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끈 잇는 차영길입니다
2026년 04월 24일
도움받던 소년이 건강히 자라 나눔의 주체로 거듭났습니다. 대우꿈동산이 지향하는 ‘자립’의 가치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될 텐데요, 차영길 후원자님을 만났습니다. 1992년 1차 입주자로 입소해 10여 년을 이곳에서 보낸 차영길 후원자님 소식지 '사랑의 끈' 편집부원으로 활동하며 꿈을 키운 자립 가구원이기도 합니다. 여러 굴곡이 담긴 시간을 차곡차곡 견디어 어느덧 20년 차 사회인으로 거듭나, 15년째 후배들의 앞길을 비추는 차영길 후원자님.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돌아오겠다’던 지난 다짐을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삶의 자세로 증명한 차영길 후원자님께 대우꿈동산의 찬란했던 초창기 그 시절을 청해 들었습니다.

지난 2월, 대우꿈동산 사무실에서 차영길 후원자가 대우꿈동산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Q. 후원자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차영길입니다. 1992년 대우꿈동산 1차 입주자로 들어와 군 제대까지 10여 년간 거주했습니다. 제 위로 누나가 있는데요, 당시 유응모 전 대표님과 사회복지학과 교수님 몇 분이 찾아오셨어요. 할머니와 함께 들어올 수 있다고 말씀 주셔서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 48세이고요, 함께 유년 시절 보낸 이택희 사장이 이끄는 가온반도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90년대 초반엔 소년소녀가장들의 살림이 여의치 못했어요. 세 들어 사는 경우가 많았죠. 얼음을 연탄불에 데워서 세수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방이 구분돼 있고 겨울엔 보일러가 나오고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온 거예요. 저는 청주에서 왔지만, 근처 괴산과 증평에서 온 친구도 있었어요. 1차와 2차로 나뉘어 입주했고, 10가구씩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Q. 대우꿈동산 편집부 활동을 하셨어요?
네, 소식지 '사랑의 끈' 편집부 소속이었죠. 기수마다 각 학년 4명 정도를 뽑았어요. 컴퓨터도 쓰고, 다 같이 다과 먹으며 회의하던 편집실이 가장 좋았어요. 주로 후원자분들을 만나서 인터뷰했고요,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시와 수필을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자원봉사자셨던 신승주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지도해 주셨어요. 제일 좋았던 건 놀러 갈 때였죠. 연초가 되면 신승주 선생님께서 자비로 저희 일출 구경시켜 주신다고 동해에 데려갔어요. 대관령 구길 넘어서요. 또 여름이면 바닷가 섬으로 2박 3일씩 같이 놀러 가기도 했죠.
Q. 낭만입니다. 신승주 선생님이시라고요,
네, 아이 같으셨어요. 삼촌 같기도 했고요. 저희와도 스스럼없이 못난 춤도 추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도 하시고요. 이전엔 대우증권에서 시설을 관리하셨다고 들었어요. 전기도 다루시고요. 그래서인지 기계를 다루는 데 능하셨어요, 얼리어댑터셨던 셈이죠. PC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에 책 보시며 아래 한글을 연습해서 알려주셨어요. 초창기 '사랑의 끈'은 저희가 다 한글로 오타 수정하고 틀까지 제작해서 찍어낸 거예요. 신승주 선생님께서 고문처럼 편집 과정을 봐주셨죠. 옛날 아파트라 인터넷 선도 내장되지 않았거든요. 인터넷망을 한 선씩 뽑아서 직접 설치하셨어요.
대학생 상주 자원봉사자는 주로 아이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국어·영어·수학을 가르치거나 복지를 전공하신 분이 오셨거든요. 신승주 선생님만 특이하게 직장인의 모습으로 들어오셔서 낯설었죠. 저도 나이 먹은 다음엔 소주잔을 같이 기울인 적 있네요. 지금은 인천공항에서 근무하시면서 관련 행사 있을 때 내려오시더라고요.

차영길 후원자가 대우꿈동산 후배들을 격려하며 응원의 동작을 취하는 모습.
Q. 애로사항이 있었을까요?
통금 시간이 10시였나, 11시였어요. 저는 크게 힘든 건 없었는데 친구들 대부분이 학생 때 통금 시간으로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땐 다른 친구들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싶기도 하잖아요?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재우고 싶기도 하고요. 이때마다 어른들 허락받아야 하는 제약이 있었거든요.
아, 이 이야기를 꺼내도 되나.(웃음)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해요. 저는 상고 전산과를 다녔는데요, 몰래 숨어서 담배를 피우다 지도 선생님께 걸린 적이 있어요. 아이들과 자주 모여 있다 보니까 나쁜 걸 빨리 배웠던 것 같아요. 그만큼 학급에서 나쁜 친구들과는 덜 어울릴 수 있었어요. 우리끼리 동병상련이니까 어쩌면 서로 더 보듬어줬던 것 같아요. 물론 선생님께는 크게 혼났죠.
Q. 지도 선생님들은 무서우셨습니까?
당시 제일 무섭던 선생님이 한수동 센터장님이시고요.(웃음) 그렇다고 욕을 하신 게 아니에요. 엄격하신 정도였고요, 상주 자원봉사자분들과 직원분들 모두 저희한테 진심 담아 사랑으로 대하신 게 당시로서도 느껴졌습니다. 저희를 싫어한다기보단 길잡이 역할을 해주신다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거든요. 그래서 저희도 원망보단 이분들께 실망감을 주면 안 되겠단 다짐을 하게 됐어요. 언젠가 꿈동산을 다시 찾을 때 부끄럽진 않아야겠단 생각이었던 셈이죠.

차영길 후원자가 대우꿈동산 한수동 센터장과 함께 과거 '사랑의 끈' 편집부 시절 에피소드를 되짚어보는 모습.
Q.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요?
여름 캠프로 한수동 센터장님 고향에 들른 적 있어요. 충북 옥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야영했었죠. 운동장 한편에 텐트 친 다음 사흘간 밥 해 먹고, 운동회도 열고, 밤엔 담력 훈련도 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또 명사들이 대우꿈동산에 오셔서 강연해 주시기도 했어요. 상당한 문화적 혜택이죠. 내 집 바로 앞에서 삶에 도움 되는 얘기를 전해 들은 거니까요. 어쩌면 저희는 굳세게 자라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데도 문화적 혜택과 공동체 경험이 쌓이다 보니까 사회생활에서 대인관계를 맺는데 조금 더 쉬운 측면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또 박중훈 영화배우님도 1992년도에 대우꿈동산을 찾았어요. 그밖에 거제도에 있던 대우조선해양 조선소 견학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아마 청주에서 버스 타고 7시간 갔나 그래요. 길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습니다.

1994년 박중훈 영화배우(앞줄 왼쪽)가 대우꿈동산에 방문한 당시 사진. (1994.01.13.)
Q. 학창 시절에 힘든 건 없으셨어요?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요, 실은 돈에 관해서 별생각이 없었어요. 친척도 많고, 할머니도 계시고, 누나도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막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죠. 대우꿈동산에 입소했으니 어떻게든 살게 되잖아요. 친척분들도 도와주시고요. 대우꿈동산에 입주한 아동들의 공통점이랄까요, 모두 고아가 아니잖아요. 소년소녀가장으로 주변에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접수된 후원금을 대우꿈동산에서 계속 저축을 시켜 주세요. 이 돈으로 자립할 수 있는 거죠.
Q. 퇴거는 언제 하신 겁니까?
군대에 있을 때 식구들이 퇴거했습니다. 제대 3개월 전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군 복무 마치고 꿈동산으로 오지 않고, 이사 간 집으로 갔죠. 엄청 어색했어도 석별의 정은 없었어요. 어차피 대우꿈동산이 제겐 원래 집이니깐 ‘영영 못 와’ 같은 아쉬움은 들지 않더라고요. 이곳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다 받고 나간 거니까요. 그럼에도 친구들은 제2의 가족이었거든요. 90가구라고 하면 5, 60가구가 서로 친했으니깐요. 명절 때에도 갈 곳 없는 아이들끼리 모여서 밤새웠는데, 이제 그런 친구들을 가까이서 바로바로 못 본다는 사실이 가장 아쉬웠어요.
Q. 당시 친구분들과 캠핑을 떠나도 좋겠네요.
너무 좋죠. 이제는 저희 OB 멤버들도 꿈동산이 세월이 지난 만큼 나이들이 많이 찼어요. 자녀들도 있으니까 나중에라도 대우꿈동산에서 자리를 마련해주신다면 언제든 참여할 의향이 있습니다. 건물 앞 잔디밭에서 캠핑 한 번 해본다던가, 워크숍처럼 다 같이 모여 어디로 놀러 간다든가. 각자 회비를 내서라도 자녀들과 참여할 자립 가구원이 분명 있을 거예요.

'사랑의 끈' 1994년 겨울호 통권 17호 편집부 명단에 차영길 후원자 이름이 적혀있다.
Q. 대우꿈동산 후원은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센터장님께서 전화로 계좌번호만 불러만 주면 된다고 하시길래요.(웃음) 자동이체 시스템을 처음 도입하신 때였던 것 같아요. 이후에 햇수로는 15년쯤 됐네요. 소액이기도 하고, 먼저 달려와서 후원하지 못해 죄송스러운 측면도 있죠. 그런데 자립한 뒤로 기댈 곳 없이 시작하는 게 힘들다는 걸 저도 잘 알아서 마음 모으게 됐습니다. 후원금의 쓰임새야 대우꿈동산에서 다 알아서 잘해주시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니까요. 물품 후원도 했어요. 프린터가 안 된다고 하시면 새 프린터를 가져다드렸어요. 제가 컴퓨터 업계에 있는 걸 알고 요청하신 거죠.(웃음)
처음엔 “소액을 어디에 써요?” 여쭤보니 센터장님 답변이 “아니야, 하는 게 중요한 거야.” 하시더라고요. 요즘이야 만 원 후원이 보편화됐지만, 당시엔 센터장님께 감사했어요. 지금도 무엇을 바라며 후원하진 않아요. 다만 저도 어린 나이에 후원받은 사실을 기억할 뿐이죠.
Q. 끝으로, 설립자 故 김우중 회장님은 어떤 분인가요?
세상이 뭐라고 해도, 적어도 제겐 살면서 가장 고마우신 분이에요.

차영길 후원자가 故 김우중 설립자 사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소식지 '사랑의 끈' 제17호를 든 모습.
차영길 후원자님과 함께한 질의응답 시간 동안 대우꿈동산은 주거 공간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닐지 생각해 봤습니다. 추운 겨울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는 보금자리이고, 친구들과 함께한 편집실 다과 시간이며, 따끔한 훈계와 관심으로 비로소 일탈을 바로잡던 스승처럼 보였으니 말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겠다"던 명랑한 청주 소년의 어릴 적 다짐은 15년째 이어지는 정기 후원과 후배들의 앞길을 살피는 따뜻한 시선으로 증명됐습니다. 받은 사랑을 당연히 여기기보단 세상으로 다시 베풀 줄 아는 차영길 후원자님의 삶이 멋져 보인 이유입니다. 대우꿈동산이 뿌린 '자립'이란 씨앗이 꽃을 피우고 무럭무럭 자라난 가장 구체적인 증거처럼 다가온 하루였습니다.
글 사진 마케팅커뮤니케이션팀 김준성 대리
사랑의 끈 잇는 차영길입니다
2026년 04월 24일
도움받던 소년이 건강히 자라 나눔의 주체로 거듭났습니다. 대우꿈동산이 지향하는 ‘자립’의 가치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될 텐데요, 차영길 후원자님을 만났습니다. 1992년 1차 입주자로 입소해 10여 년을 이곳에서 보낸 차영길 후원자님 소식지 '사랑의 끈' 편집부원으로 활동하며 꿈을 키운 자립 가구원이기도 합니다. 여러 굴곡이 담긴 시간을 차곡차곡 견디어 어느덧 20년 차 사회인으로 거듭나, 15년째 후배들의 앞길을 비추는 차영길 후원자님.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돌아오겠다’던 지난 다짐을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삶의 자세로 증명한 차영길 후원자님께 대우꿈동산의 찬란했던 초창기 그 시절을 청해 들었습니다.

지난 2월, 대우꿈동산 사무실에서 차영길 후원자가 대우꿈동산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Q. 후원자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차영길입니다. 1992년 대우꿈동산 1차 입주자로 들어와 군 제대까지 10여 년간 거주했습니다. 제 위로 누나가 있는데요, 당시 유응모 전 대표님과 사회복지학과 교수님 몇 분이 찾아오셨어요. 할머니와 함께 들어올 수 있다고 말씀 주셔서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 48세이고요, 함께 유년 시절 보낸 이택희 사장이 이끄는 가온반도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90년대 초반엔 소년소녀가장들의 살림이 여의치 못했어요. 세 들어 사는 경우가 많았죠. 얼음을 연탄불에 데워서 세수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방이 구분돼 있고 겨울엔 보일러가 나오고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온 거예요. 저는 청주에서 왔지만, 근처 괴산과 증평에서 온 친구도 있었어요. 1차와 2차로 나뉘어 입주했고, 10가구씩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Q. 대우꿈동산 편집부 활동을 하셨어요?
네, 소식지 '사랑의 끈' 편집부 소속이었죠. 기수마다 각 학년 4명 정도를 뽑았어요. 컴퓨터도 쓰고, 다 같이 다과 먹으며 회의하던 편집실이 가장 좋았어요. 주로 후원자분들을 만나서 인터뷰했고요,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시와 수필을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자원봉사자셨던 신승주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지도해 주셨어요. 제일 좋았던 건 놀러 갈 때였죠. 연초가 되면 신승주 선생님께서 자비로 저희 일출 구경시켜 주신다고 동해에 데려갔어요. 대관령 구길 넘어서요. 또 여름이면 바닷가 섬으로 2박 3일씩 같이 놀러 가기도 했죠.
Q. 낭만입니다. 신승주 선생님이시라고요,
네, 아이 같으셨어요. 삼촌 같기도 했고요. 저희와도 스스럼없이 못난 춤도 추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도 하시고요. 이전엔 대우증권에서 시설을 관리하셨다고 들었어요. 전기도 다루시고요. 그래서인지 기계를 다루는 데 능하셨어요, 얼리어댑터셨던 셈이죠. PC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에 책 보시며 아래 한글을 연습해서 알려주셨어요. 초창기 '사랑의 끈'은 저희가 다 한글로 오타 수정하고 틀까지 제작해서 찍어낸 거예요. 신승주 선생님께서 고문처럼 편집 과정을 봐주셨죠. 옛날 아파트라 인터넷 선도 내장되지 않았거든요. 인터넷망을 한 선씩 뽑아서 직접 설치하셨어요.
대학생 상주 자원봉사자는 주로 아이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국어·영어·수학을 가르치거나 복지를 전공하신 분이 오셨거든요. 신승주 선생님만 특이하게 직장인의 모습으로 들어오셔서 낯설었죠. 저도 나이 먹은 다음엔 소주잔을 같이 기울인 적 있네요. 지금은 인천공항에서 근무하시면서 관련 행사 있을 때 내려오시더라고요.

차영길 후원자가 대우꿈동산 후배들을 격려하며 응원의 동작을 취하는 모습.
Q. 애로사항이 있었을까요?
통금 시간이 10시였나, 11시였어요. 저는 크게 힘든 건 없었는데 친구들 대부분이 학생 때 통금 시간으로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땐 다른 친구들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싶기도 하잖아요?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재우고 싶기도 하고요. 이때마다 어른들 허락받아야 하는 제약이 있었거든요.
아, 이 이야기를 꺼내도 되나.(웃음)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해요. 저는 상고 전산과를 다녔는데요, 몰래 숨어서 담배를 피우다 지도 선생님께 걸린 적이 있어요. 아이들과 자주 모여 있다 보니까 나쁜 걸 빨리 배웠던 것 같아요. 그만큼 학급에서 나쁜 친구들과는 덜 어울릴 수 있었어요. 우리끼리 동병상련이니까 어쩌면 서로 더 보듬어줬던 것 같아요. 물론 선생님께는 크게 혼났죠.
Q. 지도 선생님들은 무서우셨습니까?
당시 제일 무섭던 선생님이 한수동 센터장님이시고요.(웃음) 그렇다고 욕을 하신 게 아니에요. 엄격하신 정도였고요, 상주 자원봉사자분들과 직원분들 모두 저희한테 진심 담아 사랑으로 대하신 게 당시로서도 느껴졌습니다. 저희를 싫어한다기보단 길잡이 역할을 해주신다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거든요. 그래서 저희도 원망보단 이분들께 실망감을 주면 안 되겠단 다짐을 하게 됐어요. 언젠가 꿈동산을 다시 찾을 때 부끄럽진 않아야겠단 생각이었던 셈이죠.

차영길 후원자가 대우꿈동산 한수동 센터장과 함께 과거 '사랑의 끈' 편집부 시절 에피소드를 되짚어보는 모습.
Q.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요?
여름 캠프로 한수동 센터장님 고향에 들른 적 있어요. 충북 옥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야영했었죠. 운동장 한편에 텐트 친 다음 사흘간 밥 해 먹고, 운동회도 열고, 밤엔 담력 훈련도 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또 명사들이 대우꿈동산에 오셔서 강연해 주시기도 했어요. 상당한 문화적 혜택이죠. 내 집 바로 앞에서 삶에 도움 되는 얘기를 전해 들은 거니까요. 어쩌면 저희는 굳세게 자라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데도 문화적 혜택과 공동체 경험이 쌓이다 보니까 사회생활에서 대인관계를 맺는데 조금 더 쉬운 측면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또 박중훈 영화배우님도 1992년도에 대우꿈동산을 찾았어요. 그밖에 거제도에 있던 대우조선해양 조선소 견학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아마 청주에서 버스 타고 7시간 갔나 그래요. 길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습니다.

1994년 박중훈 영화배우(앞줄 왼쪽)가 대우꿈동산에 방문한 당시 사진. (1994.01.13.)
Q. 학창 시절에 힘든 건 없으셨어요?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요, 실은 돈에 관해서 별생각이 없었어요. 친척도 많고, 할머니도 계시고, 누나도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막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죠. 대우꿈동산에 입소했으니 어떻게든 살게 되잖아요. 친척분들도 도와주시고요. 대우꿈동산에 입주한 아동들의 공통점이랄까요, 모두 고아가 아니잖아요. 소년소녀가장으로 주변에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접수된 후원금을 대우꿈동산에서 계속 저축을 시켜 주세요. 이 돈으로 자립할 수 있는 거죠.
Q. 퇴거는 언제 하신 겁니까?
군대에 있을 때 식구들이 퇴거했습니다. 제대 3개월 전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군 복무 마치고 꿈동산으로 오지 않고, 이사 간 집으로 갔죠. 엄청 어색했어도 석별의 정은 없었어요. 어차피 대우꿈동산이 제겐 원래 집이니깐 ‘영영 못 와’ 같은 아쉬움은 들지 않더라고요. 이곳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다 받고 나간 거니까요. 그럼에도 친구들은 제2의 가족이었거든요. 90가구라고 하면 5, 60가구가 서로 친했으니깐요. 명절 때에도 갈 곳 없는 아이들끼리 모여서 밤새웠는데, 이제 그런 친구들을 가까이서 바로바로 못 본다는 사실이 가장 아쉬웠어요.
Q. 당시 친구분들과 캠핑을 떠나도 좋겠네요.
너무 좋죠. 이제는 저희 OB 멤버들도 꿈동산이 세월이 지난 만큼 나이들이 많이 찼어요. 자녀들도 있으니까 나중에라도 대우꿈동산에서 자리를 마련해주신다면 언제든 참여할 의향이 있습니다. 건물 앞 잔디밭에서 캠핑 한 번 해본다던가, 워크숍처럼 다 같이 모여 어디로 놀러 간다든가. 각자 회비를 내서라도 자녀들과 참여할 자립 가구원이 분명 있을 거예요.

'사랑의 끈' 1994년 겨울호 통권 17호 편집부 명단에 차영길 후원자 이름이 적혀있다.
Q. 대우꿈동산 후원은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센터장님께서 전화로 계좌번호만 불러만 주면 된다고 하시길래요.(웃음) 자동이체 시스템을 처음 도입하신 때였던 것 같아요. 이후에 햇수로는 15년쯤 됐네요. 소액이기도 하고, 먼저 달려와서 후원하지 못해 죄송스러운 측면도 있죠. 그런데 자립한 뒤로 기댈 곳 없이 시작하는 게 힘들다는 걸 저도 잘 알아서 마음 모으게 됐습니다. 후원금의 쓰임새야 대우꿈동산에서 다 알아서 잘해주시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니까요. 물품 후원도 했어요. 프린터가 안 된다고 하시면 새 프린터를 가져다드렸어요. 제가 컴퓨터 업계에 있는 걸 알고 요청하신 거죠.(웃음)
처음엔 “소액을 어디에 써요?” 여쭤보니 센터장님 답변이 “아니야, 하는 게 중요한 거야.” 하시더라고요. 요즘이야 만 원 후원이 보편화됐지만, 당시엔 센터장님께 감사했어요. 지금도 무엇을 바라며 후원하진 않아요. 다만 저도 어린 나이에 후원받은 사실을 기억할 뿐이죠.
Q. 끝으로, 설립자 故 김우중 회장님은 어떤 분인가요?
세상이 뭐라고 해도, 적어도 제겐 살면서 가장 고마우신 분이에요.

차영길 후원자가 故 김우중 설립자 사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소식지 '사랑의 끈' 제17호를 든 모습.
차영길 후원자님과 함께한 질의응답 시간 동안 대우꿈동산은 주거 공간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닐지 생각해 봤습니다. 추운 겨울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는 보금자리이고, 친구들과 함께한 편집실 다과 시간이며, 따끔한 훈계와 관심으로 비로소 일탈을 바로잡던 스승처럼 보였으니 말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겠다"던 명랑한 청주 소년의 어릴 적 다짐은 15년째 이어지는 정기 후원과 후배들의 앞길을 살피는 따뜻한 시선으로 증명됐습니다. 받은 사랑을 당연히 여기기보단 세상으로 다시 베풀 줄 아는 차영길 후원자님의 삶이 멋져 보인 이유입니다. 대우꿈동산이 뿌린 '자립'이란 씨앗이 꽃을 피우고 무럭무럭 자라난 가장 구체적인 증거처럼 다가온 하루였습니다.
글 사진 마케팅커뮤니케이션팀 김준성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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