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 전 대우재단 학술운영위원

옷값 지원받던 유학생, 대우의 이름으로 한국 학술의 기틀을 놓다

2026.08.14.

이태수 전 대우재단 학술운영위원

옷값 지원받던 유학생, 대우의 이름으로 한국 학술의 기틀을 놓다

2026.08.14


1970년대 초 독일 정부 장학생으로 유학길에 오른 청년은 장학생 안내 책자에서 별표가 붙은 조항 하나를 발견했다. "아프리카에서 온 유학생과 사우스 코리아에서 온 유학생에게는 겨울 옷값을 따로 지급한다." 세계 각국의 장학생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학생들 옆에 앉게 됐다. 한국이 필리핀보다 못살던 시절, 나라 전체가 '가난뱅이 취급'을 받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유학생이 한국인 최초로 서양 고전학의 본고장에서 그리스·로마 고전과 고대 철학을 정통으로 공부하고 돌아온 이태수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다.

1981년 귀국한 그를 저녁 자리로 불러 지원을 약속한 사람이 대우재단 초대 이사장 이용희 교수였고, 그 만남은 한국 고전학계가 만들어지는 출발점이 됐다. 이후 45년, 그는 대우재단 학술사업의 수혜자이자 심사자,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 그리고 지금은 학술운영위원으로 대우재단과 동행해왔다. 대우와 함께했던 한국 학술 40년의 산증인을 대우재단빌딩에서 만났다.

인터뷰 내내 이태수 교수는 40여 년 전의 인물과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아카이빙이 안 돼 있어 진위를 가릴 수 없는 게 안타깝다"는 말을 반복했다. 겨울 옷값을 따로 받던 빈국의 유학생이 아무런 콤플렉스 없이 학문하는 나라가 되기까지, 그 압축 성장의 출발점에 대우재단의 학술 지원이 있었다는 것이 그의 증언이다. "한국 고전학계를 키워준 게 사실은 대우재단이에요. 그 재정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못 했을 겁니다."

  • 박혁진

    기업이 학술 사업에 애정을 갖고 꾸준히 지원하는 게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인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1980년 무렵 대우재단이 학술 사업을 시작할 때 학계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 이태수

    그때 대학 교수에게 ‘연구비’라는 게 나오질 않았어요. 이공계는 70년대에 과학연구재단이 생겨서 지원이 시작됐지만, 인문계는 연구비가 가뭄에 콩 나듯 나왔고 액수도 얼마 안 됐어요. 교육부 예산에 여유가 생기면 국립대학에 조금씩 내려보내는 정도인데 그것도 일반 교수한테는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때에 대우재단이 출연금을 200억 원으로 불려서 대규모 학술 사업을 시작한 거예요. 1978년에 김우중 회장이 사재 50억 원을 출연해 재단을 만들었고, 1980년부터 학술 사업이 본격화됐습니다. 인문·사회의 기초 분야까지 전부 챙겨서 골고루, 기획 범위가 굉장히 넓고 지원도 파격적이었어요. 연구 결과서 심사하고, 심사서 받아서 보관하고, 심사평을 연구자에게 보내 답하게 하고. 그때는 생각할 수 없는 몇 단계 선진적인 방식이었습니다. 80년대 학술 지원은 대우재단이 주역이었어요.

  • 박혁진

    그 사업을 이끈 분이 이용희 초대 이사장이었죠. 어떤 분이었습니까?

  • 이태수

    요즘엔 그런 인물이 있기 어려운데, 본인이 모든 학문 분야를 두루 섭렵한다고 자신하신 분이에요. 전공은 정치외교학이지만 미술사 저술도 있고, 소크라테스 연구도 하셨지요. 언어학에도 조예가 있었고, 만주어처럼 이제는 사실상 잊혀진 언어에도 능통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백과사전적인 인물이라고 스스로 자부했고 주변에서도 인정해준 분이죠. 김우중 회장님과는 연희전문 선배의 연고로 연결됐고, 거의 전권을 맡기셨어요. 실제로 전권을 행사하셨고요.

    제가 1981년에 귀국하니까 대우재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녁 먹으러 오라고. 가서 인사드리고 앉자마자 지원을 해주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모임이 한 시간 넘게 걸렸을 텐데 제가 한 말은 "네"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웃음) 한국 학술계가 얼마나 허술한가, 특히 지원이 전무한 ‘이론 분야’를 당신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지원하려는가, 그 말씀을 한 시간 동안 듣고 그 자리에서 약속을 받았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절차랄 게 없는 방식이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저는 그 돈이 제일 가성비 있게, 아주 생산적(Productive)으로 쓰였다고 봐요.

  • 박혁진

    그 지원이 한국 고전학계를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 이태수

    이용희 이사장님이 큰돈은 여러 학문 분야에 나눠주면서도, 돈이 안 갈 분야, 꼭 있어야 하는데 아직 여건이 안 돼 못 하는 분야를 '불우부진(不遇不振) 분야'라고 이름 붙여 특별 지원을 했어요. 고전학이 바로 그런 분야였습니다. 한국에는 과도 없고 전임 교원도 없었어요. 학회를 만들어도 회원들이 낸 회비로 학회를 제대로 운영하기는 어려웠지요.

    그 학회비를 대우재단이 계속 지원해주고, 겨울방학에 그리스어·라틴어 무료 강좌를 열면 강사료를 지원해줬어요. 한국 고전학계를 키워준 게 사실은 대우재단이에요. 지금 제 고전학 제자들이 서울대에만 다섯입니다. 엄청난 돈이 들어간 건 아니지만, 그 돈이 없었으면 못 했을 일이에요. 저처럼 학생들이 하기 어려운 분야를 하던 사람에게는, 귀국하자마자 스폰서가 생긴 획기적인 순간이었죠.

    10년 전쯤 고전학회에 마지막으로 참석했을 때 그런 얘기를 했어요. 학회가 이만큼 커졌지만 사실은 대우재단 돈으로 꾸려온 시절이 있었다, 그걸 좀 기억해두기 바란다고.

  • 박혁진

    김우중 회장은 학술 사업에 어떤 존재였습니까? 보통 이런 사업을 하면 돈을 대는 쪽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있잖아요.

  • 이태수

    그런 건 없었어요. 전혀 없었습니다. 연구비를 주고서 이래라저래라 하면 그 연구를 망치겠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김우중 회장님의 방식은 인연이 있고 믿을 수 있는 학자에게 맡기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봐요. 이용희 이사장님이 연희전문 연고였다면, 1990년에 취임한 이석희 이사장님은 경기고등학교 시절 은사였어요.

    그리고 김용준 선생님이 계세요. 1981년부터 상근하면서 이 재단의 산 역사가 되신 분인데, 김우중 회장님과는 집안끼리 서로 챙기는 특수 관계였어요. 이분이 해직 교수셨거든요. 해직 교수는 그때 어디서도 쓰지 못했어요. 그런데 김우중 회장님이 이용희 이사장 시절이 끝난 뒤에도 계속 지원해줬어요. 시류가 어떻든 자기 사람을 챙기고, 맡긴 다음에는 전권을 주는 것. 그게 대우재단 학술 사업이 그렇게 자유롭게 갈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 박혁진

    대우학술총서는 언제부터 나오기 시작했습니까?

  • 이태수

    1984년쯤부터일 거예요. 80년에 시작해서 2~3년은 걸리니까. 당시 기준을 어떻게 맞췄냐면, 대학원생을 상대로 교육 과정에서 추천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 그때로서는 최고 수준이었죠. 집필진도 외국에 가서 제대로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 당시 구할 수 있는 최상의 저자들을 확보했어요. 지금 와서 보면 '그때는 저 수준이었구나' 하겠지만, 그 의미가 엄청 커요. 한국 학술사의 증거자료(Evidence)들이 지금 여기(대우학술총서) 모여 있는 거예요. 나중에 ‘서양 학문 수용사’ 같은 걸 연구하는 사람이 나오면 이건 엄청난 자료입니다.

    초기에는 이공계도 포함했어요. 84년에 자연과학 1권으로 김진의 교수의 '소립자와 게이지 상호작용'이 나왔는데, 지금은 이공계 교수한테 그런 책을 받을 수가 없어요. 전부 작은 페이퍼와 실험 보고서를 써야 하니까, 한 분야를 망라하는 저술을 쓸 교수가 없습니다. 그런 때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요.

  • 박혁진

    교수님은 1994년 교육부 대학정책실장으로 가셔서 정부의 학술 지원을 키우는 일도 하셨습니다.

  • 이태수

    그게 재미있는 대목인데, 대우재단의 비중이 줄어드는 데 간접적으로 제가 기여를 한 셈이에요(웃음). 당시 정부의 학술진흥재단은 명맥만 있는 지원이었어요. 교육부에서도 학술 지원 업무는 뒷전이었고요. 대학 교수를 하던 사람이 와서 이걸 늘리자 한 것이지요. 어쨌든 아주 어렵게 학술진흥재단 예산을 100억 원대로 획기적으로 키워놨어요. 교육부 관리가 퇴임 후 맡곤 했던 이사장 자리에 서울대 총장을 지낸 분이 오게끔 만들었고요. 그러면서 대우재단만이 아니라 정부가 학술 지원을 하기 시작한 거죠.

    지금은 한국연구재단에서 인문사회에만 4천억 넘게 지원하니까, 그때 얘기는 단군 시대 얘기지만요. 사립 재단이 규모로 국가와 경쟁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대우재단은 석학연속강좌, '지식의 지평' 창간, 대우고전총서 같은 방식으로 변화를 계속 시도해온 거고, 저는 여기까지 끌고 온 우리가 기특하다고 생각해요.

  • 박혁진

    인터뷰 처음에 대우 학술 사업의 성취가 '퇴색됐다'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 이태수

    대우 학술 사업은 흔히 하는 말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업적이고 성취인데, 그게 잊혀졌어요. 우리 전체가 압축 성장을 했지만 특히 학계가 압축 성장을 하면서, 초창기에 (대우재단이) 결정적으로 기여한 대목은 규모가 너무 커지는 바람에 잊혀지고 말았어요. 

    요즘 사회 트렌드를 한마디로 하면 프레젠티즘, 현재주의예요. 사람들이 너무 현재에 몰두해서 역사를 안 봐요. 그런 때에도 굴하지 않고 도큐멘테이션을 해야 레거시가 생기고 히스토리가 생기고 내러티브가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너무 빨리 달려나가느라 아카이빙을 잊어버리고 와서, 지금 뒤져보려니 과거가 미약한 거예요. 아카이빙이 제대로 안 돼 있으면 관련된 사람들이 다 자기가 일등 공신이라고 나설 수 있습니다(웃음). 이 작업이 그래서 중요해요.

  • 박혁진

    교수님 인생에서 대우와의 만남은 어떤 의미였습니까?

  • 이태수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의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준 것. 저는 스승께 "서양에 가서 고전어를 정통으로 공부하고 와서 한국에 고전 연구(Classical Studies)의 전통을 만들라"는 주문을 받았고 그게 제 미션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귀국할 때 제 목표는 소박했습니다.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처럼, 이 분야를 이어줄 학생을 찾아서 이어주면 내 역할은 된다.

    그런데 이용희 이사장님을 만나 강좌를 열 재정 지원을 받고 학회를 만들 수 있게 되니까, 제가 그렇게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이 아닌데도 자꾸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되더라고요. 대학원 과정을 만들었고 그 출신들이 교수가 됐어요.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생각했던 인생의 목표를 과잉 달성했어요. 저는 이게 대우재단 덕이라고 봐요. 그런 개인사적인 기억이 저한테는 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이태수 교수는 40여 년 전의 인물과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아카이빙이 안 돼 있어 진위를 가릴 수 없는 게 안타깝다"는 말을 반복했다. 겨울 옷값을 따로 받던 빈국의 유학생이 아무런 콤플렉스 없이 학문하는 나라가 되기까지, 그 압축 성장의 출발점에 대우재단의 학술 지원이 있었다는 것이 그의 증언이다.
  •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20분간 진행됐습니다. 교수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이태수 LEE Tae-Soo

  • 1944

    출생. 서울대 철학과 학사, 석사('69)

  • 1981

    독일 괴팅겐오르크아우구스트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 1982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 1994

    교육부 대학정책실 실장

  • 1996

    한국서양고전학회 회장

  • 2002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장, 대학원 원장('04)

  • 2005

    한국철학회 회장

  • 2006

    대우재단 지식의 지평 편집위원

  • 2008

    인제대학교 교수, 인간환경미래연구원 원장('09)

  • 2010

    서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 2011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

  • 2016

    대우재단 학술자문위원회 위원

  • 2019

    대우재단 학술운영위원회 위원


구술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11월 14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이태수 이태수 전 대우재단 학술운영위원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글)
이혜련 대우재단 미션사업팀장
김자연 대우재단 미션사업팀
장윤석 대우재단 마케팅커뮤니케이션팀장(편집)
김준성 대우재단 마케팅커뮤니케이션팀(촬영)

1970년대 초 독일 정부 장학생으로 유학길에 오른 청년은 장학생 안내 책자에서 별표가 붙은 조항 하나를 발견했다. "아프리카에서 온 유학생과 사우스 코리아에서 온 유학생에게는 겨울 옷값을 따로 지급한다." 세계 각국의 장학생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학생들 옆에 앉게 됐다. 한국이 필리핀보다 못살던 시절, 나라 전체가 '가난뱅이 취급'을 받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유학생이 한국인 최초로 서양 고전학의 본고장에서 그리스·로마 고전과 고대 철학을 정통으로 공부하고 돌아온 이태수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다.

1981년 귀국한 그를 저녁 자리로 불러 지원을 약속한 사람이 대우재단 초대 이사장 이용희 교수였고, 그 만남은 한국 고전학계가 만들어지는 출발점이 됐다. 이후 45년, 그는 대우재단 학술사업의 수혜자이자 심사자,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 그리고 지금은 학술운영위원으로 대우재단과 동행해왔다. 대우와 함께했던 한국 학술 40년의 산증인을 대우재단빌딩에서 만났다.

인터뷰 내내 이태수 교수는 40여 년 전의 인물과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아카이빙이 안 돼 있어 진위를 가릴 수 없는 게 안타깝다"는 말을 반복했다. 겨울 옷값을 따로 받던 빈국의 유학생이 아무런 콤플렉스 없이 학문하는 나라가 되기까지, 그 압축 성장의 출발점에 대우재단의 학술 지원이 있었다는 것이 그의 증언이다. "한국 고전학계를 키워준 게 사실은 대우재단이에요. 그 재정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못 했을 겁니다."

  • 박혁진

    기업이 학술 사업에 애정을 갖고 꾸준히 지원하는 게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인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1980년 무렵 대우재단이 학술 사업을 시작할 때 학계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 이태수

    그때 대학 교수에게 ‘연구비’라는 게 나오질 않았어요. 이공계는 70년대에 과학연구재단이 생겨서 지원이 시작됐지만, 인문계는 연구비가 가뭄에 콩 나듯 나왔고 액수도 얼마 안 됐어요. 교육부 예산에 여유가 생기면 국립대학에 조금씩 내려보내는 정도인데 그것도 일반 교수한테는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때에 대우재단이 출연금을 200억 원으로 불려서 대규모 학술 사업을 시작한 거예요. 1978년에 김우중 회장이 사재 50억 원을 출연해 재단을 만들었고, 1980년부터 학술 사업이 본격화됐습니다. 인문·사회의 기초 분야까지 전부 챙겨서 골고루, 기획 범위가 굉장히 넓고 지원도 파격적이었어요. 연구 결과서 심사하고, 심사서 받아서 보관하고, 심사평을 연구자에게 보내 답하게 하고. 그때는 생각할 수 없는 몇 단계 선진적인 방식이었습니다. 80년대 학술 지원은 대우재단이 주역이었어요.

  • 박혁진

    그 사업을 이끈 분이 이용희 초대 이사장이었죠. 어떤 분이었습니까?

  • 이태수

    요즘엔 그런 인물이 있기 어려운데, 본인이 모든 학문 분야를 두루 섭렵한다고 자신하신 분이에요. 전공은 정치외교학이지만 미술사 저술도 있고, 소크라테스 연구도 하셨지요. 언어학에도 조예가 있었고, 만주어처럼 이제는 사실상 잊혀진 언어에도 능통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백과사전적인 인물이라고 스스로 자부했고 주변에서도 인정해준 분이죠. 김우중 회장님과는 연희전문 선배의 연고로 연결됐고, 거의 전권을 맡기셨어요. 실제로 전권을 행사하셨고요.

    제가 1981년에 귀국하니까 대우재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녁 먹으러 오라고. 가서 인사드리고 앉자마자 지원을 해주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모임이 한 시간 넘게 걸렸을 텐데 제가 한 말은 "네"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웃음) 한국 학술계가 얼마나 허술한가, 특히 지원이 전무한 ‘이론 분야’를 당신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지원하려는가, 그 말씀을 한 시간 동안 듣고 그 자리에서 약속을 받았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절차랄 게 없는 방식이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저는 그 돈이 제일 가성비 있게, 아주 생산적(Productive)으로 쓰였다고 봐요.

  • 박혁진

    그 지원이 한국 고전학계를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 이태수

    이용희 이사장님이 큰돈은 여러 학문 분야에 나눠주면서도, 돈이 안 갈 분야, 꼭 있어야 하는데 아직 여건이 안 돼 못 하는 분야를 '불우부진(不遇不振) 분야'라고 이름 붙여 특별 지원을 했어요. 고전학이 바로 그런 분야였습니다. 한국에는 과도 없고 전임 교원도 없었어요. 학회를 만들어도 회원들이 낸 회비로 학회를 제대로 운영하기는 어려웠지요.

    그 학회비를 대우재단이 계속 지원해주고, 겨울방학에 그리스어·라틴어 무료 강좌를 열면 강사료를 지원해줬어요. 한국 고전학계를 키워준 게 사실은 대우재단이에요. 지금 제 고전학 제자들이 서울대에만 다섯입니다. 엄청난 돈이 들어간 건 아니지만, 그 돈이 없었으면 못 했을 일이에요. 저처럼 학생들이 하기 어려운 분야를 하던 사람에게는, 귀국하자마자 스폰서가 생긴 획기적인 순간이었죠.

    10년 전쯤 고전학회에 마지막으로 참석했을 때 그런 얘기를 했어요. 학회가 이만큼 커졌지만 사실은 대우재단 돈으로 꾸려온 시절이 있었다, 그걸 좀 기억해두기 바란다고.

  • 박혁진

    김우중 회장은 학술 사업에 어떤 존재였습니까? 보통 이런 사업을 하면 돈을 대는 쪽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있잖아요.

  • 이태수

    그런 건 없었어요. 전혀 없었습니다. 연구비를 주고서 이래라저래라 하면 그 연구를 망치겠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김우중 회장님의 방식은 인연이 있고 믿을 수 있는 학자에게 맡기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봐요. 이용희 이사장님이 연희전문 연고였다면, 1990년에 취임한 이석희 이사장님은 경기고등학교 시절 은사였어요.

    그리고 김용준 선생님이 계세요. 1981년부터 상근하면서 이 재단의 산 역사가 되신 분인데, 김우중 회장님과는 집안끼리 서로 챙기는 특수 관계였어요. 이분이 해직 교수셨거든요. 해직 교수는 그때 어디서도 쓰지 못했어요. 그런데 김우중 회장님이 이용희 이사장 시절이 끝난 뒤에도 계속 지원해줬어요. 시류가 어떻든 자기 사람을 챙기고, 맡긴 다음에는 전권을 주는 것. 그게 대우재단 학술 사업이 그렇게 자유롭게 갈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 박혁진

    대우학술총서는 언제부터 나오기 시작했습니까?

  • 이태수

    1984년쯤부터일 거예요. 80년에 시작해서 2~3년은 걸리니까. 당시 기준을 어떻게 맞췄냐면, 대학원생을 상대로 교육 과정에서 추천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 그때로서는 최고 수준이었죠. 집필진도 외국에 가서 제대로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 당시 구할 수 있는 최상의 저자들을 확보했어요. 지금 와서 보면 '그때는 저 수준이었구나' 하겠지만, 그 의미가 엄청 커요. 한국 학술사의 증거자료(Evidence)들이 지금 여기(대우학술총서) 모여 있는 거예요. 나중에 ‘서양 학문 수용사’ 같은 걸 연구하는 사람이 나오면 이건 엄청난 자료입니다.

    초기에는 이공계도 포함했어요. 84년에 자연과학 1권으로 김진의 교수의 '소립자와 게이지 상호작용'이 나왔는데, 지금은 이공계 교수한테 그런 책을 받을 수가 없어요. 전부 작은 페이퍼와 실험 보고서를 써야 하니까, 한 분야를 망라하는 저술을 쓸 교수가 없습니다. 그런 때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요.

  • 박혁진

    교수님은 1994년 교육부 대학정책실장으로 가셔서 정부의 학술 지원을 키우는 일도 하셨습니다.

  • 이태수

    그게 재미있는 대목인데, 대우재단의 비중이 줄어드는 데 간접적으로 제가 기여를 한 셈이에요(웃음). 당시 정부의 학술진흥재단은 명맥만 있는 지원이었어요. 교육부에서도 학술 지원 업무는 뒷전이었고요. 대학 교수를 하던 사람이 와서 이걸 늘리자 한 것이지요. 어쨌든 아주 어렵게 학술진흥재단 예산을 100억 원대로 획기적으로 키워놨어요. 교육부 관리가 퇴임 후 맡곤 했던 이사장 자리에 서울대 총장을 지낸 분이 오게끔 만들었고요. 그러면서 대우재단만이 아니라 정부가 학술 지원을 하기 시작한 거죠.

    지금은 한국연구재단에서 인문사회에만 4천억 넘게 지원하니까, 그때 얘기는 단군 시대 얘기지만요. 사립 재단이 규모로 국가와 경쟁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대우재단은 석학연속강좌, '지식의 지평' 창간, 대우고전총서 같은 방식으로 변화를 계속 시도해온 거고, 저는 여기까지 끌고 온 우리가 기특하다고 생각해요.

  • 박혁진

    인터뷰 처음에 대우 학술 사업의 성취가 '퇴색됐다'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 이태수

    대우 학술 사업은 흔히 하는 말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업적이고 성취인데, 그게 잊혀졌어요. 우리 전체가 압축 성장을 했지만 특히 학계가 압축 성장을 하면서, 초창기에 (대우재단이) 결정적으로 기여한 대목은 규모가 너무 커지는 바람에 잊혀지고 말았어요. 

    요즘 사회 트렌드를 한마디로 하면 프레젠티즘, 현재주의예요. 사람들이 너무 현재에 몰두해서 역사를 안 봐요. 그런 때에도 굴하지 않고 도큐멘테이션을 해야 레거시가 생기고 히스토리가 생기고 내러티브가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너무 빨리 달려나가느라 아카이빙을 잊어버리고 와서, 지금 뒤져보려니 과거가 미약한 거예요. 아카이빙이 제대로 안 돼 있으면 관련된 사람들이 다 자기가 일등 공신이라고 나설 수 있습니다(웃음). 이 작업이 그래서 중요해요.

  • 박혁진

    교수님 인생에서 대우와의 만남은 어떤 의미였습니까?

  • 이태수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의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준 것. 저는 스승께 "서양에 가서 고전어를 정통으로 공부하고 와서 한국에 고전 연구(Classical Studies)의 전통을 만들라"는 주문을 받았고 그게 제 미션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귀국할 때 제 목표는 소박했습니다.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처럼, 이 분야를 이어줄 학생을 찾아서 이어주면 내 역할은 된다.

    그런데 이용희 이사장님을 만나 강좌를 열 재정 지원을 받고 학회를 만들 수 있게 되니까, 제가 그렇게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이 아닌데도 자꾸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되더라고요. 대학원 과정을 만들었고 그 출신들이 교수가 됐어요.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생각했던 인생의 목표를 과잉 달성했어요. 저는 이게 대우재단 덕이라고 봐요. 그런 개인사적인 기억이 저한테는 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이태수 교수는 40여 년 전의 인물과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아카이빙이 안 돼 있어 진위를 가릴 수 없는 게 안타깝다"는 말을 반복했다. 겨울 옷값을 따로 받던 빈국의 유학생이 아무런 콤플렉스 없이 학문하는 나라가 되기까지, 그 압축 성장의 출발점에 대우재단의 학술 지원이 있었다는 것이 그의 증언이다.


  •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20분간 진행됐습니다. 교수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이태수 LEE Tae-Soo

  • 1944

    출생, 서울대 철학과 학사, 석사(’69)

  • 1981

    독일 괴팅겐오르크아우구스트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 1982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 1994

    교육부 대학정책실 실장

  • 1996

    한국서양고전학회 회장

  • 2002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장, 대학원 원장('04)

  • 2005

    한국철학회 회장

  • 2006

    대우재단 지식의 지평 편집위원

  • 2008

    인제대학교 교수, 인간환경미래연구원 원장(’09)

  • 2010

    서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 2011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

  • 2016

    대우재단 학술자문위원회 위원

  • 2019

    대우재단 학술운영위원회 위원


구술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11월 14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이태수 이태수 전 대우재단 학술운영위원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글)
이혜련 대우재단 미션사업팀장
김자연 대우재단 미션사업팀
장윤석 대우재단 마케팅커뮤니케이션팀장(편집)
김준성 대우재단 마케팅커뮤니케이션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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