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석 전 대우그룹 총괄회장 

‘한국 방산 산업을 키운 상사맨’

2026.1.27.

윤영석 전 대우그룹 총괄회장

‘한국 방산 산업을 키운 상사맨’

2026.1.27.


윤영석 대우그룹 총괄회장은 대우의 살아있는 산 증인이다. 1963년 한성실업에 입사해 이후 대우 해체 때까지 김우중 회장 곁을 지켰다. 그의 삶은 김 회장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더욱 빛난다.

김 회장과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났던 그는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아는 인사 중 하나다. 고등학교 시절, 김우중 회장의 남다른 리더십과 끈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윤 회장은 1963년 한성실업에서 김우중 회장과 재회하며 한국 공산품 수출의 초석을 다진다. 김우중 회장이 한성실업을 나와 독립했을 때, 윤 회장은 김용순 회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우 부산 지사 설립을 주도하며 대우 창립 멤버로 합류한다.

윤 회장의 인터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대우를 한 번도 김우중의 회사로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대우는 김우중의 회사이자 곧 나의 회사라고 생각했다. 70년대 초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식을 모두 직원들에게 나눠준 것도 이 때문이다.

80대의 고령에도 생성형AI를 사용하는 그는 돌아가는 법이 없다. 경기고, 서울대를 졸업했어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장 힘든 곳에서 군생활을 마친 윤 회장의 인생은 도전, 또 도전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두산중공업 부회장을 비롯해 한국플랜트 산업을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대우 아카이브 인터뷰 중 가장 강력하게 대우그룹 해체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대우그룹의 해체로 흩어졌던 계열사들이 지금 여러 기업에서 꽃을 피우며 한국 경제의 주춧돌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 박혁진

    지난 10년, 아니 15년 전까지만 해도 현직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스마트폰이나 AI를 모르면 사는 재미가 없다고 하셨는데, 과거를 돌아보셨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한국 경제의 변화는 무엇입니까?

  • 윤영석

    60년대의 고정환율제가 가장 인상 깊습니다. 우리나라는 워낙 가난하여 국민 자본이 없었잖아요. 다른 강대국들처럼 자원을 약탈하여 축적할 수도 없었고 오히려 빼앗기는 입장이었으니까. 특히 6.25 전쟁을 겪으면서 완전히 거덜 난 국가였죠. 이러한 상황에서 수출 촉진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아주 기본적인 요소이자 기틀이었습니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님과의 인연이 남다르신데요, 처음 김 회장님을 만나셨을 때의 기억은 어떠신가요?

  • 윤영석

    김우중 회장과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규율부 부원이었는데, 그때 김우중 회장이 규율부장이셨습니다. 매일 아침 조회가 끝나면 규율부원들을 모아 훈련 같은 것을 시켰죠. 학생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 등등. 그런 관계에서 졸업할 때까지 1년을 같이 있었으니 고등학교 때부터 알게 된 사이였습니다.

    그때 김우중 회장님은 아침에 눈이 오면 새벽 4시에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자 혼자 운동장의 눈을 다 쓸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니, “학생이 등교할 때 눈 밟는 것을 자기는 못 본다”고 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 박혁진

    한성실업에 입사하셨을 때 김우중 회장님을 다시 만나셨다고요. 당시 한국의 수출 환경은 어떠했으며, 어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 윤영석

    네, 1963년 한성실업에 입사했는데, 첫 출근을 해보니 사무실에 김우중 회장이 과장으로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경제는 6.25 전쟁을 겪으면서 완전히 피폐했고, 성냥 하나 만드는 공장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공산품이라는 것이 없었던 시대였죠. 트리코트 같은 공산품의 수출은 거의 전무했습니다.

    한국 전체가 3천만 불 정도 수출했는데, 대부분 텅스텐이나 무연탄, 농산물, 수산물 정도였습니다. 수출 인보이스와 패킹 리스트를 만드는 것도 어려웠고, 은행조차 LC(신용장)가 무엇인지 몰랐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공산품의 인보이스와 패킹 리스트를 한국에서 처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님께서 한성실업을 나와 독립하시면서 대우가 태동하게 되는데, 당시 대우에 합류하신 계기와 그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 윤영석

    김우중 회장이 (1966년) 방콕으로 해외여행을 갔다가 베트남에서 수출 주문을 받아왔고, 그 수출량이 늘어나 홍콩, 태국, 싱가포르까지 수출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를 더 키우려 했지만 김용순 회장님 반대하자, 김우중 회장님이 독립하겠다고 나갔습니다. 저는 김용순 회장님이 사표 수리를 안 해주어 한동안 혼자 남아 대우 일을 했죠. 결국 1967년 10월부터 부산으로 내려가 대우 부산 지사를 만들었고, 1968년 4월 1일 대우실업에 공식 입사했습니다.

    저는 김우중 회장님과 함께 일하는 것을 단순히 고용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 회사를 운영한다는 생각으로 일했죠. 결혼할 때 개인적인 빚이 많았는데 김우중 회장님께서 해결해주신 것도 큰 감사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제가 대우를 같이 창업했다고 생각했지, 월급 받는 직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 박혁진

    대우실업 합류 후, 회사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특히 종합상사로서의 역할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 윤영석

    제가 대우실업에 올 때는 이미 독립하여 주문이 많이 생겨 하청 임대 공장이 사방에 있었습니다. 저는 경리 회계를 제외하고 회사 전체를 운영하며 '소사장'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죠.

    1975년 정부가 종합상사 제도를 만들었을 때, 우리가 쌍용 다음으로 두 번째로 지정되었습니다. 1979년에는 포스코와 비료 수출 실적을 합쳐 한국 종합상사 수출 1위를 달성했습니다. (첫 수출 1위는 1978년, 국내 최초 10억불 수출탑은 1979년) 그 후로 4년 연속 1위를 유지하며 대우는 지금의 대우인터내셔널(현 포스코인터내셔널)이라는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 박혁진

    대우중공업 사장으로 취임하셨을 때 당시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어떻게 혁신을 이끄셨는지 궁금합니다.

  • 윤영석

    1980년, 42살의 나이에 대우중공업 사장으로 갔을 때, 2차 오일 쇼크 이후 기름값이 오르고 물가가 치솟는 시기였습니다. 중화학공업 조정으로 많은 것을 빼앗긴 상태였죠. 대우중공업은 30~35년 동안 공기업이(前 한국기계공업)었고, 제가 가보니 부장급의 절반 이상이 저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제 말이 통하지 않았죠.

    저는 밤낮으로 현장을 돌며 직원들과 소통했고, '미파(MIPA)'라는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여 모든 업무를 표준화하고 공개했습니다. 특히, 납품업체들에게 현금 결제를 약속하고 자발적인 가격 인하를 유도하여 엄청난 원가 절감을 이루어냈습니다. 또한, 일본 고마츠 공장에서 TQC(Total Quality Control)를 배우고 우리 실정에 맞춰 경영 관리에 적용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1년 만에 회사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 박혁진

    회장님께서는 대우중공업 재직 시절, 굴착기 국산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까?

  • 윤영석

    중화학공업 조정으로 산업 기계 건설 기계 생산권을 빼앗겼을 때, 정부에서는 100% 국산 기계라면 생산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당시 핵심 유압 계통 부품은 일본 도시바에서 수입했는데, 이를 부품으로 수입해 조립하면 국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시바가 완성품을 해체해서 부품으로 주려면 30%를 더 내라고 했지만, 저는 과감히 받아들였습니다. 이를 통해 동명중공업이 유압 부품을 국산화하게 되었고, 우리는 '100% 국산화'를 내세워 시장에 다시 진입했습니다. 사업권이 없었음에도 ‘우리 기계를 쓰다가 문제 생기면 새 기계로 교체해 주겠다’는 과감한 애프터서비스 전략이 주효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시장 점유율이 94%에 달했고, 결국 사업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망한 영국의 하이맥(Hy-mac) 엔지니어 10명을 영입하여 굴착기 설계부터 품질 보증까지 전 공정을 국내에서 새로 설비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솔라 굴착기(Solar Excavator)’인데, 기술 제휴 당시 1년에 70~100대 생산하던 것을 한 달에 3천 대까지 생산하는 수준으로 성장시켰습니다.

  • 박혁진

    방위산업에 대한 회장님의 선구적인 비전이 인상 깊습니다. 어떤 계기로 방위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셨습니까?

  • 윤영석

    저는 대우중공업 사장을 하면서 ‘방위산업이 한국 경제에 꽃을 피울 수 있고, 우리나라가 일본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세계 강대국의 서열은 무기 수출액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죠. 미군 장갑차 개보수 사업과 항공 오프세트(Offset; 절충교역) 사업을 추진하며 기술 국산화를 시도했습니다.

    F-16 도입 시 발생한 오프세트 사업을 아무도 맡지 않을 때 대우중공업이 자원하여 추진했고, 공장이 없음에도 2천만 불 이상을 투자하여 공장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현재의 KF-21과 FA-50 같은 한국형 전투기 개발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해군과의 협력을 통해 부품 국산화를 진행하고 잠수함과 이지스 구축함 사업까지 맡아 진행했습니다. 헬리콥터 사업도 대우중공업이 시작점이죠.




  • 박혁진

    대우조선 사장으로 가셨을 때, 회사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회생시키셨습니까?

  • 윤영석

    대우조선 사장으로 가보니 전임 사장이 결산을 600억 원 흑자로 해놨는데, 제가 파악해보니 2,500억 원 적자였습니다. 분식회계였던 거죠. 회사가 살 길이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우중 회장님이 박정희 대통령의 유지를 따라 조선업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가 강했기에, 저는 3천억 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또한, 해군 제독들을 앞세워 해군 관련 사업을 개발하고, LNG선 건조 실적이 없던 대우조선이 한국가스공사의 LNG선 1척을 수주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를 통해 대우조선은 세계적인 LNG선 건조 기술을 확보하게 되었고, 지금 러시아 쇄빙 LNG선 16척 수주와 같은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 박혁진

    회장님께서는 대우가 단순히 돈을 버는 기업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는 조직으로 인식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특히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의 기여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회장님의 생각을 들려주십시오.

  • 윤영석

    저는 대우가 단순히 기업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한 훌륭한 조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우중 회장님이 사리사욕을 부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기보다 국가와 회사의 성장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대우재단이 대우실업 주식으로 시작되었고, 아주대학교와 아주대학교병원를 만든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제가 총괄회장으로 있을 때, 그룹에서 돈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강행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나쁜 짓이 아니라, 현재 한국 대학 랭킹 상위권에 들어서는 아주대학교와 훌륭한 병원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특히 아주대학교 병원 의사들은 인간미가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병원은 인간미가 중요하죠. 이러한 기여는 대우가 우리 사회에 남긴 중요한 유산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박혁진

    대우가 IMF로 워크아웃되면서 많은 아쉬움이 남으실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대우가 어떤 회사로 기억되기를 바라십니까?

  • 윤영석

    대우가 정부의 정치적인 개입으로 해체된 것은 정말 아쉽습니다. 만약 대우가 건재했다면 삼성그룹에 버금가는 기업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수출 주도는 대우가 했다고 단언합니다. 삼성은 나중에 왔을 뿐, 60년대, 70년대, 80년대 수출 주도는 완전히 대우였습니다. 대우는 그때그때 시간에 맞게 국가를 주도적으로 끌고나가는 힘이 되어주었던 기업이었습니다.

    대우는 단순한 기업을 넘어 사회에 기여한 훌륭한 조직이었고,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대한민국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저는 대우가 없어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많은 기업들이 대우의 유산으로 살아 숨 쉬고 있고, 대우 출신 경영인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우가 ‘젊은 사람들의 희망’이었던 기업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아카이브를 보는 사람들이 대우의 도전 정신과 혁신, 그리고 사회적 기여를 통해 '우리도 저래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3시간 50분간 진행됐습니다. 회장님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윤영석 YOON Young-Seok

  • 1938

    출생,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 1964

    한성실업 입사

  • 1968

    대우실업 입사 (전무)

  • 1980

    대우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 1985

    대우조선공업 대표이사 사장

  • 1990

    ㈜대우 무역부문 사장

  • 1993

    대우중공업 대표이사 부회장

  • 1995

    대우그룹 총괄회장 및 대우중공업 대표이사 회장

  • 1998

    한국중공업 제13대 대표이사 사장

  • 2001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부회장(2002)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4월 11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 룸 
참석자
윤영석 전 대우그룹 총괄회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정리) 

윤영석 대우그룹 총괄회장은 대우의 살아있는 산 증인이다. 1963년 한성실업에 입사해 이후 대우 해체 때까지 김우중 회장 곁을 지켰다. 그의 삶은 김 회장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더욱 빛난다.

김 회장과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났던 그는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아는 인사 중 하나다. 고등학교 시절, 김우중 회장의 남다른 리더십과 끈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윤 회장은 1963년 한성실업에서 김우중 회장과 재회하며 한국 공산품 수출의 초석을 다진다. 김우중 회장이 한성실업을 나와 독립했을 때, 윤 회장은 김용순 회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우 부산 지사 설립을 주도하며 대우 창립 멤버로 합류한다.

윤 회장의 인터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대우를 한 번도 김우중의 회사로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대우는 김우중의 회사이자 곧 나의 회사라고 생각했다. 70년대 초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식을 모두 직원들에게 나눠준 것도 이 때문이다.

80대의 고령에도 생성형AI를 사용하는 그는 돌아가는 법이 없다. 경기고, 서울대를 졸업했어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장 힘든 곳에서 군생활을 마친 윤 회장의 인생은 도전, 또 도전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두산중공업 부회장을 비롯해 한국플랜트 산업을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대우 아카이브 인터뷰 중 가장 강력하게 대우그룹 해체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대우그룹의 해체로 흩어졌던 계열사들이 지금 여러 기업에서 꽃을 피우며 한국 경제의 주춧돌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 박혁진

    지난 10년, 아니 15년 전까지만 해도 현직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스마트폰이나 AI를 모르면 사는 재미가 없다고 하셨는데, 과거를 돌아보셨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한국 경제의 변화는 무엇입니까?

  • 윤영석

    60년대의 고정환율제가 가장 인상 깊습니다. 우리나라는 워낙 가난하여 국민 자본이 없었잖아요. 다른 강대국들처럼 자원을 약탈하여 축적할 수도 없었고 오히려 빼앗기는 입장이었으니까. 특히 6.25 전쟁을 겪으면서 완전히 거덜 난 국가였죠. 이러한 상황에서 수출 촉진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아주 기본적인 요소이자 기틀이었습니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님과의 인연이 남다르신데요, 처음 김 회장님을 만나셨을 때의 기억은 어떠신가요?

  • 윤영석

    김우중 회장과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규율부 부원이었는데, 그때 김우중 회장이 규율부장이셨습니다. 매일 아침 조회가 끝나면 규율부원들을 모아 훈련 같은 것을 시켰죠. 학생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 등등. 그런 관계에서 졸업할 때까지 1년을 같이 있었으니 고등학교 때부터 알게 된 사이였습니다.

    그때 김우중 회장님은 아침에 눈이 오면 새벽 4시에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자 혼자 운동장의 눈을 다 쓸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니, “학생이 등교할 때 눈 밟는 것을 자기는 못 본다”고 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 박혁진

    한성실업에 입사하셨을 때 김우중 회장님을 다시 만나셨다고요. 당시 한국의 수출 환경은 어떠했으며, 어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 윤영석

    네, 1963년 한성실업에 입사했는데, 첫 출근을 해보니 사무실에 김우중 회장이 과장으로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경제는 6.25 전쟁을 겪으면서 완전히 피폐했고, 성냥 하나 만드는 공장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공산품이라는 것이 없었던 시대였죠. 트리코트 같은 공산품의 수출은 거의 전무했습니다.

    한국 전체가 3천만 불 정도 수출했는데, 대부분 텅스텐이나 무연탄, 농산물, 수산물 정도였습니다. 수출 인보이스와 패킹 리스트를 만드는 것도 어려웠고, 은행조차 LC(신용장)가 무엇인지 몰랐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공산품의 인보이스와 패킹 리스트를 한국에서 처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박혁진

    김우중 회장님께서 한성실업을 나와 독립하시면서 대우가 태동하게 되는데, 당시 대우에 합류하신 계기와 그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 윤영석

    김우중 회장이 (1966년) 방콕으로 해외여행을 갔다가 베트남에서 수출 주문을 받아왔고, 그 수출량이 늘어나 홍콩, 태국, 싱가포르까지 수출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를 더 키우려 했지만 김용순 회장님 반대하자, 김우중 회장님이 독립하겠다고 나갔습니다. 저는 김용순 회장님이 사표 수리를 안 해주어 한동안 혼자 남아 대우 일을 했죠. 결국 1967년 10월부터 부산으로 내려가 대우 부산 지사를 만들었고, 1968년 4월 1일 대우실업에 공식 입사했습니다.

    저는 김우중 회장님과 함께 일하는 것을 단순히 고용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 회사를 운영한다는 생각으로 일했죠. 결혼할 때 개인적인 빚이 많았는데 김우중 회장님께서 해결해주신 것도 큰 감사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제가 대우를 같이 창업했다고 생각했지, 월급 받는 직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 박혁진

    대우실업 합류 후, 회사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특히 종합상사로서의 역할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 윤영석

    제가 대우실업에 올 때는 이미 독립하여 주문이 많이 생겨 하청 임대 공장이 사방에 있었습니다. 저는 경리 회계를 제외하고 회사 전체를 운영하며 '소사장'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죠.

    1975년 정부가 종합상사 제도를 만들었을 때, 우리가 쌍용 다음으로 두 번째로 지정되었습니다. 1979년에는 포스코와 비료 수출 실적을 합쳐 한국 종합상사 수출 1위를 달성했습니다. (첫 수출 1위는 1978년, 국내 최초 10억불 수출탑은 1979년) 그 후로 4년 연속 1위를 유지하며 대우는 지금의 대우인터내셔널(현 포스코인터내셔널)이라는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 박혁진

    대우중공업 사장으로 취임하셨을 때 당시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어떻게 혁신을 이끄셨는지 궁금합니다.

  • 윤영석

    1980년, 42살의 나이에 대우중공업 사장으로 갔을 때, 2차 오일 쇼크 이후 기름값이 오르고 물가가 치솟는 시기였습니다. 중화학공업 조정으로 많은 것을 빼앗긴 상태였죠. 대우중공업은 30~35년 동안 공기업이(前 한국기계공업)었고, 제가 가보니 부장급의 절반 이상이 저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제 말이 통하지 않았죠.

    저는 밤낮으로 현장을 돌며 직원들과 소통했고, '미파(MIPA)'라는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여 모든 업무를 표준화하고 공개했습니다. 특히, 납품업체들에게 현금 결제를 약속하고 자발적인 가격 인하를 유도하여 엄청난 원가 절감을 이루어냈습니다. 또한, 일본 고마츠 공장에서 TQC(Total Quality Control)를 배우고 우리 실정에 맞춰 경영 관리에 적용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1년 만에 회사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 박혁진

    회장님께서는 대우중공업 재직 시절, 굴착기 국산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까?

  • 윤영석

    중화학공업 조정으로 산업 기계 건설 기계 생산권을 빼앗겼을 때, 정부에서는 100% 국산 기계라면 생산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당시 핵심 유압 계통 부품은 일본 도시바에서 수입했는데, 이를 부품으로 수입해 조립하면 국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시바가 완성품을 해체해서 부품으로 주려면 30%를 더 내라고 했지만, 저는 과감히 받아들였습니다. 이를 통해 동명중공업이 유압 부품을 국산화하게 되었고, 우리는 '100% 국산화'를 내세워 시장에 다시 진입했습니다. 사업권이 없었음에도 ‘우리 기계를 쓰다가 문제 생기면 새 기계로 교체해 주겠다’는 과감한 애프터서비스 전략이 주효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시장 점유율이 94%에 달했고, 결국 사업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망한 영국의 하이맥(Hy-mac) 엔지니어 10명을 영입하여 굴착기 설계부터 품질 보증까지 전 공정을 국내에서 새로 설비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솔라 굴착기(Solar Excavator)’인데, 기술 제휴 당시 1년에 70~100대 생산하던 것을 한 달에 3천 대까지 생산하는 수준으로 성장시켰습니다.

  • 박혁진

    방위산업에 대한 회장님의 선구적인 비전이 인상 깊습니다. 어떤 계기로 방위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셨습니까?

  • 윤영석

    저는 대우중공업 사장을 하면서 ‘방위산업이 한국 경제에 꽃을 피울 수 있고, 우리나라가 일본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세계 강대국의 서열은 무기 수출액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죠. 미군 장갑차 개보수 사업과 항공 오프세트(Offset; 절충교역) 사업을 추진하며 기술 국산화를 시도했습니다.

    F-16 도입 시 발생한 오프세트 사업을 아무도 맡지 않을 때 대우중공업이 자원하여 추진했고, 공장이 없음에도 2천만 불 이상을 투자하여 공장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현재의 KF-21과 FA-50 같은 한국형 전투기 개발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해군과의 협력을 통해 부품 국산화를 진행하고 잠수함과 이지스 구축함 사업까지 맡아 진행했습니다. 헬리콥터 사업도 대우중공업이 시작점이죠.




  • 박혁진

    대우조선 사장으로 가셨을 때, 회사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회생시키셨습니까?

  • 윤영석

    대우조선 사장으로 가보니 전임 사장이 결산을 600억 원 흑자로 해놨는데, 제가 파악해보니 2,500억 원 적자였습니다. 분식회계였던 거죠. 회사가 살 길이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우중 회장님이 박정희 대통령의 유지를 따라 조선업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가 강했기에, 저는 3천억 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또한, 해군 제독들을 앞세워 해군 관련 사업을 개발하고, LNG선 건조 실적이 없던 대우조선이 한국가스공사의 LNG선 1척을 수주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를 통해 대우조선은 세계적인 LNG선 건조 기술을 확보하게 되었고, 지금 러시아 쇄빙 LNG선 16척 수주와 같은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 박혁진

    회장님께서는 대우가 단순히 돈을 버는 기업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는 조직으로 인식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특히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의 기여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회장님의 생각을 들려주십시오.

  • 윤영석

    저는 대우가 단순히 기업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한 훌륭한 조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우중 회장님이 사리사욕을 부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기보다 국가와 회사의 성장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대우재단이 대우실업 주식으로 시작되었고, 아주대학교와 아주대학교병원를 만든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제가 총괄회장으로 있을 때, 그룹에서 돈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강행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나쁜 짓이 아니라, 현재 한국 대학 랭킹 상위권에 들어서는 아주대학교와 훌륭한 병원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특히 아주대학교 병원 의사들은 인간미가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병원은 인간미가 중요하죠. 이러한 기여는 대우가 우리 사회에 남긴 중요한 유산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박혁진

    대우가 IMF로 워크아웃되면서 많은 아쉬움이 남으실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대우가 어떤 회사로 기억되기를 바라십니까?

  • 윤영석

    대우가 정부의 정치적인 개입으로 해체된 것은 정말 아쉽습니다. 만약 대우가 건재했다면 삼성그룹에 버금가는 기업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수출 주도는 대우가 했다고 단언합니다. 삼성은 나중에 왔을 뿐, 60년대, 70년대, 80년대 수출 주도는 완전히 대우였습니다. 대우는 그때그때 시간에 맞게 국가를 주도적으로 끌고나가는 힘이 되어주었던 기업이었습니다.

    대우는 단순한 기업을 넘어 사회에 기여한 훌륭한 조직이었고,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대한민국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저는 대우가 없어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많은 기업들이 대우의 유산으로 살아 숨 쉬고 있고, 대우 출신 경영인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우가 ‘젊은 사람들의 희망’이었던 기업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아카이브를 보는 사람들이 대우의 도전 정신과 혁신, 그리고 사회적 기여를 통해 '우리도 저래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3시간 50분간 진행됐습니다. 회장님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윤영석 YOON Young-Seok

  • 1938

    출생,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 1964

    한성실업 입사

  • 1968

    대우실업 입사 (전무)

  • 1980

    대우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 1985

    대우조선공업 대표이사 사장

  • 1990

    ㈜대우 무역부문 사장

  • 1993

    대우중공업 대표이사 부회장

  • 1995

    대우그룹 총괄회장 및 대우중공업 대표이사 회장

  • 1998

    한국중공업 제13대 대표이사 사장

  • 2001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부회장(2002)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4월 11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 룸 
참석자
윤영석 전 대우그룹 총괄회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정리) 


News Letter 

대우재단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세요

뉴스레터 구독으로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

News Letter

대우재단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세요

뉴스레터 구독으로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


Contact

본 웹사이트는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해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Copyright 2025 © All rights Reserved. Engineered by Daewoo Foundation

Top

Contact

본 웹사이트는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해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Copyright 2025 © All rights Reserved. Engineered by Daewoo Found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