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그가 대우자동차 전략기획실장으로 돌아왔을 때 대우는 최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김우중 회장은 ‘250만 대 생산·판매 체제’라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경쟁자를 따라가는 점진적 성장이 아닌, 규모의 경제를 통해 단숨에 시장을 제패하겠다는 ‘김우중식 발상’이었다. 그룹의 모든 역량을 자동차에 투여했고, 라노스·누비라·레간자 등 신차들은 유럽 시장에서 “이 가격에 이런 품질의 차가 있느냐”는 찬사를 받았다. 현대차는 내수에 집중하던 시절, 세계 시장은 대우의 독무대였다
하지만 영광은 짧았다. 1997년 말 터진 IMF 외환위기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역설적이게도 초기에는 기회처럼 보였다. 환율이 800원에서 1,600원으로 치솟자 수출 비중이 80%에 달했던 대우자동차는 ‘돈벼락’을 맞았다. KPMG와 함께 작성한 사업계획서는 2000년 순이익 1조 원, 2001년 2조 원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회사는 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둑은 무너지고 있었다. 정부와 IMF는 대기업의 자금줄을 조이기 시작했고, 수출 기업의 생명선이던 무역금융(D/A)이 막혔다. 대우는 19조 원에 달하는 무역금융을 단기 CP와 채권으로 막아야 했다. 대차대조표에 잡히지 않던 무역금융이 고스란히 ‘차입금’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시장은 ‘대우가 부실해서 빚이 늘어난다’고 오해했지만, 실상은 흑자를 내면서도 돈이 돌지 않아 쓰러지는 ‘흑자도산’의 위기였다.
결국 삼성자동차와의 빅딜이 추진됐다. 하지만 부산 인수 협상장에서 삼성은 핵심 자료 제출을 미뤘다. 김 사장은 “삼성은 이미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갈 것이라는 판세를 읽고 있었다”고 말했다. 빅딜이 깨지자마자 대우그룹은 워크아웃에 돌입했고, 대우자동차는 매물로 나왔다.
그의 마지막 임무는 GM과의 매각 협상이었다. 그는 끝까지 ‘대우 브랜드’와 ‘판매 채널’, ‘R&D 조직’의 유지를 요구했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명맥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I don’t know’라는 GM의 답변 앞에서 모든 논리는 무력했다. 그는 “IMF만 아니었다면, 청와대가 그렇게 밀어붙이지만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며 짙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때 대한민국 수출의 14%를 책임졌던 거인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음은 김석환 전 사장과의 일문일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