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구 전 대우건설 사장

‘원전 독점 현대 넘고, 카다피와 맞장 뜬 뚝심의 건설맨’

2026.07.15.

이정구 전 대우건설 사장

‘원전 독점 현대 넘고, 카다피와 맞장 뜬 뚝심의 건설맨’

2026.07.15.


이정구 전 대우건설 사장은 스스로를 ‘엔지니어’이자 ‘해결사’로 정의한다. 1960년대 한국전력 공채로 입사해 발전소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1970년대 대우실업으로 자리를 옮긴 뒤 대우그룹의 발전소 건설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써 내려간 산증인이다. 그의 이력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으로 점철돼 있다. 현대건설이 독점하던 국내 발전소 건설 시장에 맨손으로 뛰어들어 울산화력발전소를 지어냈고, 철옹성 같던 원자력 발전 시장을 뚫기 위해 미국 기계학회(ASME) 인증이라는 기상천외한 전략을 동원해 월성 원전 수주를 따냈다.

대우 해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는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를 직접 만나 10년 묵은 미수금 5억 달러를 받아내는 기염을 토하며 대우건설을 워크아웃에서 조기 졸업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카다피로부터 미수금을 받아내는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나 다름 없을만큼 극적이었다. “대우는 내 꿈을 실현하게 해 준 무대였다”고 회고하는 그에게서, 한국 플랜트 산업의 태동기와 대우의 치열했던 생존기를 들어봤다.

  • 박혁진

    한국전력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신생 기업 대우로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 이정구

    한전에서 9년 가까이 근무하며 발전소 운전과 건설을 두루 경험했습니다. 그러다 대우가 울산화력발전소 4, 5, 6호기 공사를 맡게 되면서, 김우중 회장이 급하게 엔지니어링 회사를 만들었어요. 당시 대우에는 발전소를 아는 사람이 전무했거든요. 제가 거기에 합류해 기획 업무를 맡게 됐습니다.

    당시 울산 화력 공사는 맨땅에 헤딩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대우중공업, 대우건설, 대우엔지니어링 3개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했는데 손발이 하나도 안 맞았죠. 기자재 공급사인 외국 회사(BBC; Brown, Boveri & Cie)가 ‘너희들 못 믿겠으니 돈만 내고 빠져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밤낮없이 매달려 공기를 맞췄고, 그 경험이 대우가 플랜트 사업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습니다.




  • 박혁진

    현대건설이 독점하던 원자력 발전소 시장을 뚫은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 같습니다.

  • 이정구

    당시 원전 건설은 현대건설 외에는 아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조 원이 넘는 시장을 뚫어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죠. 그래서 제가 묘수를 냈습니다. 미국기계학회(ASME)에서 주는 ‘원자력 시공 인증(Nuclear Stamp)’을 받기로 한 거죠. 다들 ‘입찰 조건에도 없는 걸 왜 하냐’고 비웃었지만, 장영수 사장을 설득해 밀어붙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현대보다 일주일 먼저 인증을 받았고, 나중에 발주처가 입찰 자격에 이 인증을 포함시키면서 판을 뒤집었죠.

    월성 원전 3, 4호기 수주 때는 더 극적이었습니다. 입찰 승인을 해줘야 할 경제부총리가 갑자기 사표를 낸다는 뉴스가 뜬 거예요. 그날이 마침 김우중 회장 아들(김선재) 1주기라 제가 안산 묘소까지 쫓아가서 회장님께 읍소해 전화를 돌리게 했고, 사표 수리 직전에 도장을 받아냈습니다. 그렇게 따낸 공사 덕분에 대우건설이 원전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 박혁진

    대우 사태 직후, 리비아 카다피 국가원수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으셨죠. 5억 달러 미수금은 어떻게 받아내셨습니까?

  • 이정구

    IMF 이후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니 당장 해외 공사 입찰 보증(Bid Bond)도 못 끊는 상황이었습니다. 꽉 막힌 자금줄을 풀려면 리비아에서 10년 넘게 못 받고 있는 돈 5억 달러를 받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죠. 김우중 회장님도 실패했던 일인데, 제가 직접 카다피를 만나겠다고 나섰습니다.

    현지 인맥을 총동원해 어렵게 카다피를 만났는데, 의외로 ‘나는 (주)대우에 빚이 있지 대우건설엔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모든 권리 의무를 승계했다는 서류를 내밀며 설득했고, 결국 24개월 분할 상환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때 그 돈이 들어오면서 대우건설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죠. 카다피와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국가원수 사진이라 함부로 공개도 못 하다가 허락받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냈던 기억이 납니다.




  • 박혁진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포탄이 떨어지는 현장을 지키며 ‘대우 신화’를 만드셨다고요.

  • 이정구

    1983년 이란 아와즈 발전소 공사 때였습니다. 전쟁 중이라 이라크 전투기가 수시로 폭격을 퍼부었어요. 다른 외국 회사들은 다 도망갔는데 우리는 남았습니다. 평소 민방위 훈련한 대로 공습경보가 울리면 질서 정연하게 대피하고, 끝나면 다시 일했죠. 이란 발주처 사람들이 그걸 보고 놀라더군요. ‘한국 사람들 대단하다’고요.

    결국 공사를 끝까지 마쳤고, 그 신뢰 덕분에 나중에 이란에서 다른 공사들을 수주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대림산업 현장에서는 인명 피해가 있었는데, 우리는 다행히 한 명도 안 다쳐서 천만다행이었죠.




  • 박혁진

    대우건설은 대우 해체와 함께 워크아웃에 들어갔지만 조기 졸업하고 업계 1위로 도약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 이정구

    가장 중요한 건 ‘사람’과 ‘기업 문화’였습니다.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게 만드는 데 주력했습니다. ‘우리는 기술이 있고 현장이 살아있다, 절대 안 망한다’고 독려했죠. 대우 특유의 ‘믿고 맡기는 문화’가 주효했습니다.

    대우는 열심히 뛰다가 실수를 하면 덮어주지만, 안 뛰고 요령 피우는 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 야성이 있었기에 삼성, 현대도 놀랄 만큼 직원들이 똘똘 뭉쳐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대우건설 출신들이 건설업계 곳곳에서 CEO로 활약하는 이유가 바로 그 ‘인재 사관학교’ 같은 문화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박혁진

    대우그룹 해체의 원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정구

    김우중 회장님은 돌파력이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성격대로 거침없이 밀고 나가셨죠. 그런데 우리 경영자들이 뒤에서 그걸 잘 정리하고, 때로는 말리고, 직언도 하면서 보조를 맞췄어야 했는데 그 부분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회장님의 앞서가는 마인드를 뒷받침할 참모들의 역할이 아쉬웠던 거죠.

    그룹이 해체됐을 때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시집간 딸이라도 친정집이 망하면 힘이 없는 법인데, 평생을 바친 회사가 그렇게 되니 허탈했죠. 그래도 대우건설이 살아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는 게 고맙습니다.




  • 박혁진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 이정구

    대우는 저에게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준 곳이었습니다. 아무나 느낄 수 없는 보람이었죠. 후배들에게도 직장이 단순히 돈 버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펼쳐볼 수 있는 꿈의 무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우가 가졌던 그 도전적인 기업 문화를 계속 이어가 주길 바랍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15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이정구 LEE Jung-Koo

  • 1943

    출생,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

  • 1965

    한국전력 입사

  • 1976

    대우엔지니어링 입사

  • 1981

    대우기공 이사

  • 1987

    대우모터 상무

  • 1990

    대우건설 플랜트사업본부장 부사장

  • 1998

    대우건설 해외영업총괄 사장

  • 2004

    대우건설 상임고문

  • 2006

    ㈜한양 회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9월 22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2층 라이브러리 
참석
이정구 전 대우건설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이정구 전 대우건설 사장은 스스로를 ‘엔지니어’이자 ‘해결사’로 정의한다. 1960년대 한국전력 공채로 입사해 발전소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1970년대 대우실업으로 자리를 옮긴 뒤 대우그룹의 발전소 건설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써 내려간 산증인이다. 그의 이력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으로 점철돼 있다. 현대건설이 독점하던 국내 발전소 건설 시장에 맨손으로 뛰어들어 울산화력발전소를 지어냈고, 철옹성 같던 원자력 발전 시장을 뚫기 위해 미국 기계학회(ASME) 인증이라는 기상천외한 전략을 동원해 월성 원전 수주를 따냈다.

대우 해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는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를 직접 만나 10년 묵은 미수금 5억 달러를 받아내는 기염을 토하며 대우건설을 워크아웃에서 조기 졸업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카다피로부터 미수금을 받아내는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나 다름 없을만큼 극적이었다. “대우는 내 꿈을 실현하게 해 준 무대였다”고 회고하는 그에게서, 한국 플랜트 산업의 태동기와 대우의 치열했던 생존기를 들어봤다.



  • 박혁진

    한국전력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신생 기업 대우로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 이정구

    한전에서 9년 가까이 근무하며 발전소 운전과 건설을 두루 경험했습니다. 그러다 대우가 울산화력발전소 4, 5, 6호기 공사를 맡게 되면서, 김우중 회장이 급하게 엔지니어링 회사를 만들었어요. 당시 대우에는 발전소를 아는 사람이 전무했거든요. 제가 거기에 합류해 기획 업무를 맡게 됐습니다.

    당시 울산 화력 공사는 맨땅에 헤딩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대우중공업, 대우건설, 대우엔지니어링 3개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했는데 손발이 하나도 안 맞았죠. 기자재 공급사인 외국 회사(BBC; Brown, Boveri & Cie)가 ‘너희들 못 믿겠으니 돈만 내고 빠져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밤낮없이 매달려 공기를 맞췄고, 그 경험이 대우가 플랜트 사업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습니다.



  • 박혁진

    현대건설이 독점하던 원자력 발전소 시장을 뚫은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 같습니다.

  • 이정구

    당시 원전 건설은 현대건설 외에는 아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조 원이 넘는 시장을 뚫어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죠. 그래서 제가 묘수를 냈습니다. 미국기계학회(ASME)에서 주는 ‘원자력 시공 인증(Nuclear Stamp)’을 받기로 한 거죠. 다들 ‘입찰 조건에도 없는 걸 왜 하냐’고 비웃었지만, 장영수 사장을 설득해 밀어붙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현대보다 일주일 먼저 인증을 받았고, 나중에 발주처가 입찰 자격에 이 인증을 포함시키면서 판을 뒤집었죠.

    월성 원전 3, 4호기 수주 때는 더 극적이었습니다. 입찰 승인을 해줘야 할 경제부총리가 갑자기 사표를 낸다는 뉴스가 뜬 거예요. 그날이 마침 김우중 회장 아들(김선재) 1주기라 제가 안산 묘소까지 쫓아가서 회장님께 읍소해 전화를 돌리게 했고, 사표 수리 직전에 도장을 받아냈습니다. 그렇게 따낸 공사 덕분에 대우건설이 원전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 박혁진

    대우 사태 직후, 리비아 카다피 국가원수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으셨죠. 5억 달러 미수금은 어떻게 받아내셨습니까?

  • 이정구

    IMF 이후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니 당장 해외 공사 입찰 보증(Bid Bond)도 못 끊는 상황이었습니다. 꽉 막힌 자금줄을 풀려면 리비아에서 10년 넘게 못 받고 있는 돈 5억 달러를 받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죠. 김우중 회장님도 실패했던 일인데, 제가 직접 카다피를 만나겠다고 나섰습니다.

    현지 인맥을 총동원해 어렵게 카다피를 만났는데, 의외로 ‘나는 (주)대우에 빚이 있지 대우건설엔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모든 권리 의무를 승계했다는 서류를 내밀며 설득했고, 결국 24개월 분할 상환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때 그 돈이 들어오면서 대우건설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죠. 카다피와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국가원수 사진이라 함부로 공개도 못 하다가 허락받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냈던 기억이 납니다.



  • 박혁진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포탄이 떨어지는 현장을 지키며 ‘대우 신화’를 만드셨다고요.

  • 이정구

    1983년 이란 아와즈 발전소 공사 때였습니다. 전쟁 중이라 이라크 전투기가 수시로 폭격을 퍼부었어요. 다른 외국 회사들은 다 도망갔는데 우리는 남았습니다. 평소 민방위 훈련한 대로 공습경보가 울리면 질서 정연하게 대피하고, 끝나면 다시 일했죠. 이란 발주처 사람들이 그걸 보고 놀라더군요. ‘한국 사람들 대단하다’고요.

    결국 공사를 끝까지 마쳤고, 그 신뢰 덕분에 나중에 이란에서 다른 공사들을 수주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대림산업 현장에서는 인명 피해가 있었는데, 우리는 다행히 한 명도 안 다쳐서 천만다행이었죠.



  • 박혁진

    대우건설은 대우 해체와 함께 워크아웃에 들어갔지만 조기 졸업하고 업계 1위로 도약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 이정구

    가장 중요한 건 ‘사람’과 ‘기업 문화’였습니다.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게 만드는 데 주력했습니다. ‘우리는 기술이 있고 현장이 살아있다, 절대 안 망한다’고 독려했죠. 대우 특유의 ‘믿고 맡기는 문화’가 주효했습니다.

    대우는 열심히 뛰다가 실수를 하면 덮어주지만, 안 뛰고 요령 피우는 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 야성이 있었기에 삼성, 현대도 놀랄 만큼 직원들이 똘똘 뭉쳐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대우건설 출신들이 건설업계 곳곳에서 CEO로 활약하는 이유가 바로 그 ‘인재 사관학교’ 같은 문화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박혁진

    대우그룹 해체의 원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정구

    김우중 회장님은 돌파력이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성격대로 거침없이 밀고 나가셨죠. 그런데 우리 경영자들이 뒤에서 그걸 잘 정리하고, 때로는 말리고, 직언도 하면서 보조를 맞췄어야 했는데 그 부분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회장님의 앞서가는 마인드를 뒷받침할 참모들의 역할이 아쉬웠던 거죠.

    그룹이 해체됐을 때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시집간 딸이라도 친정집이 망하면 힘이 없는 법인데, 평생을 바친 회사가 그렇게 되니 허탈했죠. 그래도 대우건설이 살아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는 게 고맙습니다.



  • 박혁진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 이정구

    대우는 저에게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준 곳이었습니다. 아무나 느낄 수 없는 보람이었죠. 후배들에게도 직장이 단순히 돈 버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펼쳐볼 수 있는 꿈의 무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우가 가졌던 그 도전적인 기업 문화를 계속 이어가 주길 바랍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15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이정구 LEE Jung-Koo

  • 1943

    출생,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

  • 1965

    한국전력 입사

  • 1976

    대우엔지니어링 입사

  • 1981

    대우기공 이사

  • 1987

    대우모터 상무

  • 1990

    대우건설 플랜트사업본부장 부사장

  • 1998

    대우건설 해외영업총괄 사장

  • 2004

    대우건설 상임고문

  • 2004

    ㈜한양 회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9월 22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2층 라이브러리
참석
이정구 전 대우건설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News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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