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영남 전 대우자동차 사장

‘400만대 자동차 생산 신화’ 대우자동차 세계경영의 선봉장

2026.10.01.

왕영남 전 대우자동차 사장

‘400만대 자동차 생산 신화’ 대우자동차 세계경영의 선봉장

2026.10.01.


왕영남 전 대우자동차 사장은 한국 자동차 산업의 ‘살아있는 화석’이자 ‘현장학 교과서’다. 그의 이력은 자동차 불모지 대한민국의 신진자동차 공채 1기로 입사했다. 그의 사회생활을 신진자동차가 도요타와 제휴해 코로나를 조립하던 1966년부터 시작된다. 인천 부평공장에서 기름밥을 먹던 청년 엔지니어는 이후 GM코리아, 새한자동차를 거쳐 대우자동차의 사장이 되기까지 반세기 동안 공장 바닥을 지켰다.

그는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었다. 1970년대 도요타가 중국의 정치적 영향으로 철수하고, GM이 들어왔을 때, 일본식 ‘정밀함’과 미국식 ‘대량 생산’의 기술적 간극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1980년대 대우의 첫 월드카 ‘르망’을 만들 때는 독일(오펠)의 도면과 미국(GM)의 관리 시스템 사이에서 피를 말리며 양산을 성공시켰다.

1990년대, 김우중 회장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지구촌 곳곳을 누빌 때, 그 지도 위에 실제로 공장을 짓고 깃발을 꽂은 실행가가 바로 왕영남이었다. 베트남 하노이의 진흙탕에 파일을 박고, 우즈베키스탄 직원을 500명씩 초대해 훈련시켰으며, 폴란드 FSO 공장을 유럽의 전초기지로 키워냈다. 대우 해체 후 20여 년, 그는 “대우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후배들이 달리고 있다”고 담담히 말한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태동기부터 세계경영의 영광과 좌절까지, 그 장대한 서사를 왕영남 사장의 육성으로 복기한다.

  • 박혁진

    1966년 신진자동차 1기 공채로 입사하셨습니다. 사실상 우리나라 자동차 개발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십니다.

  • 왕영남

    인천 부평공장에서 시작했죠. 6월에 입사를 했는데, 신진이 도요타와 기술 제휴를 해서 7월부터 ‘코로나’를 막 생산할 때였습니다. 8월 15일에 100대인가 200대를 한 번에 출하했는데 서울이 마비가 될 정도로 대단했어요.

    첫 임무는 엔진 공장을 짓는 거였는데, 1970년에 중국이 ‘주은래 4원칙(대만·한국과 거래하는 기업과는 거래하지 않는다)’을 발표하면서 도요타가 야반도주하듯 철수했습니다. 파트너가 없어지니 김창원 회장이 급하게 GM하고 손을 잡았고, 1972년에 GM코리아(GMK)가 출범했죠. 다시 1년간 GM과 준비해서 겨우 엔진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잘못 만들었어요. 엔진 선택을 잘못한 거였죠. 오펠 엔진의 설계가 구식이었던 셈인데, 이는 나중에 유럽이나 미국 자동차가 일본보다 뒤쳐진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게다가 기름을 너무 많이 먹었어요.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차가 안 팔리기 시작했고, 결국 산업은행 관리 체제로 넘어갔죠.




  • 박혁진

    그러다 1978년에 대우가 산업은행 지분을 인수했습니다. 신진, GM, 새한과 달리 대우의 문화는 어땠습니까?

  • 왕영남

    (대우자동차 출범 후) 프린스를 생산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생산 초기에는 부품 조달도 잘 안되고 복잡한 게 많습니다. 당시까지는 GM 합작 회사 문화가 강했어요. 미국식인거죠. GM과 역할 간격이 확실했고 익스큐즈가 허용되는 문화라 일하기 편했어요. 잘 안 풀려도 익스큐즈하면 다 오케이입니다.

    그런데 김우중 회장님은 그게 아니거든요. 하루는 회의하고 있는데, 회장님이 무슨 대화를 나누시다가 갑자기 내려다보시고는 “넌 임마, 그렇게 앉아 있으면 되는 거야? 나가 뛰어!” 호통을 치시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요. 일단 “네 알겠습니다”하고 뛰었습니다. 회장님은 다 알아서 하기를 바라시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안 되는 놈이 있으면 끌어가고. 그게 사실 맞는 얘기죠. 대우는 오너십을 가지고 일합니다. 프로그램 매니저가 되면 그 사람이 알아서 다 해야 되요. (웃음)

  • 박혁진

    대우자동차의 ‘월드카 프로젝트’인 르망 부평공장 설립을 맡아 오펠(독일)과 GM(미국) 사이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왕영남

    르망은 독일 오펠의 ‘카데트’를 베이스로 만든 차입니다. 오펠은 5억 달러를 주면 5년 내 공장을 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5억 달러로 3년 내 짓는 게 목표였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 하겠다고 했죠. 공장을 지을 때 오펠에서 10명, GM에서 10명이 우리를 감시하러 왔어요. 될 일도 안 될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식대로 밀어붙여 3년 만에 완공했고, 비용도 약 3억 달러로 절감했습니다. 품질도 독일 본토 생산품보다 10% 더 좋게 나왔어요. 독일(오펠)에서 5만 대를 수입해서 시장 반응을 봤는데 우리 제품이 불량도 덜 나왔어요. 나중에는 오펠 본사에서 ‘너희가 기술 지도를 어떻게 했길래 한국 애들이 더 잘 만드냐’며 자기네 생산 담당 임원을 문책하고 좌천시킬 정도였죠. 반면에 GM에서 온 사람들은 전부 승진했습니다.




  • 박혁진

    1990년대에는 ‘세계경영’의 최전선에서 해외 공장 건설을 진두지휘하셨습니다. 베트남 공장 건설 당시 일화가 유명하던데요.

  • 왕영남

    베트남 하노이 인근 비담코(VIDAMCO) 공장을 지을 때였죠. 미국식 매뉴얼대로라면 눈이 올 때를 대비해 지붕 트러스 강도를 높여야 하는데, 베트남에 눈이 옵니까? 제가 그랬죠. ‘여기는 비바람만 막으면 된다. 눈 하중 계산은 빼라’. 그렇게 설계를 변경해서 공장 건설비를 획기적으로 줄였습니다. 당시 500만~1,000만 달러 정도 들었는데, 다른 계열사나 경쟁사들이 1억 달러씩 부를 때 우리는 10분의 1 가격으로 지은 겁니다.

    저는 아주 원시적인 공장부터 최신식 공장까지 다 경험한 셈입니다. 우리가 팔 공장은 그사이의 어딘가였죠. 부평공장같은 최신식 공장을 그 당시의 베트남에 지으면 파산해요. (인건비나 기후 등) 현지 사정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대우의 방식이었습니다.

  • 박혁진

    1990년대에는 ‘세계경영’의 최전선에서 해외 공장 건설을 진두지휘하셨습니다. 베트남 공장 건설 당시 일화가 유명하던데요.

  • 왕영남

    안디잔은 타슈켄트에서도 비행기 타고 들어가야 하는 깡촌 중의 깡촌입니다. 사방이 목화밭이고 공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죠. 카리모프 대통령의 정치적인 이유로 그곳이 선정됐는데, 러시아 기술자들도 와보고는 ‘여기서 자동차가 나온다고? 말도 안 된다’며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해냈습니다. 현지 인력 500명씩 부평공장으로 초대해서 공장 짓는 몇년간 먹이고 재우며 기술을 가르쳤어요. 그렇게 훈련된 인원들이 돌아가서 공장을 돌리니 차가 나오더군요. 모스크바를 갔더니 국제공항에서도 뉴스가 크게 보도되더라고요. 그 성공이 기폭제가 되어 폴란드, 루마니아 등 동구권 국가들이 ‘우리도 해달라’며 줄을 섰죠.




  • 박혁진

    폴란드 FSO 인수는 대우 세계경영의 하이라이트로 종종 언급됩니다. 그 규모가 엄청났다고요?

  • 왕영남

    우즈베키스탄은 공장 건물만 인수했고, 폴란드는 FSO 회사 자체를 인수하다보니 차원이 달랐습니다. FSO는 공산권 특유의 기업 도시였어요. 공장 안에 병원, 학교는 물론이고 100만 평 넘는 농장까지 딸려 있었어요. 그룹에서 돼지를 컨베이어 벨트에 태워서 옥수수 사료를 먹여 키우고, 한 바퀴 돌면 도축하는 덴마크 사육장 사업 모델을 검토할 정도였죠.

    원래 GM이 인수하려고 눈독을 들이던 곳이었는데, 대우가 낚아채니까 미국은 물론, 유럽 자동차 업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우리 뒷마당을 한국 놈들이 차지했다’며 분개했죠. 우리는 FSO를 유럽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아 연간 50만 대 생산 체제를 갖출 계획이었습니다.




  • 박혁진

    IMF 외환위기와 함께 대우는 해체되었습니다. 해외 공장들이 독자 생존하지 못하고 무너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 왕영남

    우리가 해외에 공장은 많이 지었지만, 기술과 핵심 부품은 여전히 한국 본사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부피가 큰 내장재 등은 현지화가 되었지만 아직 엔진 같은 핵심 부품은 한국에서 보내줘야 차를 만들 수 있었죠. 그런데 본사가 무너지면서 부품 공급이 끊기니 해외 공장들은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나는 대우 특유의 ‘직판 체제’였습니다. 현대차처럼 현지 딜러에게 차를 넘기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판매 법인을 세워 재고 부담과 금융 리스크를 다 떠안는 구조였죠. 경기가 좋을 땐 이익이 크지만, 위기가 오면 직격탄을 맞습니다. IMF 때 환율이 폭등하면서 그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게 치명타였습니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님과는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셨습니다. 어떤 기억이 남으십니까?

  • 왕영남

    중국 산동성 공장 건은 다섯 가지 불가 사유를 적어서 끝까지 반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회장님도 직접 중국 부총리를 만나 담판을 짓겠다고 장고를 거듭하셨죠.

    그런데 이미 산동성에 시멘트 공장이 돌아가고 있어서, 결국은 좋지 않은 조건임에도 자동차 부품공장을 만들기로 했어요.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사업하는 사람이 사업 제안을 거절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구나’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박혁진

    신진부터 대우까지 자동차 산업에 40년을 몸담으셨습니다. 대우자동차의 역사가 한국 산업에 남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 왕영남

    자동차에도 경제 단위라는 게 있습니다. 최소한 1분에 한 대 생산하면 연산 25만에서 30만 대라는 경제 단위가 나와요. (1984년 월드카 프로젝트 때) 회장님께서는 그 경제 단위의 공장을 만들어서, 50%는 국내에 팔고 50%는 GM이 가져가는 걸로 GM과 담판을 지으셨죠. 시작은 그렇게 된 거예요. 그전만 해도 연산 2만 대 수준이었으니 게임이 안 됐죠. 해외 공장이 제대로 돌아갔다면 1990년대 말에 연산 400만~500만 대가 실현됐을 거예요.

    지금 보면 대우에 속했던 회사 치고 잘못된 회사가 없어요. 그러니까 사업 방향이 잘못된 건 없었다 이거죠. 방향은 제대로 된 건데 운이 없었다고 봅니다. 요르단이나 아랍 가면 지금도 대우 중고차가 인기가 있어요. 대우가 만든 차의 품질 수준이 현대를 비롯해 한국 자동차 발전에도 영향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 * 구술인터뷰는 총 3시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왕영남 WANG Young-Nam

  • 1941

    출생, 서울대 조선공학과

  • 1966

    신진자동차 입사

  • 1972

    GM Korea 차장(엔진공장 기술책임)

  • 1977

    새한자동차 부장, 이사(‘79)

  • 1983

    대우자동차 상무(공장건설담당)

  • 1986

    대우자동차 전무(부평생산총괄)

  • 1990

    대우 기획조정실 전무

  • 1991

    대우중공업 국민차부문 전무

  • 1992

    ㈜대우 무역부문 전무(자동차 해외 프로젝트 총괄)

  • 1993

    대우자동차 부사장(해외사업부문)

  • 1999

    대우자동차 사장

  • 1999

    대우자동차 우크라이나 AUTOZAZ-DAEWOO 사장

  • 2006

    쌍용자동차 사외이사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10월 31일 금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왕영남 전 대우자동차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글)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대우재단 마케팅커뮤니케이션팀(장윤석, 김준성)

왕영남 전 대우자동차 사장은 한국 자동차 산업의 ‘살아있는 화석’이자 ‘현장학 교과서’다. 그의 이력은 자동차 불모지 대한민국의 신진자동차 공채 1기로 입사했다. 그의 사회생활을 신진자동차가 도요타와 제휴해 코로나를 조립하던 1966년부터 시작된다. 인천 부평공장에서 기름밥을 먹던 청년 엔지니어는 이후 GM코리아, 새한자동차를 거쳐 대우자동차의 사장이 되기까지 반세기 동안 공장 바닥을 지켰다.

그는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었다. 1970년대 도요타가 중국의 정치적 영향으로 철수하고, GM이 들어왔을 때, 일본식 ‘정밀함’과 미국식 ‘대량 생산’의 기술적 간극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1980년대 대우의 첫 월드카 ‘르망’을 만들 때는 독일(오펠)의 도면과 미국(GM)의 관리 시스템 사이에서 피를 말리며 양산을 성공시켰다.

1990년대, 김우중 회장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지구촌 곳곳을 누빌 때, 그 지도 위에 실제로 공장을 짓고 깃발을 꽂은 실행가가 바로 왕영남이었다. 베트남 하노이의 진흙탕에 파일을 박고, 우즈베키스탄 직원을 500명씩 초대해 훈련시켰으며, 폴란드 FSO 공장을 유럽의 전초기지로 키워냈다. 대우 해체 후 20여 년, 그는 “대우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후배들이 달리고 있다”고 담담히 말한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태동기부터 세계경영의 영광과 좌절까지, 그 장대한 서사를 왕영남 사장의 육성으로 복기한다.



  • 박혁진

    1966년 신진자동차 1기 공채로 입사하셨습니다. 사실상 우리나라 자동차 개발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십니다.

  • 왕영남

    인천 부평공장에서 시작했죠. 6월에 입사를 했는데, 신진이 도요타와 기술 제휴를 해서 7월부터 ‘코로나’를 막 생산할 때였습니다. 8월 15일에 100대인가 200대를 한 번에 출하했는데 서울이 마비가 될 정도로 대단했어요.

    첫 임무는 엔진 공장을 짓는 거였는데, 1970년에 중국이 ‘주은래 4원칙(대만·한국과 거래하는 기업과는 거래하지 않는다)’을 발표하면서 도요타가 야반도주하듯 철수했습니다. 파트너가 없어지니 김창원 회장이 급하게 GM하고 손을 잡았고, 1972년에 GM코리아(GMK)가 출범했죠. 다시 1년간 GM과 준비해서 겨우 엔진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잘못 만들었어요. 엔진 선택을 잘못한 거였죠. 오펠 엔진의 설계가 구식이었던 셈인데, 이는 나중에 유럽이나 미국 자동차가 일본보다 뒤쳐진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게다가 기름을 너무 많이 먹었어요.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차가 안 팔리기 시작했고, 결국 산업은행 관리 체제로 넘어갔죠.



  • 박혁진

    그러다 1978년에 대우가 산업은행 지분을 인수했습니다. 신진, GM, 새한과 달리 대우의 문화는 어땠습니까?

  • 왕영남

    (대우자동차 출범 후) 프린스를 생산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생산 초기에는 부품 조달도 잘 안되고 복잡한 게 많습니다. 당시까지는 GM 합작 회사 문화가 강했어요. 미국식인거죠. GM과 역할 간격이 확실했고 익스큐즈가 허용되는 문화라 일하기 편했어요. 잘 안 풀려도 익스큐즈하면 다 오케이입니다.

    그런데 김우중 회장님은 그게 아니거든요. 하루는 회의하고 있는데, 회장님이 무슨 대화를 나누시다가 갑자기 내려다보시고는 “넌 임마, 그렇게 앉아 있으면 되는 거야? 나가 뛰어!” 호통을 치시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요. 일단 “네 알겠습니다”하고 뛰었습니다. 회장님은 다 알아서 하기를 바라시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안 되는 놈이 있으면 끌어가고. 그게 사실 맞는 얘기죠. 대우는 오너십을 가지고 일합니다. 프로그램 매니저가 되면 그 사람이 알아서 다 해야 되요. (웃음)

  • 박혁진

    대우자동차의 ‘월드카 프로젝트’인 르망 부평공장 설립을 맡아 오펠(독일)과 GM(미국) 사이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왕영남

    르망은 독일 오펠의 ‘카데트’를 베이스로 만든 차입니다. 오펠은 5억 달러를 주면 5년 내 공장을 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5억 달러로 3년 내 짓는 게 목표였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 하겠다고 했죠. 공장을 지을 때 오펠에서 10명, GM에서 10명이 우리를 감시하러 왔어요. 될 일도 안 될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식대로 밀어붙여 3년 만에 완공했고, 비용도 약 3억 달러로 절감했습니다. 품질도 독일 본토 생산품보다 10% 더 좋게 나왔어요. 독일(오펠)에서 5만 대를 수입해서 시장 반응을 봤는데 우리 제품이 불량도 덜 나왔어요. 나중에는 오펠 본사에서 ‘너희가 기술 지도를 어떻게 했길래 한국 애들이 더 잘 만드냐’며 자기네 생산 담당 임원을 문책하고 좌천시킬 정도였죠. 반면에 GM에서 온 사람들은 전부 승진했습니다.



  • 박혁진

    1990년대에는 ‘세계경영’의 최전선에서 해외 공장 건설을 진두지휘하셨습니다. 베트남 공장 건설 당시 일화가 유명하던데요.

  • 왕영남

    베트남 하노이 인근 비담코(VIDAMCO) 공장을 지을 때였죠. 미국식 매뉴얼대로라면 눈이 올 때를 대비해 지붕 트러스 강도를 높여야 하는데, 베트남에 눈이 옵니까? 제가 그랬죠. ‘여기는 비바람만 막으면 된다. 눈 하중 계산은 빼라’. 그렇게 설계를 변경해서 공장 건설비를 획기적으로 줄였습니다. 당시 500만~1,000만 달러 정도 들었는데, 다른 계열사나 경쟁사들이 1억 달러씩 부를 때 우리는 10분의 1 가격으로 지은 겁니다.

    저는 아주 원시적인 공장부터 최신식 공장까지 다 경험한 셈입니다. 우리가 팔 공장은 그사이의 어딘가였죠. 부평공장같은 최신식 공장을 그 당시의 베트남에 지으면 파산해요. (인건비나 기후 등) 현지 사정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대우의 방식이었습니다.

  • 박혁진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공장은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젝트였다고 들었습니다.

  • 왕영남

    안디잔은 타슈켄트에서도 비행기 타고 들어가야 하는 깡촌 중의 깡촌입니다. 사방이 목화밭이고 공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죠. 카리모프 대통령의 정치적인 이유로 그곳이 선정됐는데, 러시아 기술자들도 와보고는 ‘여기서 자동차가 나온다고? 말도 안 된다’며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해냈습니다. 현지 인력 500명씩 부평공장으로 초대해서 공장 짓는 몇년간 먹이고 재우며 기술을 가르쳤어요. 그렇게 훈련된 인원들이 돌아가서 공장을 돌리니 차가 나오더군요. 모스크바를 갔더니 국제공항에서도 뉴스가 크게 보도되더라고요. 그 성공이 기폭제가 되어 폴란드, 루마니아 등 동구권 국가들이 ‘우리도 해달라’며 줄을 섰죠.



  • 박혁진

    폴란드 FSO 인수는 대우 세계경영의 하이라이트로 종종 언급됩니다. 그 규모가 엄청났다고요?

  • 왕영남

    우즈베키스탄은 공장 건물만 인수했고, 폴란드는 FSO 회사 자체를 인수하다보니 차원이 달랐습니다. FSO는 공산권 특유의 기업 도시였어요. 공장 안에 병원, 학교는 물론이고 100만 평 넘는 농장까지 딸려 있었어요. 그룹에서 돼지를 컨베이어 벨트에 태워서 옥수수 사료를 먹여 키우고, 한 바퀴 돌면 도축하는 덴마크 사육장 사업 모델을 검토할 정도였죠.

    원래 GM이 인수하려고 눈독을 들이던 곳이었는데, 대우가 낚아채니까 미국은 물론, 유럽 자동차 업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우리 뒷마당을 한국 놈들이 차지했다’며 분개했죠. 우리는 FSO를 유럽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아 연간 50만 대 생산 체제를 갖출 계획이었습니다.



  • 박혁진

    IMF 외환위기와 함께 대우는 해체되었습니다. 해외 공장들이 독자 생존하지 못하고 무너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 왕영남

    우리가 해외에 공장은 많이 지었지만, 기술과 핵심 부품은 여전히 한국 본사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부피가 큰 내장재 등은 현지화가 되었지만 아직 엔진 같은 핵심 부품은 한국에서 보내줘야 차를 만들 수 있었죠. 그런데 본사가 무너지면서 부품 공급이 끊기니 해외 공장들은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나는 대우 특유의 ‘직판 체제’였습니다. 현대차처럼 현지 딜러에게 차를 넘기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판매 법인을 세워 재고 부담과 금융 리스크를 다 떠안는 구조였죠. 경기가 좋을 땐 이익이 크지만, 위기가 오면 직격탄을 맞습니다. IMF 때 환율이 폭등하면서 그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게 치명타였습니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님과는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셨습니다. 어떤 기억이 남으십니까?

  • 왕영남

    중국 산동성 공장 건은 다섯 가지 불가 사유를 적어서 끝까지 반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회장님도 직접 중국 부총리를 만나 담판을 짓겠다고 장고를 거듭하셨죠.

    그런데 이미 산동성에 시멘트 공장이 돌아가고 있어서, 결국은 좋지 않은 조건임에도 자동차 부품공장을 만들기로 했어요.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사업하는 사람이 사업 제안을 거절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구나’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박혁진

    신진부터 대우까지 자동차 산업에 40년을 몸담으셨습니다. 대우자동차의 역사가 한국 산업에 남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 왕영남

    자동차에도 경제 단위라는 게 있습니다. 최소한 1분에 한 대 생산하면 연산 25만에서 30만 대라는 경제 단위가 나와요. (1984년 월드카 프로젝트 때) 회장님께서는 그 경제 단위의 공장을 만들어서, 50%는 국내에 팔고 50%는 GM이 가져가는 걸로 GM과 담판을 지으셨죠. 시작은 그렇게 된 거예요. 그전만 해도 연산 2만 대 수준이었으니 게임이 안 됐죠. 해외 공장이 제대로 돌아갔다면 1990년대 말에 연산 400만~500만 대가 실현됐을 거예요.

    지금 보면 대우에 속했던 회사 치고 잘못된 회사가 없어요. 그러니까 사업 방향이 잘못된 건 없었다 이거죠. 방향은 제대로 된 건데 운이 없었다고 봅니다. 요르단이나 아랍 가면 지금도 대우 중고차가 인기가 있어요. 대우가 만든 차의 품질 수준이 현대를 비롯해 한국 자동차 발전에도 영향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 * 구술인터뷰는 총 3시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왕영남 WANG Young-Nam

  • 1941

    출생, 서울대 조선공학과

  • 1966

    신진자동차 입사

  • 1972

    GM Korea 차장(엔진공장 기술책임)

  • 1977

    새한자동차 부장, 이사(‘79)

  • 1983

    대우자동차 상무(공장건설담당)

  • 1986

    대우자동차 전무(부평생산총괄)

  • 1990

    대우 기획조정실 전무

  • 1991

    대우중공업 국민차부문 전무

  • 1992

    ㈜대우 무역부문 전무(자동차 해외 프로젝트 총괄)

  • 1993

    대우자동차 부사장(해외사업부문)

  • 1999

    대우자동차 사장

  • 1999

    대우자동차 우크라이나 AUTOZAZ-DAEWOO 사장

  • 2006

    쌍용자동차 사외이사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10월 31일 금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왕영남 전 대우자동차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글)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대우재단 마케팅커뮤니케이션팀(장윤석, 김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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