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범 전 대우통신 사장

'본격 종합상사로서 그림을 그린 30년 대우맨'

2026.06.10.

유기범 전 대우통신 사장

'본격 종합상사로서 그림을 그린 30년 대우맨'

2026.06.10.


1970년대 초 시카고. 그는 시어스 로벅(Sears, Roebuck) 본사로 들어가 캔모어(Kenmore) 세탁기 다섯 대를 주문했다. 미국 동남아 의류 수출의 품질 기준이 “다섯 번 빨아 주름이 어느 정도 잡히는가”였고, 그것을 측정하려면 같은 세탁기와 비교 사진만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일본 나고야의 봉제 업자한테서 얻어들은 직후였다. 부산공장에 그 다섯 대를 들이자 동남아의 어떤 한국 봉제 회사도 가지지 못한 품질관리 체계가 만들어졌다. 그 한 수로 대우는 임포터를 거치지 않고 시어스, 제이씨페니(JCPenney), 몽고메리 워드(Montgomery Ward) 같은 미국 대형 체인스토어에 직거래의 문을 열었다. 임포터를 거치던 시절 한 벌에 6달러 받던 셔츠를 7.5달러에 팔게 되었다. 유기범 전 대우통신 사장의 이야기다.

그 직거래의 문을 연 사람은 한일은행에서 1년 남짓 일하다가 “답답하다”며 직장을 옮긴 스물 몇 살의 행정학과 출신 청년이었다. 1968년의 일이다. 김우중 회장이 그를 면접해 보더니 “언제부터 올 수 있어”라고 물었고, 2~3일 뒤 출근한 그에게 회장은 “경리하면 어때”라고 했다. 숫자 다루는 일은 안 좋아한다고 솔직히 답하자 회장은 “알았어” 한 마디로 그를 수출입 실무로 보냈다.

뉴욕을 거쳐 1974년 다시 귀국했을 때 대우는 더 이상 봉제 회사가 아니었다. 회장은 그에게 5개년 계획 발표를 시켰고, 이는 본격적인 대우종합상사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화공제품본부장으로 신발(마산자유무역지역의 일본계 공장 인수)·철강·비료 같은 새 품목을 시작했다. 그는 종합상사가 되면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봤다. 대리에서 과장으로 올라가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 시험과 법률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룰을 승진 조건에 박았다. “어느 나라에 가서든 거기서 법인 하나 만들고 사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사람을 중시했던 그는 4000억 매출의 대우통신을 1조 매출 회사로 끌어올렸으나, 얼마 후 대우는 해체됐다. 이후에도 대우에서 일했단 이유만으로 적지 않은 고생을 했던 그는 “그것도 경험”이라며 “나야 잘 산 거지”라고 말했다.

  • 박혁진

    한일은행을 한 달여 만에 그만두고 대우로 옮기셨습니다. 어떤 계기였습니까.

  • 유기범

    68년 9월에 군 제대를 했어요. 그때 은행이나 일부 기업이 시험으로 사람을 뽑던 시절이라 일신제강 같은 데도 봤고 은행도 봤죠. 은행이 신용 있고 보너스도 많이 준다더라고요. 들어가 보니 일도 바쁘고, 선배들 보니 지점장 하고 나서는 중역 안 되면 검사역 정도로 끝나는 게 뻔하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한 친구가 “대우라고 조그만 회사가 있는데 사람을 늘 뽑는다, 가보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무역 회사라니까 앞으로 세계로도 나가고 재미있지 않겠나 싶어서 그냥 가봤죠.

  • 박혁진

    김우중 회장이 직접 면접을 보셨다고요.

  • 유기범

    동영빌딩 5층인가에 있었는데 가보니까 직원이 17명쯤이었어요. 김 회장이 한 번 쭉 보더니 “언제부터 올 수 있어” 그러시더라고요. 며칠 뒤 출근했더니 또 보시더니 “경리하면 어때?”라고 하셔요. 저는 숫자 다루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솔직히 말씀드렸죠. 인터뷰 온 놈이 뭐가 그렇게 싫고 좋고가 있냐 싶으셨겠지만 “알았어”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며칠 창가에 앉아 있다가 가장 기초적인 일, 신용장 받아 은행에서 돈 찾아오는 업무부터 시작했어요.




  • 박혁진

    그때 대우 현지 지사 설립이 한국 무역사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는데, 그 배경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 유기범

    홍콩에 원단을 보내면 인도네시아로 재수출하는 형태였는데, 홍콩 사람들이 트집을 잡아 부도를 내는 일이 잦았어요. 그런 걸 빨리 해결할 사람이 현지에 있어야겠다고 봐서 회장님이 윤영석 회장을 싱가포르에 보내신 거예요.

    주력 제품이 원단에서 봉제로 옮겨가면서 71년에 미국 시장을 뚫기 위해 출장을 갔는데, 회장님은 수입 쿼터 정보를 입수하시고는 벌써 다음 단계를 생각하시더라고요. 싱가포르 어느 회사 대리점에 있던 인도인 직원 하나를 데려다 뉴욕에 법인을 만드시는 거예요. 회장님은 그렇게 한두 단계 앞을 미리 보시는 분이었습니다.




  • 박혁진

    미국 대형체인점 직거래를 트신 게 결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 유기범

    시어스는 일본 나고야의 봉제 업자와 쭉 거래해왔는데, 더 이상 값이 안 맞으니까 그 업체가 우리한테 재하청을 한 거예요. 그래서 나고야로 직접 찾아갔더니 검사 노하우를 알려준 거예요. 별게 아니더라고요. 캔모어 세탁기 다섯 대 사오고, 주름 비교 사진만 있으면 되는 거였어요. 그걸 부산공장에 들여놓으니 동남아에서 이런 품질 관리 하는 데가 우리 밖에 없었어요. 이게 업계에 소문이 났죠. 신뢰도도 올라가고.

    그러니까 시어스도, 그걸 보고 온 제이씨페니·몽고메리도 ‘이제 직거래해도 되겠다’한 거죠. 임포터를 거치면 한 벌 6달러 받던 게, 직거래하면서 7.5달러까지 받게 됐어요. 그 무렵 트라이아세테이트라는 일본산 새 원사를 미국에서 발견해 회장님께 전화드렸더니 회장님이 일본 쪽 수입 독점을 따버리셨어요. 보통 한 다스에 6달러짜리 셔츠가 14달러가 됐죠.

  • 박혁진

    1974년에 귀국하시고 종합상사 시대를 여는 한복판에 계셨습니다.

  • 유기범

    들어와 보니 제일은행장 하던 분을 회장으로 모셔놨더라고요. 회사 폼이 잡혀가던 거죠. 회장님이 차장인 저보고 5개년 계획을 만들어 발표하라고 하셔서 ‘5년 뒤 수출 1억 달러’라고 적었는데, 그게 나중에 거의 맞아떨어졌어요. 중화공제품본부장을 하면서는 철강·비료 쪽도 시작했어요.




  • 박혁진

    무역 부문 사장 시절에 ‘비전 2000’과 함께 ‘홀딩 컴퍼니로 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 유기범

    상사라는 게 거래 복덕방이거든요. 1억 달러짜리 거래 해봐야 1% 떼면 100만 달러예요. 거래액은 커도 부가가치는 못 내요. 그래서 종합상사는 자회사를 많이 거느린 홀딩컴퍼니(지주회사)로 가야 한다고 봤죠. 일본 상사들이 결국 그걸 못 해서 큰돈을 못 번 거고요. 홀딩컴퍼니로 가려면 사람을 키워야 해요. 대리에서 과장으로 가려면 영어 토익 일정 점수, 법률 지식 일정 수준—이런 걸 승진 조건에 박았어요. 좀 반발이 있었지만 밀어붙였죠.

    거래라는 게 결국 법률 행위거든요. 법이라는 게 어느 나라나 민법 있고 상법 있고 비슷해요. 영어와 법률 콘셉트만 있으면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대우 우즈베키스탄’ 만들어서 거기 사장 하고, 교환기 공장 차리고, 그걸 팔아먹을 수 있단 말이에요. 상무가 됐든 전무가 됐든 똑같이 현장 가서 실적이나 따 오는 건 인재를 키우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회장이 2년마다 바뀌는 회사 구조에선 잘 안 돼요. 룰을 만들어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박혁진

    대우통신 사장 시절에 4,000억 회사를 1조 매출로 키우셨습니다.

  • 유기범

    솔직히 통신으로 가라고 했을 때 그만뒀어야 했어요. 지금도 후회해요. 그런데 가서 보니 또 뭘 안 만들면 직성이 안 풀려서요. 내비게이션 사업을 그때 시작했어요. 미국에 직원을 보내서 GPS 받아왔는데 그때는 10미터까지밖에 풀어주지 않아서 한국 골목길에는 좀 부정확했죠.

    교환기는 그동안 삼성·LG·대우·한화 네 회사가 나눠 먹던 시장인데, 어느 날 LG와 삼성이 둘이 연합해서 대우와 한화를 빼버리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미국 가서 퇴직한 엔지니어 한 분을 찾아 우리 직원 셋 붙여 대용량 교환기를 단독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쪽에서 로비가 들어와 회장님께도 얘기가 갔지만, 회장님이 ‘네 거니까 좋을 대로 해’ 그러시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우즈베키스탄·우크라이나에도 교환기 공장을 세웠어요. 우크라이나 총리가 나중에 대통령이 됐는데, 그 사람들이 나라보다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회장님은 어디 가시려면 ‘건(件)’이 있어야 하니까 그런 걸 미리 만들어 드리는 것도 제 일이었죠. 세진컴퓨터에 외상으로 많이 줬다가 그건 손해를 크게 봤어요. 그것 때문에 회장님이 말씀은 안 하셔도 속으로는 ‘저 자식’ 하셨을 거예요.




  • 박혁진

    대우그룹 해체기에 약 70일을 수감하셨습니다. 지금 돌아보시면 어떻습니까.

  • 유기범

    그 당시에 매출 1조 이상 다섯 개 사장만 골라낸 거예요. 통신이 1조가 되면서 거기 걸려든 거죠. 그 전이라면 빠졌을 거고요. 분식회계라는 게, 그건 다른 회사도 다 그랬어요.

    다만 현대나 삼성은 IMF 초기에 그걸 어느 정도 커버했고, 우리는 회장님이 자동차에 모든 걸 거시면서 해외 투자에만 매달려서 내부 정리할 여력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다 탄로가 난 거죠. 그건 회사가 그렇게 클 때 한 번씩 겪는 일이고,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에요. 그게 그렇게 됐으니까 어쩌겠어요. 70일 그것도 경험이지.

  • 박혁진

    30년을 함께한 대우는 사장님께 어떤 의미였습니까. 후대에 무엇을 전하고 싶으십니까.

  • 유기범

    대우는 제 인생 그 자체예요. 은행에서 1년도 안 했고, 대우 와서 회장님 밑에서 여러 가지 배우고, 인구 1,000만 명 이상 되는 나라는 다 돌아다녔으니까요. 남미부터 아프리카까지. 저처럼 다닌 사람 없을 거예요.

    우리나라가 작잖아요. 세계를 상대로 뭔가 해야 하는 게 숙명이에요. 대우 같은 진취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지금 젊은 사람들은 세계가 좁아진 시대를 사니까 더 그래야죠. 저는 해방되고 학교 다니면서 이 모든 발전을 다 봤고 전 세계를 다 돌아봤어요. 70일 감옥도 갔지만 그것도 경험이고요. 제가 잘 산 거죠. 보통이지 뭐, 대단할 게 뭐 있어요.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15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유기범 YOO Ki-Beom

  • 1943

    출생, 서울대학교 행정학과

  • 1967

    한일은행 입사

  • 1968

    대우실업 입사

  • 1977

    대우실업 이사

  • 1984

    ㈜대우 국내사업본부장 전무

  • 1985

    ㈜대우 무역부문 부사장

  • 1987

    대우정밀 대표이사 사장

  • 1990

    대우기획조정실 사장

  • 1991

    대우아메리카법인 사장

  • 1993

    ㈜대우 무역부문 사장

  • 1995

    대우통신 대표이사 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8월 4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유기범 전 대우통신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1970년대 초 시카고. 그는 시어스 로벅(Sears, Roebuck) 본사로 들어가 캔모어(Kenmore) 세탁기 다섯 대를 주문했다. 미국 동남아 의류 수출의 품질 기준이 “다섯 번 빨아 주름이 어느 정도 잡히는가”였고, 그것을 측정하려면 같은 세탁기와 비교 사진만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일본 나고야의 봉제 업자한테서 얻어들은 직후였다. 부산공장에 그 다섯 대를 들이자 동남아의 어떤 한국 봉제 회사도 가지지 못한 품질관리 체계가 만들어졌다. 그 한 수로 대우는 임포터를 거치지 않고 시어스, 제이씨페니(JCPenney), 몽고메리 워드(Montgomery Ward) 같은 미국 대형 체인스토어에 직거래의 문을 열었다. 임포터를 거치던 시절 한 벌에 6달러 받던 셔츠를 7.5달러에 팔게 되었다. 유기범 전 대우통신 사장의 이야기다.

그 직거래의 문을 연 사람은 한일은행에서 1년 남짓 일하다가 “답답하다”며 직장을 옮긴 스물 몇 살의 행정학과 출신 청년이었다. 1968년의 일이다. 김우중 회장이 그를 면접해 보더니 “언제부터 올 수 있어”라고 물었고, 2~3일 뒤 출근한 그에게 회장은 “경리하면 어때”라고 했다. 숫자 다루는 일은 안 좋아한다고 솔직히 답하자 회장은 “알았어” 한 마디로 그를 수출입 실무로 보냈다.

뉴욕을 거쳐 1974년 다시 귀국했을 때 대우는 더 이상 봉제 회사가 아니었다. 회장은 그에게 5개년 계획 발표를 시켰고, 이는 본격적인 대우종합상사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화공제품본부장으로 신발(마산자유무역지역의 일본계 공장 인수)·철강·비료 같은 새 품목을 시작했다. 그는 종합상사가 되면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봤다. 대리에서 과장으로 올라가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 시험과 법률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룰을 승진 조건에 박았다. “어느 나라에 가서든 거기서 법인 하나 만들고 사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사람을 중시했던 그는 4000억 매출의 대우통신을 1조 매출 회사로 끌어올렸으나, 얼마 후 대우는 해체됐다. 이후에도 대우에서 일했단 이유만으로 적지 않은 고생을 했던 그는 “그것도 경험”이라며 “나야 잘 산 거지”라고 말했다.



  • 박혁진

    한일은행을 한 달여 만에 그만두고 대우로 옮기셨습니다. 어떤 계기였습니까.

  • 유기범

    68년 9월에 군 제대를 했어요. 그때 은행이나 일부 기업이 시험으로 사람을 뽑던 시절이라 일신제강 같은 데도 봤고 은행도 봤죠. 은행이 신용 있고 보너스도 많이 준다더라고요. 들어가 보니 일도 바쁘고, 선배들 보니 지점장 하고 나서는 중역 안 되면 검사역 정도로 끝나는 게 뻔하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한 친구가 “대우라고 조그만 회사가 있는데 사람을 늘 뽑는다, 가보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무역 회사라니까 앞으로 세계로도 나가고 재미있지 않겠나 싶어서 그냥 가봤죠.

  • 박혁진

    김우중 회장이 직접 면접을 보셨다고요.

  • 유기범

    동영빌딩 5층인가에 있었는데 가보니까 직원이 17명쯤이었어요. 김 회장이 한 번 쭉 보더니 “언제부터 올 수 있어” 그러시더라고요. 며칠 뒤 출근했더니 또 보시더니 “경리하면 어때?”라고 하셔요. 저는 숫자 다루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솔직히 말씀드렸죠. 인터뷰 온 놈이 뭐가 그렇게 싫고 좋고가 있냐 싶으셨겠지만 “알았어”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며칠 창가에 앉아 있다가 가장 기초적인 일, 신용장 받아 은행에서 돈 찾아오는 업무부터 시작했어요.



  • 박혁진

    그때 대우 현지 지사 설립이 한국 무역사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는데, 그 배경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 유기범

    홍콩에 원단을 보내면 인도네시아로 재수출하는 형태였는데, 홍콩 사람들이 트집을 잡아 부도를 내는 일이 잦았어요. 그런 걸 빨리 해결할 사람이 현지에 있어야겠다고 봐서 회장님이 윤영석 회장을 싱가포르에 보내신 거예요.

    주력 제품이 원단에서 봉제로 옮겨가면서 71년에 미국 시장을 뚫기 위해 출장을 갔는데, 회장님은 수입 쿼터 정보를 입수하시고는 벌써 다음 단계를 생각하시더라고요. 싱가포르 어느 회사 대리점에 있던 인도인 직원 하나를 데려다 뉴욕에 법인을 만드시는 거예요. 회장님은 그렇게 한두 단계 앞을 미리 보시는 분이었습니다.



  • 박혁진

    미국 대형체인점 직거래를 트신 게 결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 유기범

    시어스는 일본 나고야의 봉제 업자와 쭉 거래해왔는데, 더 이상 값이 안 맞으니까 그 업체가 우리한테 재하청을 한 거예요. 그래서 나고야로 직접 찾아갔더니 검사 노하우를 알려준 거예요. 별게 아니더라고요. 캔모어 세탁기 다섯 대 사오고, 주름 비교 사진만 있으면 되는 거였어요. 그걸 부산공장에 들여놓으니 동남아에서 이런 품질 관리 하는 데가 우리 밖에 없었어요. 이게 업계에 소문이 났죠. 신뢰도도 올라가고.

    그러니까 시어스도, 그걸 보고 온 제이씨페니·몽고메리도 ‘이제 직거래해도 되겠다’한 거죠. 임포터를 거치면 한 벌 6달러 받던 게, 직거래하면서 7.5달러까지 받게 됐어요. 그 무렵 트라이아세테이트라는 일본산 새 원사를 미국에서 발견해 회장님께 전화드렸더니 회장님이 일본 쪽 수입 독점을 따버리셨어요. 보통 한 다스에 6달러짜리 셔츠가 14달러가 됐죠.

  • 박혁진

    1974년에 귀국하시고 종합상사 시대를 여는 한복판에 계셨습니다.

  • 유기범

    들어와 보니 제일은행장 하던 분을 회장으로 모셔놨더라고요. 회사 폼이 잡혀가던 거죠. 회장님이 차장인 저보고 5개년 계획을 만들어 발표하라고 하셔서 ‘5년 뒤 수출 1억 달러’라고 적었는데, 그게 나중에 거의 맞아떨어졌어요. 중화공제품본부장을 하면서는 철강·비료 쪽도 시작했어요.



  • 박혁진

    무역 부문 사장 시절에 ‘비전 2000’과 함께 ‘홀딩 컴퍼니로 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 유기범

    상사라는 게 거래 복덕방이거든요. 1억 달러짜리 거래 해봐야 1% 떼면 100만 달러예요. 거래액은 커도 부가가치는 못 내요. 그래서 종합상사는 자회사를 많이 거느린 홀딩컴퍼니(지주회사)로 가야 한다고 봤죠. 일본 상사들이 결국 그걸 못 해서 큰돈을 못 번 거고요. 홀딩컴퍼니로 가려면 사람을 키워야 해요. 대리에서 과장으로 가려면 영어 토익 일정 점수, 법률 지식 일정 수준—이런 걸 승진 조건에 박았어요. 좀 반발이 있었지만 밀어붙였죠.

    거래라는 게 결국 법률 행위거든요. 법이라는 게 어느 나라나 민법 있고 상법 있고 비슷해요. 영어와 법률 콘셉트만 있으면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대우 우즈베키스탄’ 만들어서 거기 사장 하고, 교환기 공장 차리고, 그걸 팔아먹을 수 있단 말이에요. 상무가 됐든 전무가 됐든 똑같이 현장 가서 실적이나 따 오는 건 인재를 키우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회장이 2년마다 바뀌는 회사 구조에선 잘 안 돼요. 룰을 만들어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박혁진

    대우통신 사장 시절에 4,000억 회사를 1조 매출로 키우셨습니다.

  • 유기범

    솔직히 통신으로 가라고 했을 때 그만뒀어야 했어요. 지금도 후회해요. 그런데 가서 보니 또 뭘 안 만들면 직성이 안 풀려서요. 내비게이션 사업을 그때 시작했어요. 미국에 직원을 보내서 GPS 받아왔는데 그때는 10미터까지밖에 풀어주지 않아서 한국 골목길에는 좀 부정확했죠.

    교환기는 그동안 삼성·LG·대우·한화 네 회사가 나눠 먹던 시장인데, 어느 날 LG와 삼성이 둘이 연합해서 대우와 한화를 빼버리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미국 가서 퇴직한 엔지니어 한 분을 찾아 우리 직원 셋 붙여 대용량 교환기를 단독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쪽에서 로비가 들어와 회장님께도 얘기가 갔지만, 회장님이 ‘네 거니까 좋을 대로 해’ 그러시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우즈베키스탄·우크라이나에도 교환기 공장을 세웠어요. 우크라이나 총리가 나중에 대통령이 됐는데, 그 사람들이 나라보다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회장님은 어디 가시려면 ‘건(件)’이 있어야 하니까 그런 걸 미리 만들어 드리는 것도 제 일이었죠. 세진컴퓨터에 외상으로 많이 줬다가 그건 손해를 크게 봤어요. 그것 때문에 회장님이 말씀은 안 하셔도 속으로는 ‘저 자식’ 하셨을 거예요.



  • 박혁진

    대우그룹 해체기에 약 70일을 수감하셨습니다. 지금 돌아보시면 어떻습니까.

  • 유기범

    그 당시에 매출 1조 이상 다섯 개 사장만 골라낸 거예요. 통신이 1조가 되면서 거기 걸려든 거죠. 그 전이라면 빠졌을 거고요. 분식회계라는 게, 그건 다른 회사도 다 그랬어요.

    다만 현대나 삼성은 IMF 초기에 그걸 어느 정도 커버했고, 우리는 회장님이 자동차에 모든 걸 거시면서 해외 투자에만 매달려서 내부 정리할 여력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다 탄로가 난 거죠. 그건 회사가 그렇게 클 때 한 번씩 겪는 일이고,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에요. 그게 그렇게 됐으니까 어쩌겠어요. 70일 그것도 경험이지.

  • 박혁진

    30년을 함께한 대우는 사장님께 어떤 의미였습니까. 후대에 무엇을 전하고 싶으십니까.

  • 유기범

    대우는 제 인생 그 자체예요. 은행에서 1년도 안 했고, 대우 와서 회장님 밑에서 여러 가지 배우고, 인구 1,000만 명 이상 되는 나라는 다 돌아다녔으니까요. 남미부터 아프리카까지. 저처럼 다닌 사람 없을 거예요.

    우리나라가 작잖아요. 세계를 상대로 뭔가 해야 하는 게 숙명이에요. 대우 같은 진취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지금 젊은 사람들은 세계가 좁아진 시대를 사니까 더 그래야죠. 저는 해방되고 학교 다니면서 이 모든 발전을 다 봤고 전 세계를 다 돌아봤어요. 70일 감옥도 갔지만 그것도 경험이고요. 제가 잘 산 거죠. 보통이지 뭐, 대단할 게 뭐 있어요.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15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유기범 YOO Ki-Beom

  • 1943

    출생, 서울대학교 행정학과

  • 1967

    한일은행 입사

  • 1968

    대우실업 입사

  • 1977

    대우실업 이사

  • 1984

    ㈜대우 국내사업본부장 전무

  • 1985

    ㈜대우 무역부문 부사장

  • 1987

    대우정밀 대표이사 사장

  • 1990

    대우기획조정실 사장

  • 1991

    대우아메리카법인 사장

  • 1993

    ㈜대우 무역부문 사장

  • 1995

    대우통신 대표이사 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8월 4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유기범 전 대우통신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News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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