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원 전 대우경제연구소 회장

‘전설의 경제부 기자, 대우 브랜드를 대중에 심다’

2026.04.15.

김용원 전 대우경제연구소 회장

‘전설의 경제부 기자, 대우 브랜드를 대중에 심다’

2026.04.15.


'대우'라는 브랜드는 한때 남성적이고, 수출 지향적인 B2B 기업의 상징이었다. 그런 대우가 TV, 냉장고 등 소비재를 앞세워 안방 시장을 공략하고, 친숙한 브랜드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 언론인의 변신이 있었다. 조선일보 최연소 경제부장, 편집국장을 지낸 김용원 전 대우전자 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수출만 알던 대우그룹에 소비자의 마음을 얻는 ‘이미지’의 중요성을 심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고 회고했다.

1959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촉망받는 경제부 기자로 활동하던 그와 대우의 인연은 1960년대 후반 시작됐다. 창업 초기,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았음에도 젊은 경제부장에게 보여준 김 회장의 통 큰 배려에 감명받은 그는 이후 정부 관료와 기업인들에게 ‘젊고 유능한 기업인 김우중’을 알리는 자발적 홍보대사가 되었다.

그 인연은 1975년 언론계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대우그룹 합류로 이어졌다. 김 회장은 그에게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비서실(훗날 기획조정실)을 맡겼다. 당시 100여 명에 불과했던 대우실업에서 그는 사업가 출신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기업의 체계를 잡고, 대외 이미지를 구축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김우중 회장이 사업의 최전선에서 뛴다면, 나는 그 사업이 대중에게 어떻게 비칠지를 고민하는 역할이었다”며 “대우 합창단을 만들고, 무의촌에 병원을 건립하는 등 공익사업을 통해 대우의 이미지를 높이는 일에 주력했다”고 말했다.
◇ ‘제품’ 대신 ‘감성’… 방문판매와 잡지로 여심을 공략하다

김 전 회장의 역량이 만개한 곳은 1980년대 중반부터 8년간 이끈 대우전자였다. 당시 대우는 부실기업이던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막 인수한 상태였다. 금성사와 삼성전자가 양분하던 시장에서 ‘후발주자’, ‘부실기업 인수’라는 꼬리표를 떼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정공법 대신 차별화 전략을 택했다. ‘남성적인 대우’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소비의 주체인 여성을 정면으로 공략했다. 업계 최초로 1만 명에 달하는 주부 사원을 채용해 방문판매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들의 활동을 돕기 위해 여성 교양지 ‘삶과 꿈’을 창간해 무료로 배포했다. 그는 “문을 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품질 좋은 잡지는 광고 전단보다 효과적으로 소비자 마음의 문을 여는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대리점 개업 시에는 여성 브라스 밴드를 동원해 지역 축제로 만들고, 성악 전공자들로 구성된 전문 합창단을 운영하며 ‘문화의 대우’ 이미지를 심었다. 이러한 감성적이고 섬세한 접근은 대우전자를 단기간에 ‘가전 3사’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내 인생의 두 기둥, 조선일보 17년과 대우 17년”

그는 김우중 회장에 대해 “수많은 부실기업을 인수하면서도 실패한 적이 없는,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판단력을 지닌 경영자”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내가 돈 버는 일보다 쓰는 일을 많이 한다고 씹히기도 했지만, 김 회장은 나의 역할을 믿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다”며 깊은 신뢰를 표했다.

17년간의 대우 생활을 마감하고 출판사를 운영하며 조용한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조선일보 17년, 대우 17년이 내 인생의 두 기둥”이라며 “대우가 지금은 해체되어 안타깝지만, 김우중 회장과 함께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은 여전하다”고 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과의 첫 만남은 어땠습니까?

  • 김용원

    1960년대 후반 경제부장 시절, 선배 소개로 만났어요. 김우중 회장이 술을 안 해서 식사만 하고 헤어졌는데 며칠 뒤 ‘코티나’ 승용차 한 대가 집으로 배달됐어요. 창업 초기라 넉넉지 않았을 텐데 보여준 배려에 깊은 인상을 받았죠. 차 한 대 외에 어떤 부탁도 없었어요. 이후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진해서 김 회장과 대우를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됐죠.

  • 박혁진

    언론인에서 기업인으로 변신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 김용원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중 언론 파동을 겪고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김 회장이 손을 내밀었어요. 당시 대우는 직원이 100명 남짓한 작은 회사였어요. 처음에는 비서실을 만들어 김 회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주로 사업보다는 기업의 체계를 잡고, 대외 이미지를 구축하는 일을 했죠. 김 회장이 나를 골프도 못 치게 하려고 주말마다 회의를 소집할 정도로 일이 많았지만, 정말 신나게 일했어요.




  • 박혁진

    대우전자를 맡아 단기간에 성장시킨 비결은 무엇인가요?

  • 김용원

    후발주자로서 금성과 삼성을 따라잡기 위해서 ‘가전 3사’ 이미지 구축에 주력했습니다. 디자인, 광고, 판매, 기술 제휴를 우리 강점으로 만들어 나갔죠. 특히, 소비의 주체인 여성을 어떻게 공략할까 고민하다가, 업계 최초로 주부사원 방문판매 제도를 도입했어요. 그전까지는 가전 제품을 방문 판매한다는 건 생각도 못할 때였어요.

    하지만 무작정 찾아가면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교양 잡지 ‘삶과 꿈’을 만들어 무료로 나눠주며 마음의 문을 열게 했죠. 한 발짝만 들어서게 되면 친근감이 생겨서 얘기도 되고, 그 집 물건도 보게 되고, 드나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대리점을 오픈할 땐, 여성 브라스 밴드를 동원해 동네 축제처럼 만들고, 전문 합창단을 운영해 ‘문화’ 이미지를 한층한층 더해 나갔어요.

  • 박혁진

    당시 대우는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했는데, 내부 반발은 없었나요?

  • 김용원

    수출 위주의 대우그룹 사람들로서는 무척 낯선 전략이었을 거예요. “돈 버는 일은 안 하고 돈 쓰는 일만 한다”고 씹히기도 했죠. 하지만 김우중 회장이 나 같은 사람을 써서 어떻게든지 새로운 물길을 튼 거죠. 김우중 회장은 시작부터 꿈을 확 키웠기 때문에, (내가) 조그만 상사의 뭘 한 게 아니라 그룹 CI 작업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를 다 했던 거예요. 나는 대우의 기업 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 박혁진

    광주 하남공단에 가장 먼저 진출한 특별한 배경이 있습니까?

  • 김용원

    전략적 판단이었죠. 당시 경쟁사들은 모두 영남에 기반을 두고 있어 상대적으로 호남이 취약했어요. 우리는 그 허점을 파고들어 호남에 먼저 진출하기로 했어요. (1985년) 하남공단에 누구도 들어오지 않을 때 가장 먼저 들어가 선점한 덕분에, 이후 호남 시장에서 높은 시장 점유율을 기록할 수 있었죠. 하남공단에 간 건 대우전자의 성공 케이스 중 하나입니다. 어떻든 우리가 열악한 호남 지역에 발판을 만들었으니까요.

  • 박혁진

    대우재단과 대우병원 설립에도 참여하셨다고요?

  • 김용원

    (1978년 김우중 회장이 사재를 출연한 직후) 김효규 박사가 세브란스 부총장을 하고 계실 때, 그분을 중심으로 취약한 지역에 ‘대우병원’을 짓게 됐어요. 당시 기조실장을 할 때여서, 전국을 다니면서 병원 짓는 작업을 했죠.

    특히, 낙도오지 특수성을 고려해 의료진 구성에 신경을 썼습니다. 이한빈 선생(대우재단 초대 이사장)과 김효규 부총장하고 상의해서, 아래 사람부터 뽑는 게 아니라 역으로 병원장을 먼저 뽑고, 그다음에 의사를 뽑고, 간호사를 뽑는 방식으로 스태프를 꾸렸어요. 세브란스 중심으로 갖춰져서 그때는 참 멋있게 됐습니다. 아주 모범 케이스 중 하나가 됐죠. 병원이 없는 무의촌에 종합병원을, 그것도 30병상 이상의 제대로 된 병원을 지어줬으니까요.




  • 박혁진

    ‘대우맨’으로서의 삶을 돌이켜본다면?

  • 김용원

    조선일보에서 17년, 대우에서 17년을 보냈어요. 내 인생의 두 기둥입니다. 대우에 와서 많은 것을 배웠고, 김 회장으로부터 많은 혜택도 받았어요. 대우가 해체된 것은 마음 아프지만, 김우중 회장과 함께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그것도 작은 획이 아니라 큰 획을 긋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은 여전합니다. 후회는 없어요.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40분간 진행됐습니다. 회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김용원 KIM Yong-Won

  • 1935

    출생, 서울대학교 행정학과

  • 1959

    조선일보 입사 (경제부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 1975

    대우실업 입사

  • 1979

    대우개발 부사장

  • 1982

    대우기획조정실 실장 사장

  • 1983

    대우전자 대표이사 사장

  • 1991

    대우경제연구소 회장

  • 1991

    도서출판 삶과꿈 창립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6월 27일 금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김용원 전 대우경제연구소 회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대우'라는 브랜드는 한때 남성적이고, 수출 지향적인 B2B 기업의 상징이었다. 그런 대우가 TV, 냉장고 등 소비재를 앞세워 안방 시장을 공략하고, 친숙한 브랜드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 언론인의 변신이 있었다. 조선일보 최연소 경제부장, 편집국장을 지낸 김용원 전 대우전자 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수출만 알던 대우그룹에 소비자의 마음을 얻는 ‘이미지’의 중요성을 심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고 회고했다.

1959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촉망받는 경제부 기자로 활동하던 그와 대우의 인연은 1960년대 후반 시작됐다. 창업 초기,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았음에도 젊은 경제부장에게 보여준 김 회장의 통 큰 배려에 감명받은 그는 이후 정부 관료와 기업인들에게 ‘젊고 유능한 기업인 김우중’을 알리는 자발적 홍보대사가 되었다.

그 인연은 1975년 언론계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대우그룹 합류로 이어졌다. 김 회장은 그에게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비서실(훗날 기획조정실)을 맡겼다. 당시 100여 명에 불과했던 대우실업에서 그는 사업가 출신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기업의 체계를 잡고, 대외 이미지를 구축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김우중 회장이 사업의 최전선에서 뛴다면, 나는 그 사업이 대중에게 어떻게 비칠지를 고민하는 역할이었다”며 “대우 합창단을 만들고, 무의촌에 병원을 건립하는 등 공익사업을 통해 대우의 이미지를 높이는 일에 주력했다”고 말했다.
◇ ‘제품’ 대신 ‘감성’… 방문판매와 잡지로 여심을 공략하다

김 전 회장의 역량이 만개한 곳은 1980년대 중반부터 8년간 이끈 대우전자였다. 당시 대우는 부실기업이던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막 인수한 상태였다. 금성사와 삼성전자가 양분하던 시장에서 ‘후발주자’, ‘부실기업 인수’라는 꼬리표를 떼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정공법 대신 차별화 전략을 택했다. ‘남성적인 대우’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소비의 주체인 여성을 정면으로 공략했다. 업계 최초로 1만 명에 달하는 주부 사원을 채용해 방문판매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들의 활동을 돕기 위해 여성 교양지 ‘삶과 꿈’을 창간해 무료로 배포했다. 그는 “문을 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품질 좋은 잡지는 광고 전단보다 효과적으로 소비자 마음의 문을 여는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대리점 개업 시에는 여성 브라스 밴드를 동원해 지역 축제로 만들고, 성악 전공자들로 구성된 전문 합창단을 운영하며 ‘문화의 대우’ 이미지를 심었다. 이러한 감성적이고 섬세한 접근은 대우전자를 단기간에 ‘가전 3사’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내 인생의 두 기둥, 조선일보 17년과 대우 17년”

그는 김우중 회장에 대해 “수많은 부실기업을 인수하면서도 실패한 적이 없는,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판단력을 지닌 경영자”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내가 돈 버는 일보다 쓰는 일을 많이 한다고 씹히기도 했지만, 김 회장은 나의 역할을 믿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다”며 깊은 신뢰를 표했다.

17년간의 대우 생활을 마감하고 출판사를 운영하며 조용한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조선일보 17년, 대우 17년이 내 인생의 두 기둥”이라며 “대우가 지금은 해체되어 안타깝지만, 김우중 회장과 함께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은 여전하다”고 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과의 첫 만남은 어땠습니까?

  • 김용원

    1960년대 후반 경제부장 시절, 선배 소개로 만났어요. 김우중 회장이 술을 안 해서 식사만 하고 헤어졌는데 며칠 뒤 ‘코티나’ 승용차 한 대가 집으로 배달됐어요. 창업 초기라 넉넉지 않았을 텐데 보여준 배려에 깊은 인상을 받았죠. 차 한 대 외에 어떤 부탁도 없었어요. 이후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진해서 김 회장과 대우를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됐죠.

  • 박혁진

    언론인에서 기업인으로 변신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 김용원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중 언론 파동을 겪고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김 회장이 손을 내밀었어요. 당시 대우는 직원이 100명 남짓한 작은 회사였어요. 처음에는 비서실을 만들어 김 회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주로 사업보다는 기업의 체계를 잡고, 대외 이미지를 구축하는 일을 했죠. 김 회장이 나를 골프도 못 치게 하려고 주말마다 회의를 소집할 정도로 일이 많았지만, 정말 신나게 일했어요.



  • 박혁진

    대우전자를 맡아 단기간에 성장시킨 비결은 무엇인가요?

  • 김용원

    후발주자로서 금성과 삼성을 따라잡기 위해서 ‘가전 3사’ 이미지 구축에 주력했습니다. 디자인, 광고, 판매, 기술 제휴를 우리 강점으로 만들어 나갔죠. 특히, 소비의 주체인 여성을 어떻게 공략할까 고민하다가, 업계 최초로 주부사원 방문판매 제도를 도입했어요. 그전까지는 가전 제품을 방문 판매한다는 건 생각도 못할 때였어요.

    하지만 무작정 찾아가면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교양 잡지 ‘삶과 꿈’을 만들어 무료로 나눠주며 마음의 문을 열게 했죠. 한 발짝만 들어서게 되면 친근감이 생겨서 얘기도 되고, 그 집 물건도 보게 되고, 드나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대리점을 오픈할 땐, 여성 브라스 밴드를 동원해 동네 축제처럼 만들고, 전문 합창단을 운영해 ‘문화’ 이미지를 한층한층 더해 나갔어요.

  • 박혁진

    당시 대우는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했는데, 내부 반발은 없었나요?

  • 김용원

    수출 위주의 대우그룹 사람들로서는 무척 낯선 전략이었을 거예요. “돈 버는 일은 안 하고 돈 쓰는 일만 한다”고 씹히기도 했죠. 하지만 김우중 회장이 나 같은 사람을 써서 어떻게든지 새로운 물길을 튼 거죠. 김우중 회장은 시작부터 꿈을 확 키웠기 때문에, (내가) 조그만 상사의 뭘 한 게 아니라 그룹 CI 작업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를 다 했던 거예요. 나는 대우의 기업 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 박혁진

    광주 하남공단에 가장 먼저 진출한 특별한 배경이 있습니까?

  • 김용원

    전략적 판단이었죠. 당시 경쟁사들은 모두 영남에 기반을 두고 있어 상대적으로 호남이 취약했어요. 우리는 그 허점을 파고들어 호남에 먼저 진출하기로 했어요. (1985년) 하남공단에 누구도 들어오지 않을 때 가장 먼저 들어가 선점한 덕분에, 이후 호남 시장에서 높은 시장 점유율을 기록할 수 있었죠. 하남공단에 간 건 대우전자의 성공 케이스 중 하나입니다. 어떻든 우리가 열악한 호남 지역에 발판을 만들었으니까요.

  • 박혁진

    대우재단과 대우병원 설립에도 참여하셨다고요?

  • 김용원

    (1978년 김우중 회장이 사재를 출연한 직후) 김효규 박사가 세브란스 부총장을 하고 계실 때, 그분을 중심으로 취약한 지역에 ‘대우병원’을 짓게 됐어요. 당시 기조실장을 할 때여서, 전국을 다니면서 병원 짓는 작업을 했죠.

    특히, 낙도오지 특수성을 고려해 의료진 구성에 신경을 썼습니다. 이한빈 선생(대우재단 초대 이사장)과 김효규 부총장하고 상의해서, 아래 사람부터 뽑는 게 아니라 역으로 병원장을 먼저 뽑고, 그다음에 의사를 뽑고, 간호사를 뽑는 방식으로 스태프를 꾸렸어요. 세브란스 중심으로 갖춰져서 그때는 참 멋있게 됐습니다. 아주 모범 케이스 중 하나가 됐죠. 병원이 없는 무의촌에 종합병원을, 그것도 30병상 이상의 제대로 된 병원을 지어줬으니까요.



  • 박혁진

    ‘대우맨’으로서의 삶을 돌이켜본다면?

  • 김용원

    조선일보에서 17년, 대우에서 17년을 보냈어요. 내 인생의 두 기둥입니다. 대우에 와서 많은 것을 배웠고, 김 회장으로부터 많은 혜택도 받았어요. 대우가 해체된 것은 마음 아프지만, 김우중 회장과 함께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그것도 작은 획이 아니라 큰 획을 긋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은 여전합니다. 후회는 없어요.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40분간 진행됐습니다. 회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김용원 KIM Yong-Won

  • 1935

    출생, 서울대학교 행정학과

  • 1959

    조선일보 입사 (경제부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 1975

    대우실업 입사

  • 1979

    대우개발 부사장

  • 1982

    대우기획조정실 실장 사장

  • 1983

    대우전자 대표이사 사장

  • 1991

    대우경제연구소 회장

  • 1991

    도서출판 삶과꿈 창립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6월 27일 금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
김용원 전 대우경제연구소 회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인터뷰, 정리)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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