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호석 전 대우중공업 사장

'불가능을 거래한 대우의 전략가'

2026.06.18.

추호석 전 대우중공업 사장

‘불가능을 거래한 대우의 전략가’

2026.06.18.


면접장에 헐렁한 ROTC 단복을 입고 나타난 스물셋 청년은 당돌했다. "병역 필한 자를 뽑는데 미필자가 여길 왜 왔냐"는 면접관의 핀잔에 청년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받아쳤다. “군대 가 있는 동안 월급 안 줄 테니 회사는 이득이고, 저는 제대 후 갈 직장 정해놓으니 좋고. 서로 좋은 거 아닙니까?” 당시 37세였던 청년 사업가 김우중 사장은 그 자리에서 "너 합격"을 외쳤다. "내일부터 당장 부산공장으로 출근해." 졸업도 안 한 대학생은 그렇게 대우맨이 되었다.

추호석(75). 그는 대우 신화의 가장 치열했던 순간마다 ‘해결사’로 호출되었던 인물이다. 1980년대 런던 금융시장에서 맨몸으로 석유 비즈니스를 개척했고, 전쟁 중인 이란의 테헤란, 쿠데타가 일어난 파키스탄, 그리고 살얼음판 같은 북한의 주석궁을 넘나들며 ‘대우식 세계경영’의 지도를 넓혔다. 대우가 해체된 지 25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그는 여전히 1982년 런던의 안개를, 리비아 사막의 모래바람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휘발유와 디젤의 성분을 빼곡히 적어 내려간 그의 낡은 노트처럼, 그의 기억은 화석처럼 단단했다.

  • 박혁진

    은행원을 꿈꾸던 청년이 신생 기업 대우를 택했습니다. 시작부터 남달랐더군요.

  • 추호석

    은행은 너무 정적이었어요. 역동적인 일을 하고 싶어 대우를 택했죠. 입사하자마자 부산공장으로 내려가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그때는 신입사원도 한 달에 하루 쉴까 말까 했어요. 그래도 불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수출해서 나라를 살린다’는 보람, 일종의 애국심 같은 게 우리를 지탱했거든요. 일요일에 쉬게 되니까 오히려 하루가 너무 길어서 뭘 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으니까요.

  • 박혁진

    1980년대 런던 지사 시절, 갑작스럽게 ‘석유 비즈니스’를 개척하라는 특명을 받으셨죠.

  • 추호석

    어느 날 회장님이 런던으로 오시더니 대뜸 “하던 일 다 인계하고 원유(Crude Oil) 비즈니스 전문가가 돼라”고 하셨어요. 실제 거래는 나중에 있을 테니 일단 공부해라 하시면서요. 서점에 가서 소설책부터 전문서적까지 닥치는 대로 사보고, 쉘(Shell) 출신 은퇴자를 가정교사로 모셔와 매일 4시간씩 과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공부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실전이 터졌습니다. 리비아 건설 대금으로 현금 대신 원유를 받게 된 거죠. 이게 골치 아픈 게, 예고도 없이 ‘배 띄웠으니 가져가라’는 식이에요. 제때 못 팔면 바다 위에 뜬 애물단지가 돼서 헐값에 넘겨야 했죠.




  • 박혁진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이 ‘앤트워프 정유공장 인수’건이군요. 10억 불 가치의 공장을 180만 불에 샀다는 게 사실입니까.

  • 추호석

    처음엔 저도 사기인 줄 알았습니다. 미국 석유회사 회장이 찾아와서 벨기에 앤트워프에 있는 정유공장(Universal Refining N.V.)을 사라고 하는데 400만 불을 불러요. 가보니 시설 가치만 10억 불은 돼 보이는데 말이죠. 알아보니 정제 마진이 적자라 돌릴수록 손해고, 문을 닫으려니 토양 오염 복구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어서 차라리 공짜로라도 넘기고 싶은 상황이었어요. 회장님께 보고했더니 직접 파리로 날아와 협상해서 400만 불 부르는 걸 180만 불에 샀습니다.

    더 놀라운 건 회장님이 공장을 가보지도 않고 계약금 10만 불을 그 자리에서 쏘셨다는 겁니다. 실무자인 저는 ‘그래도 공장은 보고 계약해야지’라며 걱정이 태산인데, 회장님 머릿속엔 다른 계산이 있었던 거죠. 그 계약서를 들고 바로 리비아로 날아가서 ‘우리 정유공장 샀으니 원유 더 줘’하고 베팅을 하신 겁니다.

  • 박혁진

    결국 그 공장이 대우의 ‘캐시카우’가 된 거 아닌가요?

  • 추호석

    그 공장 덕분에 우리는 원유가 언제 들어오든 탱크에 저장해뒀다가 비쌀 때 팔 수 있는 ‘버퍼’(Buffer)를 갖게 됐습니다. 당시 유가는 계속 떨어지는 추세였는데, 리비아와는 ‘넷 백 포뮬라(Net Back Formula)’라고, 정제 후 제품 가격에서 비용을 뺀 나머지를 원유가로 쳐주는 복잡한 방식으로 계약했어요. 이게 우리한테 유리하게 작용했죠.

    나중에는 우리가 하루에 35만 배럴까지 핸들링했습니다. 웬만한 산유국 생산량과 맞먹는 수준이었죠. 진짜 겁 없이 했습니다. 이후 원유 비즈니스는 이란, 앙골라, 나이지리아, 쿠바로 뻗어갔습니다. 한국의 작은 무역회사가 글로벌 오일 트레이더가 된 겁니다.



물론 그에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아찔했던 순간도 털어놓았다. 리비아에서 '부아티펠(Bu Attifel)'이라는 특수 원유를 강제로 떠안게 된 적이 있었다. 응고점이 높아 가열 장치가 없는 배에는 실을 수도 없는 까다로운 원유였다.

“회장님은 무조건 팔아보라고 하고, 사겠다는 사람은 없고... 그때 마침 영국 걸프오일에서 그 원유를 급하게 찾는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가 가진 다른 원유와 맞교환(Swap)하면서 큰 이익을 남겼죠. 실력도 중요하지만, 비즈니스에는 천운도 따라야 합니다.”

  • 박혁진

    회장님의 비서실장(첫 업무비서)으로서, 전 세계를 다니며 숱한 난제들을 해결하셨습니다. 파키스탄 정권 교체 때의 일화를 들려주시죠.

  • 추호석

    1989년 파키스탄 정권이 바뀌면서 진행하던 고속도로 공사와 택시 수출 계약이 전면 취소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회장님이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해결하라’고 하시더군요.

    아무도 손을 못 쓸 때, 제가 런던 시절 알았던 인맥을 떠올렸어요. 옥스퍼드 출신의 영국 국회의원 친구(알란 덩컨)가 예전에 ‘내 동기 중에 베나지르 부토라고 있는데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거다’라고 했던 게 기억났죠. 바로 그 친구에게 연락해 파키스탄 총리가 된 부토 부부와의 만남을 주선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파키스탄 사업은 다 풀렸죠. 비즈니스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겁니다.




  • 박혁진

    1990년대 초반, 대북 사업의 최전선에도 계셨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사진도 찍으셨다고요.

  • 추호석

    1992년부터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남쪽 인사들은 보통 큰절을 하거나 깍듯이 대하는데 우리는 당당하게 서서 악수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중에 안내원이 그 사진을 코팅해 주면서 ‘공화국 안에서는 이 사진만 있으면 아무도 검문 못 한다’고 하더군요. 일종의 암행어사 마패였죠.

  • 박혁진

    당시 북한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나요?

  • 추호석

    정치적 상황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북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았을 겁니다. 마지막 방북 때였는데, 북한 보위부 책임자가 협상이 잘 안 되니까 저를 구석으로 끌고 가더니 협박을 해요. ‘추 동무, 집에 가고 싶지 않아? 대남 방송에 추 아무개가 의거 월북했다고 때리면 당신은 끝이야. 죽을 때까지 못 가’라고요.

    그때 제가 생전 처음으로 쌍욕을 했습니다. ‘야 이 XXX야,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겁을 주냐. 내가 여기 놀러 왔냐’고 소리를 질렀죠. 그랬더니 오히려 꼬리를 내리더라고요. 그들은 강하게 나가면 약해집니다. 그게 마지막 방북이 됐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 박혁진

    대우중공업 사장 시절, 강성 노조와 직접 부딪히셨습니다. 무역통이 중공업을 맡아 걱정이 많았을 텐데요.

  • 추호석

    제가 갔을 때 노사 관계가 최악이었습니다. 빨간 머리띠 두른 노조원들이 본관을 점거하고 있었죠. 취임 다음 날, 예고도 없이 노조 사무실을 찾아갔어요. 임원들이 전례가 없다며 말렸지만 ‘사장이 직원 만나는 게 무슨 문제냐’고 했죠. 노조 간부들과 커피 마시며 이야기하니 그들도 놀라더군요.

    회장님이 저를 중공업에 보낸 건 단순히 물건을 팔라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으라는 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항공우주(KAI)와 철도차량 부문을 분리·통합하며 구조조정의 기틀을 닦았던 것이 훗날 회사가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봅니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대우 해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대우가 해체된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석연치 않다’면서도 ‘우리가 조금 더 내실을 다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고 담담히 말했다.

  • 박혁진

    대우는 해체되었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십니까?

  • 추호석

    얼마 전 고창에 갔더니 시골 식당 주인이 김우중 회장님을 존경한다며 술을 권하더군요. 이유를 물으니 “남들 안 하는 거 해낸 분 아니냐. 러시아, 베트남, 아프리카... 대우가 길 닦아놔서 지금 우리가 먹고사는 거다”라고 합디다. 그 식당 주인 말이 정답입니다.

    대우의 정신은 단연코 ‘도전(Challenge)’입니다. 우리는 아프리카 오지, 전쟁 중인 이란, 미수교국이던 동유럽까지 남들이 가지 않는 곳만 골라 다녔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야성(野性), 그리고 내 비즈니스가 국가에 도움이 된다는 희생정신. 대우가 사라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그런 기백이 약해진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 박혁진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추호석

    요즘 젊은 친구들이 너무 안정적인 길만 찾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여전히 많습니다. 우리가 닦아놓은 길 위에 더 넓은 고속도로를 깔아주길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저지르세요. 그게 대우가 남긴 유산입니다.



인터뷰 내내 그의 손에는 1982년 런던에서 썼다는 낡은 노트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휘발유와 디젤의 성분, 리비아 원유의 특성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청년 추호석의 땀방울이자, 세계를 무대로 뛰었던 대우의 항해일지였다.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살 수 있겠냐고요? 허허, 아마 힘들걸요. 잠도 못 자고 전 세계를 떠돌았으니...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원 없이 뛰었으니까요."

대우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흩어졌지만, 그들이 남긴 발자국은 여전히 한국 경제의 영토를 넓히는 이정표로 남아 있다. 추호석, 그는 여전히 그 길 위에 서 있는 영원한 ‘해결사’이자 ‘프런티어’였다.

  •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35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추호석 CHU Ho-Suk

  • 1950

    출생,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 1975

    대우실업 런던지사, 브뤼셀지사

  • 1988

    대우기획조정실(비서실) 부장

  • 1990

    대우기획조정실 상무

  • 1995

    ㈜대우 무역부문 전무

  • 1995

    대우중공업 종합기계 사장

  • 2001

    코리아와이즈넛 대표이사 사장

  • 2004

    파라다이스 대표이사 사장, 부회장('10)

  • 2013

    대우학원 이사장

  • 2023

    대우의료재단 이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8월 11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추호석 전 대우중공업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면접장에 헐렁한 ROTC 단복을 입고 나타난 스물셋 청년은 당돌했다. "병역 필한 자를 뽑는데 미필자가 여길 왜 왔냐"는 면접관의 핀잔에 청년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받아쳤다. “군대 가 있는 동안 월급 안 줄 테니 회사는 이득이고, 저는 제대 후 갈 직장 정해놓으니 좋고. 서로 좋은 거 아닙니까?” 당시 37세였던 청년 사업가 김우중 사장은 그 자리에서 "너 합격"을 외쳤다. "내일부터 당장 부산공장으로 출근해." 졸업도 안 한 대학생은 그렇게 대우맨이 되었다.

추호석(75). 그는 대우 신화의 가장 치열했던 순간마다 ‘해결사’로 호출되었던 인물이다. 1980년대 런던 금융시장에서 맨몸으로 석유 비즈니스를 개척했고, 전쟁 중인 이란의 테헤란, 쿠데타가 일어난 파키스탄, 그리고 살얼음판 같은 북한의 주석궁을 넘나들며 ‘대우식 세계경영’의 지도를 넓혔다. 대우가 해체된 지 25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그는 여전히 1982년 런던의 안개를, 리비아 사막의 모래바람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휘발유와 디젤의 성분을 빼곡히 적어 내려간 그의 낡은 노트처럼, 그의 기억은 화석처럼 단단했다.



  • 박혁진

    은행원을 꿈꾸던 청년이 신생 기업 대우를 택했습니다. 시작부터 남달랐더군요.

  • 추호석

    은행은 너무 정적이었어요. 역동적인 일을 하고 싶어 대우를 택했죠. 입사하자마자 부산공장으로 내려가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그때는 신입사원도 한 달에 하루 쉴까 말까 했어요. 그래도 불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수출해서 나라를 살린다’는 보람, 일종의 애국심 같은 게 우리를 지탱했거든요. 일요일에 쉬게 되니까 오히려 하루가 너무 길어서 뭘 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으니까요.

  • 박혁진

    1980년대 런던 지사 시절, 갑작스럽게 ‘석유 비즈니스’를 개척하라는 특명을 받으셨죠.

  • 추호석

    어느 날 회장님이 런던으로 오시더니 대뜸 “하던 일 다 인계하고 원유(Crude Oil) 비즈니스 전문가가 돼라”고 하셨어요. 실제 거래는 나중에 있을 테니 일단 공부해라 하시면서요. 서점에 가서 소설책부터 전문서적까지 닥치는 대로 사보고, 쉘(Shell) 출신 은퇴자를 가정교사로 모셔와 매일 4시간씩 과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공부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실전이 터졌습니다. 리비아 건설 대금으로 현금 대신 원유를 받게 된 거죠. 이게 골치 아픈 게, 예고도 없이 ‘배 띄웠으니 가져가라’는 식이에요. 제때 못 팔면 바다 위에 뜬 애물단지가 돼서 헐값에 넘겨야 했죠.



  • 박혁진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이 ‘앤트워프 정유공장 인수’건이군요. 10억 불 가치의 공장을 180만 불에 샀다는 게 사실입니까.

  • 추호석

    처음엔 저도 사기인 줄 알았습니다. 미국 석유회사 회장이 찾아와서 벨기에 앤트워프에 있는 정유공장(Universal Refining N.V.)을 사라고 하는데 400만 불을 불러요. 가보니 시설 가치만 10억 불은 돼 보이는데 말이죠. 알아보니 정제 마진이 적자라 돌릴수록 손해고, 문을 닫으려니 토양 오염 복구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어서 차라리 공짜로라도 넘기고 싶은 상황이었어요. 회장님께 보고했더니 직접 파리로 날아와 협상해서 400만 불 부르는 걸 180만 불에 샀습니다.

    더 놀라운 건 회장님이 공장을 가보지도 않고 계약금 10만 불을 그 자리에서 쏘셨다는 겁니다. 실무자인 저는 ‘그래도 공장은 보고 계약해야지’라며 걱정이 태산인데, 회장님 머릿속엔 다른 계산이 있었던 거죠. 그 계약서를 들고 바로 리비아로 날아가서 ‘우리 정유공장 샀으니 원유 더 줘’하고 베팅을 하신 겁니다.

  • 박혁진

    결국 그 공장이 대우의 ‘캐시카우’가 된 거 아닌가요?

  • 추호석

    그 공장 덕분에 우리는 원유가 언제 들어오든 탱크에 저장해뒀다가 비쌀 때 팔 수 있는 ‘버퍼’(Buffer)를 갖게 됐습니다. 당시 유가는 계속 떨어지는 추세였는데, 리비아와는 ‘넷 백 포뮬라(Net Back Formula)’라고, 정제 후 제품 가격에서 비용을 뺀 나머지를 원유가로 쳐주는 복잡한 방식으로 계약했어요. 이게 우리한테 유리하게 작용했죠.

    나중에는 우리가 하루에 35만 배럴까지 핸들링했습니다. 웬만한 산유국 생산량과 맞먹는 수준이었죠. 진짜 겁 없이 했습니다. 이후 원유 비즈니스는 이란, 앙골라, 나이지리아, 쿠바로 뻗어갔습니다. 한국의 작은 무역회사가 글로벌 오일 트레이더가 된 겁니다.



물론 그에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아찔했던 순간도 털어놓았다. 리비아에서 '부아티펠(Bu Attifel)'이라는 특수 원유를 강제로 떠안게 된 적이 있었다. 응고점이 높아 가열 장치가 없는 배에는 실을 수도 없는 까다로운 원유였다.

“회장님은 무조건 팔아보라고 하고, 사겠다는 사람은 없고... 그때 마침 영국 걸프오일에서 그 원유를 급하게 찾는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가 가진 다른 원유와 맞교환(Swap)하면서 큰 이익을 남겼죠. 실력도 중요하지만, 비즈니스에는 천운도 따라야 합니다.”
  • 박혁진

    회장님의 비서실장(첫 업무비서)으로서, 전 세계를 다니며 숱한 난제들을 해결하셨습니다. 파키스탄 정권 교체 때의 일화를 들려주시죠.

  • 추호석

    1989년 파키스탄 정권이 바뀌면서 진행하던 고속도로 공사와 택시 수출 계약이 전면 취소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회장님이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해결하라’고 하시더군요.

    아무도 손을 못 쓸 때, 제가 런던 시절 알았던 인맥을 떠올렸어요. 옥스퍼드 출신의 영국 국회의원 친구(알란 덩컨)가 예전에 ‘내 동기 중에 베나지르 부토라고 있는데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거다’라고 했던 게 기억났죠. 바로 그 친구에게 연락해 파키스탄 총리가 된 부토 부부와의 만남을 주선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파키스탄 사업은 다 풀렸죠. 비즈니스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겁니다.



  • 박혁진

    1990년대 초반, 대북 사업의 최전선에도 계셨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사진도 찍으셨다고요.

  • 추호석

    1992년부터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남쪽 인사들은 보통 큰절을 하거나 깍듯이 대하는데 우리는 당당하게 서서 악수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중에 안내원이 그 사진을 코팅해 주면서 ‘공화국 안에서는 이 사진만 있으면 아무도 검문 못 한다’고 하더군요. 일종의 암행어사 마패였죠.

  • 박혁진

    당시 북한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나요?

  • 추호석

    정치적 상황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북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았을 겁니다. 마지막 방북 때였는데, 북한 보위부 책임자가 협상이 잘 안 되니까 저를 구석으로 끌고 가더니 협박을 해요. ‘추 동무, 집에 가고 싶지 않아? 대남 방송에 추 아무개가 의거 월북했다고 때리면 당신은 끝이야. 죽을 때까지 못 가’라고요.

    그때 제가 생전 처음으로 쌍욕을 했습니다. ‘야 이 XXX야,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겁을 주냐. 내가 여기 놀러 왔냐’고 소리를 질렀죠. 그랬더니 오히려 꼬리를 내리더라고요. 그들은 강하게 나가면 약해집니다. 그게 마지막 방북이 됐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 박혁진

    대우중공업 사장 시절, 강성 노조와 직접 부딪히셨습니다. 무역통이 중공업을 맡아 걱정이 많았을 텐데요.

  • 추호석

    제가 갔을 때 노사 관계가 최악이었습니다. 빨간 머리띠 두른 노조원들이 본관을 점거하고 있었죠. 취임 다음 날, 예고도 없이 노조 사무실을 찾아갔어요. 임원들이 전례가 없다며 말렸지만 ‘사장이 직원 만나는 게 무슨 문제냐’고 했죠. 노조 간부들과 커피 마시며 이야기하니 그들도 놀라더군요.

    회장님이 저를 중공업에 보낸 건 단순히 물건을 팔라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으라는 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항공우주(KAI)와 철도차량 부문을 분리·통합하며 구조조정의 기틀을 닦았던 것이 훗날 회사가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봅니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대우 해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대우가 해체된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석연치 않다’면서도 ‘우리가 조금 더 내실을 다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고 담담히 말했다.

  • 박혁진

    대우는 해체되었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십니까?

  • 추호석

    얼마 전 고창에 갔더니 시골 식당 주인이 김우중 회장님을 존경한다며 술을 권하더군요. 이유를 물으니 “남들 안 하는 거 해낸 분 아니냐. 러시아, 베트남, 아프리카... 대우가 길 닦아놔서 지금 우리가 먹고사는 거다”라고 합디다. 그 식당 주인 말이 정답입니다.

    대우의 정신은 단연코 ‘도전(Challenge)’입니다. 우리는 아프리카 오지, 전쟁 중인 이란, 미수교국이던 동유럽까지 남들이 가지 않는 곳만 골라 다녔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야성(野性), 그리고 내 비즈니스가 국가에 도움이 된다는 희생정신. 대우가 사라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그런 기백이 약해진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 박혁진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추호석

    요즘 젊은 친구들이 너무 안정적인 길만 찾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여전히 많습니다. 우리가 닦아놓은 길 위에 더 넓은 고속도로를 깔아주길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저지르세요. 그게 대우가 남긴 유산입니다.


인터뷰 내내 그의 손에는 1982년 런던에서 썼다는 낡은 노트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휘발유와 디젤의 성분, 리비아 원유의 특성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청년 추호석의 땀방울이자, 세계를 무대로 뛰었던 대우의 항해일지였다.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살 수 있겠냐고요? 허허, 아마 힘들걸요. 잠도 못 자고 전 세계를 떠돌았으니...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원 없이 뛰었으니까요."

대우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흩어졌지만, 그들이 남긴 발자국은 여전히 한국 경제의 영토를 넓히는 이정표로 남아 있다. 추호석, 그는 여전히 그 길 위에 서 있는 영원한 ‘해결사’이자 ‘프런티어’였다.

  •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35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추호석 CHU Ho-Suk

  • 1950

    출생,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 1975

    대우실업 런던지사, 브뤼셀지사

  • 1988

    대우기획조정실(비서실) 부장

  • 1990

    대우기획조정실 상무

  • 1995

    ㈜대우 무역부문 전무

  • 1995

    대우중공업 종합기계 사장

  • 2001

    코리아와이즈넛 대표이사 사장

  • 2004

    파라다이스 대표이사 사장, 부회장('10)

  • 2013

    대우학원 이사장

  • 2023

    대우의료재단 이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8월 11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추호석 전 대우중공업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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