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호 전 대우자동차 사장

‘세계경영 노병에게 후회란 없다’

2026.04.01.

강병호 전 대우자동차 사장

‘세계경영 노병에게 후회란 없다’

2026.04.01.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도 고시 대신 국책은행을 택했던 한 청년이 있었다. 안정된 은행원의 길을 걷던 그는 1975년, 당시 신흥 기업이던 대우그룹에 합류하며 인생의 항로를 바꾼다. 적극적인 업무 스타일로 입사 두 달 만에 김우중 회장의 눈에 띈 그는, 김 회장의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맡기는' 스타일 덕에 신입사원 시절부터 해외 미개척지를 홀로 누벼야 했다. 바로 강병호 전 대우자동차 사장의 이야기다.

그의 대우 인생은 '세계경영'의 축소판과 같았다. 1976년, 모두가 중동으로 향할 때 그는 남미 에콰도르로 날아갔다. 현지 시장과 대우의 사업 포트폴리오가 맞지 않아 고전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중화학 공업인 '조선'으로 돌파구를 열었다. 에콰도르 해군으로부터 따낸 선박 수주 계약은 대우가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기업으로 도약하는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리비아 건설 현장에 투입될 기자재 조달과 금융 업무를 맡았고, 런던에서는 대우 세계경영의 '금융 신경망' 역할을 한 BFC 설립을 주도했다. 1991년 귀국 후에는 그룹 기조실에서 GM과의 결별 협상을 1년 만에 성공시키며 대우자동차 독자 경영의 길을 열었다.

외환위기 속에서 대우자동차 사장을 맡아 그룹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그는 "회장님을 더 잘 보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털어놓으면서도, "월급쟁이가 아닌 주인으로서 회사를 만들어 간다는 심정으로 일했기에 후회는 없다"고 단언했다. '대우는 나의 전부였다'는 그의 말에는 '대우 신화'를 온몸으로 일궈낸 '노병'의 자부심이 짙게 묻어났다. 아래는 강병호 전 사장과의 일문일답이다.

  • 박혁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산업은행에 입사한 계기가 독특합니다.

  • 강병호

    친구 따라 법대에 갔는데 저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특히 지방에서 올라와 고시 합격만을 위해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며 '저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죠. 그래서 고시는 1차 시험조차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 병역 미필자가 갈 수 있는 직장이 국책은행 등 몇 군데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친구들과 "너는 한국은행, 나는 산업은행" 하는 식으로 정해서 시험을 본 겁니다. 그렇게 9년 반을 은행원으로 일했습니다.

  • 박혁진

    안정적인 국책은행을 떠나 대우로 오셨습니다. 당시 대우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 강병호

    솔직히 처음엔 '이런 조직이 있나' 싶었습니다. 일본식 조직 문화가 남아있던 은행과 달리, 대우는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자유분방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문화가 마음에 들더군요.

    일을 스스로 찾아서 처리하면 그대로 인정해주니 회사에 이로운 방향으로 모든 게 정리됐습니다. 개인의 개성이 강했지만, 그만큼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아마 그런 점이 대우가 크게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겁니다. 지금의 잘나가는 IT 기업들처럼 70년대 대우에는 그런 문화가 있었습니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과는 고등학교 선후배라는 것 외에는 인연이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신입사원 시절부터 깊은 신뢰를 얻게 되셨습니까?

  • 강병호

    원래 동양증권에 지원했는데, 면접 때 그 자리에 계셨던 회장님이 저를 점찍으셨는지 발령이 대우실업 비서실로 났습니다. 그게 첫 인연입니다. 입사 후 비서실에서 일하며 정리되지 않은 업무들을 자발적으로 찾아서 처리하고 결재를 올렸는데, 그런 적극적인 모습을 좋게 보신 것 같습니다.

    입사 두 달 만인 12월 초에 회장님이 "같이 출장 가자"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출발 당일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너 혼자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해외여행도 처음인데 스위스 취리히, 뉴욕, 남미까지 혼자 다니며 일을 처리했습니다. 회장님은 그렇게 사람을 테스트하고 파악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일을 맡기고 믿어주시니 저도 없는 재주로나마 최선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 박혁진

    1976년, 대우맨 최초로 남미 에콰도르에 파견되셨습니다.

  • 강병호

    입사 초기 출장을 계기로 에콰도르 지점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처음엔 도로 포장 공사 계약을 성사시켰지만, 막상 무역을 하려니 할 게 없었습니다. 당시 대우는 대량 생산, 대규모 시장 위주였는데 남미는 소량 다품종 시장이라 맞지 않았던 거죠. 1년 가까이 '다 그만둬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고민했습니다.

  • 박혁진

    그 돌파구가 '조선' 수주였습니다. 경공업 위주였던 대우에겐 큰 도전이었을 텐데요.

  • 강병호

    당시 에콰도르는 석유가 나면서 돈이 넘치던 시절이라 생활 수준이 우리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중화학 공업뿐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본사 선박부에 정보를 보내 설득했고, 결국 에콰도르 해군과 선박 수주 계약을 맺게 됐습니다. 현대도 뛰어들었고 폴란드 업체는 말도 안 되는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등 경쟁이 치열했지만, 결국 우리가 이겼습니다. 이 계약이 아마 대한조선공사가 1억 불 넘는 수주를 한 첫 사례였을 겁니다.




  • 박혁진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런던에서 BFC(British Finance Center) 설립을 주도하셨습니다. BFC는 어떤 조직이었나요?

  • 강병호

    리비아 등 해외 건설 프로젝트가 커지면서 자재 조달과 금융 지원을 할 해외 거점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엔 프랑크푸르트였지만, 금융 중심지인 런던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해 기능을 옮겼고 그것이 BFC가 된 겁니다. 프로젝트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해외 금융 센터'였을 뿐입니다.

  • 박혁진

    일각에서는 '비자금 창구'라는 오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강병호

    '비자금 창구'라는 말은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BFC의 모든 자금은 기장(記帳)이 되기 때문에 비자금을 만들 구조가 아닙니다.




  • 박혁진

    1991년 귀국해 그룹 기조실에서 GM과의 합작 청산 협상을 담당하셨습니다.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 강병호

    1년이 꼬박 걸렸습니다. GM이 수년에 걸쳐 총 5억 불을 투자했는데, 우리는 원금 5억 불만 돌려주고 지분 50%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당연히 GM에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죠. 당시 부평, 창원 공장의 부동산 가치만 해도 투자 원금을 훌쩍 넘었으니까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삿대질하며 싸웠습니다. 저는 앞에서 버티고, 회장님은 뒤에서 GM과 친분이 있는 인맥을 통해 설득하는 투트랙 전략을 썼습니다. 결국 우리 제안대로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 박혁진

    IMF 외환위기 속에서 대우자동차 사장을 맡으셨고, 그룹의 마지막을 지켜보셨습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 강병호

    우리가 회장님을 더 잘 모셨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회장님은 천성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개발하는 분인데, 옆에서 '이건 너무 이릅니다', '이건 너무 큽니다'라며 타이밍을 조절해 드렸어야 했습니다.

    특히 자동차 사업을 크게 벌리실 때 기회는 좋았지만, 우리가 그걸 감당할 능력이 있었는지… 여러 회사를 동시에 인수하기보다 몇 군데에 집중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되는 건 되지만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 박혁진

    개인적인 원망이나 후회는 없으십니까?

  • 강병호

    원망이 있다면 제가 제일 많아야 할 사람입니다. 회장님이 해외에 계시는 바람에 저 혼자 5년 실형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저는 회장님께 딱 한 가지, '나를 믿어줬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믿어주셨기에 없는 재주로나마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섭섭한 마음을 지우고 지내기로 했습니다.

  • 박혁진

    사장님께 '대우'는 무엇이었습니까?

  • 강병호

    나의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월급쟁이가 아니라 ‘회사를 함께 만들어 간다’는 심정으로 일했습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없어진 지금도 대우 선후배들이 만나면 어느 동창들보다 끈끈한 겁니다. 대우에 다녔다는 것에 대해 어떤 후회도 없으며, 지금도 누구에게든 떳떳하게 이야기합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30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강병호 KANG Byung-Ho

  • 1943

    출생, 서울대학교 법학과

  • 1966

    한국산업은행 입사

  • 1975

    대우실업 비서실 입사(부장)

  • 1981

    대우개발 런던지사, 에콰도르 퀴토지사

  • 1983

    ㈜대우 런던지사장 및 유럽본부장

  • 1991

    대우기획조정실 부사장 및 대우그룹 해외관리본부장

  • 1995

    ㈜대우 무역부문 사장

  • 1998

    대우자동차 사장

  • 1999

    대우통신 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6월 16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자
강병호 전 대우자동차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도 고시 대신 국책은행을 택했던 한 청년이 있었다. 안정된 은행원의 길을 걷던 그는 1975년, 당시 신흥 기업이던 대우그룹에 합류하며 인생의 항로를 바꾼다. 적극적인 업무 스타일로 입사 두 달 만에 김우중 회장의 눈에 띈 그는, 김 회장의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맡기는' 스타일 덕에 신입사원 시절부터 해외 미개척지를 홀로 누벼야 했다. 바로 강병호 전 대우자동차 사장의 이야기다.

그의 대우 인생은 '세계경영'의 축소판과 같았다. 1976년, 모두가 중동으로 향할 때 그는 남미 에콰도르로 날아갔다. 현지 시장과 대우의 사업 포트폴리오가 맞지 않아 고전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중화학 공업인 '조선'으로 돌파구를 열었다. 에콰도르 해군으로부터 따낸 선박 수주 계약은 대우가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기업으로 도약하는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리비아 건설 현장에 투입될 기자재 조달과 금융 업무를 맡았고, 런던에서는 대우 세계경영의 '금융 신경망' 역할을 한 BFC 설립을 주도했다. 1991년 귀국 후에는 그룹 기조실에서 GM과의 결별 협상을 1년 만에 성공시키며 대우자동차 독자 경영의 길을 열었다.

외환위기 속에서 대우자동차 사장을 맡아 그룹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그는 "회장님을 더 잘 보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털어놓으면서도, "월급쟁이가 아닌 주인으로서 회사를 만들어 간다는 심정으로 일했기에 후회는 없다"고 단언했다. '대우는 나의 전부였다'는 그의 말에는 '대우 신화'를 온몸으로 일궈낸 '노병'의 자부심이 짙게 묻어났다. 아래는 강병호 전 사장과의 일문일답이다.



  • 박혁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산업은행에 입사한 계기가 독특합니다.

  • 강병호

    친구 따라 법대에 갔는데 저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특히 지방에서 올라와 고시 합격만을 위해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며 '저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죠. 그래서 고시는 1차 시험조차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 병역 미필자가 갈 수 있는 직장이 국책은행 등 몇 군데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친구들과 "너는 한국은행, 나는 산업은행" 하는 식으로 정해서 시험을 본 겁니다. 그렇게 9년 반을 은행원으로 일했습니다.

  • 박혁진

    안정적인 국책은행을 떠나 대우로 오셨습니다. 당시 대우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 강병호

    솔직히 처음엔 '이런 조직이 있나' 싶었습니다. 일본식 조직 문화가 남아있던 은행과 달리, 대우는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자유분방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문화가 마음에 들더군요.

    일을 스스로 찾아서 처리하면 그대로 인정해주니 회사에 이로운 방향으로 모든 게 정리됐습니다. 개인의 개성이 강했지만, 그만큼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아마 그런 점이 대우가 크게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겁니다. 지금의 잘나가는 IT 기업들처럼 70년대 대우에는 그런 문화가 있었습니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과는 고등학교 선후배라는 것 외에는 인연이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신입사원 시절부터 깊은 신뢰를 얻게 되셨습니까?

  • 강병호

    원래 동양증권에 지원했는데, 면접 때 그 자리에 계셨던 회장님이 저를 점찍으셨는지 발령이 대우실업 비서실로 났습니다. 그게 첫 인연입니다. 입사 후 비서실에서 일하며 정리되지 않은 업무들을 자발적으로 찾아서 처리하고 결재를 올렸는데, 그런 적극적인 모습을 좋게 보신 것 같습니다.

    입사 두 달 만인 12월 초에 회장님이 "같이 출장 가자"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출발 당일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너 혼자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해외여행도 처음인데 스위스 취리히, 뉴욕, 남미까지 혼자 다니며 일을 처리했습니다. 회장님은 그렇게 사람을 테스트하고 파악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일을 맡기고 믿어주시니 저도 없는 재주로나마 최선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 박혁진

    1976년, 대우맨 최초로 남미 에콰도르에 파견되셨습니다.

  • 강병호

    입사 초기 출장을 계기로 에콰도르 지점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처음엔 도로 포장 공사 계약을 성사시켰지만, 막상 무역을 하려니 할 게 없었습니다. 당시 대우는 대량 생산, 대규모 시장 위주였는데 남미는 소량 다품종 시장이라 맞지 않았던 거죠. 1년 가까이 '다 그만둬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고민했습니다.

  • 박혁진

    그 돌파구가 '조선' 수주였습니다. 경공업 위주였던 대우에겐 큰 도전이었을 텐데요.

  • 강병호

    당시 에콰도르는 석유가 나면서 돈이 넘치던 시절이라 생활 수준이 우리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중화학 공업뿐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본사 선박부에 정보를 보내 설득했고, 결국 에콰도르 해군과 선박 수주 계약을 맺게 됐습니다. 현대도 뛰어들었고 폴란드 업체는 말도 안 되는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등 경쟁이 치열했지만, 결국 우리가 이겼습니다. 이 계약이 아마 대한조선공사가 1억 불 넘는 수주를 한 첫 사례였을 겁니다.



  • 박혁진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런던에서 BFC(British Finance Center) 설립을 주도하셨습니다. BFC는 어떤 조직이었나요?

  • 강병호

    리비아 등 해외 건설 프로젝트가 커지면서 자재 조달과 금융 지원을 할 해외 거점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엔 프랑크푸르트였지만, 금융 중심지인 런던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해 기능을 옮겼고 그것이 BFC가 된 겁니다. 프로젝트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해외 금융 센터'였을 뿐입니다.

  • 박혁진

    일각에서는 '비자금 창구'라는 오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강병호

    '비자금 창구'라는 말은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BFC의 모든 자금은 기장(記帳)이 되기 때문에 비자금을 만들 구조가 아닙니다.



  • 박혁진

    1991년 귀국해 그룹 기조실에서 GM과의 합작 청산 협상을 담당하셨습니다.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 강병호

    1년이 꼬박 걸렸습니다. GM이 수년에 걸쳐 총 5억 불을 투자했는데, 우리는 원금 5억 불만 돌려주고 지분 50%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당연히 GM에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죠. 당시 부평, 창원 공장의 부동산 가치만 해도 투자 원금을 훌쩍 넘었으니까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삿대질하며 싸웠습니다. 저는 앞에서 버티고, 회장님은 뒤에서 GM과 친분이 있는 인맥을 통해 설득하는 투트랙 전략을 썼습니다. 결국 우리 제안대로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 박혁진

    IMF 외환위기 속에서 대우자동차 사장을 맡으셨고, 그룹의 마지막을 지켜보셨습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 강병호

    우리가 회장님을 더 잘 모셨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회장님은 천성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개발하는 분인데, 옆에서 '이건 너무 이릅니다', '이건 너무 큽니다'라며 타이밍을 조절해 드렸어야 했습니다.

    특히 자동차 사업을 크게 벌리실 때 기회는 좋았지만, 우리가 그걸 감당할 능력이 있었는지… 여러 회사를 동시에 인수하기보다 몇 군데에 집중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되는 건 되지만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 박혁진

    개인적인 원망이나 후회는 없으십니까?

  • 강병호

    원망이 있다면 제가 제일 많아야 할 사람입니다. 회장님이 해외에 계시는 바람에 저 혼자 5년 실형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저는 회장님께 딱 한 가지, '나를 믿어줬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믿어주셨기에 없는 재주로나마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섭섭한 마음을 지우고 지내기로 했습니다.

  • 박혁진

    사장님께 '대우'는 무엇이었습니까?

  • 강병호

    나의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월급쟁이가 아니라 ‘회사를 함께 만들어 간다’는 심정으로 일했습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없어진 지금도 대우 선후배들이 만나면 어느 동창들보다 끈끈한 겁니다. 대우에 다녔다는 것에 대해 어떤 후회도 없으며, 지금도 누구에게든 떳떳하게 이야기합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30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강병호 KANG Byung-Ho

  • 1943

    출생, 서울대학교 법학과

  • 1966

    한국산업은행 입사

  • 1975

    대우실업 비서실 입사(부장)

  • 1981

    대우개발 런던지사, 에콰도르 퀴토지사

  • 1983

    ㈜대우 런던지사장 및 유럽본부장

  • 1991

    대우기획조정실 부사장 및 대우그룹 해외관리본부장

  • 1995

    ㈜대우 무역부문 사장

  • 1998

    대우자동차 사장

  • 1999

    대우통신 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6월 16일 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룸 
참석자
강병호 전 대우자동차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News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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