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미수교국을 개척한 건설 외길 60년’ (1부)

2026.2.11.

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미수교국을 개척한 건설 외길 60년’ (1부)

2026.2.11.


1973년, 서울역 앞에는 거대한 회색빛 뼈대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한때 서울의 관문이자 관광 산업의 희망으로 불렸던 교통센터는 공사 중단과 화재를 겪으며 버려진 채 스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모두가 외면하던 그곳에, 젊은 기업가 김우중과 그의 오랜 친구 홍성부가 나타났다. 마치 운명처럼, 홍성부는 김우중의 "건설회사를 한번 해보지 않겠냐?"는 다짜고짜 제안에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쌍용양회에서 잔뼈 굵은 건설본부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그였지만, 김우중과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작은 회사를 인수하며 시작된 대우건설. 12명의 직원이 전부였던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홍성부의 눈은 이미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버려진 교통센터를 오피스 빌딩으로 탈바꿈시키는 혁신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정부의 호텔 계획을 뒤엎는 과감한 결정이었지만, 그의 탁월한 수익성 분석과 "돈은 김 회장님이, 기술과 사람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신뢰로 김우중을 설득했다.

그들은 건물의 단순한 완성을 넘어, 지하 2,400평 공간에 국내 최초로 25m 수영장을 갖춘 최고급 헬스센터를 들이는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이는 직원들의 자부심을 높였고, '대우'라는 이름에 단순히 돈 버는 기업 이상의 가치를 불어넣었다. 대우센터의 성공적인 준공은 대우건설의 실력을 세상에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시 대우다”, “정말 잘 지었다”는 찬사는 단순한 칭찬을 넘어, 대우에 대한 국민과 정부의 신뢰를 쌓는 초석이 되었다.

홍성부는 이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제 드넓은 해외 시장으로 향했다. 당시 수많은 한국 건설업체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래바람 속에서 좌절하고 있을 때, 그는 수단과 리비아라는 아프리카 미수교국에 주목했다. 그는 단순한 건설 하청을 넘어, 자본을 수출하고 건설을 수반하는 선진국형 모델을 제시했다.

  • 박혁진

    대우건설에 합류할 당시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 홍성부

    제가 1973년 대우에 합류하기 전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당시 저는 쌍용양회에서 건설본부장을 맡아 동해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고, 국민대학교 정릉 캠퍼스 이전을 마친 시점이었습니다.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던 중, 언론을 통해 '대우'라는 이름이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것을 접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사업을 잘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서울역 앞에 짓다 만 교통센터를 대우가 인수한다는 기사가 눈에 띄더군요.

    마침 국민대학교에 김우중 회장님의 형님이신 김덕중 교수님이 강의를 오셨습니다. 김덕중 교수님은 저보다 세 살 위였지만, 6.25 전쟁 때문에 복학이 늦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저와 동급으로 함께 공부하고 핸드볼까지 같이 했던, 아주 친한 형님이셨죠. 국민대에서 김덕중 교수님을 졸업 후 처음 만났는데, 자연스럽게 대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김덕중 교수님께서 김우중 회장님이 서울역 교통센터 문제로 걱정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김우중 회장님을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습니다.




  • 박혁진

    그렇게 김우중 회장님을 만나셨군요. 첫 만남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습니까?

  • 홍성부

    1973년 5월 중순쯤이었을 겁니다. 대우센터를 짓기 전, 럭키(LG)가 쓰던 빌딩에 대우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사장실이 따로 없이 김우중 회장이 여기저기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일하고 있더군요. 사무실은 타자 소리로 가득했고, 그야말로 활기 넘치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때 김우중 회장님이 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넌 건설이지? 건설회사 한번 해보지 않겠냐?"라고 물었습니다. 저도 마침 진로를 고민하던 터라, “돈도 많이 안 들고 회사를 만들 수 있다. 자본금은 3천만 원 정도로 하면 된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김 회장님이 “자본금은 내가 낼 테니, 기술하고 사람은 네가 대라”고 하셨고, 50대 50으로 지분을 나누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우건설회사를 만들기로 합의했습니다.

  • 박혁진

    50대 50 지분 제안은 결국 실질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고민이 있었고,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 홍성부

    네, 고등학교 동기 친구와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우리가 개인 자격으로 대우라는 대기업의 대표인 김우중 회장님과 50대 50으로 간다는 것은 나중에 증자나 결정권 문제에서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제가 김 회장님께 “50대 50은 김 회장님이 알아서 하시라. 다만 건설업은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서로 믿지 못하면 건설업은 못한다” 고 말씀드렸습니다. 결제가 신속해야 하고, 영수증 없는 돈도 써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당신이 나를 믿는다면, 50% 지분은 김우중 회장님이 알아서 하시고, 일은 내가 다 책임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김 회장님이 "그러자. 나는 당신을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그렇게 하자"고 하셨고, 그때부터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겁니다. 저는 건설 관련해서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 박혁진

    당시 정부에서 건설업 신규 면허 발급을 중단한 상태였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대우건설을 설립할 수 있었습니까?

  • 홍성부

    당시 대한민국에는 건설회사가 약 600여 개나 있었고, 면허가 너무 많이 나간 상태라 정부에서 신규 면허를 발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존의 면허를 인수해야 했죠. 청주에 있던 604위 건설회사인 영진토건의 건설업 면허를 사들였고, 그 면허를 바탕으로 '대우건설 주식회사'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1973년 11월 1일, 직원 12명과 함께 LG가 쓰던 빌딩에서 사무실을 시작했습니다.

  • 박혁진

    대우건설의 첫 번째 과제가 서울역 앞 교통센터 건설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그 건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대우센터로 탄생하게 되었습니까?

  • 홍성부

    그 교통센터는 서울의 관문이 되는 중요한 장소였는데, 10층 이상 올라갈 수 있는 골조가 짜여 있었고, 5층까지는 완공된 상태에서 공사가 중단되어 몇 년째 방치돼 있었습니다. 심지어 불까지 났었죠. 제가 쌍용에 있을 때 그 안전 진단을 맡아 건물을 점검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관광 산업 활성화를 위해 그 지역을 관광산업 구역으로 지정하고 호텔을 포함한 복합 빌딩으로 계획했습니다. 대우센터를 인수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을 갖는 것을 넘어, '호텔을 지어 관광 산업에 기여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김우중 회장님은 몇몇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던 거죠. 본인이 부산 공장을 지으면서 건설업의 문제점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자금은 내가 댈 테니, 사람은 네가 다 맡아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검토한 결과, 기존 교통센터 건물은 모듈과 출입구 분리 문제로 5성급 특급 호텔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백화점 또한 유통망 문제로 수익성이 낮다고 보았고요. 결국 가장 적절한 방향은 오피스 빌딩으로 짓는 것이라고 보고드렸습니다.

    김우중 회장님은 정부 승인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원래 호텔을 지으려 했으니, 뒤쪽 땅을 사서 거기에 호텔(힐튼호텔)을 짓고, 지금 부지에는 사무실을 짓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렇게 용도 변경 신청을 거쳐 오피스 빌딩으로 확정하고, 호텔은 뒤쪽 부지로 이전하게 된 겁니다. 우리가 자체 설계 사무소를 등록하고 대우건설 이름으로 설계 도면을 찍어내면서 대우센터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 박혁진

    당시 다른 대형 건설회사 인수를 제안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는 반대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 홍성부

    김우중 회장님께서 토건이나 몇몇 부실한 회사들이 시장에 나온 것을 보고 ‘큰 회사를 인수하자’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건설회사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이 생기는 업종이다. 그런 복잡하고 지저분한 일들을 안고 가야하고, 왜 그런 사건들이 생기는지도 모른 채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차라리 “지금 맡고 있는 교통센터 하나만 제대로 완성하면, 당시 100억에서 150억 규모가 되고, 건설업 면허 유지에도 충분하며, 이걸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 회사의 기반은 이런 방식으로 잡는 게 낫다. 무리한 인수합병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회장님께서 제 이야기를 받아들여 주셔서 대형회사 인수는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우건설이 대우개발을 흡수 합병하면서 상호가 '대우개발'로 변경되고 자본금 랭킹이 단숨에 24위까지 뛰어올랐다. 대우건설은 당시 자본금이 3천만 원에서 6천만 원 사이였고, 대우개발은 40억 자본금의 회사였다. 하지만 건설업 면허 유지를 위해 대우건설이 주체가 되어 대우개발을 흡수 합병하고, 상호는 '대우개발'로 바꿨다.

대우센터 빌딩을 인수하는 데 들어간 돈을 모두 자본금으로 반영했기 때문에, 자본금 랭킹이 단숨에 24위까지 뛰어올랐다. 이는 당시 현대건설도 자본금이 10억~20억 수준이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시행사가 곧 건설사가 되어버린 혁신적인 구조가 되어버린 것이다.

  • 박혁진

    대우센터는 1977년 완공 후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특히 건물 내부적으로도 혁신적인 시도들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점에 중점을 두셨습니까?

  • 홍성부

    대우센터는 단순히 웅장한 건물을 넘어, 대우의 위상과 가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축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김우중 회장님은 저에게 그 큰 프로젝트를 맡기면서 속으로는 많이 걱정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이 집을 내가 못 짓는다면 그 누구라도 못 짓는 거다”라며 자신감을 표현했습니다. 기존 계획상 호텔과 백화점이 있었지만, 수익성이 낮다고 판단하여 모두 오피스로 구성했습니다. 가장 어려운 임대 사업은 김우중 회장님이 직접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셨죠.

    저는 설계, 시공, 관리 세 가지를 한 덩어리로 묶어 피드백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빌딩을 많이 짓는 비즈니스 모델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의 '모리 빌딩'처럼 빌딩 임대 사업을 전제로 했습니다. 또한, 건설 현장의 안전 관리를 철저히 하여 대우센터를 지을 때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1977년 대우센터 준공 후 "역시 대우구나", "정말 잘 지었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대우센터는 외형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혁신적인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지하 2,400평 공간에 국내에서는 거의 없던 25m 수영장이 포함된 최고급 헬스센터를 도입하여 직원 복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했습니다. 대우센터는 단순한 임대 수익을 넘어, 직원들의 자부심과 만족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50분간 진행됐습니다. 회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2부 이어 보기 '터치')



홍성부 HONG Soung-Bu

  • 1937

    출생,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 1964

    금성방직 입사

  • 1966

    쌍용양회 입사

  • 1973

    대우개발 입사 (전무)

  • 1978

    대창기업 사장

  • 1980

    대우기획조정실 사장 겸 ㈜대우 건설부문 사장

  • 1989

    동우개발 사장

  • 1993

    ㈜신한 회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4월 22일 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 룸 
참석자
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정리) 

1973년, 서울역 앞에는 거대한 회색빛 뼈대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한때 서울의 관문이자 관광 산업의 희망으로 불렸던 교통센터는 공사 중단과 화재를 겪으며 버려진 채 스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모두가 외면하던 그곳에, 젊은 기업가 김우중과 그의 오랜 친구 홍성부가 나타났다. 마치 운명처럼, 홍성부는 김우중의 "건설회사를 한번 해보지 않겠냐?"는 다짜고짜 제안에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쌍용양회에서 잔뼈 굵은 건설본부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그였지만, 김우중과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작은 회사를 인수하며 시작된 대우건설. 12명의 직원이 전부였던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홍성부의 눈은 이미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버려진 교통센터를 오피스 빌딩으로 탈바꿈시키는 혁신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정부의 호텔 계획을 뒤엎는 과감한 결정이었지만, 그의 탁월한 수익성 분석과 "돈은 김 회장님이, 기술과 사람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신뢰로 김우중을 설득했다.

그들은 건물의 단순한 완성을 넘어, 지하 2,400평 공간에 국내 최초로 25m 수영장을 갖춘 최고급 헬스센터를 들이는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이는 직원들의 자부심을 높였고, '대우'라는 이름에 단순히 돈 버는 기업 이상의 가치를 불어넣었다. 대우센터의 성공적인 준공은 대우건설의 실력을 세상에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시 대우다”, “정말 잘 지었다”는 찬사는 단순한 칭찬을 넘어, 대우에 대한 국민과 정부의 신뢰를 쌓는 초석이 되었다.

홍성부는 이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제 드넓은 해외 시장으로 향했다. 당시 수많은 한국 건설업체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래바람 속에서 좌절하고 있을 때, 그는 수단과 리비아라는 아프리카 미수교국에 주목했다. 그는 단순한 건설 하청을 넘어, 자본을 수출하고 건설을 수반하는 선진국형 모델을 제시했다.



  • 박혁진

    대우건설에 합류할 당시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 홍성부

    제가 1973년 대우에 합류하기 전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당시 저는 쌍용양회에서 건설본부장을 맡아 동해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고, 국민대학교 정릉 캠퍼스 이전을 마친 시점이었습니다.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던 중, 언론을 통해 '대우'라는 이름이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것을 접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사업을 잘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서울역 앞에 짓다 만 교통센터를 대우가 인수한다는 기사가 눈에 띄더군요.

    마침 국민대학교에 김우중 회장님의 형님이신 김덕중 교수님이 강의를 오셨습니다. 김덕중 교수님은 저보다 세 살 위였지만, 6.25 전쟁 때문에 복학이 늦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저와 동급으로 함께 공부하고 핸드볼까지 같이 했던, 아주 친한 형님이셨죠. 국민대에서 김덕중 교수님을 졸업 후 처음 만났는데, 자연스럽게 대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김덕중 교수님께서 김우중 회장님이 서울역 교통센터 문제로 걱정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김우중 회장님을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습니다.



  • 박혁진

    그렇게 김우중 회장님을 만나셨군요. 첫 만남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습니까?

  • 홍성부

    1973년 5월 중순쯤이었을 겁니다. 대우센터를 짓기 전, 럭키(LG)가 쓰던 빌딩에 대우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사장실이 따로 없이 김우중 회장이 여기저기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일하고 있더군요. 사무실은 타자 소리로 가득했고, 그야말로 활기 넘치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때 김우중 회장님이 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넌 건설이지? 건설회사 한번 해보지 않겠냐?"라고 물었습니다. 저도 마침 진로를 고민하던 터라, “돈도 많이 안 들고 회사를 만들 수 있다. 자본금은 3천만 원 정도로 하면 된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김 회장님이 “자본금은 내가 낼 테니, 기술하고 사람은 네가 대라”고 하셨고, 50대 50으로 지분을 나누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우건설회사를 만들기로 합의했습니다.

  • 박혁진

    50대 50 지분 제안은 결국 실질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고민이 있었고,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 홍성부

    네, 고등학교 동기 친구와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우리가 개인 자격으로 대우라는 대기업의 대표인 김우중 회장님과 50대 50으로 간다는 것은 나중에 증자나 결정권 문제에서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제가 김 회장님께 “50대 50은 김 회장님이 알아서 하시라. 다만 건설업은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서로 믿지 못하면 건설업은 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결제가 신속해야 하고, 영수증 없는 돈도 써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당신이 나를 믿는다면, 50% 지분은 김우중 회장님이 알아서 하시고, 일은 내가 다 책임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김 회장님이 "그러자. 나는 당신을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그렇게 하자"고 하셨고, 그때부터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겁니다. 저는 건설 관련해서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 박혁진

    당시 정부에서 건설업 신규 면허 발급을 중단한 상태였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대우건설을 설립할 수 있었습니까?

  • 홍성부

    당시 대한민국에는 건설회사가 약 600여 개나 있었고, 면허가 너무 많이 나간 상태라 정부에서 신규 면허를 발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존의 면허를 인수해야 했죠. 청주에 있던 604위 건설회사인 영진토건의 건설업 면허를 사들였고, 그 면허를 바탕으로 '대우건설 주식회사'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1973년 11월 1일, 직원 12명과 함께 LG가 쓰던 빌딩에서 사무실을 시작했습니다.

  • 박혁진

    대우건설의 첫 번째 과제가 서울역 앞 교통센터 건설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그 건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대우센터로 탄생하게 되었습니까?

  • 홍성부

    그 교통센터는 서울의 관문이 되는 중요한 장소였는데, 10층 이상 올라갈 수 있는 골조가 짜여 있었고, 5층까지는 완공된 상태에서 공사가 중단되어 몇 년째 방치돼 있었습니다. 심지어 불까지 났었죠. 제가 쌍용에 있을 때 그 안전 진단을 맡아 건물을 점검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관광 산업 활성화를 위해 그 지역을 관광산업 구역으로 지정하고 호텔을 포함한 복합 빌딩으로 계획했습니다. 대우센터를 인수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을 갖는 것을 넘어, '호텔을 지어 관광 산업에 기여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김우중 회장님은 몇몇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던 거죠. 본인이 부산 공장을 지으면서 건설업의 문제점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자금은 내가 댈 테니, 사람은 네가 다 맡아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검토한 결과, 기존 교통센터 건물은 모듈과 출입구 분리 문제로 5성급 특급 호텔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백화점 또한 유통망 문제로 수익성이 낮다고 보았고요. 결국 가장 적절한 방향은 오피스 빌딩으로 짓는 것이라고 보고드렸습니다.

    김우중 회장님은 정부 승인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원래 호텔을 지으려 했으니, 뒤쪽 땅을 사서 거기에 호텔(힐튼호텔)을 짓고, 지금 부지에는 사무실을 짓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렇게 용도 변경 신청을 거쳐 오피스 빌딩으로 확정하고, 호텔은 뒤쪽 부지로 이전하게 된 겁니다. 우리가 자체 설계 사무소를 등록하고 대우건설 이름으로 설계 도면을 찍어내면서 대우센터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 박혁진

    당시 다른 대형 건설회사 인수를 제안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는 반대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 홍성부

    김우중 회장님께서 토건이나 몇몇 부실한 회사들이 시장에 나온 것을 보고 ‘큰 회사를 인수하자’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건설회사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이 생기는 업종이다. 그런 복잡하고 지저분한 일들을 안고 가야하고, 왜 그런 사건들이 생기는지도 모른 채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차라리 “지금 맡고 있는 교통센터 하나만 제대로 완성하면, 당시 100억에서 150억 규모가 되고, 건설업 면허 유지에도 충분하며, 이걸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 회사의 기반은 이런 방식으로 잡는 게 낫다. 무리한 인수합병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회장님께서 제 이야기를 받아들여 주셔서 대형회사 인수는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우건설이 대우개발을 흡수 합병하면서 상호가 '대우개발'로 변경되고 자본금 랭킹이 단숨에 24위까지 뛰어올랐다. 대우건설은 당시 자본금이 3천만 원에서 6천만 원 사이였고, 대우개발은 40억 자본금의 회사였다. 하지만 건설업 면허 유지를 위해 대우건설이 주체가 되어 대우개발을 흡수 합병하고, 상호는 '대우개발'로 바꿨다.

대우센터 빌딩을 인수하는 데 들어간 돈을 모두 자본금으로 반영했기 때문에, 자본금 랭킹이 단숨에 24위까지 뛰어올랐다. 이는 당시 현대건설도 자본금이 10억~20억 수준이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시행사가 곧 건설사가 되어버린 혁신적인 구조가 되어버린 것이다.

  • 박혁진

    대우센터는 1977년 완공 후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특히 건물 내부적으로도 혁신적인 시도들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점에 중점을 두셨습니까?

  • 홍성부

    대우센터는 단순히 웅장한 건물을 넘어, 대우의 위상과 가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축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김우중 회장님은 저에게 그 큰 프로젝트를 맡기면서 속으로는 많이 걱정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이 집을 내가 못 짓는다면 그 누구라도 못 짓는 거다”라며 자신감을 표현했습니다. 기존 계획상 호텔과 백화점이 있었지만, 수익성이 낮다고 판단하여 모두 오피스로 구성했습니다. 가장 어려운 임대 사업은 김우중 회장님이 직접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셨죠.

    저는 설계, 시공, 관리 세 가지를 한 덩어리로 묶어 피드백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빌딩을 많이 짓는 비즈니스 모델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의 '모리 빌딩'처럼 빌딩 임대 사업을 전제로 했습니다. 또한, 건설 현장의 안전 관리를 철저히 하여 대우센터를 지을 때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1977년 대우센터 준공 후 "역시 대우구나", "정말 잘 지었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대우센터는 외형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혁신적인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지하 2,400평 공간에 국내에서는 거의 없던 25m 수영장이 포함된 최고급 헬스센터를 도입하여 직원 복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했습니다. 대우센터는 단순한 임대 수익을 넘어, 직원들의 자부심과 만족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50분간 진행됐습니다. 회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2부 이어 읽기 '클릭')





홍성부 HONG Soung-Bu

  • 1937

    출생,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 1964

    금성방직 입사

  • 1966

    쌍용양회 입사

  • 1973

    대우개발 입사 (전무)

  • 1978

    대창기업 사장

  • 1980

    대우기획조정실 사장 겸 ㈜대우 건설부문 사장

  • 1989

    동우개발 사장

  • 1993

    ㈜신한 회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4월 22일 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 룸 
참석자
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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