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시카고. 그는 시어스 로벅(Sears, Roebuck) 본사로 들어가 캔모어(Kenmore) 세탁기 다섯 대를 주문했다. 미국 동남아 의류 수출의 품질 기준이 “다섯 번 빨아 주름이 어느 정도 잡히는가”였고, 그것을 측정하려면 같은 세탁기와 비교 사진만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일본 나고야의 봉제 업자한테서 얻어들은 직후였다. 부산공장에 그 다섯 대를 들이자 동남아의 어떤 한국 봉제 회사도 가지지 못한 품질관리 체계가 만들어졌다. 그 한 수로 대우는 임포터를 거치지 않고 시어스, 제이씨페니(JCPenney), 몽고메리 워드(Montgomery Ward) 같은 미국 대형 체인스토어에 직거래의 문을 열었다. 임포터를 거치던 시절 한 벌에 6달러 받던 셔츠를 7.5달러에 팔게 되었다. 유기범 전 대우통신 사장의 이야기다.
그 직거래의 문을 연 사람은 한일은행에서 1년 남짓 일하다가 “답답하다”며 직장을 옮긴 스물 몇 살의 행정학과 출신 청년이었다. 1968년의 일이다. 김우중 회장이 그를 면접해 보더니 “언제부터 올 수 있어”라고 물었고, 2~3일 뒤 출근한 그에게 회장은 “경리하면 어때”라고 했다. 숫자 다루는 일은 안 좋아한다고 솔직히 답하자 회장은 “알았어” 한 마디로 그를 수출입 실무로 보냈다.
뉴욕을 거쳐 1974년 다시 귀국했을 때 대우는 더 이상 봉제 회사가 아니었다. 회장은 그에게 5개년 계획 발표를 시켰고, 이는 본격적인 대우종합상사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화공제품본부장으로 신발(마산자유무역지역의 일본계 공장 인수)·철강·비료 같은 새 품목을 시작했다. 그는 종합상사가 되면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봤다. 대리에서 과장으로 올라가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 시험과 법률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룰을 승진 조건에 박았다. “어느 나라에 가서든 거기서 법인 하나 만들고 사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사람을 중시했던 그는 4000억 매출의 대우통신을 1조 매출 회사로 끌어올렸으나, 얼마 후 대우는 해체됐다. 이후에도 대우에서 일했단 이유만으로 적지 않은 고생을 했던 그는 “그것도 경험”이라며 “나야 잘 산 거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