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복조 전 대우증권 사장

증권의 '증'도 모른 상사맨, 업계 전설이 되다

2026.04.28.

손복조 전 대우증권 사장

증권의 '증'도 모른 상사맨, 업계 전설이 되다

2026.04.28.


금융업 경력 하나 없이 기획과장으로 입사해 법전을 파고들던 이방인. 그는 모두가 장밋빛 환상에 취해있을 때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고 외치며 회사의 속살을 파헤쳤다. IMF 위기를 홀로 예견하고 선제적 구조조정을 단행해 회사를 구했으며, 대우그룹에서 산업은행으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대우증권을 떠난지 만 4년 만에 대우증권의 대표이사로 복귀하여, 시장점유율 5위로까지 추락해 있던 회사 위상을 불과 2개월 20일 만에 점유율 1위로 회복시킨 전설. 손복조 전 대우증권 사장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다.

그가 대우증권에 첫발을 디딘 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상사를 전전하다 모친의 갑작스런 별세로 가족 모두와 일시적으로 귀향까지 하기로 했던 그는 친구의 추천으로 금융계에 뛰어들었다. 증권의 ‘증’자도 모르던 그에게 주어진 직책은 핵심 보직인 ‘기획과장’. 사내에서는 ‘낙하산’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그는 논리와 실력으로 정면 돌파를 택했다. 그의 무기는 업계의 관행이 아닌 ‘법전’이었다. 증권거래법규를 밤새 파고들어 누구보다 해박한 논리로 무장했다. 그의 날카로운 분석과 통찰력에 베테랑들도 혀를 내둘렀고, ‘이방인’은 서서히 조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눈에 비친 80년대 증권업계는 화려했지만 위태로웠다. 자기자본 규모가 턱없이 취약하여 고객 예탁금과 하루짜리 단기자금인 ‘콜론(Call Loan)’으로 연명하는 기형적 구조. 그는 ‘증권회사는 돈이 없다’는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일본 주재원 시절, 선진 금융사들의 철저한 리스크 관리를 목도하며 그는 한국 증권업계에 다가올 유동성 위기를 직감했다.
예감은 현실이 됐다. 1995년 본사 기획실장으로 복귀한 그는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혹독한 구조조정의 칼을 빼 들었다. 방만하게 운영되던 주식과 부동산 자산을 정리하고, 장부 밖에서 곪아가던 해외 부실 펀드를 수면 위로 끌어내 정리했다. 이는 IMF 외환위기가 닥치기 불과 1년 남짓 전의 일이었다. 동서증권, 고려증권 등 경쟁사들이 유동성 위기로 줄줄이 무너져 내릴 때, 대우증권은 그의 선제적 대응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하고 오히려 더욱 단단해졌다.

하지만 영광은 길지 않았다.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대우증권은 산업은행의 자회사가 됐고, 그는 하루아침에 조직을 떠나야 했다. 심지어 회사를 그만두고 2년 이상이나 경과한 시점에 발생한 매매 허수 주문 사고의 책임자로 지목되어 징계를 받는 일까지 겪기도 했다. 전산 시스템 상의 중요 설계 오류에 대한 사고였음에도 그 실제 지시자와 실행자는 징계 대상에서 제외하고 단지 시스템 개발 종료 시점에 업무 책임자의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징계처분과 관련한 사전 조사나 청문 없이 일방적으로 행한 조치였다. 억울함과 배신감은 그에게 처음으로 ‘권력 의지’라는 것을 심어주었다. “내가 돌아가서 반드시 회사를 되살려 놓겠다.”

2004년, 그의 다짐은 현실이 됐다. 업계 5위로 추락한 친정 대우증권의 CEO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다. 그에게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는 ‘그 당시 결산기였던 익년 3월 한 달간 실적만으로도 1등을 되찾자’는 명확하고 강렬한 목표를 제시했다. 모든 평가 기준을 ‘시장 점유율’ 하나로 통일하고, 전국 지점에 목표를 50%씩 상향 배분하며 무한 경쟁의 불을 붙였다. 꽃다발과 피자가 1등 지점으로 날아갔고, 사장은 격려를 위해 전국을 누볐다. 잠자고 있던 대우증권의 DNA가 깨어났다. 모두가 불가능이라던 목표는 취임 2개월 20일 만에 달성됐다. ‘손복조 신화’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손복조 사장과의 일문일답이다.

  • 박혁진

    대우증권에는 어떻게 입사하게 되셨습니까?

  • 손복조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금융 쪽이 아닌 율산실업 같은 일반 상사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회사를 거치는 동안 회사가 파산하는 등 불안정한 시기를 겪었고, 안정적인 직장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님의 갑작스런 별세로 고향에서 1년여 병환 중인 아버님을 모시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직장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대우증권 인사 담당자가 대학교 친구여서 인연이 닿았습니다. 당시 삼보증권과 합병한 직후라 인재가 필요했고, 마침 기획과장이 해외 부서로 가고 싶어 해 자리가 비는 타이밍이었습니다. 증권업 경험이 전혀 없던 제게 기획과장이라는 중요한 보직이 주어진 것은 지금 생각하면 여러 상황이 겹친 운명적인 일이었습니다.




  • 박혁진

    대우증권은 어떻게 20년간 독보적인 1위를 할 수 있었습니까?

  • 손복조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1983년 당시 업계 1위였던 삼보증권을 합병하면서 자본금, 점포망, 인력 등 모든 면에서 경쟁사들의 두 배가 넘는 압도적인 규모를 갖췄습니다. 규제 산업이었기 때문에 이 격차를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죠. 둘째, 유능했던 김창희 사장님이 20년 가까이 장기 경영을 했습니다. 전 세계의 위대한 조직들은 예외 없이 훌륭한 지도자가 오랜 기간 이끌어온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김우중 회장님께서 100% 권한을 위임(임파워먼트)했습니다. 그룹의 다른 사업이 워낙 크고 바빠서이기도 했지만, 경영을 전적으로 믿고 맡겼기 때문에 소신 있는 경영이 가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입사원을 1년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등 인재 경영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 박혁진

    인터뷰 내내 ‘증권회사는 돈이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 손복조

    과거 증권사들은 자기자본이 정말 너무나 취약했습니다. 은행의 경우는 자기자본이나 기타 차입금 외에 고객 예금을 활용하여 일상 업무를 영위할 여지가 많습니다. 하지만 증권회사의 경우는 고객예탁금을 100% 외부 기관에 예치하게 되어 있고 회사채 발행과 같은 외부 차입이 활성화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일상적인 필요 업무자금도 없어 하루짜리 초단기 자금인 ‘콜론(Call Loan)’을 매일 수천억씩 빌려서 영업을 했습니다. 이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은 구조로, 시장 상황이 나빠지면 언제든 유동성 위기로 무너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IMF 외환위기 전부터 이 문제를 직시하고 있었고, 동서·고려증권 등 부실한 회사와의 콜 거래를 선제적으로 끊어 대우증권이 입을 수 있었던 수백억의 손실을 막았습니다.

  • 박혁진

    1995년 기획실장으로 복귀해 단행한 구조조정이 IMF 위기 극복에 결정적이었다고 하셨습니다.

  • 손복조

    그렇습니다. 7년간 일본 주재원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그동안 회사는 모든 면에서 오히려 퇴보한 상태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해외 부실도 심각했죠. 저는 즉시 방만하게 보유하던 주식과 부동산 등 무수익 자산을 모두 처분하고, 해외 현지법인들이 암암리에 운영하던 부실 펀드를 정리했습니다. 모두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이는 회사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이 조치 덕분에 IMF가 터졌을 때 대우증권은 다른 회사들과 달리 매우 건강한 상태에서 위기를 맞을 수 있었습니다.




  • 박혁진

    2004년 CEO로 복귀해 3개월도 안 돼 업계 5위에서 1위로 올려놓은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 손복조

    목표를 단순하고 명확하게 설정한 것이 핵심입니다. ‘내년 3월, 단 한 달만이라도 시장 점유율 1위를 되찾자’는 자존심 회복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평가 기준을 ‘목표 대비 달성률’ 하나로 통일하고, 전 지점의 목표를 일괄적으로 50% 상향했습니다.

    그리고 1등부터 120등까지의 순위를 실시간으로 공개하며 선의의 경쟁을 극대화했습니다. 1등 지점에는 피자와 꽃다발을 보내고 제가 직접 찾아가 격려했습니다. 잠자고 있던 직원들의 자부심과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시장 상황도 운 좋게 따라주었고요.

  • 박혁진

    대우증권 사장으로서 이루지 못해 아쉬운 꿈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 손복조

    자기자본을 5조 원까지 키워 명실상부한 ‘글로벌 투자은행(IB)’의 기틀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연임이 되었다면 매년 1조 원씩 이익을 내 자본을 축적하고, 그 자기자본의 힘으로 최소한 수백억 원 규모의 투자딜을 과감히 진입해서 투자수익을 극대화 하는 진짜 투자은행 업무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연임이 되지 못해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구술인터뷰는 총 3시간 10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손복조 SOHN Bok-Jo

  • 1951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 1976

    율산실업 입사

  • 1984

    대우증권 입사(과장)

  • 1990

    대우증권 동경사무소장

  • 1995

    대우증권 기획실장

  • 1997

    대우증권 기업금융본부장

  • 1999

    대우증권 리서치센터 IT사업본부장

  • 2002

    LG선물 대표이사

  • 2004

    대우증권 대표이사 사장

  • 2008

    토러스투자증권 창업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6월 30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손복조 전 대우증권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글)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금융업 경력 하나 없이 기획과장으로 입사해 법전을 파고들던 이방인. 그는 모두가 장밋빛 환상에 취해있을 때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고 외치며 회사의 속살을 파헤쳤다. IMF 위기를 홀로 예견하고 선제적 구조조정을 단행해 회사를 구했으며, 산업은행으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대우증권을 떠난지 만 4년 만에 대표이사로 복귀하여, 시장점유율 5위로까지 추락해 있던 회사를 불과 2개월 20일 만에 점유율 1위로 회복시킨 전설. 손복조 전 대우증권 사장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다.

그가 대우증권에 첫발을 디딘 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상사를 전전하다 모친의 갑작스런 별세로 가족 모두와 일시적으로 귀향까지 하기로 했던 그는 친구의 추천으로 금융계에 뛰어들었다. 증권의 ‘증’자도 모르던 그에게 주어진 직책은 핵심 보직인 ‘기획과장’. 사내에서는 ‘낙하산’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그는 논리와 실력으로 정면 돌파를 택했다. 그의 무기는 업계의 관행이 아닌 ‘법전’이었다. 증권거래법규를 밤새 파고들어 누구보다 해박한 논리로 무장했다. 그의 날카로운 분석과 통찰력에 베테랑들도 혀를 내둘렀고, ‘이방인’은 서서히 조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눈에 비친 80년대 증권업계는 화려했지만 위태로웠다. 자기자본 규모가 턱없이 취약하여 고객 예탁금과 하루짜리 단기자금인 ‘콜론(Call Loan)’으로 연명하는 기형적 구조. 그는 ‘증권회사는 돈이 없다’는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일본 주재원 시절, 선진 금융사들의 철저한 리스크 관리를 목도하며 그는 한국 증권업계에 다가올 유동성 위기를 직감했다.
예감은 현실이 됐다. 1995년 본사 기획실장으로 복귀한 그는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혹독한 구조조정의 칼을 빼 들었다. 방만하게 운영되던 주식과 부동산 자산을 정리하고, 장부 밖에서 곪아가던 해외 부실 펀드를 수면 위로 끌어내 정리했다. 이는 IMF 외환위기가 닥치기 불과 1년 남짓 전의 일이었다. 동서증권, 고려증권 등 경쟁사들이 유동성 위기로 줄줄이 무너져 내릴 때, 대우증권은 그의 선제적 대응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하고 오히려 더욱 단단해졌다.

하지만 영광은 길지 않았다.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대우증권은 산업은행의 자회사가 됐고, 그는 하루아침에 조직을 떠나야 했다. 심지어 회사를 그만두고 2년 이상이나 경과한 시점에 발생한 매매 허수 주문 사고의 책임자로 지목되어 징계를 받는 일까지 겪기도 했다. 전산 시스템 상의 중요 설계 오류에 대한 사고였음에도 그 실제 지시자와 실행자는 징계 대상에서 제외하고 단지 시스템 개발 종료 시점에 업무 책임자의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징계처분과 관련한 사전 조사나 청문 없이 일방적으로 행한 조치였다. 억울함과 배신감은 그에게 처음으로 ‘권력 의지’라는 것을 심어주었다. “내가 돌아가서 반드시 회사를 되살려 놓겠다.”

2004년, 그의 다짐은 현실이 됐다. 업계 5위로 추락한 친정 대우증권의 CEO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다. 그에게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는 ‘그 당시 결산기였던 익년 3월 한 달간 실적만으로도 1등을 되찾자’는 명확하고 강렬한 목표를 제시했다. 모든 평가 기준을 ‘시장 점유율’ 하나로 통일하고, 전국 지점에 목표를 50%씩 상향 배분하며 무한 경쟁의 불을 붙였다. 꽃다발과 피자가 1등 지점으로 날아갔고, 사장은 격려를 위해 전국을 누볐다. 잠자고 있던 대우증권의 DNA가 깨어났다. 모두가 불가능이라던 목표는 취임 2개월 20일 만에 달성됐다. ‘손복조 신화’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손복조 사장과의 일문일답이다.



  • 박혁진

    대우증권에는 어떻게 입사하게 되셨습니까?

  • 손복조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금융 쪽이 아닌 율산실업 같은 일반 상사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회사를 거치는 동안 회사가 파산하는 등 불안정한 시기를 겪었고, 안정적인 직장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님의 갑작스런 별세로 고향에서 1년여 병환 중인 아버님을 모시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직장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대우증권 인사 담당자가 대학교 친구여서 인연이 닿았습니다. 당시 삼보증권과 합병한 직후라 인재가 필요했고, 마침 기획과장이 해외 부서로 가고 싶어 해 자리가 비는 타이밍이었습니다. 증권업 경험이 전혀 없던 제게 기획과장이라는 중요한 보직이 주어진 것은 지금 생각하면 여러 상황이 겹친 운명적인 일이었습니다.



  • 박혁진

    대우증권은 어떻게 20년간 독보적인 1위를 할 수 있었습니까?

  • 손복조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1983년 당시 업계 1위였던 삼보증권을 합병하면서 자본금, 점포망, 인력 등 모든 면에서 경쟁사들의 두 배가 넘는 압도적인 규모를 갖췄습니다. 규제 산업이었기 때문에 이 격차를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죠. 둘째, 유능했던 김창희 사장님이 20년 가까이 장기 경영을 했습니다. 전 세계의 위대한 조직들은 예외 없이 훌륭한 지도자가 오랜 기간 이끌어온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김우중 회장님께서 100% 권한을 위임(임파워먼트)했습니다. 그룹의 다른 사업이 워낙 크고 바빠서이기도 했지만, 경영을 전적으로 믿고 맡겼기 때문에 소신 있는 경영이 가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입사원을 1년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등 인재 경영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 박혁진

    인터뷰 내내 ‘증권회사는 돈이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 손복조

    과거 증권사들은 자기자본이 정말 너무나 취약했습니다. 은행의 경우는 자기자본이나 기타 차입금 외에 고객 예금을 활용하여 일상 업무를 영위할 여지가 많습니다. 하지만 증권회사의 경우는 고객예탁금을 100% 외부 기관에 예치하게 되어 있고 회사채 발행과 같은 외부 차입이 활성화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일상적인 필요 업무자금도 없어 하루짜리 초단기 자금인 ‘콜론(Call Loan)’을 매일 수천억씩 빌려서 영업을 했습니다. 이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은 구조로, 시장 상황이 나빠지면 언제든 유동성 위기로 무너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IMF 외환위기 전부터 이 문제를 직시하고 있었고, 동서·고려증권 등 부실한 회사와의 콜 거래를 선제적으로 끊어 대우증권이 입을 수 있었던 수백억의 손실을 막았습니다.

  • 박혁진

    1995년 기획실장으로 복귀해 단행한 구조조정이 IMF 위기 극복에 결정적이었다고 하셨습니다.

  • 손복조

    그렇습니다. 7년간 일본 주재원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그동안 회사는 모든 면에서 오히려 퇴보한 상태였습니다. 장부상 자기자본 1조 원은 실질적으로 모두 잠식된 상태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해외 부실도 심각했죠. 저는 즉시 방만하게 보유하던 주식과 부동산 등 무수익 자산을 모두 처분하고, 해외 현지법인들이 암암리에 운영하던 부실 펀드를 정리했습니다. 모두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이는 회사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이 조치 덕분에 IMF가 터졌을 때 대우증권은 다른 회사들과 달리 매우 건강한 상태에서 위기를 맞을 수 있었습니다.



  • 박혁진

    2004년 CEO로 복귀해 3개월도 안 돼 업계 5위에서 1위로 올려놓은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 손복조

    목표를 단순하고 명확하게 설정한 것이 핵심입니다. ‘내년 3월, 단 한 달만이라도 시장 점유율 1위를 되찾자’는 자존심 회복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평가 기준을 ‘목표 대비 달성률’ 하나로 통일하고, 전 지점의 목표를 일괄적으로 50% 상향했습니다.

    그리고 1등부터 120등까지의 순위를 실시간으로 공개하며 선의의 경쟁을 극대화했습니다. 1등 지점에는 피자와 꽃다발을 보내고 제가 직접 찾아가 격려했습니다. 잠자고 있던 직원들의 자부심과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시장 상황도 운 좋게 따라주었고요.

  • 박혁진

    대우증권 사장으로서 이루지 못해 아쉬운 꿈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 손복조

    자기자본을 5조 원까지 키워 명실상부한 ‘글로벌 투자은행(IB)’의 기틀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연임이 되었다면 매년 1조 원씩 이익을 내 자본을 축적하고, 그 자기자본의 힘으로 최소한 수백억 원 규모의 투자딜을 과감히 진입해서 투자수익을 극대화 하는 진짜 투자은행 업무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연임이 되지 못해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3시간 10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사진, 영상 등 본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대우재단에 있습니다.



손복조 SOHN Bok-Jo

  • 1951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 1976

    율산실업 입사

  • 1984

    대우증권 입사(과장)

  • 1990

    대우증권 동경사무소장

  • 1995

    대우증권 기획실장

  • 1997

    대우증권 기업금융본부장

  • 1999

    대우증권 리서치센터 IT사업본부장

  • 2002

    LG선물 대표이사

  • 2004

    대우증권 대표이사 사장

  • 2008

    토러스투자증권 창업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6월 30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손복조 전 대우증권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News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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