에 관해서도 두루 여쭤봤습니다.

조희현 전시팀장이 작년 9월 6일 토요일, 아트선재센터 한옥정원에서 열린 '아티스트 토크: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 사진 남서원
Q. 팀장님, 아트선재센터와 첫 만남이 궁금합니다.
런던의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인턴십을 하며 전시 일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당시 보조했던 전시가 2012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던 이불 개인전의 순회전이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인연이 참 신기하게 느껴져요. 이후 아시아문화원 소속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정보원 일을 하다가, 2017년에 아트선재센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Q. 한옥과 양옥에서 열렸던 《싹》(1995)은 어떠한 전시였으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작가와는 어떠한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보시나요?
아트선재센터의 첫 전시였던 《싹》(1995)은 지금의 미술관 건물이 지어지기 이전에 있던 한옥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전시였어요. 겉모습은 한옥이었지만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내부 구조는 일본식이었고, 생활하면서 증축한 별관은 또 서양식으로 지어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건축 양식이 뒤섞인 건물은, 당시 한국 사회가 모호한 국가 정체성 속에서 빠르게 변화하고 성장해 가던 시대적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죠.
당시 이 전시의 큐레이터였던 김선정 예술감독님은 작가들에게 신작을 커미션하여 화이트 큐브가 아닌 주거 공간 안에서 실험적인 형식의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싹》은 전시의 형식에 대한 실험이자, 작가들의 예술적 비전과 실험 정신을 지지하는 미술관의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전시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싹》이 제시한 방향성은 지금까지도 아트선재센터의 정체성처럼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2025년은 《싹》의 30주년이 되는 해였고, 다시 한번 동시대 미술관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어떤 공간이 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2025)는 미술관을 단순히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제도적 공간으로 바라보지 않고, 끊임없이 분해되고 변화하며 다시 생성되는 하나의 생태적 존재로 바라봅니다. 이러한 시선은 전시가 취할 수 있는 보다 급진적인 형식과, 미술관이 예술과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며, 미술관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마치 30년 전 《싹》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죠.
Q.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작가가 한국의 수많은 미술관 중 이곳 ‘아트선재센터’ 생태계에 집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김선정 예술감독님과 오랜 인연을 이어온 작가입니다. 두 분은 리얼 DMZ 프로젝트와 광주비엔날레를 함께하며 협업해 왔고, 그 과정 속에서 작가와 아트선재센터 역시 서로의 활동을 10년 넘게 지켜봐 왔습니다. 아트선재센터의 30주년을 그냥 넘기지 않고, 충분히 축하하고 기념해야 한다고 독려해 준 것도 바로 작가였어요. 미술관이 걸어온 30년의 세월을 귀하게 여겨준 그 마음 덕분에 이번 전시가 열리게 된 것이죠.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시도한 작업은 미술관의 구조적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술관 입장에서는 매우 큰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전시장 안의 모든 안내 정보를 제거하고, 조명과 온·습도 제어 장치를 멈추는 것은 물론, 가공되지 않은 방대한 양의 흙과 돌, 식물을 공간 안으로 들이고 가스불을 실제로 피우는 시도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미술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들을 실험의 영역으로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와 아트선재센터가 쌓아온 깊은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신뢰가 깊을수록 전시는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큐레이터와 작가 사이에 이러한 신뢰가 없다면, 서로의 방향을 믿고 끝까지 밀어붙이기가 결코 쉽지 않을 테니까요.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2025). / 사진 아트선재센터
Q. 이번 전시는 2/1(일)가 되면 곧 막을 내리는데요, 관객분들이 어떠한 질문 안고서 귀가하기를 희망하시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작가는 미술관 건물 자체를 하나의 작업 대상으로 삼아 매우 철저하게 분석하고, 전시 공간을 정교한 방식으로 설계했습니다. 관람 중에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벽이나 통로, 문 하나까지도 우연히 만들어진 요소는 없습니다. 기존의 것을 그대로 둘지, 변형할지, 무엇을 더하고 덜어낼지, 마감의 범위와 빛의 유입 정도에 이르기까지, 이번 전시는 건물의 모든 면적과 개별 요소를 예민하게 검토하고 결정한 결과물이에요. 파격적인 변화도 있는 한편 그 변화가 아주 미묘해 관객의 입장에서는 쉽게 인지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런 작은 디테일들을 발견해가며 봐도 좋을 것 같아요.
또 이번 전시는 한 번 보았을 때와 시간이 지나 다시 보았을 때의 경험이 굉장히 다르게 느껴지는 전시이기도 합니다. 거꾸로 뒤집힌 2층의 무성한 덩굴과 푸르던 소나무가 점차 말라가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새로운 잎이 자라나기도 하는데, 날씨에 따라 공간이 만들어내는 냄새 역시 매우 다채롭습니다. 이처럼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전시를 통해서 익숙하다고 여겨왔던 존재와 공간, 환경,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바라보는 경험이 되었으면 합니다.
Q. 한편, 1층 전시장 흙 위에 놓인 과일 종이 다양해 보였습니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작가 작업팀의 요청 아래 과일을 교체하기도 하나요?
매일 식물에 물을 주며 이들의 상태와 성장을 계속 돌보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외부 환경에 따라 작업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시간이 지나며 발생하는 변화들을 꾸준히 관찰하고 있어요. 이때 관찰된 물리적 변화를 그대로 수용할 것인지, 혹은 초기 상태로 되돌릴 것인지는 작가 스튜디오 측과 함께 주기적으로 논의하며 대응하고 있습니다. 수박이나 호박을 교체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프로세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요. 변화의 상태와 맥락에 따라 협의해 결정하는 것이죠.
Q. 팀장님께서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전시 층과 전시물은 무엇이었는지요?
저는 텅 빈 폐허처럼 어두운 지하 공간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올라오다가, 마침내 지상층에 도달했을 때 눈에 담기는 장면을 이번 전시에서 가장 좋아합니다. 자연광이 스며들고, 흙과 식물 같은 생명력 있는 자연 요소들이 드러나고, 또 유리문 너머로는 여전히 활기차게 돌아가는 현실의 풍경이 한꺼번에 겹쳐지는 장면이에요.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가상인지, 어디까지가 작업이고 어디서부터가 환경인지가 모호해지면서 인공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뒤섞이는데, 그때 동시다발적으로 발현되어 교차하는 감각을 좋아해요.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2025). / 사진 아트선재센터
Q. 다음 전시 일정에 관해서도 살짝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트선재센터가 꾸준히 관심 갖고 탐구해 온 생태적 사고를 2026년에는 자연환경을 넘어 정체성과 존재 방식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확장하려고 해요. 먼저 3월에는 국내외, 여러 세대의 LGBTQ+ 또는 이를 주제 삼는 7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대규모 기획전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이 열립니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퀴어 미술의 다층적인 지형을 조망하고, 트랜스적 존재 조건과 퀴어적 시공간성을 탐구하는 전시예요. 워낙 많은 작가들이 참여하다 보니, 마치 축제나 운동회가 열리는 기분이랄까요.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서도호: 스페큘레이션스》 기자간담회에서 조희현 전시팀장이 작품에 관해 소개하고 있다. / 사진 남서원
Q. 끝으로, 팀장님만의 좌우명이 있다면요?
내일보다는 오늘을 가장 잘 보내려 합니다. 이건 동료들과 함께 일할 때나 가족, 지인들과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을 건강한 마음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과 온기 있게 잘 보내면, 자연스레 더 건강하고 발전적인 내일이 따라온다고 믿어요.
정리 마케팅커뮤니케이션팀 김준성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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