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근 전 대우일본지역본사 사장

기자에서 관료 그리고 대우, 자부심 하나로 20년 일했다

2026.09.11.

박용근 전 대우일본지역본사 사장

기자에서 관료 그리고 대우, 자부심 하나로 20년 일했다

2026.09.11.


박용근 전 대우그룹 일본지역본사 사장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아온 ‘산증인’이다. 6.25 전쟁 당시 중학생의 몸으로 서울에서 고향 영주까지 500리를 걸어 탈출하며 사선을 넘나들었던 소년은, 훗날 펜을 쥔 언론인으로, 국가 정책을 조율하는 관료로, 그리고 대우그룹의 심장부를 지키는 야전사령관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1960~70년대, 그는 통신사와 KBS에서 정치부장과 경제부장을 역임하며 청와대를 출입했고, 이후 남덕우 부총리의 전격적인 발탁으로 경제기획원(EPB) 공보관(이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질주하던 시기, 그는 정부와 언론의 가교로서 그 역동적인 현장을 지켰다.

잘 나가던 관료였던 그가 1979년, 돌연 ‘대우맨’이 된 것은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갑작스러운 병마로 공직을 떠나야 했던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김우중’이라는 신화적 인물이었다. ‘1~2년만 경험하고 나오겠지’ 했던 그의 대우 생활은 무려 20년이나 이어졌다. 그는 대우실업 화학본부장, 대우조선 기획담당 전무, 대우그룹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며 김우중 회장의 천재적인 ‘직관’을 ‘시스템’으로 보완하고, 특유의 폭넓은 정·관계 및 언론 네트워크를 활용해 대우의 대외 리스크를 관리하는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그의 일본어 실력과 인적 네트워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60년대 주일 특파원 시절 맺은 인맥을 바탕으로 일본 정재계 거물들과 교류하며, 대우의 일본 건설업 면허 취득(국내 1호), 스즈키 자동차와의 국민차(티코) 기술 제휴 등 굵직한 사업을 막후에서 성사시켰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출발해 가장 깊숙한 내부자가 되어 대우의 영광과 상처를 모두 지켜본 그에게, 대우는 여전히 ‘아쉬움’이자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 박혁진

    잘 나가던 언론인이자 경제기획원 관료였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인 ‘재벌 기업’ 대우에 합류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 박용근

    제 의지와는 무관한, 타율적인 결정이었습니다. 경제기획원 대변인 시절 부친상을 당해 무리를 했는지 급성 장폐색으로 쓰러져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한 달 넘게 요양을 해야 했는데, 전시 상황 같던 경제기획원 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 사표를 냈죠.

    그때 김우중 회장실에서 연락이 왔어요. 한번 보자고. 만나서 제안을 받았는데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공직과는 전혀 다른, 생소하기 짝이 없는 ‘정글’ 같은 곳 아닙니까. 하지만 역발상을 했습니다. ‘언론과 관료 사회에서 쌓은 내 노하우가 비대해진 기업 집단에는 오히려 필요한 구석이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도전하게 된 거죠. 처음엔 10년도 못 있을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20년을 근무하며 대우에서 가장 오래 몸담은 임원 중 한 명이 됐습니다.

  • 박혁진

    관료 출신으로서 처음 본 대우의 조직 문화는 어땠습니까? 꽤 충격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 박용근

    입사 직후 회장님을 수행해 리비아 출장을 갔는데, 밤 12시에 도착하자마자 현장 회의를 소집하시더군요. 그 열정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더 놀란 건 ‘시스템의 부재’였습니다. 회장님이 아주 중요한 외부 인사를 만나 회담을 하는데, 옆에서 기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겁니다. 정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제가 직언을 했습니다. “이 많은 정보를 회장 혼자 머릿속에 담고 있으면, 조직에 피드백은 어떻게 합니까? 이건 위험합니다.” 그랬더니 회장님이 “그럼 내일부터 박 상무님이 맡아주세요” 하시더군요.

    또 한 번은, 제가 입사 초기에 아무런 미션도 없이 미국 전 지사를 한 바퀴 돌아보라는 지시를 받고 한 달간 미국을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지점장들이 ‘본사 비서실에서 감시하러 왔나’ 하고 긴장하더군요. 저는 그때 대우가 얼마나 방대하게, 하지만 한편으론 얼마나 거칠게 뻗어 나가고 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역할은 회장님의 직관을 뒷받침할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박혁진

    일본통(通)으로서 대우의 일본 사업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셨습니다. 특히 폐쇄적인 일본 건설 시장을 뚫은 일화가 유명한데요.

  • 박용근

    당시 일본 건설 시장은 외국 기업에겐 난공불락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본 특파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교도통신 경제부장에게 힌트를 얻었어요. 미국의 ‘벡텔’이 일본 면허를 땄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이 되면 한국도 되는 거 아니냐’는 논리로 일본 건설성과 접촉하고, 언론 인맥을 동원해 분위기를 조성했죠. 심지어 교도통신 부장에게 부탁해 우리 면허 신청 서류가 국장 결재함에 들어가 있는지까지 실시간으로 체크했습니다.

    결국 현대건설보다 앞서서 대우가 국내 건설사 최초로 일본 건설 면허 1호를 따냈습니다. 그 기사가 니혼게이자이신문 1면에 났을 때 현대건설 담당자가 본국에서 소환되어 깨졌다는 후문도 들었습니다(웃음). 남들이 하지 못하는 발상과 네트워크, 그게 저의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 박혁진

    스즈키 자동차와의 제휴를 통해 ‘국민차(티코)’ 시대를 열기도 하셨죠. 그 과정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고요?

  • 박용근

    스즈키 오사무 회장과 친분이 깊었습니다. 스즈키의 경영 철학은 ‘모든 것을 미니마이즈(Minimize) 한다’는 것이었죠. 공장 부지부터 라인 배치까지 낭비가 없어요. 제휴 과정에서 우리 ROTC 출신 신입사원 30명을 뽑아 스즈키 공장에 연수를 보냈는데, 어느 날 스즈키 회장이 다급하게 전화를 했어요. ‘애들이 파업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급히 가보니 이유가 기가 막혀요. 김치와 고추장, 된장을 못 먹어서 화가 난 거였어요(웃음). 급히 현지 한식당을 수배해 달래줬죠. 이걸 우리는 ‘김치 스트라이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연수생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일본 직원들은 8시 업무 시작이면 7시 반에 와서 옷 갈아입고 8시 정각에 기계를 돌리는데, 우리는 8시에 출근해서 옷 갈아입고 8시 반에야 일을 시작하더라. 생산성 차이가 거기서 나더라”는 겁니다. 그 깨달음 하나만으로도 연수는 성공이었다고 회장님께 보고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 박혁진

    대우조선 전무 시절에는 자금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셨습니다.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 박용근

    대우가 옥포조선소를 인수했지만, 환율 급등과 금융 비용으로 하루 이자만 1억 원씩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산업은행과 정부의 지원 없이는 버티기 힘들었죠. 당시 대우조선 사장보다 제가 정부 쪽 인맥이 더 두터웠습니다.

    김만재, 김용환 같은 전직 장관들이나 산업은행 총재들과의 인연을 활용해 550억 원 출자전환 같은 난제들을 풀러 다녔습니다. 이형구 전 산업은행 총재가 대우 고문으로 오셨을 때는 제가 현관까지 나가 영접했습니다. 대우에는 그런 의전 문화가 부족했거든요. 외부 인사를 모셔오면 ‘여기가 내가 정착할 곳이구나’ 하는 느낌을 줘야 하는데, 그런 디테일이 아쉬워서 제가 자처해서 챙기곤 했습니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께서 일본의 ‘마쓰시타 정경숙’ 같은 인재 양성 기관을 한국에 만들고 싶어 하셨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 박용근

    그게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입니다. 김 회장께서는 한국의 정치 문화를 순화시켜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 있으셨어요. 그래서 저에게 일본의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経塾)’을 벤치마킹하라고 특별 지시를 하셨죠.

    제가 마쓰시타를 수십 번 오가며 커리큘럼부터 운영 시스템까지 다 파악해 뒀습니다. 단순히 기업 인재를 키우는 게 아니라, 국가를 이끌어갈 리더를 키우겠다는 원대한 꿈이었습니다. 만약 대우 사태가 없었다면, 아마 ‘김우중 정경연구소’ 같은 곳이 생겨서 한국 정치와 사회에 큰 기여를 했을 겁니다.

  • 박혁진

    언론인 출신으로서 대우가 언론사를 소유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 박용근

    네, 부산 지역 신문을 인수하려 할 때 제가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재벌이 언론을 갖는 것은 순기능도 있지만, 리스크가 훨씬 크다. 굳이 하려면 중앙지를 해야지 지방지는 맞지 않다’고 직언했죠. 결국 인수는 진행됐지만, 결과적으로 그룹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기업이 언론을 소유하는 것이 경영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습니다.




  • 박혁진

    대우그룹의 해체를 지켜보며 ‘대우맨’으로서, 또 관료 출신으로서 만감이 교차하셨을 것 같습니다.

  • 박용근

    김 회장님은 늘 신입사원한테 ‘이 대우빌딩의 불이 100년, 200년이 지나도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그런 자부심으로 20년을 일했고요. 관료 사회와 대우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려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시대의 파고를 넘지 못했습니다. 일부 관료들의 대우에 대한 비우호적인 시각, 그리고 우리 스스로 그들을 더 세련되게 설득하지 못했던 점들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김 회장님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일본어판: ‘미래는 당신의 손 안에’)를 일본어로 번역 출간할 때, 아사히신문 논설위원에게 감수를 부탁했어요. 그가 원고를 다 보고 나서 ‘정말 품격 있는 문장이고, 훌륭한 철학이다’라고 평가하더군요. 비록 회사는 해체되었지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그 도전 정신과 성취는 후대에도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22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박용근 PARK Yong-Geun

  • 1936

    출생, 중앙대 법학과

  • 1967

    동화통신사 주일 특파원

  • 1973

    한국방송공사(KBS) 정경부장

  • 1976

    경제기획원 대변인

  • 1979

    대우실업 상무

  • 1984

    대우조선 전무

  • 1987

    ㈜대우 일본법인장 부사장

  • 1995

    대우 회장비서실 실장 사장

  • 1998

    대우 일본지역본사 사장

  • 2003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10월 17일 금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2층
참석
박용근 전 대우일본지역본사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글)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대우재단 마케팅커뮤니케이션팀(장윤석, 김준성)

박용근 전 대우그룹 일본지역본사 사장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아온 ‘산증인’이다. 6.25 전쟁 당시 중학생의 몸으로 서울에서 고향 영주까지 500리를 걸어 탈출하며 사선을 넘나들었던 소년은, 훗날 펜을 쥔 언론인으로, 국가 정책을 조율하는 관료로, 그리고 대우그룹의 심장부를 지키는 야전사령관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1960~70년대, 그는 통신사와 KBS에서 정치부장과 경제부장을 역임하며 청와대를 출입했고, 이후 남덕우 부총리의 전격적인 발탁으로 경제기획원(EPB) 공보관(이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질주하던 시기, 그는 정부와 언론의 가교로서 그 역동적인 현장을 지켰다.

잘 나가던 관료였던 그가 1979년, 돌연 ‘대우맨’이 된 것은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갑작스러운 병마로 공직을 떠나야 했던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김우중’이라는 신화적 인물이었다. ‘1~2년만 경험하고 나오겠지’ 했던 그의 대우 생활은 무려 20년이나 이어졌다. 그는 대우실업 화학본부장, 대우조선 기획담당 전무, 대우그룹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며 김우중 회장의 천재적인 ‘직관’을 ‘시스템’으로 보완하고, 특유의 폭넓은 정·관계 및 언론 네트워크를 활용해 대우의 대외 리스크를 관리하는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그의 일본어 실력과 인적 네트워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60년대 주일 특파원 시절 맺은 인맥을 바탕으로 일본 정재계 거물들과 교류하며, 대우의 일본 건설업 면허 취득(국내 1호), 스즈키 자동차와의 국민차(티코) 기술 제휴 등 굵직한 사업을 막후에서 성사시켰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출발해 가장 깊숙한 내부자가 되어 대우의 영광과 상처를 모두 지켜본 그에게, 대우는 여전히 ‘아쉬움’이자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 박혁진

    잘 나가던 언론인이자 경제기획원 관료였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인 ‘재벌 기업’ 대우에 합류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 박용근

    제 의지와는 무관한, 타율적인 결정이었습니다. 경제기획원 대변인 시절 부친상을 당해 무리를 했는지 급성 장폐색으로 쓰러져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한 달 넘게 요양을 해야 했는데, 전시 상황 같던 경제기획원 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 사표를 냈죠.

    그때 김우중 회장실에서 연락이 왔어요. 한번 보자고. 만나서 제안을 받았는데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공직과는 전혀 다른, 생소하기 짝이 없는 ‘정글’ 같은 곳 아닙니까. 하지만 역발상을 했습니다. ‘언론과 관료 사회에서 쌓은 내 노하우가 비대해진 기업 집단에는 오히려 필요한 구석이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도전하게 된 거죠. 처음엔 10년도 못 있을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20년을 근무하며 대우에서 가장 오래 몸담은 임원 중 한 명이 됐습니다.

  • 박혁진

    관료 출신으로서 처음 본 대우의 조직 문화는 어땠습니까? 꽤 충격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 박용근

    입사 직후 회장님을 수행해 리비아 출장을 갔는데, 밤 12시에 도착하자마자 현장 회의를 소집하시더군요. 그 열정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더 놀란 건 ‘시스템의 부재’였습니다. 회장님이 아주 중요한 외부 인사를 만나 회담을 하는데, 옆에서 기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겁니다. 정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제가 직언을 했습니다. “이 많은 정보를 회장 혼자 머릿속에 담고 있으면, 조직에 피드백은 어떻게 합니까? 이건 위험합니다.” 그랬더니 회장님이 “그럼 내일부터 박 상무님이 맡아주세요” 하시더군요.

    또 한 번은, 제가 입사 초기에 아무런 미션도 없이 미국 전 지사를 한 바퀴 돌아보라는 지시를 받고 한 달간 미국을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지점장들이 ‘본사 비서실에서 감시하러 왔나’ 하고 긴장하더군요. 저는 그때 대우가 얼마나 방대하게, 하지만 한편으론 얼마나 거칠게 뻗어 나가고 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역할은 회장님의 직관을 뒷받침할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박혁진

    일본통(通)으로서 대우의 일본 사업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셨습니다. 특히 폐쇄적인 일본 건설 시장을 뚫은 일화가 유명한데요.

  • 박용근

    당시 일본 건설 시장은 외국 기업에겐 난공불락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본 특파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교도통신 경제부장에게 힌트를 얻었어요. 미국의 ‘벡텔’이 일본 면허를 땄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이 되면 한국도 되는 거 아니냐’는 논리로 일본 건설성과 접촉하고, 언론 인맥을 동원해 분위기를 조성했죠. 심지어 교도통신 부장에게 부탁해 우리 면허 신청 서류가 국장 결재함에 들어가 있는지까지 실시간으로 체크했습니다.

    결국 현대건설보다 앞서서 대우가 국내 건설사 최초로 일본 건설 면허 1호를 따냈습니다. 그 기사가 니혼게이자이신문 1면에 났을 때 현대건설 담당자가 본국에서 소환되어 깨졌다는 후문도 들었습니다(웃음). 남들이 하지 못하는 발상과 네트워크, 그게 저의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 박혁진

    스즈키 자동차와의 제휴를 통해 ‘국민차(티코)’ 시대를 열기도 하셨죠. 그 과정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고요?

  • 박용근

    스즈키 오사무 회장과 친분이 깊었습니다. 스즈키의 경영 철학은 ‘모든 것을 미니마이즈(Minimize) 한다’는 것이었죠. 공장 부지부터 라인 배치까지 낭비가 없어요. 제휴 과정에서 우리 ROTC 출신 신입사원 30명을 뽑아 스즈키 공장에 연수를 보냈는데, 어느 날 스즈키 회장이 다급하게 전화를 했어요. ‘애들이 파업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급히 가보니 이유가 기가 막혀요. 김치와 고추장, 된장을 못 먹어서 화가 난 거였어요(웃음). 급히 현지 한식당을 수배해 달래줬죠. 이걸 우리는 ‘김치 스트라이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연수생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일본 직원들은 8시 업무 시작이면 7시 반에 와서 옷 갈아입고 8시 정각에 기계를 돌리는데, 우리는 8시에 출근해서 옷 갈아입고 8시 반에야 일을 시작하더라. 생산성 차이가 거기서 나더라”는 겁니다. 그 깨달음 하나만으로도 연수는 성공이었다고 회장님께 보고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 박혁진

    대우조선 전무 시절에는 자금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셨습니다.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 박용근

    대우가 옥포조선소를 인수했지만, 환율 급등과 금융 비용으로 하루 이자만 1억 원씩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산업은행과 정부의 지원 없이는 버티기 힘들었죠. 당시 대우조선 사장보다 제가 정부 쪽 인맥이 더 두터웠습니다.

    김만재, 김용환 같은 전직 장관들이나 산업은행 총재들과의 인연을 활용해 550억 원 출자전환 같은 난제들을 풀러 다녔습니다. 이형구 전 산업은행 총재가 대우 고문으로 오셨을 때는 제가 현관까지 나가 영접했습니다. 대우에는 그런 의전 문화가 부족했거든요. 외부 인사를 모셔오면 ‘여기가 내가 정착할 곳이구나’ 하는 느낌을 줘야 하는데, 그런 디테일이 아쉬워서 제가 자처해서 챙기곤 했습니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께서 일본의 ‘마쓰시타 정경숙’ 같은 인재 양성 기관을 한국에 만들고 싶어 하셨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 박용근

    그게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입니다. 김 회장께서는 한국의 정치 문화를 순화시켜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 있으셨어요. 그래서 저에게 일본의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経塾)’을 벤치마킹하라고 특별 지시를 하셨죠.

    제가 마쓰시타를 수십 번 오가며 커리큘럼부터 운영 시스템까지 다 파악해 뒀습니다. 단순히 기업 인재를 키우는 게 아니라, 국가를 이끌어갈 리더를 키우겠다는 원대한 꿈이었습니다. 만약 대우 사태가 없었다면, 아마 ‘김우중 정경연구소’ 같은 곳이 생겨서 한국 정치와 사회에 큰 기여를 했을 겁니다.

  • 박혁진

    언론인 출신으로서 대우가 언론사를 소유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 박용근

    네, 부산 지역 신문을 인수하려 할 때 제가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재벌이 언론을 갖는 것은 순기능도 있지만, 리스크가 훨씬 크다. 굳이 하려면 중앙지를 해야지 지방지는 맞지 않다’고 직언했죠. 결국 인수는 진행됐지만, 결과적으로 그룹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기업이 언론을 소유하는 것이 경영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습니다.



  • 박혁진

    대우그룹의 해체를 지켜보며 ‘대우맨’으로서, 또 관료 출신으로서 만감이 교차하셨을 것 같습니다.

  • 박용근

    김 회장님은 늘 신입사원한테 ‘이 대우빌딩의 불이 100년, 200년이 지나도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그런 자부심으로 20년을 일했고요. 관료 사회와 대우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려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시대의 파고를 넘지 못했습니다. 일부 관료들의 대우에 대한 비우호적인 시각, 그리고 우리 스스로 그들을 더 세련되게 설득하지 못했던 점들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김 회장님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일본어판: ‘미래는 당신의 손 안에’)를 일본어로 번역 출간할 때, 아사히신문 논설위원에게 감수를 부탁했어요. 그가 원고를 다 보고 나서 ‘정말 품격 있는 문장이고, 훌륭한 철학이다’라고 평가하더군요. 비록 회사는 해체되었지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그 도전 정신과 성취는 후대에도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22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박용근 PARK Yong-Geun

  • 1936

    출생, 중앙대 법학과

  • 1967

    동화통신사 주일 특파원

  • 1973

    한국방송공사(KBS) 정경부장

  • 1976

    경제기획원 대변인

  • 1979

    대우실업 상무

  • 1984

    대우조선 전무

  • 1987

    ㈜대우 일본법인장 부사장

  • 1995

    대우 회장비서실 실장 사장

  • 1998

    대우 일본지역본사 사장

  • 2003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10월 17일 금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2층
참석
박용근 전 대우일본지역본사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글)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대우재단 마케팅커뮤니케이션팀(장윤석, 김준성)


News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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