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환 전 대우자동차 사장

대우의 마지막 협상가가 말하는 대우그룹 해체의 진실

2026.05.11.

김석환 전 대우자동차 사장

대우의 마지막 협상가가 말하는 대우그룹 해체의 진실

2026.05.11.


“I don’t know.”

1999년, GM과의 대우자동차 매각 협상 테이블. 실무진이 몇 달간 함께 만든 기업가치 평가 보고서는 휴짓조각이 됐다. GM은 평가액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렀다. 협상 대표였던 김석환 당시 대우자동차 사장은 분노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검토한 내용은 무엇이었나. 이건 말도 안 되지 않는가.” 그의 항의에 돌아온 GM 측 실무 대표의 답은 단 세 단어, “나는 모른다(I don’t know)”였다.

그 짧은 답변 속에서 김 사장은 거대한 벽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협상 결렬이 아니었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대우 신화’가 국가와 거대 자본의 힘 앞에서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보여주는 서늘한 현실이었다. 그는 당시를 “모든 것이 결정된 게임이었다”고 회고했다.

1975년, 김석환 사장은 모두가 선망하던 산업은행을 떠나 대우실업에 합류했다. 당시 대우는 삼성과 비교할 수 없는 ‘중소기업’이었다. 산업은행 차장은 “왜 거길 가냐”며 만류했고, 3개월의 유예 기간까지 줬다. 하지만 처음 방문한 대우 사무실에서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봤다. 텔렉스 소리와 고성이 오가는, 마치 도떼기시장 같은 혼돈 속에서 그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느꼈다. “수출만이 살길”이라던 시대정신에 이끌려 그는 망설임 없이 대우맨의 길을 택했다.

이후 그의 삶은 세계를 무대로 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리비아에서는 건설 대금을 현물인 석유로 받아내는 임무를 수행했고, 프랑스에서는 산더미처럼 쌓인 패션 재고를 2년 만에 흑자로 돌려놨다. 미국 법인장 시절에는 적자 사업을 정리하고 자동차 부품 수출로 활로를 뚫으며 부임 2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그는 김우중 회장의 신뢰를 받는 ‘해결사’였다. 김 회장은 “저 친구를 보내면 이상하게 일이 잘 풀린다”며 그를 궂은일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1997년, 그가 대우자동차 전략기획실장으로 돌아왔을 때 대우는 최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김우중 회장은 ‘250만 대 생산·판매 체제’라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경쟁자를 따라가는 점진적 성장이 아닌, 규모의 경제를 통해 단숨에 시장을 제패하겠다는 ‘김우중식 발상’이었다. 그룹의 모든 역량을 자동차에 투여했고, 라노스·누비라·레간자 등 신차들은 유럽 시장에서 “이 가격에 이런 품질의 차가 있느냐”는 찬사를 받았다. 현대차는 내수에 집중하던 시절, 세계 시장은 대우의 독무대였다

하지만 영광은 짧았다. 1997년 말 터진 IMF 외환위기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역설적이게도 초기에는 기회처럼 보였다. 환율이 800원에서 1,600원으로 치솟자 수출 비중이 80%에 달했던 대우자동차는 ‘돈벼락’을 맞았다. KPMG와 함께 작성한 사업계획서는 2000년 순이익 1조 원, 2001년 2조 원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회사는 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둑은 무너지고 있었다. 정부와 IMF는 대기업의 자금줄을 조이기 시작했고, 수출 기업의 생명선이던 무역금융(D/A)이 막혔다. 대우는 19조 원에 달하는 무역금융을 단기 CP와 채권으로 막아야 했다. 대차대조표에 잡히지 않던 무역금융이 고스란히 ‘차입금’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시장은 ‘대우가 부실해서 빚이 늘어난다’고 오해했지만, 실상은 흑자를 내면서도 돈이 돌지 않아 쓰러지는 ‘흑자도산’의 위기였다.

결국 삼성자동차와의 빅딜이 추진됐다. 하지만 부산 인수 협상장에서 삼성은 핵심 자료 제출을 미뤘다. 김 사장은 “삼성은 이미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갈 것이라는 판세를 읽고 있었다”고 말했다. 빅딜이 깨지자마자 대우그룹은 워크아웃에 돌입했고, 대우자동차는 매물로 나왔다.

그의 마지막 임무는 GM과의 매각 협상이었다. 그는 끝까지 ‘대우 브랜드’와 ‘판매 채널’, ‘R&D 조직’의 유지를 요구했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명맥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I don’t know’라는 GM의 답변 앞에서 모든 논리는 무력했다. 그는 “IMF만 아니었다면, 청와대가 그렇게 밀어붙이지만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며 짙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때 대한민국 수출의 14%를 책임졌던 거인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음은 김석환 전 사장과의 일문일답.

  • 박혁진

    대우에 합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 김석환

    산업은행에서 5년 정도 근무하며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죠. 1975년에 당시 김태구 회장과 권동열 사장의 권유로 대우로 옮기게 됐어요. 산업은행에서는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대우로의 이직을 모두가 만류했죠.

    그러다 (당시 삼주빌딩에 있는) 대우 사무실에 가봤더니 이게 완전히 ‘도떼기시장’이야. 텔렉스와 고성이 오가고. 사람 사는 것 같더라고. 야, 저런 데서 뭘 한번 해봐야지. 그 역동적인 분위기에 오히려 매료됐어요.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시대적 사명감에 이끌려 합류를 결심했죠.




  • 박혁진

    대우자동차의 ‘세계 경영’ 전략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 김석환

    김우중 회장님의 생각은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가 되는 것이었어요. 당시 자동차 산업은 규모의 경제가 핵심이었는데, 20~30만 대 수준에서 조금씩 생산량을 늘려서는 도요타나 GM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셨죠. 그래서 곧바로 250만 대 생산·판매 체제를 구축하는 목표를 세우셨어요.

    먼저 전 세계에 생산 및 판매 거점을 확보해 규모를 만든 뒤, 우리 기술력으로 만든 ‘값싸고 질 좋은’ 자동차를 공급해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파격적인 전략이었죠.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마티즈 등 4개 신차종이 그 전략의 결과물이었고, 세계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




  • 박혁진

    IMF 외환위기가 대우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나요?

  • 김석환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내막은 복잡합니다. 환율이 급등하면서 수출 위주였던 대우자동차는 엄청난 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됐어요. 실제로 1999년 KPMG 보고서에서도 대우자동차의 순이익을 2000년 1조 원, 2001년 2조 원으로 예측할 만큼 회사는 건강했어요.

    진짜 위기는 다른 곳에서 왔어요. 바로 무역금융(D/A) 중단이었죠. 당시 대우그룹은 한국 수출액의 14%를 차지했고, 약 19조 원에 달하는 무역금융을 사용하고 있었어요. 무역금융은 대차대조표상 차입금으로 잡히지 않는 자금입니다. 그런데 정부와 IMF가 이 무역금융을 막아버리니까, 우리는 수출을 계속하기 위해 19조 원을 단기 CP(기업어음)나 채권으로 조달해야 했던 거예요. 이 과정에서 장부상 차입금이 갑자기 19조 원이나 불어났고, 외부에서는 이를 두고 '대우가 부실해서 빚을 늘린다'고 오해했죠.

    실제로는 흑자를 내면서도 자금 조달 방식이 바뀌어 빚이 늘어난 것처럼 보였을 뿐인데, 이것이 결국 ‘흑자도산’과 워크아웃으로 이어진 결정적 계기가 된겁니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의 ‘2천억 흑자’ 지시가 분식회계로 둔갑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진실은 무엇입니까?

  • 김석환

    대우그룹, 특히 대우자동차는 IMF 외환위기 때 망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수출 비중이 70~80%에 달했기 때문에 환율이 800원에서 1600원 이상으로 치솟자 오히려 엄청난 흑자를 내고 있었어요. 회의에서 '2천억 만들어보라'는 김우중 회장의 지시는 분식회계 지시가 아니라, 경영회의에서 "이익이 천 몇 백억 원 날 것 같으니, 노력해서 2천억 원을 목표로 해보자"는 목표 설정이었어요. 한 임원이 이를 개인적으로 메모한 것이 나중에 분식회계 지시의 증거로 왜곡된 거죠.




  • 박혁진

    삼성자동차와의 ‘빅딜’은 왜 결렬됐나요?

  • 김석환

    정부의 대기업 구조조정 압박 속에서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를 맞바꾸는 빅딜이 추진됐습니다. 우리 목표는 삼성차 인수를 통해 급한 자금줄을 트는 것이었죠. 이건희 회장과 김우중 회장이 사인한 합의서까지 있었고, 내가 인수단장을 맡아 부산 공장으로 내려갔었습니다. 하지만 삼성 측은 핵심 자료 제출을 계속 미루며 시간을 끌었어요.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삼성은 이미 정부의 기류를 파악하고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갈 것을 예측했던 것 같아요. 빅딜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뺀 것이죠. 빅딜이 깨지자마자 대우는 워크아웃에 들어갔습니다.

  • 박혁진

    GM과의 매각 협상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 김석환

    참담했죠. 몇 달간 양사 실무진이 함께 기업가치 평가(DCF 방식)를 진행했고, 우리 나름의 예상 가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협상 자리에서 GM은 그와는 전혀 무관한,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제시했죠. 마치 점령군 같았어요.

    내가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자 GM 측 대표는 “I don’t know(나는 모른다)”라고 답했습니다. 그 말은 ‘실무 협상과 무관하게 가격은 이미 위에서 결정됐으니 따르라’는 의미였던 거예요. 대우 브랜드, 판매망, R&D 조직 유지를 조건으로 힘겹게 협상을 이어갔지만, 마지막 순간 ‘경영진의 판단에 따라 변경할 수 있다’는 독소 조항이 들어가면서 사실상 모든 것을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 박혁진

    따지고 보면 대우의 마지막 협상가였는데, ‘대우’는 인생에서 어떤 의미로 남아있나요?

  • 김석환

    후회는 없습니다. 산업은행에 있었다면 편한 삶을 살았겠지만, 대우에 와서 전 세계를 누비며 일에 쫓겨 살았어요. 대한민국 수출의 14%를 담당하던 기업의 일원으로서 국가 경제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큽니다.

    다만, 대우 사태는 학문적으로 반드시 재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역금융이 차입금으로 둔갑하는 과정의 진실, 그리고 그로 인해 한 기업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후세는 알아야죠. 그래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남은 이들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15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김석환 KIM Suk-Hwan

  • 1944

    출생,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 1966

    한국산업은행 입사

  • 1975

    대우실업 입사(대리)

  • 1986

    ㈜대우 건설부문 이사

  • 1993

    ㈜대우 무역부문 부사장

  • 1995

    대우 아메리카법인장 부사장

  • 1997

    대우자동차 전략기획실장 부사장

  • 2000

    대우자동차 입찰사무국 사장

  • 2002

    대우인천자동차(청산법인) 대표이사 사장

  • 2005

    GM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 전략사업담당 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7월 14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김석환 전 대우자동차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I don’t know.”

1999년, GM과의 대우자동차 매각 협상 테이블. 실무진이 몇 달간 함께 만든 기업가치 평가 보고서는 휴짓조각이 됐다. GM은 평가액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렀다. 협상 대표였던 김석환 당시 대우자동차 사장은 분노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검토한 내용은 무엇이었나. 이건 말도 안 되지 않는가.” 그의 항의에 돌아온 GM 측 실무 대표의 답은 단 세 단어, “나는 모른다(I don’t know)”였다.

그 짧은 답변 속에서 김 사장은 거대한 벽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협상 결렬이 아니었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대우 신화’가 국가와 거대 자본의 힘 앞에서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보여주는 서늘한 현실이었다. 그는 당시를 “모든 것이 결정된 게임이었다”고 회고했다.

1975년, 김석환 사장은 모두가 선망하던 산업은행을 떠나 대우실업에 합류했다. 당시 대우는 삼성과 비교할 수 없는 ‘중소기업’이었다. 산업은행 차장은 “왜 거길 가냐”며 만류했고, 3개월의 유예 기간까지 줬다. 하지만 처음 방문한 대우 사무실에서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봤다. 텔렉스 소리와 고성이 오가는, 마치 도떼기시장 같은 혼돈 속에서 그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느꼈다. “수출만이 살길”이라던 시대정신에 이끌려 그는 망설임 없이 대우맨의 길을 택했다.

이후 그의 삶은 세계를 무대로 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리비아에서는 건설 대금을 현물인 석유로 받아내는 임무를 수행했고, 프랑스에서는 산더미처럼 쌓인 패션 재고를 2년 만에 흑자로 돌려놨다. 미국 법인장 시절에는 적자 사업을 정리하고 자동차 부품 수출로 활로를 뚫으며 부임 2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그는 김우중 회장의 신뢰를 받는 ‘해결사’였다. 김 회장은 “저 친구를 보내면 이상하게 일이 잘 풀린다”며 그를 궂은일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1997년, 그가 대우자동차 전략기획실장으로 돌아왔을 때 대우는 최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김우중 회장은 ‘250만 대 생산·판매 체제’라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경쟁자를 따라가는 점진적 성장이 아닌, 규모의 경제를 통해 단숨에 시장을 제패하겠다는 ‘김우중식 발상’이었다. 그룹의 모든 역량을 자동차에 투여했고, 라노스·누비라·레간자 등 신차들은 유럽 시장에서 “이 가격에 이런 품질의 차가 있느냐”는 찬사를 받았다. 현대차는 내수에 집중하던 시절, 세계 시장은 대우의 독무대였다.

하지만 영광은 짧았다. 1997년 말 터진 IMF 외환위기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역설적이게도 초기에는 기회처럼 보였다. 환율이 800원에서 1,600원으로 치솟자 수출 비중이 80%에 달했던 대우자동차는 ‘돈벼락’을 맞았다. KPMG와 함께 작성한 사업계획서는 2000년 순이익 1조 원, 2001년 2조 원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회사는 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둑은 무너지고 있었다. 정부와 IMF는 대기업의 자금줄을 조이기 시작했고, 수출 기업의 생명선이던 무역금융(D/A)이 막혔다. 대우는 19조 원에 달하는 무역금융을 단기 CP와 채권으로 막아야 했다. 대차대조표에 잡히지 않던 무역금융이 고스란히 ‘차입금’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시장은 ‘대우가 부실해서 빚이 늘어난다’고 오해했지만, 실상은 흑자를 내면서도 돈이 돌지 않아 쓰러지는 ‘흑자도산’의 위기였다.

결국 삼성자동차와의 빅딜이 추진됐다. 하지만 부산 인수 협상장에서 삼성은 핵심 자료 제출을 미뤘다. 김 사장은 “삼성은 이미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갈 것이라는 판세를 읽고 있었다”고 말했다. 빅딜이 깨지자마자 대우그룹은 워크아웃에 돌입했고, 대우자동차는 매물로 나왔다.

그의 마지막 임무는 GM과의 매각 협상이었다. 그는 끝까지 ‘대우 브랜드’와 ‘판매 채널’, 'R&D 조직'의 유지를 요구했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명맥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I don’t know’라는 GM의 답변 앞에서 모든 논리는 무력했다. 그는 “IMF만 아니었다면, 청와대가 그렇게 밀어붙이지만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며 짙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때 대한민국 수출의 14%를 책임졌던 거인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음은 김석환 전 사장과의 일문일답.



  • 박혁진

    대우에 합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 김석환

    산업은행에서 5년 정도 근무하며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죠. 1975년에 당시 김태구 회장과 권동열 사장의 권유로 대우로 옮기게 됐어요. 산업은행에서는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대우로의 이직을 모두가 만류했죠. 그러다 (당시 삼주빌딩에 있는) 대우 사무실에 가봤더니 이게 완전히 ‘도떼기시장’이야. 텔렉스와 고성이 오가고. 사람 사는 것 같더라고. 야, 저런 데서 뭘 한번 해봐야지. 그 역동적인 분위기에 오히려 매료됐어요.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시대적 사명감에 이끌려 합류를 결심했죠.



  • 박혁진

    대우자동차의 ‘세계 경영’ 전략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 김석환

    김우중 회장님의 생각은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가 되는 것이었어요. 당시 자동차 산업은 규모의 경제가 핵심이었는데, 20~30만 대 수준에서 조금씩 생산량을 늘려서는 도요타나 GM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셨죠. 그래서 곧바로 250만 대 생산·판매 체제를 구축하는 목표를 세우셨어요.

    먼저 전 세계에 생산 및 판매 거점을 확보해 규모를 만든 뒤, 우리 기술력으로 만든 ‘값싸고 질 좋은’ 자동차를 공급해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파격적인 전략이었죠.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마티즈 등 4개 신차종이 그 전략의 결과물이었고, 세계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



  • 박혁진

    IMF 외환위기가 대우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나요?

  • 김석환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내막은 복잡합니다. 환율이 급등하면서 수출 위주였던 대우자동차는 엄청난 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됐어요. 실제로 1999년 KPMG 보고서에서도 대우자동차의 순이익을 2000년 1조 원, 2001년 2조 원으로 예측할 만큼 회사는 건강했어요.

    진짜 위기는 다른 곳에서 왔어요. 바로 무역금융(D/A) 중단이었죠. 당시 대우그룹은 한국 수출액의 14%를 차지했고, 약 19조 원에 달하는 무역금융을 사용하고 있었어요. 무역금융은 대차대조표상 차입금으로 잡히지 않는 자금입니다. 그런데 정부와 IMF가 이 무역금융을 막아버리니까, 우리는 수출을 계속하기 위해 19조 원을 단기 CP(기업어음)나 채권으로 조달해야 했던 거예요. 이 과정에서 장부상 차입금이 갑자기 19조 원이나 불어났고, 외부에서는 이를 두고 '대우가 부실해서 빚을 늘린다'고 오해했죠. 실제로는 흑자를 내면서도 자금 조달 방식이 바뀌어 빚이 늘어난 것처럼 보였을 뿐인데, 이것이 결국 ‘흑자도산’과 워크아웃으로 이어진 결정적 계기가 된겁니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의 ‘2천억 흑자’ 지시가 분식회계로 둔갑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진실은 무엇입니까?

  • 김석환

    대우그룹, 특히 대우자동차는 IMF 외환위기 때 망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수출 비중이 70~80%에 달했기 때문에 환율이 800원에서 1600원 이상으로 치솟자 오히려 엄청난 흑자를 내고 있었어요. 회의에서 '2천억 만들어보라'는 김우중 회장의 지시는 분식회계 지시가 아니라, 경영회의에서 "이익이 천 몇 백억 원 날 것 같으니, 노력해서 2천억 원을 목표로 해보자"는 목표 설정이었어요. 한 임원이 이를 개인적으로 메모한 것이 나중에 분식회계 지시의 증거로 왜곡된 거죠.



  • 박혁진

    삼성자동차와의 ‘빅딜’은 왜 결렬됐나요?

  • 김석환

    정부의 대기업 구조조정 압박 속에서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를 맞바꾸는 빅딜이 추진됐습니다. 우리 목표는 삼성차 인수를 통해 급한 자금줄을 트는 것이었죠. 이건희 회장과 김우중 회장이 사인한 합의서까지 있었고, 내가 인수단장을 맡아 부산 공장으로 내려갔었습니다. 하지만 삼성 측은 핵심 자료 제출을 계속 미루며 시간을 끌었어요.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삼성은 이미 정부의 기류를 파악하고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갈 것을 예측했던 것 같아요. 빅딜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뺀 것이죠. 빅딜이 깨지자마자 대우는 워크아웃에 들어갔습니다.

  • 박혁진

    GM과의 매각 협상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 김석환

    참담했죠. 몇 달간 양사 실무진이 함께 기업가치 평가(DCF 방식)를 진행했고, 우리 나름의 예상 가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협상 자리에서 GM은 그와는 전혀 무관한,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제시했죠. 마치 점령군 같았어요.

    내가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자 GM 측 대표는 “I don’t know(나는 모른다)”라고 답했습니다. 그 말은 ‘실무 협상과 무관하게 가격은 이미 위에서 결정됐으니 따르라’는 의미였던 거예요. 대우 브랜드, 판매망, R&D 조직 유지를 조건으로 힘겹게 협상을 이어갔지만, 마지막 순간 ‘경영진의 판단에 따라 변경할 수 있다’는 독소 조항이 들어가면서 사실상 모든 것을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 박혁진

    따지고 보면 대우의 마지막 협상가였는데, ‘대우’는 인생에서 어떤 의미로 남아있나요?

  • 김석환

    후회는 없습니다. 산업은행에 있었다면 편한 삶을 살았겠지만, 대우에 와서 전 세계를 누비며 일에 쫓겨 살았어요. 대한민국 수출의 14%를 담당하던 기업의 일원으로서 국가 경제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큽니다.

    다만, 대우 사태는 학문적으로 반드시 재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역금융이 차입금으로 둔갑하는 과정의 진실, 그리고 그로 인해 한 기업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후세는 알아야죠. 그래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남은 이들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15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김석환 KIM Suk-Hwan

  • 1944

    출생,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 1966

    한국산업은행 입사

  • 1975

    대우실업 입사(대리)

  • 1986

    ㈜대우 건설부문 이사

  • 1993

    ㈜대우 무역부문 부사장

  • 1995

    대우 아메리카법인장 부사장

  • 1997

    대우자동차 전략기획실장 부사장

  • 2000

    대우자동차 입찰사무국 사장

  • 2002

    대우인천자동차(청산법인) 대표이사 사장

  • 2005

    GM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 전략사업담당 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7월 14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김석환 전 대우자동차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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