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효빈 전 고등기술연구원 사장 

‘산업은행 대리에서, 기술대우 신화 창조 주역으로’

2025.11.28.

임효빈 전 고등기술연구원 사장

'산업은행 대리에서, 기술대우 신화 창조 주역으로'

2025.11.28.


대우그룹은 ‘세계경영’과 ‘기술대우’라는 두 기둥을 바탕으로 세계로 뻗어나갔다. 두 기둥은 어느 하나만으로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였다.

그 중에서도 ‘기술대우’의 꿈은 1992년 고등기술연구원의 설립과 함께 비로소 구체화됐다. 고등기술연구원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산학협동조합이라는 모델로 만들어 국내 기업은 물론이고 학계에도 큰 관심을 모았다. 이전의 기업 연구소는 그룹 내 한 계열사 안에 소속돼, 그 역할에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고등기술연구원은 달랐다.

산학협동이란 독자적 모델로 만들어지면서 기존 연구소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될 정도로 고등기술연구원은 기술대우를 상징하는 곳이다. 이 연구소의 산파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임효빈 고등기술연구원 전 사장이다. 공대(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산업은행에 입사했던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산업은행을 다닌 지 8년 만에 돌연 은행을 그만두고 대우그룹 공채 1기에 지원해 대우와 인연을 맺었다.
공대를 졸업했던 그의 경력은 대우에서 꽃을 피웠다. 한국기계 철도 부문을 인수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대우가 중공업 부문에 강자로 떠오른 발판을 마련했다. 대우 아카이브 구술 인터뷰 과정에서 처음 털어놓은 에피소드지만,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까지 동원돼 추진됐던 포항 영일만 석유 시추 탐사에 비밀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당시 정부가 신생기업 대우의 추진력과 기술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을만하다.

임 전 사장은 이후 여러 계열사를 돌다가 김우중 회장의 배려로 MIT에 1년여간 연수를 다녀왔고, 이때의 경험이 발판이 되어서 대우그룹 자체 연구소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고등기술연구원이란 이름으로 발족했고, 기술대우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 박혁진

    사장님 경력 중 특이한 게 산업은행에서 8년간 일하시다 대우에 합류하신 건데, 왜 그런 선택을 하신 건가요?

  • 임효빈

    신문에 신입사원 모집란 보니까, 이 회사가 수출을 한다네요? 거기에다 새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니까 ‘에라 지금 새로 시작한다 한들 내가 무슨 크게 뭐 손해 볼 거 뭐 있냐?’ 이런 마음으로 왔죠. 그게 공채 1기인데, 면접 볼 때 나보고 무슨 사고쳐서 온 거 아니냐고 묻더라고요. 산업은행 8년차가 지원했으니 그럴 만도 했죠.

    산업은행에서는 같이 다니던 김태구하고 몇 명이 찾아와 ‘어쩌려고 대우에 가냐?’고 말리더라고. 내가 특채로 가면 모를까 신입사원 공채에 지원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거든요.



  • 박혁진

    입사하신 지 몇 년 안 돼서 기획실로 발령이 났는데, 주로 어떤 일을 하셨나요?

  • 임효빈

    화학공학과라는 게 화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인더스터리를 배웠어요.  산업은행에서도 그렇고 인더스트리를 안다는 게 나로 굉장한 장점이었죠.  내가 비록 생산 현장에 가서 생산 과정을 하고 뭘 하지 않더라도 인더스트리라는 게 뭔지 아니까... 내가 대우의 다각화 있어서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75년도에 종합상사라는 게 생기면서, 종합상사의 요건 중에 ‘무슨 품목을 몇 개 이상 해야 된다’ ‘수출국이 몇 개 이상 돼야 된다’ ‘중화공 제품을 몇 개 이상 해야 된다’ 이런 게 있어요.

    그 요건 중에 1년 내에 2년 내에 이거 요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종합상사의 혜택을 취소한다 이거지. 내가 고려피혁 생산부장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돌아와서 맡은 중화공제품 수출본부장 직무 대행이라는 게 그거야. 종합상사라는 게 말이야, 중화공제품을 수출해야 되는데,  별거 다 했어요. 하여튼 뭐 소다회도 하고, 시멘트도 하고, 무슨 철강제도 하고.


  • 박혁진

    그때 한국기계 철차 본부 인수에 있어서 역할을 좀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임효빈

    삼성이 한 품목 가지고 대박을 치고 있는 게 있었는데 그게 기차였어요. 그런데 삼성의 그 담당 부장이 내 친구야. 아 이 자식이 폼 재는 거지. 얼마나 쟀는데... 내가 명색이 중화공제품 수출본부장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기계의 철차 본부에 기차를 배우러 갔었어요.

    두 달쯤 있었나? 그래도 한국기계가 국영기업체인데, 거기 전산실에 경영 자료가 다 있었어요. 특히 부실화 된 이유가 적힌 자료. 삼십 몇 년을 부실했다는 그 자료가 거기 다 있었어요. 그걸 바탕으로 내가 ‘연수보고서’를 낸 거야. 나야 또 산업은행 출신이니까 보고서 하나 잘 썼죠.

    그 당시 김우중 회장이 보고서를 보고 인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 난 몰라요. 근데 ‘우리도 기차 수출이나 한번 해보자’ 하신 거야. 내가 연수 다녀온 게 75년 8월에서 11월인데, 76년 2월~3월에 회장이 상공부하고 얘기해서 한국기계 인수한 거예요.

    회장이 그 당시에 내 보고서를 얼마만큼 공부를 하시고 한 건지. 아니면 상공부와의 다른 토픽으로 흥정거리로 ‘야 그거 한국 기계 좀 인수해다오’ 라고 했는지 그건 난 몰라요. 그런데 딱 인수를 하고 나니까 얼마나 쉬워요. 그래서 내가 초대 영업본부장을 했어요.



  • 박혁진

    나중에 그게 계기가 돼서 나중에 뭐 조선이라든가 중공업 뭐 이런 것들을 인수했겠네요?

  • 임효빈

    그랬을 가능성이 있죠. 회장이 ‘그거 봐라’ 자신감이 생겼죠. 기회를 딱 그 보시는 게 있어. 우리도 놀라요. 우리 쫓아가기 바쁠 정도야. 누구는 뭐 ‘내가 그래서 회장이 그랬다’ 그랬는데 아니야. 회장이 보는 눈이 있어. 아니 회장님 어쩌시려고 저러나 싶은데 터뜨리는 거예요. 일단.

  • 박혁진

    상공부와 대화 과정에서 회장님께서 사장님 의견을 안 물으셨어요?

  • 임효빈

    대우에서 한창 바쁠 때 나는 정보부에 차출된 적이 있었어요. 내 이력서에는 안 쓰고, 못 쓴 얘기예요.

    76년 1월에 회장이 날 부르더니 LA에 갑자기 가라는 거에요. 임무는 뭐냐? 포항의 포항제철 앞 바다에 300m를 뚫어가지고 들어낸 샘플을 가지고 분석하는... 그 장비 기술 소프트웨어까지를 공급하는 게 우리 일이었거든요. 그런 걸 해외 자료 무슨 물자 이런 거를 들여오는 일에 전문가가 없으니까 정부가 김우중 회장한테 ‘신직수하고 김영수 기조실장이 직접 좀 도와주시오’ 해서 보고를 했고, 차출돼서 갔고 넉 달 돼서 끝나서 돌아왔어요.

    그러고 돌아오니까 이제 한국기계라고 내가 아는 회사를 인수했더라구요. 내가 파견갔던 일은 마누라하고 윤영석 회장 정도만 알았어요.


  • 박혁진

    한국기계 인수가  사장님의 대우에서의 역할과 관련해 대단한 전환점이셨겠어요?

  • 임효빈

    나도 지금 개인적으로 뭐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내가 그때 말이야 그래도 그런 일을 했다’하는 자부심을 가져요.

  • 박혁진

    이력 중에 ‘서진피아노’ 사장이란 이력이 특이한 데 그건 뭔가요? 왜 중공업 그리고 반도체 관련 일을 하시다가 그 일을 하신 거예요?

  • 임효빈

    마누라가 아팠는데, 지금은 그거 아파도 괜찮아요. 그때 아프면 50 대 50이야. 우리 애들이 초등학교, 유치원 다닐 때인데 와이프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어요. 중공업에서 차출돼서 인수팀에 들어가 있을 때였어요. 나는 세브란스 가서 살았어요. 그때가 대한전선 가전사업부 인수할 때예요. 회장이 나보고 챙기라고 하는데, 회사 가서 마누라 얘기하는 것처럼 구차한 게 어딨어요? 회장한테 갔지.

    그러니까 회장님이 “내가 고려병원 원장한테 얘기해 놓을게 옮겨. 괜찮지?” 그러더라구요. 들었으면 “알았습니다” 이러고 나와야 되는데, ”제가 회사를 바꿔도 마누라는 못 바꾸겠습니다.” 그래버렸어요. 나중에 정희자 회장한테 들은 얘기지만 회장이 그때 그 일로 화가 엄청 많이 나셨더라고. 홍성부 실장도 다음 날 “야 회장이 이렇게 화를 내?” 묻더라구요. 그래서 결국 서진피아노로 발령이 났어요.



  • 박혁진

    그러다 어떻게 기조실로 복귀하신 거예요?

  • 임효빈

    피아노 팔러 미국이고 독일이고 다니는데, 이제 비행기 안에서 회장을 만난 거예요. 우연히... 회장님 비행기 타면 바닥에 담요 깔고 자요. 승무원이 오더니 김우중 회장님 저 앞에 (계시다고 해서) 갔더니, ‘너 어디 갔다 와?’ 그러는 거에요. 나는 ‘아 제가 피아노 팔러 갔다 오지 어디 갔다 옵니까?’ 그랬더니... 회장도 똑같아. ‘너 아직도 피아노 파냐?’ 그래서 출장 갔다가 들어오니까 기조실 발령이 난 거예요.

  • 박혁진

    그러다가 87년 미국 LA법인으로 가신 건가요?

  • 임효빈

    미국 법인에는 컴퓨터 사업 정리하러 갔어요. 그게 한 6개월 걸렸고, 있으면서 이런 저런 일을 했죠. 미국 근무가 끝나가니까 회장님이 ‘너 뭐 할래?’ 묻길래, 1년만 공부할 시간을 달라고 했죠. 그때 하버드 최고경영자 과정 3개월 마치고, 이후 MIT에 가서 테크놀로지 매니지먼트, 기술경영이란 과목을 스페셜 펠로우로 들었어요. 내가 미국 오기 전에 ‘기술대우’ 등을 얘기한 게 김진균, 최병헌 등이 함께 주도해서 92년 5월에 연구원 설립 관련 보고서를 냈어요.


  • 박혁진

    그 때부터 ‘기술대우’란 말이 나온 건가요?

  • 임효빈

    대우가 ‘세계경영’이란 말을 썼는데 그건 오케이. 그런데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는 세계경영이라는 게 있을 수 있냐 말이에요? 그런데 기술대우가 뭐에요? 말로만 기술한다고 기술대우예요? 대우에 있는 기술 역량을 한데 모으되, 산학기술 협동조합의 형태로 해서 롱텀을 보고 기술을 연구해보자는 거였죠. 사실 반대가 많았어요.

    첫째 돈은 어디서 나오느냐? 둘째 기술 사오면 되지 왜 돈을 들여서 당장 도움이 안 되는 연구소를 만드느냐? 이런 거였죠. 근데 대우가 돈 있어서 뭐 한적 있어요?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고마운 거는 그렇게 어려운데 말이에요. 임원들이 임아무개(임효빈)를 잘 봐서 그러는지 ‘아 회장님 그거 한번 긍정적으로 하지. 하여튼 전부 그런 방향이야. 장병주, 홍성부, 박성규 전부...

  • 박혁진

    산학협동조합이란 모델이 당시에는 없었나요?

  • 임효빈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이제 참고를 했어요. 내가 삼성종합기술원의 원장도 만나보고, 포스코 원장도 만나보고, 또 LG 가서도 만나보고, 나는 나대로 ‘아 이렇구나 저렇구나’ 이랬어요. 다른 회사의 연구소들은 종합연구소는 삼성은 삼성전자 부속이야. 그다음에 포항제철의 연구소는 포항종합대학, 포스코의 소속이에요.

    근데 이거는 독립 법인이라고. 이익을 추구하는 독립법인이 아니고 산학기술 연구협동조합이라는 게 아주 재미있는 모델이에요.



  • 박혁진

    반대가 많았어도, 예산이 2년 만에 4배로 증가한 거 보면 회사 내에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 임효빈

    자발적인 합의인지, 타의적 합의인지는 모르겠는데, 회장이 그만한 관심을 보이시고, 그거를 회장님이 실망하지 않게끔 우리도 했죠. 김우중 회장이 보통 사람이에요? 만에 하나 김우중 회장이 공개회의 같은 데서 ‘야 임마! 넌 뭐 하고 있는 거야?’ 한마디만 했더라면 박살 나는 거예요. 지금 고등기술연구원에 한번 가보세요. 지금도 반듯해요.

  • 박혁진

    대우가 이렇게 해체되지 않고 쭉 이렇게 좀 이어갔다고 그러면 고등기술연구원 효과가 참 많이 났을 것 같아요. 롱텀을 보고 연구한 조직이니까요.

  • 임효빈

    그런 생각도 하고 아쉬운 점이 많죠. 그러니까 아주 대학을 갈 때마다 그렇고 고등기술연구원을 갈 때마다 ‘야 이게 대우라는 게 그냥 실존만 하고 있었더라도...’ 이런 생각을 해요. 대우조선에서도 그렇고, 자동차도 그렇고, 심지어는 건설에서조차도 반대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아 이거는 이거 그냥 있을만 하네.’ 그래요. 어떤 면에서 보면 자기들 돈 빼 나간 건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기술 하는 사람들은요 주머니 생각을 덜 하거든.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가 얘기하면 들어주네. 그래 참 고마운 거야. 내가 무슨 뭐 회장한테 아파트를 받았어요? 무슨 뭐 신념이다 무슨 가치관이다 이렇게 거창한 거 없어요. 내 생각대로 ‘이건 이렇게 해야 되겠다’라고 한 것이 그나마 고등기술연구원으로 살아 있다는 거. 이거 하나는 내가 그러면 1973년에 대우에 왔을 때 이거 하러 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 박혁진

    고등기술연구원 만들 때 원칙이 있었나요?

  • 임효빈

    고등기술연구원의 연구는 실용성(프렉티컬리티), 수월성(엑설런스) 그다음에 글로벌리티(국제성) 세 가지를 해야 된다였어요.

    실용성은 뭐냐? 연구를 위한 연구 안 된다. 쓸 수 있는 연구를 해야 되겠다. 그 다음에 이제 우월성. 남들이 하니까 우리도 한다? 남들이 안 하는 걸 우리만이 해야만 배타적으로 우수하다고 인정을 받는다. 글로벌리티. 세상 어디에 내놔도 이런 얘네들이 이런 걸 했네 라고 해야지.

    근데 그중에 어느 것도 말이죠. 최고라는 말은 없어요. 남들이 안 하는 것 중에서도 실용성 찾을 수 있고, 엑셀런스 찾을 수 있고. 글로벌리티 찾을 수 있다는 내 생각이고 그 말은 내가 만들었어요.




임 사장은 고등기술연구원을 이렇게 정의했다. “기술대우의 하나의 수단이고, 기술대우를 실천할 수 있는 실체다” 대우그룹은 해체됐지만, 고등기술연구원을 중심으로 한 대우의 기술은 지금 여러 대기업의 주요 계열사로 옮겨 심어져 이제 꽃피우고 있다. 산업은행 8년 차 대리의 대우그룹 입사는 대우 발전의 중요한 모멘텀이 됐다. 한국기계 인수와 고등기술연구원 설립 이외에도 여러 중요한 일들을 했던 그는 언제나 자발적 자세로 회장을 설득하고 동료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의 진취적이고 자발적 자세는 대우그룹 성장의 밑거름이 됐고, 지금도 한국 경제 성장의 보이지 않는 발판으로 남아 있다.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30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임효빈 IM Hyo-Bin

  • 1943

    출생,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 1965

    한국산업은행 입사

  • 1973

    대우실업 입사

  • 1974

    고려피혁 생산부장

  • 1976

    대우중공업 영업본부장 상무

  • 1983

    대우정밀공업 전무

  • 1985

    대우전자 LA법인 대표이사

  • 1992

    대우기획조정실 부사장 겸 고등기술연구원 부원장

  • 1995

    고등기술연구원 원장 (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2월 28일 금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 룸 
참석자
임효빈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차장기자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정리) 

대우그룹은 ‘세계경영’과 ‘기술대우’라는 두 기둥을 바탕으로 세계로 뻗어나갔다. 두 기둥은 어느 하나만으로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였다. 그 중에서도 ‘기술대우’의 꿈은 1992년 고등기술연구원의 설립과 함께 비로소 구체화됐다. 고등기술연구원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산학협동조합이라는 모델로 만들어 국내 기업은 물론이고 학계에도 큰 관심을 모았다. 이전의 기업 연구소는 그룹 내 한 계열사 안에 소속돼, 그 역할에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고등기술연구원은 달랐다.

산학협동이란 독자적 모델로 만들어지면서 기존 연구소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될 정도로 고등기술연구원은 기술대우를 상징하는 곳이다. 이 연구소의 산파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임효빈 고등기술연구원 전 사장이다. 공대(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산업은행에 입사했던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산업은행을 다닌 지 8년 만에 돌연 은행을 그만두고 대우그룹 공채 1기에 지원해 대우와 인연을 맺었다.

공대를 졸업했던 그의 경력은 대우에서 꽃을 피웠다. 한국기계 철도 부문을 인수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대우가 중공업 부문에 강자로 떠오른 발판을 마련했다. 대우 아카이브 구술 인터뷰 과정에서 처음 털어놓은 에피소드지만,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까지 동원돼 추진됐던 포항 영일만 석유 시추 탐사에 비밀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당시 정부가 신생기업 대우의 추진력과 기술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을만하다. 임 전 사장은 이후 여러 계열사를 돌다가 김우중 회장의 배려로 MIT에 1년여간 연수를 다녀왔고, 이때의 경험이 발판이 되어서 대우그룹 자체 연구소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고등기술연구원이란 이름으로 발족했고, 기술대우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 박혁진

    사장님 경력 중 특이한 게 산업은행에서 8년간 일하시다 대우에 합류하신 건데, 왜 그런 선택을 하신 건가요?

  • 임효빈

    신문에 신입사원 모집란 보니까, 이 회사가 수출을 한다네요? 거기에다 새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니까 ‘에라 지금 새로 시작한다 한들 내가 무슨 크게 뭐 손해 볼 거 뭐 있냐?’ 이런 마음으로 왔죠. 그게 공채 1기인데, 면접 볼 때 나보고 무슨 사고쳐서 온 거 아니냐고 묻더라고요. 산업은행 8년차가 지원했으니 그럴 만도 했죠. 산업은행에서는 같이 다니던 김태구하고 몇 명이 찾아와 ‘어쩌려고 대우에 가냐?’고 말리더라고. 내가 특채로 가면 모를까 신입사원 공채에 지원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거든요.

  • 박혁진

    입사하신 지 몇 년 안 돼서 기획실로 발령이 났는데, 주로 어떤 일을 하셨나요?

  • 임효빈

    화학공학과라는 게 화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인더스터리를 배웠어요.  산업은행에서도 그렇고 인더스트리를 안다는 게 나로 굉장한 장점이었죠.  내가 비록 생산 현장에 가서 생산 과정을 하고 뭘 하지 않더라도 인더스트리라는 게 뭔지 아니까... 내가 대우의 다각화 있어서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75년도에 종합상사라는 게 생기면서, 종합상사의 요건 중에 ‘무슨 품목을 몇 개 이상 해야 된다’ ‘수출국이 몇 개 이상 돼야 된다’ ‘중화공 제품을 몇 개 이상 해야 된다’ 이런 게 있어요.

    그 요건 중에 1년 내에 2년 내에 이거 요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종합상사의 혜택을 취소한다 이거지. 내가 고려피혁 생산부장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돌아와서 맡은 중화공제품 수출본부장 직무 대행이라는 게 그거야. 종합상사라는 게 말이야, 중화공제품을 수출해야 되는데,  별거 다 했어요. 하여튼 뭐 소다회도 하고, 시멘트도 하고, 무슨 철강제도 하고.



  • 박혁진

    그때 한국기계 철차 본부 인수에 있어서 역할을 좀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임효빈

    삼성이 한 품목 가지고 대박을 치고 있는 게 있었는데 그게 기차였어요. 그런데 삼성의 그 담당 부장이 내 친구야. 아 이 자식이 폼 재는 거지. 얼마나 쟀는데... 내가 명색이 중화공제품 수출본부장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기계의 철차 본부에 기차를 배우러 갔었어요. 두 달쯤 있었나? 그래도 한국기계가 국영기업체인데, 거기 전산실에 경영 자료가 다 있었어요. 특히 부실화 된 이유가 적힌 자료. 삼십 몇 년을 부실했다는 그 자료가 거기 다 있었어요. 그걸 바탕으로 내가 ‘연수보고서’를 낸 거야. 나야 또 산업은행 출신이니까 보고서 하나 잘 썼죠.

    그 당시 김우중 회장이 보고서를 보고 인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 난 몰라요. 근데 ‘우리도 기차 수출이나 한번 해보자’ 하신 거야. 내가 연수 다녀온 게 75년 8월에서 11월인데, 76년 2월~3월에 회장이 상공부하고 얘기해서 한국기계 인수한 거예요.  회장이 그 당시에 내 보고서를 얼마만큼 공부를 하시고 한 건지. 아니면 상공부와의 다른 토픽으로 흥정거리로 ‘야 그거 한국 기계 좀 인수해다오’ 라고 했는지 그건 난 몰라요. 그런데 딱 인수를 하고 나니까 얼마나 쉬워요. 그래서 내가 초대 영업본부장을 했어요.

  • 박혁진

    나중에 그게 계기가 돼서 나중에 뭐 조선이라든가 중공업 뭐 이런 것들을 인수했겠네요?

  • 임효빈

    그랬을 가능성이 있죠. 회장이 ‘그거 봐라’ 자신감이 생겼죠. 기회를 딱 그 보시는 게 있어. 우리도 놀라요. 우리 쫓아가기 바쁠 정도야. 누구는 뭐 ‘내가 그래서 회장이 그랬다’ 그랬는데 아니야. 회장이 보는 눈이 있어. 아니 회장님 어쩌시려고 저러나 싶은데 터뜨리는 거예요. 일단.

  • 박혁진

    상공부와 대화 과정에서 회장님께서 사장님 의견을 안 물으셨어요?

  • 임효빈

    대우에서 한창 바쁠 때 나는 정보부에 차출된 적이 있었어요. 내 이력서에는 안 쓰고, 못 쓴 얘기예요. 76년 1월에 회장이 날 부르더니 LA에 갑자기 가라는 거에요. 임무는 뭐냐? 포항의 포항제철 앞 바다에 300m를 뚫어가지고 들어낸 샘플을 가지고 분석하는... 그 장비 기술 소프트웨어까지를 공급하는 게 우리 일이었거든요. 그런 걸 해외 자료 무슨 물자 이런 거를 들여오는 일에 전문가가 없으니까 정부가 김우중 회장한테 ‘신직수하고 김영수 기조실장이 직접 좀 도와주시오’ 해서 보고를 했고, 차출돼서 갔고 넉 달 돼서 끝나서 돌아왔어요.

    그러고 돌아오니까 이제 한국기계라고 내가 아는 회사를 인수했더라구요. 내가 파견갔던 일은 마누라하고 윤영석 회장 정도만 알았어요.



  • 박혁진

    한국기계 인수가  사장님의 대우에서의 역할과 관련해 대단한 전환점이셨겠어요?

  • 임효빈

    나도 지금 개인적으로 뭐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내가 그때 말이야 그래도 그런 일을 했다’하는 자부심을 가져요.

  • 박혁진

    이력 중에 ‘서진피아노’ 사장이란 이력이 특이한 데 그건 뭔가요? 왜 중공업 그리고 반도체 관련 일을 하시다가 그 일을 하신 거예요?

  • 임효빈

    마누라가 아팠는데, 지금은 그거 아파도 괜찮아요. 그때 아프면 50 대 50이야. 우리 애들이 초등학교, 유치원 다닐 때인데 와이프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어요. 중공업에서 차출돼서 인수팀에 들어가 있을 때였어요. 나는 세브란스 가서 살았어요. 그때가 대한전선 가전사업부 인수할 때예요. 회장이 나보고 챙기라고 하는데, 회사 가서 마누라 얘기하는 것처럼 구차한 게 어딨어요? 회장한테 갔지.

    그러니까 회장님이 “내가 고려병원 원장한테 얘기해 놓을게 옮겨. 괜찮지?” 그러더라구요. 들었으면 “알았습니다” 이러고 나와야 되는데, ”제가 회사를 바꿔도 마누라는 못 바꾸겠습니다.” 그래버렸어요. 나중에 정희자 회장한테 들은 얘기지만 회장이 그때 그 일로 화가 엄청 많이 나셨더라고. 홍성부 실장도 다음 날 “야 회장이 이렇게 화를 내?” 묻더라구요. 그래서 결국 서진피아노로 발령이 났어요.

  • 박혁진

    그러다 어떻게 기조실로 복귀하신 거예요?

  • 임효빈

    피아노 팔러 미국이고 독일이고 다니는데, 이제 비행기 안에서 회장을 만난 거예요. 우연히... 회장님 비행기 타면 바닥에 담요 깔고 자요. 승무원이 오더니 김우중 회장님 저 앞에 (계시다고 해서) 갔더니, ‘너 어디 갔다 와?’ 그러는 거에요. 나는 ‘아 제가 피아노 팔러 갔다 오지 어디 갔다 옵니까?’ 그랬더니... 회장도 똑같아. ‘너 아직도 피아노 파냐?’ 그래서 출장 갔다가 들어오니까 기조실 발령이 난 거예요.

  • 박혁진

    그러다가 87년 미국 LA법인으로 가신 건가요?

  • 임효빈

    미국 법인에는 컴퓨터 사업 정리하러 갔어요. 그게 한 6개월 걸렸고, 있으면서 이런 저런 일을 했죠. 미국 근무가 끝나가니까 회장님이 ‘너 뭐 할래?’ 묻길래, 1년만 공부할 시간을 달라고 했죠. 그때 하버드 최고경영자 과정 3개월 마치고, 이후 MIT에 가서 테크놀로지 매니지먼트, 기술경영이란 과목을 스페셜 펠로우로 들었어요. 내가 미국 오기 전에 ‘기술대우’ 등을 얘기한 게 김진균, 최병헌 등이 함께 주도해서 92년 5월에 연구원 설립 관련 보고서를 냈어요.



  • 박혁진

    그 때부터 ‘기술대우’란 말이 나온 건가요?

  • 임효빈

    대우가 ‘세계경영’이란 말을 썼는데 그건 오케이. 그런데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는 세계경영이라는 게 있을 수 있냐 말이에요? 그런데 기술대우가 뭐에요? 말로만 기술한다고 기술대우예요? 대우에 있는 기술 역량을 한데 모으되, 산학기술 협동조합의 형태로 해서 롱텀을 보고 기술을 연구해보자는 거였죠. 사실 반대가 많았어요.

    첫째 돈은 어디서 나오느냐? 둘째 기술 사오면 되지 왜 돈을 들여서 당장 도움이 안 되는 연구소를 만드느냐? 이런 거였죠. 근데 대우가 돈 있어서 뭐 한적 있어요?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고마운 거는 그렇게 어려운데 말이에요. 임원들이 임아무개(임효빈)를 잘 봐서 그러는지 ‘아 회장님 그거 한번 긍정적으로 하지. 하여튼 전부 그런 방향이야. 장병주, 홍성부, 박성규 전부...

  • 박혁진

    산학협동조합이란 모델이 당시에는 없었나요?

  • 임효빈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이제 참고를 했어요. 내가 삼성종합기술원의 원장도 만나보고, 포스코 원장도 만나보고, 또 LG 가서도 만나보고, 나는 나대로 ‘아 이렇구나 저렇구나’ 이랬어요. 다른 회사의 연구소들은 종합연구소는 삼성은 삼성전자 부속이야. 그다음에 포항제철의 연구소는 포항종합대학, 포스코의 소속이에요. 근데 이거는 독립 법인이라고. 이익을 추구하는 독립법인이 아니고 산학기술 연구협동조합이라는 게 아주 재미있는 모델이에요.

  • 박혁진

    반대가 많았어도, 예산이 2년 만에 4배로 증가한 거 보면 회사 내에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 임효빈

    자발적인 합의인지, 타의적 합의인지는 모르겠는데, 회장이 그만한 관심을 보이시고, 그거를 회장님이 실망하지 않게끔 우리도 했죠. 김우중 회장이 보통 사람이에요? 만에 하나 김우중 회장이 공개회의 같은 데서 ‘야 임마! 넌 뭐 하고 있는 거야?’ 한마디만 했더라면 박살 나는 거예요. 지금 고등기술연구원에 한번 가보세요. 지금도 반듯해요.




  • 박혁진

    대우가 이렇게 해체되지 않고 쭉 이렇게 좀 이어갔다고 그러면 고등기술연구원 효과가 참 많이 났을 것 같아요. 롱텀을 보고 연구한 조직이니까요.

  • 임효빈

    그런 생각도 하고 아쉬운 점이 많죠. 그러니까 아주 대학을 갈 때마다 그렇고 고등기술연구원을 갈 때마다 ‘야 이게 대우라는 게 그냥 실존만 하고 있었더라도...’ 이런 생각을 해요. 대우조선에서도 그렇고, 자동차도 그렇고, 심지어는 건설에서조차도 반대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아 이거는 이거 그냥 있을만 하네.’ 그래요. 어떤 면에서 보면 자기들 돈 빼 나간 건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기술 하는 사람들은요 주머니 생각을 덜 하거든.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가 얘기하면 들어주네. 그래 참 고마운 거야. 내가 무슨 뭐 회장한테 아파트를 받았어요? 무슨 뭐 신념이다 무슨 가치관이다 이렇게 거창한 거 없어요. 내 생각대로 ‘이건 이렇게 해야 되겠다’라고 한 것이 그나마 고등기술연구원으로 살아 있다는 거. 이거 하나는 내가 그러면 1973년에 대우에 왔을 때 이거 하러 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 박혁진

    고등기술연구원 만들 때 원칙이 있었나요?

  • 임효빈

    고등기술연구원의 연구는 실용성(프렉티컬리티), 수월성(엑설런스) 그다음에 글로벌리티(국제성) 세 가지를 해야 된다였어요. 실용성은 뭐냐? 연구를 위한 연구 안 된다. 쓸 수 있는 연구를 해야 되겠다. 그 다음에 이제 우월성. 남들이 하니까 우리도 한다? 남들이 안 하는 걸 우리만이 해야만 배타적으로 우수하다고 인정을 받는다. 글로벌리티. 세상 어디에 내놔도 이런 얘네들이 이런 걸 했네 라고 해야지.

    근데 그중에 어느 것도 말이죠. 최고라는 말은 없어요. 남들이 안 하는 것 중에서도 실용성 찾을 수 있고, 엑셀런스 찾을 수 있고. 글로벌리티 찾을 수 있다는 내 생각이고 그 말은 내가 만들었어요.



임 사장은 고등기술연구원을 이렇게 정의했다. “기술대우의 하나의 수단이고, 기술대우를 실천할 수 있는 실체다”

대우그룹은 해체됐지만, 고등기술연구원을 중심으로 한 대우의 기술은 지금 여러 대기업의 주요 계열사로 옮겨 심어져 이제 꽃피우고 있다. 산업은행 8년 차 대리의 대우그룹 입사는 대우 발전의 중요한 모멘텀이 됐다. 한국기계 인수와 고등기술연구원 설립 이외에도 여러 중요한 일들을 했던 그는 언제나 자발적 자세로 회장을 설득하고 동료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의 진취적이고 자발적 자세는 대우그룹 성장의 밑거름이 됐고, 지금도 한국 경제 성장의 보이지 않는 발판으로 남아 있다.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30분간 진행됐습니다. 사장님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임효빈 IM Hyo-Bin

  • 1943

    출생,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 1965

    한국산업은행 입사

  • 1973

    대우실업 입사

  • 1974

    고려피혁 생산부장

  • 1976

    대우중공업 영업본부장 상무

  • 1983

    대우정밀공업 전무

  • 1985

    대우전자 LA법인 대표이사

  • 1992

    대우기획조정실 부사장 겸 고등기술연구원 부원장

  • 1995

    고등기술연구원 원장 (사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2월 28일 금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 룸 
참석자
임효빈 사장
박혁진 주간조선 차장기자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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