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신광수의 『관서악부』로 박사논문을 썼고, 평양읍지 2종을 번역하여 [평양을 담다]로 출판하였다.
평양에 대해 『모든 물건은 이곳으로 오라』(18세기 도시), 『비단과 꽃의 기억』(문헌과해석 82호), 『조선 시대 평양으로 떠나는 하루 여행』(웹진담談) 등을 썼다.
Abstract
“번암(체제공)에게 나의 시를 불교의 염주법을 삼아 화려한 술잔치가 벌어지는 자리에서
한 차례 노래하고 춤출 때마다 생각하고 생각하며 자성하기를 청한다.
마음에 깨들은 바가 있는가.”
평양이란 어떤 곳인가?
서도는 항주처럼 수려한 곳
태평성대가 사백 년이 되었네.
제일강산에 부귀까지 겸하여
풍류 감사들이 고금에 노닐었지. (1수)
평양은 기자와 동명왕이 도읍지로 삼은 곳이요, 사대부들은 뱃놀이를 하거나 강가 누각에 앉아 기생들과 풍악을 울리며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 역사학자 박은식에 따르면 “우리 한국 사천년 문물이 실로 이곳에서 발원”한 곳이요, 고려 때 서경(西京)으로 중요한 위상을 가진 곳이자, 중국의 침입과 묘청의 난처럼 전쟁과 반란의 역사로 점철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사신들이 지나가는 경유지이자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휴식처이기도 해서 중국 사신들이 중국의 ‘강남’에 비견하여 그 아름다움을 보증하기도 한 곳이다.
평양의 지방색을 빼어나게 형상화한 「관서악부」
이러한 평양의 전모를 가장 잘 형상화시킨 연작시 「관서악부」는 조선후기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 1712~1775)가 작고하기 전 1774년에 쓴 작품이다. 절친한 친구 번암 채제공이 평양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7언4구 형식의 108수를 지어 전별로 준 연작시이다. 채제공이 평양감사로 부임하여 한 해 동안의 행적이 그려지는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청천강과 압록강 일대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춘하추동 사계절의 순환을 밟는다. 관서지방의 지방색을 잘 형상화한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관서악부」의 ‘관서’는 평안도 지역을 뜻하며 ‘악부’는 한문학의 한 갈래이다.
‘평양이라는 공간과 평안감사의 만남’에 초점을 맞춘 「관서악부」
평안감사가 경험하는 가장 화려한 평양의 순간을 그려내는 것, 이는 신광수가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시적 구상이었는데 채제공의 요청을 계기로 이 구상은 드디어 실현되었다. 「관서악부」는 이렇게 탄생했으며 신광수의 대표작이 되었다.
신광수는 「관서악부」에서 평양 읍지에 제시된 지역적 정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했으며, 평양을 관찰사의 풍류로 가득 찬 낭만적인 공간으로 그려낸다. 또한 「관서악부」는 평양의 풍속과 민간의 삶을 비롯해 평양의 역사와 유적 등 평양의 여러 면모를 드러냄으로써 평양을 가장 잘 형상화시킨 작품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이 시에서 평안감사는 성대한 부임행렬과 기생의 점고(點考), 화려한 잔치를 경험한다. 여러 유적을 돌아보고 고조선, 기자조선, 고구려, 고려의 옛 자취가 남아 있는 평양의 역사를 회고하며, 평안감사인 만큼 평안도 전역을 순력하기도 한다.
「관서악부」에 구현된 사실과 상상의 영역의 구분
이 책의 역해자는 「관서악부」의 번역에 풍미를 더하고 다채로운 정보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작품을 해설하면서 「관서악부」에 구현된 사실과 상상의 영역을 구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실 여부는 실제 자료인 평양 및 평안도 지도, 평양 읍지 및 관련 문헌을 참고해서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지 검토했다. 사실과는 다른 부분, 또 비중 있게 형상화된 부분에서는 당시 대중이 상상했던 평양의 이미지를 찾으려고 했다. 평양은 유명하면서도 정확하게는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기대감을 갖게 하는 동시에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도시다. 평양의 사실 정보를 어떻게 문학적으로 녹여낼 것인가. 또 대중이 상상하는 평양의 이미지에 어떻게 현실감을 불어넣을 것인가. 이 점은 신광수의 고민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관서악부」를 읽을 때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평양이라는 도시에 대한 평안감사의 ‘가상적’ 경험을 담은 「관서악부」
역해자에 따르면 「관서악부」는 흔히 평양을 가장 잘 형상화한 작품으로 인식되지만, 정작 「관서악부」를 쓸 때 신광수가 채제공과 함께 평양을 누비면서 평안감사의 경험을 옆에서 직접 보고 형상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신광수는 평안감사도 아니었고, 1774년 당시에 채제공을 따라 평양에 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관서악부」의 내용에는 평안감사가 도임한 시점부터 이임하는 시점까지 포함되어 있지만 신광수가 이 시를 쓸 당시는 채제공이 부임한 초기였기 때문에 이 시에 그려진 대부분의 모습은 1774년의 시점에서 보면 미래형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기본 골격은 실제로 존재하는 평양이라는 도시를 평안감사가 ‘가상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가상’은 완전히 허구라고 보기는 힘들다. 신광수가 실존 인물 채제공이 평안감사가 되어 평양에 도임한다는 실제 상황으로 시작한 것은 이 시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였다. 사실에 기반하고 현실적인 장면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신광수는 여러 가지를 고려했다.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낸 친구였던 채제공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반영하면서 현실감을 높였고, 1760년과 1761년에 평양에 갔던 자신의 경험도 반영했던 것이다.
평양의 교방 레퍼토리 「관산융마」의 저자 신광수
신광수는 1746년에 시험 답안에 쓴 「관산융마(關山戎馬)」라는 시로 이미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관산융마는」 평양의 교방 레퍼토리로서 당시 평양 기생들이 이 시를 읊지 못하면 일류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한때 신광수는 유명세를 떨쳤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온다. 신광수는 1760년과 1761년에 두 차례 평양에 갔던 적이 있었다. 이미 「관산융마」로 유명했지만 당시 신광수는 문과 급제에 실패하고 아무런 관직도 없어 내세울 것이 없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평양의 풍류를 맛볼 수 없는 처지였다. 평안감사가 잔치를 열고 있어 정자에는 오르고 싶었으나 참석하는 일이 여간 쉽지 않았다. 이때 감사가 신광수가 선비라는 것을 알아준 덕분에 겨우 말석에 앉을 수 있었다. 그 다음에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졌다. 기생들이 「관산융마」를 부르는 것을 보고 신광수가 자신이 쓴 시라고 밝히자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Original Volume
Title : 關西樂府
Author : 申光洙
Published Year : 조선 영조
저자(한글) : 신광수
원서 언어 : 漢文
저자 약력 : 신광수
조선 후기 문인.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연(聖淵), 호는 석북(石北), 오악산인(五嶽山人)이다. 35세 때 과시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로 시명(詩名)을 얻었다. 50세에 음직으로 영릉 참봉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아가서 연천 현감 등을 역임했고 기로과에서 장원을 하여 승지에 오른 뒤에는 병조참의, 영월부사가 되었다. 신광수는 남인계 문인으로 채제공, 이헌경, 정범조, 목만중 등과 교유했다. 그의 한시는 크게 백성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파한 「채신행(採薪行)」, 「납월구일행(臘月九日行)」, 「제주걸자가(濟州乞者歌)」 같은 고시와 관변풍류를 그린 「한벽당십이곡(寒碧堂十二曲)」 같은 염정시로 대별할 수 있다. 1774년에 채제공을 위해 쓴 「관서악부(關西樂府)」는 평안감사의 풍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그 안에는 지방관의 치적과 민간에 대한 묘사도 있어 이 두 요소를 적절하게 결합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관서악부」는 당시에 인기를 끌어 다수의 필사본으로 유통되었고, 후대에는 지방 죽지사의 작가들이 「관서악부」를 직접 언급할 정도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