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균 전 대우조선 사장

“대우조선의 역사가 곧 한국방위사업의 역사”

2026.07.03.

신영균 전 대우조선 사장

“대우조선의 역사가 곧 한국방위사업의 역사”

2026.07.03.


신영균 전 대우조선 사장의 이력은 ‘조선’(造船)과는 거리가 멀었다. 1970년대 초반, 그는 한국은행에서 거시경제와 금융 정책을 다루던 정통 엘리트 행원이었다. 6~7년 차 행원이었던 그는 맨날 글이나 쓰는 일이 답답해 퇴사를 결심했고, 우연한 기회에 동양증권 사무실에 들렀다가 운명처럼 대우실업의 젊은 리더 김우중을 만났다. 면접은 단 1분 만에 끝났다. 김 회장은 그의 이력서를 ‘팔락팔락’ 넘겨보더니 대뜸 '너 우리 회사로 와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안정된 국책은행을 떠나 신생 기업 대우로 자리를 옮긴 그는 기획조정실을 거쳐 대우조선(현 한화오션)의 산증인이 되었다.

그가 대우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8년,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대우가 옥포조선소를 인수하면서부터다. 당시 옥포는 도크 하나 없는 허허벌판 백사장이었다. 그는 옥포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자금을 조달하고, 수주를 따내고, 노사 분규의 파도를 넘었다. 특히 그는 대우조선이 일본을 추월하고 세계 정상에 서는 과정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경쟁사들이 일본의 기술을 답습할 때, 과감한 설계 전산화를 도입해 기술 격차를 벌렸고, 잠수함 등 특수선 분야를 개척해 방위산업의 기틀을 다졌다.

IMF 외환위기 당시 환율 급등으로 장부상 부채가 폭등하는 상황에서도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회사를 지켜낸 '재무통 CEO'이자 '야전사령관', 신영균 전 사장을 만났다.

  • 박혁진

    한국은행이라는 최고의 직장을 그만두고 신생 기업 대우로 옮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우중 회장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 신영균

    한국은행 생활이 6~7년쯤 되니 답답하더군요. 글이나 쓰고 통계나 만지는 일이 적성에 안 맞았습니다. 나오겠다고 하니 다들 뜯어말렸죠. 우연히 점심시간에 동양증권(대우증권 전신)에 들렀다가, 거기 있던 지인이 ‘우리 회사에서 사원 모집하는데 와보라’고 해서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아직 공사 중이라 인테리어도 덜 된 건물이었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운데 김우중 회장이 앉아 계셨는데, 눈빛이 형형하더군요. 제 이력서를 보시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종이를 '팔락팔락' 넘기시더라고요. 그러더니 딱 덮고는 '너 우리 회사 와라. 대리로 와라' 하시는 겁니다 . '6개월만 있어 봐라' 하시면서요. 속으로 '내가 미쳤나, 여길 오게' 했는데, 월급이 은행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당시 은행 월급이 깎여서 분유 값 대기도 빠듯했거든요. 그래서 덜컥 대우맨이 됐죠.

  • 박혁진

    김우중 회장님은 직관이 뛰어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꼼꼼한 금융 전문가인 사장님과는 스타일이 많이 달랐을 텐데요.

  • 신영균

    회장님은 직관적이고 도전적이죠. 저는 실무자니까 계산을 해야 하고요. 한번은 회장님이 스위스 해운 회사와 선박 거래를 추진하시는데, 제가 계산해 보니 우리한테 손해가 나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보고를 드리러 갔더니 '그것도 계산 못 하냐'며 불같이 화를 내시더군요. 쫓겨나다시피 나왔는데, 나중에 표를 아주 간단하게 만들어서 다시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금방 이해하시고 '그럼 하지 마라'고 깔끔하게 접으시더라고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걸 알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바로 인정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는 제 숫자를 신뢰하셨습니다. 대우조선 사장으로 갈 때도 '자동차 때문에 바쁘니까 네가 알아서 다 해라. 보고 안 해도 된다'며 전권을 주셨죠. 그런 신뢰가 있었기에 소신껏 일할 수 있었습니다.




  • 박혁진

    옥포조선소 인수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 신영균

    1978년 여름이었죠. 정부가 대한조선공사가 짓다 만 옥포조선소를 대우보고 맡으라고 압박할 때였습니다. 우리 기조실에서는 '기술도 없고 돈도 너무 많이 들어서 힘들다'는 부정적인 보고서를 올렸는데, 김 회장님 뜻에 따라 '단, 정부가 지원해 주면 재고하겠다'는 단서 조항 하나를 달아서 냈어요. 그리고 나서 휴가를 갔는데, 라디오 뉴스에서 '대우가 옥포조선소를 인수한다'고 남덕우 부총리가 발표를 해버린 겁니다.

    곧바로 거제도로 내려갔는데, 말이 조선소지 그냥 끝이 안 보이는 모래사장뿐이었어요. 도크도 없고 골리앗 크레인도 없었죠. 배 짓는 기술은커녕 용어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전 찾아가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영국 엔지니어링 회사 '애플도어(A&P Appledore)'의 도움을 받아 도크를 파고 설비를 들여왔습니다. 그때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퇴로가 없으니 죽기 살기로 덤볐던 시절입니다.




  • 박혁진

    대우조선이 단기간에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당시 조선 최강국이던 일본을 따라잡은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 신영균

    우리는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일본을 따라 해서는 이길 수 없다고 봤습니다. 일본은 당시 베테랑 엔지니어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손으로 도면을 그리는 수작업(작도) 방식에 의존했어요. 반면 우리는 젊은 엔지니어들을 주축으로 과감하게 ‘설계 전산화(Digitalization)’를 밀어붙였습니다.

    거대한 모니터에 배의 구조를 띄우면 응력을 많이 받는 곳은 빨간색, 안전한 곳은 파란색으로 표시가 돼요. 그걸 보면서 구조를 최적화하는 거죠. 일본 기술자들이 '우리는 늙어서 컴퓨터 못 한다'고 손사래 칠 때, 우리는 디지털로 치고 나간 겁니다. 거기서 게임이 끝났어요.

    또 하나는 기업 문화의 차이입니다. 일본 조선소 미팅을 가보면 사장 혼자 떠들고 실무자들은 입도 뻥긋 못 해요. 하지만 대우는 달랐습니다. 회장님 앞이라도 실무자가 '그건 아닙니다'라고 직언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 개방적인 소통 문화가 기술 혁신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 박혁진

    대우조선은 상선뿐 아니라 잠수함 등 방산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 과정은 어땠나요?

  • 신영균

    잠수함 건조는 김우중 회장님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먼저 시작한 사업입니다. 독일 등에서 기술을 도입해 209급 잠수함을 우리가 처음으로 건조했죠. 잠수함의 생명은 '정숙성'입니다. 엔진 소음이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되거든요. 해군 관계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나중에 현대중공업이 방산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정숙성이나 마감 기술면에서는 대우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IMF 이후 그룹이 힘을 잃으면서 방산 수주전에서 억울한 일도 겪었습니다. 경쟁사가 로비를 통해 우리 투찰 가격 정보를 빼내 가서 덤핑으로 수주를 채가는 일도 있었죠. 그럼에도 기술력만큼은 대우가 압도적이었습니다. 대우조선의 기술이 곧 대한민국 해양 방위산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박혁진

    IMF 외환위기 당시 대우조선은 '분식회계'의 오명을 썼습니다. 당시 재무 출신 사장으로서 할 말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 신영균

    그건 정말 코미디 같은 일입니다. 당시 조선소는 배를 지으면 인도하기도 전에 정부가 수출 실적으로 잡으라고 독촉했습니다. 수출 통계를 올려야 하니까요. 정부가 시키는 대로 관행에 따랐는데, 나중에 회사가 어려워지니까 그걸 전부 '분식'이라며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겁니다.

    더 억울한 건 환율입니다. 우리는 산업은행에서 외화(달러) 자금을 빌려 설비를 지었는데, 환율이 800원에서 1,200원으로 뛰니까 가만히 있어도 빚이 1.5배로 불어나는 겁니다. 장부상으로는 막대한 적자 기업이 됐지만, 실제로는 수출 호조로 영업이익이 6천억 원이 넘게 났어요.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는데, 금융 비용과 환차손 때문에 부실 기업으로 낙인찍힌 거죠. 그때 정부가 금융 지원을 조금만 유연하게 해줬더라면 대우는 충분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 박혁진

    강성으로 유명한 대우조선 노조와도 신뢰 관계를 구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신영균

    제가 1995년 관리본부장으로 내려갔을 때, 노조가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더군요. 그들이 요구한 건 딱 하나였습니다. ‘그룹 비서실이나 노무팀이 개입하지 않게 해달라. 사장님이 직접 결정해 달라’는 것이었죠. 저는 ‘좋다. 대우조선의 일은 (윤원석) 사장에서 스톱이다. 대신 너희도 상급단체(민주노총) 지시가 아니라 회사 이익을 위해 움직여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니 노조도 달라졌습니다. 겉으로는 투쟁하는 척하며 머리띠를 매도, 뒤로는 '사장님, 이거 정치적인 쇼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사고 안 치겠습니다'라며 귀띔을 해줬죠. 회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갔을 때도 노조가 경영진을 믿고 힘을 실어줬기에 조기 졸업이 가능했습니다.




  • 박혁진

    마지막으로, 사장님께 '대우'는 어떤 의미입니까? 그리고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 신영균

    한국은행 시절의 저는 책상 앞에 앉아 글이나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우에 와서 '야성'을 배웠습니다.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들고, 맨땅에 헤딩하며 길을 뚫는 법을 배웠죠. 김우중 회장님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인 분입니다. 과오도 있지만, 한국 경제를 수출 주도형으로 바꾸고 중화학공업을 일으킨 공(功)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주체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결정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고독하더라도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주인이 되십시오. 그리고 시대의 흐름, 산업의 '시프트(Shift)'를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역과 중공업의 시대를 살았지만, 지금은 AI와 데이터의 시대입니다. 그 변화의 파도에 과감하게 올라타십시오. 그게 대우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입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20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신영균 SHIN Young-Gyun

  • 1944

    출생,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 1969

    한국은행 입사

  • 1975

    동양증권 입사

  • 1978

    대우실업 기획조정실

  • 1978

    대우조선공업 이사부장

  • 1988

    ㈜대우 선박금융 이사

  • 1993

    대우조선공업 상무

  • 1995

    대우중공업 조선해양부문 대표이사 사장

  • 1999

    대우중공업 조선부문 대표이사 사장

  • 2002

    동부한농화학 대표이사 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8월 18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신영균 전 대우조선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신영균 전 대우조선 사장의 이력은 ‘조선’(造船)과는 거리가 멀었다. 1970년대 초반, 그는 한국은행에서 거시경제와 금융 정책을 다루던 정통 엘리트 행원이었다. 6~7년 차 행원이었던 그는 맨날 글이나 쓰는 일이 답답해 퇴사를 결심했고, 우연한 기회에 동양증권 사무실에 들렀다가 운명처럼 대우실업의 젊은 리더 김우중을 만났다. 면접은 단 1분 만에 끝났다. 김 회장은 그의 이력서를 ‘팔락팔락’ 넘겨보더니 대뜸 '너 우리 회사로 와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안정된 국책은행을 떠나 신생 기업 대우로 자리를 옮긴 그는 기획조정실을 거쳐 대우조선(현 한화오션)의 산증인이 되었다.

그가 대우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8년,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대우가 옥포조선소를 인수하면서부터다. 당시 옥포는 도크 하나 없는 허허벌판 백사장이었다. 그는 옥포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자금을 조달하고, 수주를 따내고, 노사 분규의 파도를 넘었다. 특히 그는 대우조선이 일본을 추월하고 세계 정상에 서는 과정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경쟁사들이 일본의 기술을 답습할 때, 과감한 설계 전산화를 도입해 기술 격차를 벌렸고, 잠수함 등 특수선 분야를 개척해 방위산업의 기틀을 다졌다.

IMF 외환위기 당시 환율 급등으로 장부상 부채가 폭등하는 상황에서도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회사를 지켜낸 '재무통 CEO'이자 '야전사령관', 신영균 전 사장을 만났다.



  • 박혁진

    한국은행이라는 최고의 직장을 그만두고 신생 기업 대우로 옮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우중 회장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 신영균

    한국은행 생활이 6~7년쯤 되니 답답하더군요. 글이나 쓰고 통계나 만지는 일이 적성에 안 맞았습니다. 나오겠다고 하니 다들 뜯어말렸죠. 우연히 점심시간에 동양증권(대우증권 전신)에 들렀다가, 거기 있던 지인이 ‘우리 회사에서 사원 모집하는데 와보라’고 해서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아직 공사 중이라 인테리어도 덜 된 건물이었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운데 김우중 회장이 앉아 계셨는데, 눈빛이 형형하더군요. 제 이력서를 보시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종이를 '팔락팔락' 넘기시더라고요. 그러더니 딱 덮고는 '너 우리 회사 와라. 대리로 와라' 하시는 겁니다 . '6개월만 있어 봐라' 하시면서요. 속으로 '내가 미쳤나, 여길 오게' 했는데, 월급이 은행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당시 은행 월급이 깎여서 분유 값 대기도 빠듯했거든요. 그래서 덜컥 대우맨이 됐죠.

  • 박혁진

    김우중 회장님은 직관이 뛰어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꼼꼼한 금융 전문가인 사장님과는 스타일이 많이 달랐을 텐데요.

  • 신영균

    회장님은 직관적이고 도전적이죠. 저는 실무자니까 계산을 해야 하고요. 한번은 회장님이 스위스 해운 회사와 선박 거래를 추진하시는데, 제가 계산해 보니 우리한테 손해가 나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보고를 드리러 갔더니 '그것도 계산 못 하냐'며 불같이 화를 내시더군요. 쫓겨나다시피 나왔는데, 나중에 표를 아주 간단하게 만들어서 다시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금방 이해하시고 '그럼 하지 마라'고 깔끔하게 접으시더라고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걸 알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바로 인정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는 제 숫자를 신뢰하셨습니다. 대우조선 사장으로 갈 때도 '자동차 때문에 바쁘니까 네가 알아서 다 해라. 보고 안 해도 된다'며 전권을 주셨죠. 그런 신뢰가 있었기에 소신껏 일할 수 있었습니다.



  • 박혁진

    옥포조선소 인수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 신영균

    1978년 여름이었죠. 정부가 대한조선공사가 짓다 만 옥포조선소를 대우보고 맡으라고 압박할 때였습니다. 우리 기조실에서는 '기술도 없고 돈도 너무 많이 들어서 힘들다'는 부정적인 보고서를 올렸는데, 김 회장님 뜻에 따라 '단, 정부가 지원해 주면 재고하겠다'는 단서 조항 하나를 달아서 냈어요. 그리고 나서 휴가를 갔는데, 라디오 뉴스에서 '대우가 옥포조선소를 인수한다'고 남덕우 부총리가 발표를 해버린 겁니다.

    곧바로 거제도로 내려갔는데, 말이 조선소지 그냥 끝이 안 보이는 모래사장뿐이었어요. 도크도 없고 골리앗 크레인도 없었죠. 배 짓는 기술은커녕 용어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전 찾아가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영국 엔지니어링 회사 '애플도어(A&P Appledore)'의 도움을 받아 도크를 파고 설비를 들여왔습니다. 그때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퇴로가 없으니 죽기 살기로 덤볐던 시절입니다.



  • 박혁진

    대우조선이 단기간에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당시 조선 최강국이던 일본을 따라잡은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 신영균

    우리는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일본을 따라 해서는 이길 수 없다고 봤습니다. 일본은 당시 베테랑 엔지니어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손으로 도면을 그리는 수작업(작도) 방식에 의존했어요. 반면 우리는 젊은 엔지니어들을 주축으로 과감하게 ‘설계 전산화(Digitalization)’를 밀어붙였습니다.

    거대한 모니터에 배의 구조를 띄우면 응력을 많이 받는 곳은 빨간색, 안전한 곳은 파란색으로 표시가 돼요. 그걸 보면서 구조를 최적화하는 거죠. 일본 기술자들이 '우리는 늙어서 컴퓨터 못 한다'고 손사래 칠 때, 우리는 디지털로 치고 나간 겁니다. 거기서 게임이 끝났어요.

    또 하나는 기업 문화의 차이입니다. 일본 조선소 미팅을 가보면 사장 혼자 떠들고 실무자들은 입도 뻥긋 못 해요. 하지만 대우는 달랐습니다. 회장님 앞이라도 실무자가 '그건 아닙니다'라고 직언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 개방적인 소통 문화가 기술 혁신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 박혁진

    대우조선은 상선뿐 아니라 잠수함 등 방산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 과정은 어땠나요?

  • 신영균

    잠수함 건조는 김우중 회장님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먼저 시작한 사업입니다. 독일 등에서 기술을 도입해 209급 잠수함을 우리가 처음으로 건조했죠. 잠수함의 생명은 '정숙성'입니다. 엔진 소음이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되거든요. 해군 관계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나중에 현대중공업이 방산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정숙성이나 마감 기술면에서는 대우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IMF 이후 그룹이 힘을 잃으면서 방산 수주전에서 억울한 일도 겪었습니다. 경쟁사가 로비를 통해 우리 투찰 가격 정보를 빼내 가서 덤핑으로 수주를 채가는 일도 있었죠. 그럼에도 기술력만큼은 대우가 압도적이었습니다. 대우조선의 기술이 곧 대한민국 해양 방위산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박혁진

    IMF 외환위기 당시 대우조선은 '분식회계'의 오명을 썼습니다. 당시 재무 출신 사장으로서 할 말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 신영균

    그건 정말 코미디 같은 일입니다. 당시 조선소는 배를 지으면 인도하기도 전에 정부가 수출 실적으로 잡으라고 독촉했습니다. 수출 통계를 올려야 하니까요. 정부가 시키는 대로 관행에 따랐는데, 나중에 회사가 어려워지니까 그걸 전부 '분식'이라며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겁니다.

    더 억울한 건 환율입니다. 우리는 산업은행에서 외화(달러) 자금을 빌려 설비를 지었는데, 환율이 800원에서 1,200원으로 뛰니까 가만히 있어도 빚이 1.5배로 불어나는 겁니다. 장부상으로는 막대한 적자 기업이 됐지만, 실제로는 수출 호조로 영업이익이 6천억 원이 넘게 났어요.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는데, 금융 비용과 환차손 때문에 부실 기업으로 낙인찍힌 거죠. 그때 정부가 금융 지원을 조금만 유연하게 해줬더라면 대우는 충분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 박혁진

    강성으로 유명한 대우조선 노조와도 신뢰 관계를 구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신영균

    제가 1995년 관리본부장으로 내려갔을 때, 노조가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더군요. 그들이 요구한 건 딱 하나였습니다. ‘그룹 비서실이나 노무팀이 개입하지 않게 해달라. 사장님이 직접 결정해 달라’는 것이었죠. 저는 ‘좋다. 대우조선의 일은 (윤원석) 사장에서 스톱이다. 대신 너희도 상급단체(민주노총) 지시가 아니라 회사 이익을 위해 움직여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니 노조도 달라졌습니다. 겉으로는 투쟁하는 척하며 머리띠를 매도, 뒤로는 '사장님, 이거 정치적인 쇼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사고 안 치겠습니다'라며 귀띔을 해줬죠. 회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갔을 때도 노조가 경영진을 믿고 힘을 실어줬기에 조기 졸업이 가능했습니다.



  • 박혁진

    마지막으로, 사장님께 '대우'는 어떤 의미입니까? 그리고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 신영균

    한국은행 시절의 저는 책상 앞에 앉아 글이나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우에 와서 '야성'을 배웠습니다.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들고, 맨땅에 헤딩하며 길을 뚫는 법을 배웠죠. 김우중 회장님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인 분입니다. 과오도 있지만, 한국 경제를 수출 주도형으로 바꾸고 중화학공업을 일으킨 공(功)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주체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결정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고독하더라도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주인이 되십시오. 그리고 시대의 흐름, 산업의 '시프트(Shift)'를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역과 중공업의 시대를 살았지만, 지금은 AI와 데이터의 시대입니다. 그 변화의 파도에 과감하게 올라타십시오. 그게 대우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입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20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신영균 SHIN Young-Gyun

  • 1944

    출생,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 1969

    한국은행 입사

  • 1975

    동양증권 입사

  • 1978

    대우실업 기획조정실

  • 1978

    대우조선공업 이사부장

  • 1988

    ㈜대우 선박금융 이사

  • 1993

    대우조선공업 상무

  • 1995

    대우중공업 조선해양부문 대표이사 사장

  • 1999

    대우중공업 조선부문 대표이사 사장

  • 2002

    동부한농화학 대표이사 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8월 18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신영균 전 대우조선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News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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