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섭 전 대우정보시스템 사장 

음지에서 양지 지향하던 중앙정보부 요원, 김우중의 20년 그림자로

2026.08.05.

김용섭 전 대우정보시스템 사장

음지에서 양지 지향하던 중앙정보부 요원, 김우중의 20년 그림자로

2026.08.05.


1980년 5월 31일, 신군부의 숙정 바람이 중앙정보부를 휩쓸었다. 하루아침에 서기관 이상 260명이 옷을 벗었다. 해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해 장교로 복무하다 1967년 중앙정보부 공채에 수석으로 들어가, LA총영사관과 워싱턴대사관을 거쳐 부장 비서실 총무과장까지 지낸 김용섭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때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김우중 회장이었다. 1980년 10월, 첫 면접에서 김우중 회장이 그에게 건넨 말은 단 한마디, "골프 잘 치시네요"였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출근하라"는 말로 면접은 끝났다.

그렇게 시작된 대우 생활 20년. 김용섭 사장은 회장비서실에서 6년, 기획조정실 인사담당, 대우자동차판매 영업총괄, 대우인력개발원 원장을 거쳐 대우정보시스템 사장으로 대우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한다. "대우에 근무한 임직원 중에 김우중 회장과 얼굴을 가장 오래 마주한 사람이 나다." 지금의 국가정보원이나 과거 안전기획부,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가슴 속에는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란 음지에서 일하던 김 사장은 대우로 옮겨와 김우중 회장의 가장 가까운 음지에서 때론 양지에서 대우의 성장과 해체를 지켜봤다. 그를 대우재단빌딩 아카이빙룸에서 만났다.

  • 박혁진

    이력 중에 제일 특이했던 게 해군사관학교를 나오셨다는 점이었습니다. 계속 해군에 계셨으면 장군이 되셨을 텐데, 어떻게 중앙정보부로 옮기시게 된 겁니까?

  • 김용섭

    제가 탔던 82함이라는 배가 대한민국 해군 최초로 미국 해군의 손을 빌리지 않고 우리 손으로 오버홀(전면 개보수)을 한 배입니다. 그 배의 함장이 참 우수하고 훌륭한 분이었는데, 어느 날 정보부에서 소위·중위·대위를 공채한다는 공문을 저한테 주시더라고요. 육군과 공군에는 그런 지원 허가를 안 해줬는데 해군은 전군에 뿌렸어요. 그걸 보고 마음이 동해서 지원했죠. 현역 신분으로 파견 형식이었으니까 대우에 올 때까지 군인 신분이었습니다. 군에서 17년, 대우에서 딱 20년을 있었습니다.

  • 박혁진

    1980년에 어떻게 대우에 입사하게 되셨습니까?

  • 김용섭

    숙정으로 정보부를 나오게 됐을 때 오라는 기업이 세 군데 있었어요. 어디로 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김우중 회장이 직접 전화를 하셨어요. 만나자고. 그래서 만났는데, 제가 이력서 취미란에 골프, 핸디 11이라고 써놨거든요. 사실 그때 핸디가 5였는데 너무 골프만 치러 다니는 사람으로 볼까 봐 줄여 쓴 거예요. (웃음)

    그런데 회장님이 다른 건 하나도 안 물어보시고 "골프 잘 치시네요" 이러시더라고. 그러더니 "어디에서 근무하고 싶으냐" 물으시길래 기업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고 했더니 "그럼 비서실은 어때요?" 하시고는 "내일은 개천절이니까 쉬고 월요일날 출근해" 이러시는 거예요. 짧게 만났지만 뭔가 끊고 맺는 게 즉결심판 같다. 회장의 성격은 굉장히 분명하구나, 그런 인상이었죠.




  • 박혁진

    정보부에 오래 계시다가 기업으로 오셨는데, 와서 보신 대우는 어땠습니까?

  • 김용섭

    제가 놀란 게, 여기 굉장히 우수한 사람들이 많구나, 정보부에 없는 인재들이 여기 엄청나게 있구나 하는 거였어요. 그때 대우에 미국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 40여 명, 제가 인사를 담당할 때는 65명까지 있었죠. 정보부와는 비교가 안 됐습니다. 제가 그때 쓴 표현이 있어요. "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그 정도로 기업을 몰랐던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놀란 건 비서실 규모였어요. 비서실장, 저, 수행비서, 여직원 하나. 네 명밖에 없었어요. 김우중 회장이 그만큼 혼자서 열정적으로 일하신 거죠.

  • 박혁진

    회장님 해외 출장도 자주 수행하셨죠. 곁에서 본 회장님의 일하는 방식은 어땠습니까?

  • 김용섭

    회장님이 1년에 230일에서 260일 정도 출장을 가셨거든요. 평상시엔 젊은 수행비서들이 모시고 다녔는데, 중국 초창기 출장, 수교 전 러시아, 그리고 북한에 가실 때는 늘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회장님 출장 스타일이 이렇습니다. 파리로 가시면 도착이 아침 6시 반쯤인데, 1등석에서 내리실 때 세수하고 넥타이까지 맨 완전한 정장 차림으로 내리십니다. 그 길로 공항 근처 조찬 약속으로 직행해요. 지점장들이 회장과 마주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어서 약속을 잔뜩 만들어놓는데, 회장님은 그걸 하나도 자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루 평균 세 시간 이상을 못 잤습니다.




  • 박혁진

    1990년에 국민차, 그러니까 티코 판매를 맡으셨습니다. 어떻게 맡게 되신 겁니까?

  • 김용섭

    어느 날 조찬 모임이 끝났는데 회장님이 그 길로 해외 출장을 떠나시면서 저를 보더니 "바빠?" 이러시는 거예요. 대우 임원이 안 바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안 바쁩니다" 했죠. (웃음)

    그랬더니 공항 가는 차 뒷자리에 타라고 하세요. 우리 회장님이 앞자리에 타라고 하면 대화할 게 없는 거고, 뒷자리에 타라고 하면 하실 말씀이 있는 겁니다. 국민차 판매를 맡아보라는 말씀이었어요. 저는 회장님이 뭘 시키실 때 "왜 갑니까, 가서 뭘 합니까"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가서 파악해서 하면 되는 거니까. "알았습니다" 하고 갔죠.

  • 박혁진

    가보시니 어땠습니까?

  • 김용섭

    가서 검토를 해보니까, 국민차 판매를 대우자동차 판매 조직에 그대로 갖다 넣으면 같이 어려워지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당시 대우자동차 판매 조직으로는 게임이 안 됐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세일즈맨이 1만 명, 기아가 7천 명인데 대우는 2천200명이었어요. 한 사람이 하루에 5명을 만난다고 치면 저쪽은 하루 5만 명을 만나고 우리는 1만 명입니다. 전국 AS 네트워크도 비교가 안 되고요. 이 인력, 이 조직 가지고는 절대 못 이깁니다.

    그래서 딜러 시스템을 해야 한다고 본 거죠. 당시 자동차 3사가 전부 직영 체제였습니다. 젊은 직원들을 시켜서 딜러 시스템을 연구하게 했어요.




  • 박혁진

    그 보고를 평양 가는 길에 하셨다는 게 유명한 얘기입니다.

  • 김용섭

    보고서가 거의 마감될 무렵에 회장님이 부르시더니 "나하고 평양 좀 갈래?" 하시는 거예요. 날짜를 보니 엿새 남았어요. 내려와서 직원들한테 "무조건 그때까지 끝내라" 했더니 출장 전날 600페이지짜리 보고서를 가져왔어요. 그걸 20페이지로 요약해서 들고 평양에 갔습니다.

    저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이 보고를 하려면 최소 한 시간이 필요한데, 서울에서는 회장님을 한 시간 붙잡을 기회가 안 생깁니다. 평양 대동강변 영빈관에서 저녁 먹고 회장님 방에 보고서를 들고 갔죠. 회장님이 제목을 보시더니 보고서를 딱 덮으세요. "얘기해." 그때 중요한 게 뭔지 아십니까? 5분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5분이에요. 그 5분 안에 승부를 봐야 합니다.

  • 박혁진

    어떻게 설득하셨습니까?

  • 김용섭

    숫자로 말씀드렸죠. 인력과 조직으로는 직영으로 절대 못 이긴다. 그리고 직영 조직 운영에는 자동차 매출의 12%가 들어가는데 딜러 조직은 8%면 된다, 4%가 남는다. 굉장히 큰 차이입니다. 문제는 돈이었어요. 전국에 판매망을 만드는 데 4천600억이 드는데, 당시 정부가 대우더러 본사 사옥을 팔라고 하던 시절이에요. 본사를 팔아도 1천억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죠. "회장님, 4천600억 중에 400억만 허락해 주시면 나머지 4천200억은 딜러들이 하게 만들겠습니다." 회장님이 가만히 계시다가 "그게 되겠어?" 하시더라고요. "할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서울 가서 다시 회의를 해서 결정하자" 하셨어요. 회장님이 웬만한 일은 그 자리에서 다 결정해 주시는데, 중요한 일에는 그 정도로 시간을 끄십니다.

    서울 와서 임원 30~40명 앞에서 브리핑하고, 반대 의견이 계속 나오니까 결론을 안 내시고 "창원 가서 공장 임원들 다 모아놓고 한 번 더 하자" 하셨어요. 저는 그런 걸 처음 봤습니다. 경영자로서 그 결정 방식, 저는 참 좋다고 생각해요. 결국 "일단 딜러로 간다, 나중에 그 시스템이 나쁘면 회수하면 된다"고 결론을 내주셨습니다.




  • 박혁진

    비서실에서 6년, 그리고 20년 내내 회장님께 직보하는 위치에 계셨습니다. 사장님만의 보고 원칙이 있으셨습니까?

  • 김용섭

    팩트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절대 말하지 않는 것. 무슨 얘기가 들리면 여기저기 크로스체크를 합니다. 듣자마자 쫓아가서 "회장님, 이렇답니다" 하는 건 절대 안 했어요. 말하자면 숙성을 시키는 거죠. 충분히 소화해서 회장님이 아셔야 될 가치가 있는 것만 보고했습니다.

    확인도 안 된 얘기를 의사결정권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제가 정보 일을 한 사람이라 말씀드리는데, 범죄입니다. 사람을 엉뚱한 데로 끌고 가니까요. 의사결정권자를 팩트가 아닌 것으로 끌고 가거나 흥분시키는 일은 비서나 참모에게 절대 금물입니다. 회장님의 좋은 점이, 사람에 대한 얘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으시는데, 듣고 바로 반응을 안 하세요. 잘못된 정보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데요.

  • 박혁진

    6년이나 비서실에 계실 수 있었던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김용섭

    입이 무거운 겁니다. 저는 회장님의 자랑이 될 만한 얘기도 안 했어요. 한번은 회장님이 출장 가시면서 국방부 장관을 찾아가 어떤 문제를 부탁하라고 하셨어요. 장관이 바로 해결해줘서 답을 받아놨는데, 일주일 뒤 귀국하신 회장님께 보고드렸더니 "그거 담당 사장한테 얘기해 줬어?" 하세요. "안 했습니다" 했더니 "해주지 그랬어" 하시더라고요.

    저는 두 가지를 생각한 겁니다. 내가 그런 걸 사장한테 얘기하면 '이 친구가 장관 만났다고 폼 잡는다'고 들릴 수 있다. 그리고 회장님이 직접 말씀하시면 사장과 주고받을 얘기가 생긴다. 저는 말만 전할 뿐이니까요. 회장님이 그런 걸 아신 거죠. 사실 중앙정보부 과장이면 어디 가도 대접받는 자리인데, 여기 와서 매일 가방 들고 다니는 비서를 6년 했습니다.



오랜 기간 김우중 회장 곁을 지키던 김 사장은 정작 대우가 해체위기에 놓였을 때는 대우정보시스템에 있었다. 김 회장과는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셈이다. 그에게 ‘김우중 회장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 것 같냐?’고 물었더니, 당시 정치권과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미스가 있었다는 점을 아쉽다고 꼽았다. 그는 만약 그때 곁에 있었다면 ‘회장님, 대통령 믿으면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경제 관료들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됩니다’라고 얘기했을 것 같다는 소회를 털어놓았다.

  • 박혁진

    해체 이후에도 회장님을 뵀을 때, 회장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 김용섭

    이 얘기는 기억이 납니다. 회장님의 후회가 뭐였냐면, 그때 단기 외채 있잖습니까. 환율이 1,900원대까지 올라갔을 때 25% 이자를 주고 돈을 빌려서 그 환율로 빚을 갚았단 말이에요. 그걸 후회하셨어요. 못 갚겠다고 했어야 한다, 지금은 못 갚겠다, 우리가 안정되면 갚겠다고 교섭을 했어야 하는데 그걸 못 한 게 정말 한스럽다는 거죠. 은행 입장에서도 떼이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딜을 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김우중 회장은 그걸 그냥 다 갚아야 되는 줄 알고 하셨던 겁니다. 그 점에서 회장님은 너무 순진했고, 너무 양심적이었던 거죠. 그런데 정부에 대한 원망이라든가 대통령에 대한 얘기는, 할 만도 한데, 한마디도 안 하시더라고요.

  • 박혁진

    군인으로 17년을 사시다가 원치 않게 대우로 옮기셨습니다. 대우맨으로 산 20년에 대한 소회가 있으시다면요.

  • 김용섭

    해사 동기 중에 별을 단 친구가 14명입니다. 가끔 그 친구들을 만나면 생각하죠. 내가 해군에 있었으면 과연 별이라도 달았을까, 대우에 간 것이 좋았는가. 그런데 세상을 넓게 보고 넓게 활동했다는 점에서는 대우가 훨씬 낫습니다. 해군 총장보다 훨씬 낫게 살았어요. 대우에 와서 '참 더러운 팔자다'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잖냐, 어떤 면에서는 화려한 면도 있었고 더 좋았다 싶은 면도 있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터뷰 내내 김용섭 사장은 메모 한 장 없이 40여 년 전의 날짜와 숫자를 정확히 짚어냈다. 그는 "대우에 관해 제가 가진 자료는 (대우자동차 시장점유율) 대구 22%, 경북 27%가 적힌 두 페이지짜리 문서 하나뿐이고, 지금 얘기하는 건 전부 기억"이라고 했다. 그가 대우가 쓰러진 것이 너무 억울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대목에서, 20년 동안 김우중 회장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한 대우맨의 마음이 읽혔다.

"앞으로 천 년이 가도 대우 같은 회사는 안 나옵니다. 못 만들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남겨야 합니다."

  • * 구술인터뷰는 총 3시간 25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김용섭 KIM Yong-Sup

  • 1941

    출생, 해군사관학교

  • 1965

    대한민국 해군

  • 1967

    국제문제연구소(국정원), LA 한국총영사관, 워싱턴대사관

  • 1980

    대우 회장비서실

  • 1986

    대우 기획조정실 상무

  • 1990

    대우자동차판매 영업총괄 부사장

  • 1995

    대우 회장비서실 부사장

  • 1996

    대우인력개발원 원장 부사장

  • 1998

    대우정보시스템 대표이사 사장

  • 2001

    레코코리아(주) 회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9월 8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 룸 
참석
김용섭 전 대우정보시스템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1980년 5월 31일, 신군부의 숙정 바람이 중앙정보부를 휩쓸었다. 하루아침에 서기관 이상 260명이 옷을 벗었다. 해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해 장교로 복무하다 1967년 중앙정보부 공채에 수석으로 들어가, LA총영사관과 워싱턴대사관을 거쳐 부장 비서실 총무과장까지 지낸 김용섭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때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김우중 회장이었다. 1980년 10월, 첫 면접에서 김우중 회장이 그에게 건넨 말은 단 한마디, "골프 잘 치시네요"였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출근하라"는 말로 면접은 끝났다.

그렇게 시작된 대우 생활 20년. 김용섭 사장은 회장비서실에서 6년, 기획조정실 인사담당, 대우자동차판매 영업총괄, 대우인력개발원 원장을 거쳐 대우정보시스템 사장으로 대우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한다. "대우에 근무한 임직원 중에 김우중 회장과 얼굴을 가장 오래 마주한 사람이 나다." 지금의 국가정보원이나 과거 안전기획부,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가슴 속에는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란 음지에서 일하던 김 사장은 대우로 옮겨와 김우중 회장의 가장 가까운 음지에서 때론 양지에서 대우의 성장과 해체를 지켜봤다. 그를 대우재단빌딩 아카이빙룸에서 만났다.



  • 박혁진

    이력 중에 제일 특이했던 게 해군사관학교를 나오셨다는 점이었습니다. 계속 해군에 계셨으면 장군이 되셨을 텐데, 어떻게 중앙정보부로 옮기시게 된 겁니까?

  • 김용섭

    제가 탔던 82함이라는 배가 대한민국 해군 최초로 미국 해군의 손을 빌리지 않고 우리 손으로 오버홀(전면 개보수)을 한 배입니다. 그 배의 함장이 참 우수하고 훌륭한 분이었는데, 어느 날 정보부에서 소위·중위·대위를 공채한다는 공문을 저한테 주시더라고요. 육군과 공군에는 그런 지원 허가를 안 해줬는데 해군은 전군에 뿌렸어요. 그걸 보고 마음이 동해서 지원했죠. 현역 신분으로 파견 형식이었으니까 대우에 올 때까지 군인 신분이었습니다. 군에서 17년, 대우에서 딱 20년을 있었습니다.

  • 박혁진

    1980년에 어떻게 대우에 입사하게 되셨습니까?

  • 김용섭

    숙정으로 정보부를 나오게 됐을 때 오라는 기업이 세 군데 있었어요. 어디로 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김우중 회장이 직접 전화를 하셨어요. 만나자고. 그래서 만났는데, 제가 이력서 취미란에 골프, 핸디 11이라고 써놨거든요. 사실 그때 핸디가 5였는데 너무 골프만 치러 다니는 사람으로 볼까 봐 줄여 쓴 거예요. (웃음)

    그런데 회장님이 다른 건 하나도 안 물어보시고 "골프 잘 치시네요" 이러시더라고. 그러더니 "어디에서 근무하고 싶으냐" 물으시길래 기업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고 했더니 "그럼 비서실은 어때요?" 하시고는 "내일은 개천절이니까 쉬고 월요일날 출근해" 이러시는 거예요. 짧게 만났지만 뭔가 끊고 맺는 게 즉결심판 같다. 회장의 성격은 굉장히 분명하구나, 그런 인상이었죠.



  • 박혁진

    정보부에 오래 계시다가 기업으로 오셨는데, 와서 보신 대우는 어땠습니까?

  • 김용섭

    제가 놀란 게, 여기 굉장히 우수한 사람들이 많구나, 정보부에 없는 인재들이 여기 엄청나게 있구나 하는 거였어요. 그때 대우에 미국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 40여 명, 제가 인사를 담당할 때는 65명까지 있었죠. 정보부와는 비교가 안 됐습니다. 제가 그때 쓴 표현이 있어요. "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그 정도로 기업을 몰랐던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놀란 건 비서실 규모였어요. 비서실장, 저, 수행비서, 여직원 하나. 네 명밖에 없었어요. 김우중 회장이 그만큼 혼자서 열정적으로 일하신 거죠.

  • 박혁진

    회장님 해외 출장도 자주 수행하셨죠. 곁에서 본 회장님의 일하는 방식은 어땠습니까?

  • 김용섭

    회장님이 1년에 230일에서 260일 정도 출장을 가셨거든요. 평상시엔 젊은 수행비서들이 모시고 다녔는데, 중국 초창기 출장, 수교 전 러시아, 그리고 북한에 가실 때는 늘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회장님 출장 스타일이 이렇습니다. 파리로 가시면 도착이 아침 6시 반쯤인데, 1등석에서 내리실 때 세수하고 넥타이까지 맨 완전한 정장 차림으로 내리십니다. 그 길로 공항 근처 조찬 약속으로 직행해요. 지점장들이 회장과 마주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어서 약속을 잔뜩 만들어놓는데, 회장님은 그걸 하나도 자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루 평균 세 시간 이상을 못 잤습니다.



  • 박혁진

    1990년에 국민차, 그러니까 티코 판매를 맡으셨습니다. 어떻게 맡게 되신 겁니까?

  • 김용섭

    어느 날 조찬 모임이 끝났는데 회장님이 그 길로 해외 출장을 떠나시면서 저를 보더니 "바빠?" 이러시는 거예요. 대우 임원이 안 바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안 바쁩니다" 했죠. (웃음)

    그랬더니 공항 가는 차 뒷자리에 타라고 하세요. 우리 회장님이 앞자리에 타라고 하면 대화할 게 없는 거고, 뒷자리에 타라고 하면 하실 말씀이 있는 겁니다. 국민차 판매를 맡아보라는 말씀이었어요. 저는 회장님이 뭘 시키실 때 "왜 갑니까, 가서 뭘 합니까"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가서 파악해서 하면 되는 거니까. "알았습니다" 하고 갔죠.

  • 박혁진

    가보시니 어땠습니까?

  • 김용섭

    가서 검토를 해보니까, 국민차 판매를 대우자동차 판매 조직에 그대로 갖다 넣으면 같이 어려워지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당시 대우자동차 판매 조직으로는 게임이 안 됐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세일즈맨이 1만 명, 기아가 7천 명인데 대우는 2천200명이었어요. 한 사람이 하루에 5명을 만난다고 치면 저쪽은 하루 5만 명을 만나고 우리는 1만 명입니다. 전국 AS 네트워크도 비교가 안 되고요. 이 인력, 이 조직 가지고는 절대 못 이깁니다.

    그래서 딜러 시스템을 해야 한다고 본 거죠. 당시 자동차 3사가 전부 직영 체제였습니다. 젊은 직원들을 시켜서 딜러 시스템을 연구하게 했어요.



  • 박혁진

    그 보고를 평양 가는 길에 하셨다는 게 유명한 얘기입니다.

  • 김용섭

    보고서가 거의 마감될 무렵에 회장님이 부르시더니 "나하고 평양 좀 갈래?" 하시는 거예요. 날짜를 보니 엿새 남았어요. 내려와서 직원들한테 "무조건 그때까지 끝내라" 했더니 출장 전날 600페이지짜리 보고서를 가져왔어요. 그걸 20페이지로 요약해서 들고 평양에 갔습니다.

    저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이 보고를 하려면 최소 한 시간이 필요한데, 서울에서는 회장님을 한 시간 붙잡을 기회가 안 생깁니다. 평양 대동강변 영빈관에서 저녁 먹고 회장님 방에 보고서를 들고 갔죠. 회장님이 제목을 보시더니 보고서를 딱 덮으세요. "얘기해." 그때 중요한 게 뭔지 아십니까? 5분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5분이에요. 그 5분 안에 승부를 봐야 합니다.

  • 박혁진

    어떻게 설득하셨습니까?

  • 김용섭

    숫자로 말씀드렸죠. 인력과 조직으로는 직영으로 절대 못 이긴다. 그리고 직영 조직 운영에는 자동차 매출의 12%가 들어가는데 딜러 조직은 8%면 된다, 4%가 남는다. 굉장히 큰 차이입니다. 문제는 돈이었어요. 전국에 판매망을 만드는 데 4천600억이 드는데, 당시 정부가 대우더러 본사 사옥을 팔라고 하던 시절이에요. 본사를 팔아도 1천억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죠. "회장님, 4천600억 중에 400억만 허락해 주시면 나머지 4천200억은 딜러들이 하게 만들겠습니다." 회장님이 가만히 계시다가 "그게 되겠어?" 하시더라고요. "할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서울 가서 다시 회의를 해서 결정하자" 하셨어요. 회장님이 웬만한 일은 그 자리에서 다 결정해 주시는데, 중요한 일에는 그 정도로 시간을 끄십니다.

    서울 와서 임원 30~40명 앞에서 브리핑하고, 반대 의견이 계속 나오니까 결론을 안 내시고 "창원 가서 공장 임원들 다 모아놓고 한 번 더 하자" 하셨어요. 저는 그런 걸 처음 봤습니다. 경영자로서 그 결정 방식, 저는 참 좋다고 생각해요. 결국 "일단 딜러로 간다, 나중에 그 시스템이 나쁘면 회수하면 된다"고 결론을 내주셨습니다.



  • 박혁진

    비서실에서 6년, 그리고 20년 내내 회장님께 직보하는 위치에 계셨습니다. 사장님만의 보고 원칙이 있으셨습니까?

  • 김용섭

    팩트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절대 말하지 않는 것. 무슨 얘기가 들리면 여기저기 크로스체크를 합니다. 듣자마자 쫓아가서 "회장님, 이렇답니다" 하는 건 절대 안 했어요. 말하자면 숙성을 시키는 거죠. 충분히 소화해서 회장님이 아셔야 될 가치가 있는 것만 보고했습니다.

    확인도 안 된 얘기를 의사결정권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제가 정보 일을 한 사람이라 말씀드리는데, 범죄입니다. 사람을 엉뚱한 데로 끌고 가니까요. 의사결정권자를 팩트가 아닌 것으로 끌고 가거나 흥분시키는 일은 비서나 참모에게 절대 금물입니다. 회장님의 좋은 점이, 사람에 대한 얘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으시는데, 듣고 바로 반응을 안 하세요. 잘못된 정보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데요.

  • 박혁진

    6년이나 비서실에 계실 수 있었던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김용섭

    입이 무거운 겁니다. 저는 회장님의 자랑이 될 만한 얘기도 안 했어요. 한번은 회장님이 출장 가시면서 국방부 장관을 찾아가 어떤 문제를 부탁하라고 하셨어요. 장관이 바로 해결해줘서 답을 받아놨는데, 일주일 뒤 귀국하신 회장님께 보고드렸더니 "그거 담당 사장한테 얘기해 줬어?" 하세요. "안 했습니다" 했더니 "해주지 그랬어" 하시더라고요.

    저는 두 가지를 생각한 겁니다. 내가 그런 걸 사장한테 얘기하면 '이 친구가 장관 만났다고 폼 잡는다'고 들릴 수 있다. 그리고 회장님이 직접 말씀하시면 사장과 주고받을 얘기가 생긴다. 저는 말만 전할 뿐이니까요. 회장님이 그런 걸 아신 거죠. 사실 중앙정보부 과장이면 어디 가도 대접받는 자리인데, 여기 와서 매일 가방 들고 다니는 비서를 6년 했습니다.


오랜 기간 김우중 회장 곁을 지키던 김 사장은 정작 대우가 해체위기에 놓였을 때는 대우정보시스템에 있었다. 김 회장과는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셈이다. 그에게 ‘김우중 회장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 것 같냐?’고 물었더니, 당시 정치권과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미스가 있었다는 점을 아쉽다고 꼽았다. 그는 만약 그때 곁에 있었다면 ‘회장님, 대통령 믿으면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경제 관료들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됩니다’라고 얘기했을 것 같다는 소회를 털어놓았다.

  • 박혁진

    해체 이후에도 회장님을 뵀을 때, 회장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 김용섭

    이 얘기는 기억이 납니다. 회장님의 후회가 뭐였냐면, 그때 단기 외채 있잖습니까. 환율이 1,900원대까지 올라갔을 때 25% 이자를 주고 돈을 빌려서 그 환율로 빚을 갚았단 말이에요. 그걸 후회하셨어요. 못 갚겠다고 했어야 한다, 지금은 못 갚겠다, 우리가 안정되면 갚겠다고 교섭을 했어야 하는데 그걸 못 한 게 정말 한스럽다는 거죠. 은행 입장에서도 떼이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딜을 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김우중 회장은 그걸 그냥 다 갚아야 되는 줄 알고 하셨던 겁니다. 그 점에서 회장님은 너무 순진했고, 너무 양심적이었던 거죠. 그런데 정부에 대한 원망이라든가 대통령에 대한 얘기는, 할 만도 한데, 한마디도 안 하시더라고요.

  • 박혁진

    군인으로 17년을 사시다가 원치 않게 대우로 옮기셨습니다. 대우맨으로 산 20년에 대한 소회가 있으시다면요.

  • 김용섭

    해사 동기 중에 별을 단 친구가 14명입니다. 가끔 그 친구들을 만나면 생각하죠. 내가 해군에 있었으면 과연 별이라도 달았을까, 대우에 간 것이 좋았는가. 그런데 세상을 넓게 보고 넓게 활동했다는 점에서는 대우가 훨씬 낫습니다. 해군 총장보다 훨씬 낫게 살았어요. 대우에 와서 '참 더러운 팔자다'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잖냐, 어떤 면에서는 화려한 면도 있었고 더 좋았다 싶은 면도 있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터뷰 내내 김용섭 사장은 메모 한 장 없이 40여 년 전의 날짜와 숫자를 정확히 짚어냈다. 그는 "대우에 관해 제가 가진 자료는 (대우자동차 시장점유율) 대구 22%, 경북 27%가 적힌 두 페이지짜리 문서 하나뿐이고, 지금 얘기하는 건 전부 기억"이라고 했다. 그가 대우가 쓰러진 것이 너무 억울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대목에서, 20년 동안 김우중 회장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한 대우맨의 마음이 읽혔다.

"앞으로 천 년이 가도 대우 같은 회사는 안 나옵니다. 못 만들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남겨야 합니다."

  • * 구술인터뷰는 총 3시간 25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김용섭 KIM Yong-Sup

  • 1941

    출생, 해군사관학교

  • 1965

    대한민국 해군

  • 1967

    국제문제연구소(국정원), LA 한국총영사관, 워싱턴대사관

  • 1980

    대우 회장비서실

  • 1986

    대우 기획조정실 상무

  • 1990

    대우자동차판매 영업총괄 부사장

  • 1995

    대우 회장비서실 부사장

  • 1996

    대우인력개발원 원장 부사장

  • 1998

    대우정보시스템 대표이사 사장

  • 2001

    레코코리아(주) 회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9월 8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 룸
참석
김용섭 전 대우정보시스템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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