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귀현 전 대우 인도지역본사 사장

회장은 직관으로 질렀고, 나는 몸으로 떼워 길을 냈다

2026.05.21.

남귀현 전 대우 인도지역본사 사장

회장은 직관으로 질렀고, 나는 몸으로 떼워 길을 냈다

2026.05.21.


남귀현 전 대우 인도지역본사 사장은 1973년, 당시 재계 서열 상위권이던 럭키금성(현 LG) 그룹을 떠나 창업 6년 차의 신생 기업 대우실업에 합류했다. 금성사 전선수출부에서 근무하던 20대 청년을 움직인 것은 “대우가 월급을 많이 주고,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많다”는 소문이었다. 수출 실무에 능통했던 그는 입사 면접장에서 김우중 회장을 처음 만났다. 김 회장이 던지는 실무적인 질문에 그는 거침없이 대답했고, 그 자리에서 즉시 채용이 결정됐다. 입사 6개월 만에 대리로 파격 승진한 그는 이후 대우 성장의 결정적 장면마다 ‘해결사’로 등판했다.

그는 엔지니어 출신이 아니었지만, 대우의 섬유, 건설, 전자, 자동차 등 핵심 사업의 자재 구매와 해외 영업을 도맡았다. 1970년대 후반 섬유 파동 때는 회장의 지시 없이 독단으로 미국 듀폰 본사로 날아가 원사를 확보해 국내 공급망의 판도를 뒤집었고, 1979년 리비아 건설 현장에서는 현금이 든 더플백을 메고 사막을 횡단하며 자재를 조달했다.

1990년대 ‘세계경영’의 기치 아래 그는 모로코, 폴란드, 인도, 러시아, 남미 우수아이아까지 전 세계를 누비며 생산 기지를 개척했다. 김우중 회장이 직관적으로 “여기다!”라고 깃발을 꽂으면, 남귀현은 그곳에 공장을 짓고 물건을 팔아 ‘돈’을 만들어내는 야전사령관이었다. 대우 해체 후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는 여전히 그때의 열정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대우가 무너진 것은 단순한 기업의 실패가 아니라 국부(國富)의 유출이었다”고 회고하는 남귀현 전 사장을 만났다.

  • 박혁진

    안정적인 금성사(LG)를 그만두고 당시 신생 기업이던 대우로 옮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우중 회장님과의 첫 만남은 어땠습니까?

  • 남귀현

    1973년이었죠. 당시 LG는 이미 자리를 잡은 대기업이었지만, 대우라는 회사가 수출도 많이 하고 월급도 세다는 소문이 파다했어요. 젊은 혈기에 뭔가 역동적인 곳에서 일해보고 싶어서 경력직으로 지원했죠. 면접장에 갔더니 김우중 회장님을 비롯해 이석희 전무님 같은 창업 멤버들이 계셨어요.

    회장님이 아주 실무적인 걸 물어보시더군요. 제가 전 직장에서 공업진흥청 가서 소요량 증명받고, 은행 가서 LC(신용장) 개설하고, 원자재 수입해서 공장에 공급하는 일을 직접 발로 뛰며 했거든요. 막힘없이 대답하니까 김 회장님 얼굴에 희색이 도는 게 보였어요. ‘아, 이 친구는 일머리가 있구나’ 싶으셨겠죠. 바로 합격했고, 입사 6개월 만에 대리로 승진했습니다. 그때부터는 휴일도 없이 정말 신바람 나게 일만 했죠.




  • 박혁진

    입사 후 ‘구매 통’으로 활약하셨는데, 특히 듀폰(DuPont)과의 담판 에피소드가 전설처럼 남아있습니다.

  • 남귀현

    그때가 70년대 후반인데, 원사 파동이 났어요. 코오롱이나 동양폴리에스터 같은 국내 업체들이 원사 공급권을 쥐고 우리 같은 수출 업체들을 쥐락펴락했어요. 물량이 딸리면 배급 주다시피 하고, 가격도 자기들 마음대로였죠. 우리가 수출 물량은 많은데 자재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니 늘 을(乙) 신세였어요.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아이디어를 냈지. ‘미국 듀폰(DuPont)을 뚫자.’ 회장님께 보고하면 복잡해질까 봐 무작정 미국 윌밍턴 듀폰 본사로 날아갔어요. 가서 판매 디렉터를 만났는데, 머리 벗겨진 60대 노신사들이에요. 새파란 젊은 놈이 와서 “1만 5천 톤을 사겠다”고 하니까 처음엔 믿지도 않아요. 하지만 대우의 쿼터와 수출 실적을 보여주며 설득해서 결국 공급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귀국해서 회장님께 “듀폰 물량 확보했습니다” 보고하니까 회장님이 깜짝 놀라시더니, 그 길로 바로 코오롱으로 쳐들어가셨어요. “너희가 가격 안 맞춰주면 1만 5천 톤 다 들여와서 딴 회사들한테도 풀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으셨죠. 그전까지 끌려다니던 우리가 단숨에 ‘칼자루’를 쥐게 된 겁니다. 회장님이 그때 저를 보시고 ‘이 친구는 일을 맡기면 뚱땅뚱땅 해결해 오는구나’ 하고 믿음을 가지신 것 같아요.




  • 박혁진

    그러다가 1979년에는 갑자기 리비아 건설 현장으로 발령을 받으셨습니다. 건설 경험이 전무하셨을 텐데요.

  • 남귀현

    어느 날 회장님이 부르시더니 “당장 일주일 내로 리비아로 가”라고 하세요. 제가 “회장님, 저는 건설의 건 자도 모르고, 벽돌도 모릅니다” 했더니 “당장 일주일내로 가. 잔말 말고 가” 하시는 거예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짐 싸서 갔죠.

    가보니 난리도 아니에요. 현장은 10개가 넘는데 자재 구매 담당자는 딱 2명뿐이었어요. 자재 공급이 끊기면 수천 명의 인력이 손을 놓아야 하니 비상이었죠. 리비아는 금융 시스템이 없어서 수표를 안 써요. 현금 박치기야. 아스팔트 포장용 피치(Pitch)를 사러 갈 때 더플백에 현찰을 가득 담아서 차에 싣고 다녔어요. 펄펄 끓는 피치를 식지 않게 하려고 히팅 장치가 된 특수 탱크로리 20대를 사서 일주일 내내 사막을 왕복하며 날랐습니다.

    항구도 문제였어요. 배가 들어와도 하역할 장비가 없어서 배들이 둥둥 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직접 크레인 부대를 만들어서 1만 5천 톤 시멘트를 밤낮으로 퍼 날랐습니다. 그렇게 몸으로 때우며 공기를 맞췄죠.

  • 박혁진

    대우전자 시절, ‘탱크주의’ 제품만큼이나 저돌적인 해외 영업으로 유명하셨습니다. 특히 러시아 시장 개척 당시 마피아와 얽힌 일화가 있다고요.

  • 남귀현

    1990년대 초반 러시아가 개방되자마자 들어갔습니다. 당시 러시아 은행들은 믿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TV를 팔아 현지 화폐(루블)를 벌면 그걸 달러로 바꿔 송금해야 하는데, 거래하던 은행이 우리 돈 300만 불을 들고 야반도주를 해버린 겁니다. 소위 ‘먹튀’를 한 거죠. 회장님은 노발대발하시고 난리가 났죠.

    그래서 우리도 현지 해결사, 즉 마피아를 고용해서 돈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상대방 은행 뒤를 봐주는 더 센 마피아가 나타나서 우리 지사장에게 ‘너 애들 학교 다니지? 조심해라’ 하고 협박을 해오는 겁니다. 결국 돈은 못 찾았지만, 그 야생 같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별의별 일을 다 겪었습니다. 그래도 국내 영업 베테랑들을 러시아 전역에 뿌려서 직영점을 내고 현찰 박치기로 TV를 엄청나게 팔아치웠죠.




  • 박혁진

    중앙아시아에서도 김우중 회장님과 함께 수많은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남귀현

    한번은 회장님을 모시고 우즈베키스탄에 갔는데, 카리모프 대통령이 대접하는 저녁 만찬에서 회장님이 ‘대우 TV 2만 대를 우리 고려인 동포들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것도 ‘한 달 내로 해드리겠다’고 약속을 하신 겁니다. 제가 옆에서 ‘회장님, 스펙도 다르고 자재 준비도 해야 해서 한 달은 무리입니다’ 했더니 ‘무조건 해!’ 하시는 거예요. 결국 한국에서 부품을 비행기로 실어 나르며 밤샘 작업을 해서 기어이 2만 대를 납기 내에 맞췄습니다. 그 일로 카리모프 대통령이 감동해서 대우자동차 공장(우즈대우) 설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죠.

    반면에 카자흐스탄에서는 포기한 적도 있어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라고 했는데, 조건이 ‘이 도시의 겨울 온도를 10도까지 올려달라’는 거였어요. 난방 인프라를 다 깔라는 얘긴데, 계산해 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 그건 못하겠다고 했죠(웃음).”

  • 박혁진

    90년대 ‘세계경영’ 시절에는 모로코 국왕을 알현하고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낸 과정이 극적이었다고요.

  • 남귀현

    1997년쯤 회장님이 ‘모로코에 가서 사업 기회를 찾아보라’고 하셨어요. 제가 대우전자 전 모델이 담긴 카탈로그 하나를 들고 모로코 상공부 장관을 찾아갔습니다. 쫙 펼쳐놓고 그랬죠. ‘우리는 TV부터 냉장고, 자동차까지 다 만든다. 모로코를 북아프리카와 남유럽 수출의 생산 기지로 만들자. 대신 생산 독점권을 달라.’ 그랬더니 그쪽에서 흥분하더라고요.

    그게 계기가 돼서 뉴욕 UN 총회에 온 모로코 왕세자(현 국왕)를 만나 담판을 지었죠. 원래 핫산 2세 국왕을 만나기로 했는데 편찮으셔서 황태자가 나왔어요. 회장님이 ‘10억 불 투자하겠다’고 제안했고 그 자리에서 합의가 됐습니다. 카사블랑카 공항 옆에 80만 평 부지를 받고 기공식까지 다 했는데, 결국 IMF가 터지면서 중단됐습니다. 그게 성사됐다면 유럽 시장 판도가 바뀌었을 겁니다.




  • 박혁진

    폴란드의 FSO 자동차 공장 인수도 전자 공장이 먼저 길을 닦은 덕분이라면서요.

  • 남귀현

    맞습니다. 1994년 바웬사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대우가 폴란드에 공장이 있다는데 가보고 싶다’고 했어요. 사실 그건 제가 폐허가 된 수리소 부지를 헐값에 사서 TV 조립 라인 하나 깔아놓은 거였거든요. 그래도 보여드렸죠. 그랬더니 바웬사 대통령이 감동해서 ‘자동차도 같이 하자’고 제안한 겁니다. 회장님이 그 자리에서 ‘한 달 내로 폴란드 가겠다’고 약속하고, 진짜로 가셔서 FSO 인수를 결정지으셨죠.

    나중에 회장님이 그 전자 공장을 보시더니 ‘야, 울타리 값만 해도 공장 인수 가격은 나오겠다’고 농담하실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전자가 먼저 ‘첨병’으로 들어가 신뢰를 쌓으면, 자동차 같은 중공업이 따라 들어가는 게 대우의 방식이었습니다.

  • 박혁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동유럽을 거쳐 마지막엔 인도 시장까지 진출하셨습니다. 1999년 대우자동차에 대한 인도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 남귀현

    인도 공장은 이미 지어진 상태에서 제가 갔는데, 마티즈를 출시하자마자 대박이 났어요. 한 달에 300대 팔던 걸 연말엔 9,000대까지 팔았습니다. 제가 매일 아침 전국 100개 대리점 사장들한테 전화를 돌려 ‘어제 몇 대 팔았냐’고 독려했죠.

    그때 파키스탄과 인도가 카슈미르 국경 분쟁 중이었는데, 우리가 마케팅 차원에서 ‘판매 수익의 1%를 상이군경회에 기부하겠다’고 했어요. 바지파이 총리가 불러서 자동차 키 5대를 기증하고 난리가 났죠. 그런데 파키스탄 정부에서 공식 항의가 온 거예요. ‘왜 적군을 지원하느냐’고. 제가 그랬습니다. ‘이건 순수하게 차 더 팔려고 하는 커머셜(Commercial)한 활동이다. 정치적 의도는 없다’고 딱 잘라 말해서 무마시켰습니다. 그만큼 현지에서 물불 안 가리고 공격적으로 영업을 했죠.




  • 박혁진

    김우중 회장님을 가장 가까이서, 오랫동안 모셨습니다. 사장님께 김우중 회장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 남귀현

    저는 주인을 잘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은 저를 믿고 인정해 주셨어요. 하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분이었죠. 회장님 눈 밖에 나면 끝이라는 생각에 늘 긴장했습니다.

    회장님은 직관이 뛰어난 분이라 무리해 보이는 지시도 많이 하셨지만, 제가 실무적으로 검토해서 ‘이건 안 됩니다’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또 쿨하게 받아들이셨어요. 회장님이 끄시면 저는 뒤에서 밀고, 때로는 브레이크도 걸면서 호흡을 맞췄습니다. 회장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에 리비아든 모로코든 가라면 갔고, 안 되면 되게 만들었습니다. 제 인생 자체가 대우였고, 후회 없이 신바람 나게 일했습니다.

  • 박혁진

    대우그룹 해체 과정을 지켜보며 회한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 남귀현

    저는 대우 해체가 ‘국부 유출’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베트남, 폴란드, 인도 등 전 세계에 깔아놓은 네트워크와 생산 기지들이 하루아침에 날아갔어요. IMF 당시 정부가 금융을 꽉 막아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수출로 충분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환율이 2배로 뛰었으니 수출하면 이익이 엄청났거든요. 그런데 흑자 부도를 낸 겁니다.

    우리는 정말 ‘월화수목금금금’ 일하면서도 그걸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회사가 잘되면 나라도 잘된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그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꺾인 게 천추의 한입니다.




*구술인터뷰는 총 3시간 10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남귀현 NAM Kwi-Hyen

  • 1945

    출생,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 1971

    금성전선 입사

  • 1973

    대우실업 입사

  • 1979

    대우개발(토목공무-리비아자재) 이사부장

  • 1983

    대우전자(토목공무-구매) 이사부장

  • 1987

    대우전자 상무, 전무('92)

  • 1995

    대우전자 영상사업본부장 부사장

  • 1998

    대우그룹 모로코지역본사 사장

  • 1999

    대우그룹 인도지역본사 및 인도 대우자동차 사장

  • 2002

    아남전자 대표이사 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7월 21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남귀현 전 대우 인도지역본사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남귀현 전 대우 인도지역본사 사장은 1973년, 당시 재계 서열 상위권이던 럭키금성(현 LG) 그룹을 떠나 창업 6년 차의 신생 기업 대우실업에 합류했다. 금성사 전선수출부에서 근무하던 20대 청년을 움직인 것은 “대우가 월급을 많이 주고,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많다”는 소문이었다. 수출 실무에 능통했던 그는 입사 면접장에서 김우중 회장을 처음 만났다. 김 회장이 던지는 실무적인 질문에 그는 거침없이 대답했고, 그 자리에서 즉시 채용이 결정됐다. 입사 6개월 만에 대리로 파격 승진한 그는 이후 대우 성장의 결정적 장면마다 ‘해결사’로 등판했다.

그는 엔지니어 출신이 아니었지만, 대우의 섬유, 건설, 전자, 자동차 등 핵심 사업의 자재 구매와 해외 영업을 도맡았다. 1970년대 후반 섬유 파동 때는 회장의 지시 없이 독단으로 미국 듀폰 본사로 날아가 원사를 확보해 국내 공급망의 판도를 뒤집었고, 1979년 리비아 건설 현장에서는 현금이 든 더플백을 메고 사막을 횡단하며 자재를 조달했다.

1990년대 ‘세계경영’의 기치 아래 그는 모로코, 폴란드, 인도, 러시아, 남미 우수아이아까지 전 세계를 누비며 생산 기지를 개척했다. 김우중 회장이 직관적으로 “여기다!”라고 깃발을 꽂으면, 남귀현은 그곳에 공장을 짓고 물건을 팔아 ‘돈’을 만들어내는 야전사령관이었다. 대우 해체 후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는 여전히 그때의 열정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대우가 무너진 것은 단순한 기업의 실패가 아니라 국부(國富)의 유출이었다”고 회고하는 남귀현 전 사장을 만났다.



  • 박혁진

    안정적인 금성사(LG)를 그만두고 당시 신생 기업이던 대우로 옮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우중 회장님과의 첫 만남은 어땠습니까?

  • 남귀현

    1973년이었죠. 당시 LG는 이미 자리를 잡은 대기업이었지만, 대우라는 회사가 수출도 많이 하고 월급도 세다는 소문이 파다했어요. 젊은 혈기에 뭔가 역동적인 곳에서 일해보고 싶어서 경력직으로 지원했죠. 면접장에 갔더니 김우중 회장님을 비롯해 이석희 전무님 같은 창업 멤버들이 계셨어요.

    회장님이 아주 실무적인 걸 물어보시더군요. 제가 전 직장에서 공업진흥청 가서 소요량 증명받고, 은행 가서 LC(신용장) 개설하고, 원자재 수입해서 공장에 공급하는 일을 직접 발로 뛰며 했거든요. 막힘없이 대답하니까 김 회장님 얼굴에 희색이 도는 게 보였어요. ‘아, 이 친구는 일머리가 있구나’ 싶으셨겠죠. 바로 합격했고, 입사 6개월 만에 대리로 승진했습니다. 그때부터는 휴일도 없이 정말 신바람 나게 일만 했죠.



  • 박혁진

    입사 후 ‘구매 통’으로 활약하셨는데, 특히 듀폰(DuPont)과의 담판 에피소드가 전설처럼 남아있습니다.

  • 남귀현

    그때가 70년대 후반인데, 원사 파동이 났어요. 코오롱이나 동양폴리에스터 같은 국내 업체들이 원사 공급권을 쥐고 우리 같은 수출 업체들을 쥐락펴락했어요. 물량이 딸리면 배급 주다시피 하고, 가격도 자기들 마음대로였죠. 우리가 수출 물량은 많은데 자재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니 늘 을(乙) 신세였어요.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아이디어를 냈지. ‘미국 듀폰(DuPont)을 뚫자.’ 회장님께 보고하면 복잡해질까 봐 무작정 미국 윌밍턴 듀폰 본사로 날아갔어요. 가서 판매 디렉터를 만났는데, 머리 벗겨진 60대 노신사들이에요. 새파란 젊은 놈이 와서 “1만 5천 톤을 사겠다”고 하니까 처음엔 믿지도 않아요. 하지만 대우의 쿼터와 수출 실적을 보여주며 설득해서 결국 공급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귀국해서 회장님께 “듀폰 물량 확보했습니다” 보고하니까 회장님이 깜짝 놀라시더니, 그 길로 바로 코오롱으로 쳐들어가셨어요. “너희가 가격 안 맞춰주면 1만 5천 톤 다 들여와서 딴 회사들한테도 풀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으셨죠. 그전까지 끌려다니던 우리가 단숨에 ‘칼자루’를 쥐게 된 겁니다. 회장님이 그때 저를 보시고 ‘이 친구는 일을 맡기면 뚱땅뚱땅 해결해 오는구나’ 하고 믿음을 가지신 것 같아요.



  • 박혁진

    그러다가 1979년에는 갑자기 리비아 건설 현장으로 발령을 받으셨습니다. 건설 경험이 전무하셨을 텐데요.

  • 남귀현

    어느 날 회장님이 부르시더니 “당장 일주일 내로 리비아로 가”라고 하세요. 제가 “회장님, 저는 건설의 건 자도 모르고, 벽돌도 모릅니다” 했더니 “당장 일주일내로 가. 잔말 말고 가” 하시는 거예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짐 싸서 갔죠.

    가보니 난리도 아니에요. 현장은 10개가 넘는데 자재 구매 담당자는 딱 2명뿐이었어요. 자재 공급이 끊기면 수천 명의 인력이 손을 놓아야 하니 비상이었죠. 리비아는 금융 시스템이 없어서 수표를 안 써요. 현금 박치기야. 아스팔트 포장용 피치(Pitch)를 사러 갈 때 더플백에 현찰을 가득 담아서 차에 싣고 다녔어요. 펄펄 끓는 피치를 식지 않게 하려고 히팅 장치가 된 특수 탱크로리 20대를 사서 일주일 내내 사막을 왕복하며 날랐습니다.

    항구도 문제였어요. 배가 들어와도 하역할 장비가 없어서 배들이 둥둥 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직접 크레인 부대를 만들어서 1만 5천 톤 시멘트를 밤낮으로 퍼 날랐습니다. 그렇게 몸으로 때우며 공기를 맞췄죠.

  • 박혁진

    대우전자 시절, ‘탱크주의’ 제품만큼이나 저돌적인 해외 영업으로 유명하셨습니다. 특히 러시아 시장 개척 당시 마피아와 얽힌 일화가 있다고요.

  • 남귀현

    1990년대 초반 러시아가 개방되자마자 들어갔습니다. 당시 러시아 은행들은 믿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TV를 팔아 현지 화폐(루블)를 벌면 그걸 달러로 바꿔 송금해야 하는데, 거래하던 은행이 우리 돈 300만 불을 들고 야반도주를 해버린 겁니다. 소위 ‘먹튀’를 한 거죠. 회장님은 노발대발하시고 난리가 났죠.

    그래서 우리도 현지 해결사, 즉 마피아를 고용해서 돈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상대방 은행 뒤를 봐주는 더 센 마피아가 나타나서 우리 지사장에게 ‘너 애들 학교 다니지? 조심해라’ 하고 협박을 해오는 겁니다. 결국 돈은 못 찾았지만, 그 야생 같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별의별 일을 다 겪었습니다. 그래도 국내 영업 베테랑들을 러시아 전역에 뿌려서 직영점을 내고 현찰 박치기로 TV를 엄청나게 팔아치웠죠.



  • 박혁진

    중앙아시아에서도 김우중 회장님과 함께 수많은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남귀현

    한번은 회장님을 모시고 우즈베키스탄에 갔는데, 카리모프 대통령이 대접하는 저녁 만찬에서 회장님이 ‘대우 TV 2만 대를 우리 고려인 동포들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것도 ‘한 달 내로 해드리겠다’고 약속을 하신 겁니다. 제가 옆에서 ‘회장님, 스펙도 다르고 자재 준비도 해야 해서 한 달은 무리입니다’ 했더니 ‘무조건 해!’ 하시는 거예요. 결국 한국에서 부품을 비행기로 실어 나르며 밤샘 작업을 해서 기어이 2만 대를 납기 내에 맞췄습니다. 그 일로 카리모프 대통령이 감동해서 대우자동차 공장(우즈대우) 설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죠.

    반면에 카자흐스탄에서는 포기한 적도 있어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라고 했는데, 조건이 ‘이 도시의 겨울 온도를 10도까지 올려달라’는 거였어요. 난방 인프라를 다 깔라는 얘긴데, 계산해 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 그건 못하겠다고 했죠(웃음).”

  • 박혁진

    90년대 ‘세계경영’ 시절에는 모로코 국왕을 알현하고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낸 과정이 극적이었다고요.

  • 남귀현

    1997년쯤 회장님이 ‘모로코에 가서 사업 기회를 찾아보라’고 하셨어요. 제가 대우전자 전 모델이 담긴 카탈로그 하나를 들고 모로코 상공부 장관을 찾아갔습니다. 쫙 펼쳐놓고 그랬죠. ‘우리는 TV부터 냉장고, 자동차까지 다 만든다. 모로코를 북아프리카와 남유럽 수출의 생산 기지로 만들자. 대신 생산 독점권을 달라.’ 그랬더니 그쪽에서 흥분하더라고요.

    그게 계기가 돼서 뉴욕 UN 총회에 온 모로코 왕세자(현 국왕)를 만나 담판을 지었죠. 원래 핫산 2세 국왕을 만나기로 했는데 편찮으셔서 황태자가 나왔어요. 회장님이 ‘10억 불 투자하겠다’고 제안했고 그 자리에서 합의가 됐습니다. 카사블랑카 공항 옆에 80만 평 부지를 받고 기공식까지 다 했는데, 결국 IMF가 터지면서 중단됐습니다. 그게 성사됐다면 유럽 시장 판도가 바뀌었을 겁니다.



  • 박혁진

    폴란드의 FSO 자동차 공장 인수도 전자 공장이 먼저 길을 닦은 덕분이라면서요.

  • 남귀현

    맞습니다. 1994년 바웬사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대우가 폴란드에 공장이 있다는데 가보고 싶다’고 했어요. 사실 그건 제가 폐허가 된 수리소 부지를 헐값에 사서 TV 조립 라인 하나 깔아놓은 거였거든요. 그래도 보여드렸죠. 그랬더니 바웬사 대통령이 감동해서 ‘자동차도 같이 하자’고 제안한 겁니다. 회장님이 그 자리에서 ‘한 달 내로 폴란드 가겠다’고 약속하고, 진짜로 가셔서 FSO 인수를 결정지으셨죠.

    나중에 회장님이 그 전자 공장을 보시더니 ‘야, 울타리 값만 해도 공장 인수 가격은 나오겠다’고 농담하실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전자가 먼저 ‘첨병’으로 들어가 신뢰를 쌓으면, 자동차 같은 중공업이 따라 들어가는 게 대우의 방식이었습니다.

  • 박혁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동유럽을 거쳐 마지막엔 인도 시장까지 진출하셨습니다. 1999년 대우자동차에 대한 인도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 남귀현

    인도 공장은 이미 지어진 상태에서 제가 갔는데, 마티즈를 출시하자마자 대박이 났어요. 한 달에 300대 팔던 걸 연말엔 9,000대까지 팔았습니다. 제가 매일 아침 전국 100개 대리점 사장들한테 전화를 돌려 ‘어제 몇 대 팔았냐’고 독려했죠.

    그때 파키스탄과 인도가 카슈미르 국경 분쟁 중이었는데, 우리가 마케팅 차원에서 ‘판매 수익의 1%를 상이군경회에 기부하겠다’고 했어요. 바지파이 총리가 불러서 자동차 키 5대를 기증하고 난리가 났죠. 그런데 파키스탄 정부에서 공식 항의가 온 거예요. ‘왜 적군을 지원하느냐’고. 제가 그랬습니다. ‘이건 순수하게 차 더 팔려고 하는 커머셜(Commercial)한 활동이다. 정치적 의도는 없다’고 딱 잘라 말해서 무마시켰습니다. 그만큼 현지에서 물불 안 가리고 공격적으로 영업을 했죠.



  • 박혁진

    김우중 회장님을 가장 가까이서, 오랫동안 모셨습니다. 사장님께 김우중 회장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 남귀현

    저는 주인을 잘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은 저를 믿고 인정해 주셨어요. 하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분이었죠. 회장님 눈 밖에 나면 끝이라는 생각에 늘 긴장했습니다.

    회장님은 직관이 뛰어난 분이라 무리해 보이는 지시도 많이 하셨지만, 제가 실무적으로 검토해서 ‘이건 안 됩니다’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또 쿨하게 받아들이셨어요. 회장님이 끄시면 저는 뒤에서 밀고, 때로는 브레이크도 걸면서 호흡을 맞췄습니다. 회장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에 리비아든 모로코든 가라면 갔고, 안 되면 되게 만들었습니다. 제 인생 자체가 대우였고, 후회 없이 신바람 나게 일했습니다.

  • 박혁진

    대우그룹 해체 과정을 지켜보며 회한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 남귀현

    저는 대우 해체가 ‘국부 유출’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베트남, 폴란드, 인도 등 전 세계에 깔아놓은 네트워크와 생산 기지들이 하루아침에 날아갔어요. IMF 당시 정부가 금융을 꽉 막아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수출로 충분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환율이 2배로 뛰었으니 수출하면 이익이 엄청났거든요. 그런데 흑자 부도를 낸 겁니다.

    우리는 정말 ‘월화수목금금금’ 일하면서도 그걸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회사가 잘되면 나라도 잘된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그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꺾인 게 천추의 한입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3시간 10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남귀현 NAM Kwi-Hyen

  • 1945

    출생,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 1971

    금성전선 입사

  • 1973

    대우실업 입사

  • 1979

    대우개발(토목공무-리비아자재) 이사부장

  • 1983

    대우전자(토목공무-구매) 이사부장

  • 1987

    대우전자 상무, 전무('92)

  • 1995

    대우전자 영상사업본부장 부사장

  • 1998

    대우그룹 모로코지역본사 사장

  • 1999

    대우그룹 인도지역본사 및 인도 대우자동차 사장

  • 2002

    아남전자 대표이사 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7월 21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남귀현 전 대우 인도지역본사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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