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기유: 조선 학자의 눈에 비친 열하와 북경』 소개
『열하기유(熱河紀遊)』 는 서호수가 1790년(정조 14) 청나라 건륭제의 팔순 만수절 진하사의 부사로서 열하와 북경을 다녀오며 중요한 사건과 견문을 기록한 연행일기다.
이 책에서 서호수는 만주족이 지배하던 청나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분석하려는 치밀한 시선을 견지한다. 그는 연행 중 거쳐 간 지역의 연혁과 당시 수비 병력 등의 현황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고증하였다. 또한 청조의 인물이나 몽골, 베트남, 티베트 등 외국 사절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외국의 지리와 풍속에도 관심을 갖고 기록하는 등 조선 외교관으로서의 면모도 드러낸다. 특히 궁중 극장에서 관람한 당시 청나라 궁중 연극을 기록하여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또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로서 청에 소개된 서양 과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청에 머물고 있는 서양 선교사를 방문하여 학문적 대화를 나누고, 마테오리치의 무덤을 찾아 상우(尙友)의 감회를 표출하였다.
이처럼 그의 연행기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일 뿐 아니라, 18세기 동서양의 문물이 만나 새로운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교류의 문화지(文化誌)이기도 하다.
『열하기유』 내용
18세기 기행의 시대에 탄생한 서호수의 ‘청나라 문화유산답사기’
제목만 보고서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 ‘열하’가 맞긴 맞다. 조선의 230여 년 연경행 역사 중 열하를 다녀온 것은 1780년과 1790년 단 두 번뿐이었는데, 박지원은 1780년에 열하를 다녀온 후 『열하일기』를 저술했으며, 서호수는 1790년에 열하를 다녀온 후 『열하기유』를 남겼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시(時)와 함께 문(文)으로서는 사실을 말하는 실기류(實記類)의 산문들이 존중되는 전통이 강했다. 기행문이나 일기류는 이런 산문의 전통에 따라 발전했는데, 일찍이 신라 승려 혜초가 727년에 완성한 『왕오천축국전』만으로도 1,300년 가까이 된 우리나라 기행 문학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삼국과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유람과 기행을 글로 남기는 전통은 계속돼왔는데, 특히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와 청나라, 일본으로 오가는 사행(使行)단이 한 해에도 천여 명씩 있어서, 그 체험을 쓴 사행 일기 문학이 풍부해졌다.
중국 사절단의 체험은 조선시대에만 500편 이상의 연행록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고, 일본으로 오간 통신사 일기 또한 수십 편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해마다 세 차례 이상 사절단이 중국 여행길에 올랐고, 연경에 갔던 선비들 대부분이 기행문을 남겼다. 조선시대의 말엽에 나온 『연원직지』에서 김경선은 수많은 연행록 중에서 김창업의 『노가재 연행일기』, 홍대용의 『담헌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북경 기행문의 삼가(三家)’라고 평가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모두 18세기의 인물이라는 점으로, 18세기에는 이 외에도 수많은 연행기가 탄생했다. 이처럼 연행사와 통신사가 활발했던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당시 서양도 대항해 시대, 그랜드 투어의 시대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으니, 18세기는 그야말로 만개한 ‘여행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다.
18세기 기행의 시대에 탄생한 서호수의 『열하기유』는 당시 절대권력으로서의 중국, 서양과의 관계 등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일 뿐 아니라, 18세기 동서양의 문물이 만나 새로운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교류의 문화지(文化誌)이기도 하다. 방문한 지역의 지세, 연원, 역사적인 사건들을 자세히 기록한 서호수 못지않게 역해자인 서울대 중문과 이창숙 교수가 자세한 평설을 덧붙임으로써 열하기유는 현대판 ‘청나라 문화유산답사기’로 재탄생했다.
『열하일기』와 『열하기유』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서호수의 『열하기유』는 각각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1780년)과 팔순(1790년) 생일의 사절단으로서 다녀온 체험을 기록한 것으로, 10년이라는 세월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사행의 목적과 시기가 같고, 방문한 곳 또한 북경과 열하로 같다. 사절단으로서는 처음으로 열하를 방문했다는 것 때문에 당시에 주목을 받았고, 그의 명성과 유려한 필치 덕분에 현재까지도 열하 기행문으로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형식 면에서 『열하기유』는 일기체 저술로, 주로 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관련 문헌을 인용해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열하일기』는 그 형식과 내용에 따라 일기체로 쓴 기행문과 그렇지 않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대체로 주제에 따라 글을 나누고 제목을 붙였는데 북경과 열하로 이동하는 여정은 주로 일기체로 썼다. 나머지 글들은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기술했는데 물건이나 장소, 인물 등에 대해 백과사전식으로 서술한 글도 있고, 「허생전」과 「호질」 같은 소설도 있다.
내용 면에서는 둘 다 꼼꼼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당시 실학에 심취하고 이용후생에 관심을 기울였던 연암의 경우 여행 중 견문한 청나라의 문물과 삶의 모습을 바탕으로 이용후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양한 필치로 피력하였다. 반면 서호수가 사행을 나섰던 1790년에는 이미 북학의 논의가 무르익었고 박제가와 유득공을 수행원으로 데려갈 만큼 북학파와도 사이가 가까웠지만 『열하기유』에는 북학 논의는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만주족 청나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치밀한 시선이 돋보인다. 물론 서호수도 전형적인 조선의 성리학자였지만 이미 대명의리론에만 매여 있지는 않았다. 만주족이 중원에 들어가 이룩한 번영과 평화의 실상을 목도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박지원이 청조의 대내외 정치적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고, 대명의리론을 고집하는 조선 관료들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등 정치적 견해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면, 서호수는 사실 기술에 더 집중한다. 특히 자신의 전공 분야인 천문, 역산, 악률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열하와 북경에서 매일 관람했던 연극에 대한 기록 또한 큰 가치가 있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 서호수에게 연행은 배움과 물음의 길이었다
서호수(1736~1799)는 조선후기 영·정조 때 육조 판서를 모두, 그것도 여러 번 지낸 엘리트 관료다. 서호수의 가문은 북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부친 서명응과 『임원경제지』를 편찬한 아들 서유구 등 3대에 걸쳐 과학·농학 서적 편찬을 비롯한 여러 업적을 쌓은 과학기술자 집안이다. 우리에게는 장영실이나 홍대용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서호수 역시 조선 최고의 과학자 중 한 명이다.
서호수는 세종 이후 또 한 번의 과학기술 부흥기였던 영·정조 시기에 정부의 공식적인 천문역산학을 정리하고,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서양의 수학 및 천문학 이론을 연구 검토함으로써 조선 후기 천문역산의 기반을 탄탄하게 한 인물이다. 구체적으로는 조선 400여 년간의 천문현상 기록을 수집해서 정리해 《국조역상고》를 편찬하고, 밤과 낮의 시각과 절기를 정확하게 계산해냈으며, 두 개의 해시계를 하나의 돌에 새겨놓은 간평일구·혼개일구를 창제했다. 2016년에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선정한 ‘대한민국 대표 과학자 31인’에 포함될 정도로 인정받은 과학자였다.
『열하기유』에 드러난 생각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오늘날의 자연과학적 기초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 선교사와 천문학을 두고 나눈 대화를 봐도 당시까지 중국에 소개된 서양 천문학 지식을 잘 파악하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서호수는 과학 지식을 배우려는 열정 못지않게 외교관으로서의 임무에도 열의를 다한다. 몽골, 베트남, 티베트, 라오스 등 연회에 참석한 외국 사신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대화를 나누고 귀 기울이는가 하면 방문한 지역의 지세, 연원, 역사적인 사건들을 자세히 기록한다. 그의 연행은 학자로서 배움과 물음의 길이기도 했다.
서호수 『역상고성후편』의 일전과 월리, 교식(交食)은 이미 타원의 방법을 썼으니 오성(五星)의 본천도 타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금성, 수성 두 별의 본천과 태양의 본천은 같아서 당연히 일전 타원법(?圓法)을 따라야 하고, 토성, 목성 두 별은 지구에서 거리가 매우 멀어 본천이 거의 항성 본천과 같으니 타원법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화성(본천)은 혹은 태양의 본천 밖에 있고 혹은 태양의 본천 안에 있어 변동이 무상한데, 화성이 태양의 본천 안에 있을 때 화성과 지구의 거리와 태양과 지구의 거리는 100대 266이 됩니다. 이는 화성 본천이 태양 본천보다 더 낮을 때가 있어서 태의타원법(?圓法)으로 계산하여 자료 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미 측량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탕사선 합하께서는 정심한 경지의 이면까지 보셨습니다. 화성 차륜 반경의 이치는 과연 이해하기 어려우니 그 까닭은 본천이 정원(正圓)이 될 수 없으므로 타원법을 이용하여 자료를 구해야 하지만 아직 추산한 것이 없습니다. (본문 295-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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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수 귀국의 강역은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노과(老?, 라오스)와 연접하였으며, 남으로 점성(占城)과 통하고 북으로는 광서(廣西), 운남(雲南)과 이어졌으니 국내의 성(省)과 부(府)는 얼마나 됩니까?
반휘익 동서가 1700여 리, 남북이 2800여 리이며 지금 16도(道)로 나뉘어 있습니다.
서호수 귀국은 천정(天頂)이 적도(赤道)에 가까워서 기후는 항상 덥고, 곡식은 1년에 두 번씩 익는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반휘익 그렇습니다.
서호수 곽향(藿香), 육계(肉桂)는 귀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품질이 좋다고 하는데 그러합니까?
반휘익 곽향은 광서(廣西)에서 나는 것이 품질이 좋고, 육계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과연 품질이 좋습니다. 그러나 계피는 반드시 청화(淸化) 지방에서 채취하는데, 근래에는 여러 번 전화(戰禍)를 겪어서 경내의 계림(桂林)이 다 유린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좋은 산품을 얻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조선과 안남의 사신은 서로 상대국의 기본적인 정보는 대략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과 안남은 한나라 무제(武帝) 이후 중국을 중심으로 짜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가장 비슷한 처지의 두 나라였다. 어쩌면 세계사 속에서 이란성 쌍둥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두 나라의 역사는 중국을 상대하면서 거의 같은 궤도를 달려왔다. (본문 174-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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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안남은 관복이 비슷하다. 1790년의 안남사신은 청나라에서 준 만주족의 옷을 입었다. 서호수는 그 점을 지적한다.
안남사신은 머리칼을 묶어 뒤로 드리우고 오사모(烏紗帽)를 쓰며, 소매 넓은 홍포(紅袍)를 입고, 금과 대모로 장식한 띠를 매고 검은 가죽신을 신어서 우리나라의 의관과 비슷한 데가 많다고 들었다. 이제 보니 그 군신(君臣)이 다 만주의 의관을 따르되 머리는 깎지 않았다. 내가 괴이하게 여겨 반휘익에게 물었다.
“귀국의 의관은 본래 만주와 같습니까?”
반휘익이 말하였다.
“황상께서 우리 임금의 친조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수레와 의관을 하사하고, 또 배신(陪臣)들에게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왕의 말씀을 받들어 경사에서 조회와 제사에 참예할 때는 본국 의관을 사용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도로 본국 의관을 착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의관은 한때 입을 뿐입니다.”
말이 자못 또록또록하고, 낯에는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건륭은 안남왕이 직접 입조하여 체면을 세워 주었으므로 만주족의 복식을 주었다. 열하에서 잔치에 참여할 때는 만주옷을 입고, 북경과 본국에서는 다시 본국의 의관을 착용하도록 허락하였다. 이 사실을 하나하나 분명히 밝혀서 조선사신에게 해명하면서도 남의 옷을 입은 부끄러움은 감출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본문 183-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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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수는 이날 일기에 청나라 신하들이 황제에게 바친 생일선물을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중략) 새벽에 근정전 문 앞에서 내무부의 관원이 어느 순무(巡撫)가 바친 물품의 목록을 펼쳐 읽는데, 30여 종이 다 금옥(金玉)과 기완(奇玩)이다. 끝에는 “노재(奴才) 아무개는 공손히 바칩니다.”라고 썼다. 아마 만주의 풍속은 임금과 신하 사이에 ‘신(臣)’이라고 일컫지 않고 ‘노재(奴才)’라고 일컫는 듯하다. 또 보니 서장국(西藏國)에서 금불 12좌를 바쳐 출입현량문(出入賢良門) 밖에 진열하였고, 성경 장군(盛京將軍)이 바친 80수레의 각종 물품은 원명원 문밖에 진열하여 놓았다. (중략)
건륭제의 80세 생일잔치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잔치였음에 분명하다. 전국 각지에서 각층 신민이 바친 선물이 황궁에 산더미처럼 모이고, 자금성 서화문(西華門)에서 원명원에 이르는 20리 연도의 양쪽에는 임시 건축물을 연이어 설치하였다. 서호수는 신민이 바친 선물의 진열과 연도의 임시 건축물을 모두 ‘점철’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빈틈없이 빼곡히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연도의 건축물의 그 상세한 내역은 곧 다시 기록하지만 그 이름을 대기조차 힘든 이런 가설 건축물은 내각(內閣), 육부(六部)와 각 부(府), 원(院)과 각성으로부터 거인(擧人), 상민(商民), 폐원(廢員)에 이르기까지 경쟁적으로 세우고 꾸며서 온갖 사치를 다부렸다. (본문 256-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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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종실과 문무백관, 외국의 사절이 하례를 올릴 차례이다. 이때 단폐대악을 연주한다. 24명의 악대가 대고(大鼓), 방향(方響), 운라(雲?)와 관(管) 등 네 가지 악기로 서서 연주하고, 이에 맞추어 종친과 신료, 사절이 하례를 올린다.
단폐대악이 연주되자 종실, 각라와 몽·회의 여러 왕공과 문무백관이 배위(拜位)에 나아간다. 친왕이 한 반이고, 세자와 군왕이 한 반이며, 장자·패륵·패자·안남왕이 한 반이고, 진국공·보국공이 한 반이다. 좌익은 서쪽이 상석이고 우익은 동쪽이 상석인데, 다 북면하였다. 문무 정종품관(正從品官)들은 각자 품급산(品級山)에 맞추어 서열대로 의장 안의 동서에 서니 각각 18반씩이다. 동반은 서쪽이 상석이고, 서반은 동쪽이 상석인데, 다 북면하였다.
품급산은 태화전 뜰에 설치한 관원의 위치 표지이다. 진강기(陳康祺, 1840-1890)의 『낭잠기문초필(?潛紀聞初筆)』 권6에 “태화전 뜰의 품급산은 정일품부터 구품까지 새겨서 문관은 왼쪽, 무관은 오른쪽에 두며, 정과 종을 합치면 4행 36개이다. …… 송나라 사람들의 배반석을 계승한 제도로서 다만 지금은 금속을 산형으로 주조하여서 다르다.”고 하였다. 품급산은 구리로 주조한 산봉우리 형태로 높이는 30센티미터 정도이다. 만주어와 한자로 품급을 새겨 태화전 계단 아래 어도의 양옆에 설치하였다. 동서에 각 2열씩 모두 4열이며, 총수는 36개였다. 지금 태화전 뜰에서는 볼 수 없다. (본문 307-308쪽)
중국 궁중연극사 연구에 큰 기여
『열하기유』는 중국 궁중연극사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가치 있는 기록이다. 청나라 궁중에서는 연극 관람이 일상생활의 일부였다. 각종 행사와 절기, 매월 초와 보름에 정기적으로 연극을 상연하였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매일 저녁 텔레비전에서 일일연속극을 시청하듯 청나라의 황제와 황족들은 거의 매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주 연극을 관람하였다.
특히 건륭제는 연극 관람을 내치와 외교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1780년과 1790년의 만수절에는 황족 대신과 외국의 사절들이 함께 연극을 관람하였다. 서호수보다 10년 먼저 1780년에 열하를 방문했던 박지원도 삼층대희대의 연극을 문틈으로 또 담장 너머로 관람하고 자세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서호수가 참석했던 1790년의 생일잔치에서도 대대적으로 연극을 상연하였다. 연극 상연은 주로 매일 새벽에 시작하여 정오를 넘겨 끝났는데 하루에 보통 7-8시간 정도 상연하였다. 서호수도 매일 연극을 관람한 후 연극의 제목과 줄거리, 감상평을 기록하였는데, 배우들의 복장과 무대연출 등 상황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한 그의 기록은 청나라 궁중연극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가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진시에 연극을 시작하여 오시에 연극을 그쳤다. 반도승회(蟠桃勝會), 만선집록(萬仙集?), 왕모조천(王母朝天), 희축요년(喜祝堯年), 승평환흡(昇平歡洽), 낙연중추(樂宴中秋), 만국내역(萬國來譯), 회회진보(回回進寶), 오대흥륭(五代興隆), 오곡풍등(五穀?登), 가문청길(家門淸吉), 군선대회(群仙大會) 등 모두 12장(章)이었다. 선찬(宣饌)이 두 차례 있었다. 처음에는 어탁(御卓)에 차린 것을 주었고, 두 번째에는 각각 한 상씩 갖추어 주었다. 음식을 물린 뒤에는 다 낙차(酪茶)를 선사하였다. 연극을 시작할 때 선동 60명이 각각 발발(??)을 받들었는데 선도(仙桃) 형상에 금으로 쓴 수(壽) 자와 채화(彩花)로 꾸몄다. 축사(祝辭)를 노래하고 어좌를 향하니 환관이 섬돌을 내려가서 받아다가 어탁 위에 벌여 놓았다. 잠시 후에 연희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 빈과(?果), 포도, 복숭아, 임금(林檎) 등을 나눠 주었다. (본문 313-314쪽)
신선과 부처로 분장한 자가 있고, 신귀(神鬼)로 분장한 자가 있고, 제왕(帝王)으로 분장한 자도 있었다. 절주(節奏)와 소리 가락이 장(작품)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대체로 경사를 맞이하고 축수하는 가사가 많다. 여래(如來)의 장엄한 32상(相)이 연화대(蓮花臺) 위에 가부좌(跏趺坐) 하고, 방편문(方便門)을 열고 항사계(恒沙界)를 열면 수백 나한(羅漢)이 좌우에 모여 선다. 자금원광(紫金圓光)을 이고 금수가사(錦繡袈裟)를 걸치고 나계(螺?)가 서로 붙고, 구슬 눈썹이 서로 비춘다. 구름 사이 묘음과 하늘 끝 법라(法螺)가 범패(梵唄)를 따라 오르내린다. 계부(桂父)와 모군(茅君)이 무지개 치마를 나부끼며 구름수레를 타고 현포(玄圃)에 소요한다. 삼십륙법(三十六法)을 크게 드러내면 황금 정자(頂子)를 달고 옥띠를 맨 선관(仙官)과 갑옷 입고 칼을 짚은 신장(神將)이 벌여 서서 모시고 옹위하니 온화하고도 엄숙하여 우아한 모습에 씩씩한 기상을 겸하였다. 또 선동(仙童) 수백 명이 채색 저고리와 수놓은 치마를 입고 꺾어 돌며 나아가고 물러간다. 단약을 만들자면 양경(陽鏡)을 감싸서 아홉 번 굽고, 비록(秘?)을 빌자면 수선(壽扇)을 받쳐 들고 층층이 뽑는다. 선계의 아름다운 노래를 제창하고, 생황과 소(簫)로 맞추어 소리가 맑고 명랑하다. 하신(河神)과 해귀(海鬼)가 파도 깃발을 들고 빙빙 돌며 쫓으며 흔들흔들 기세가 용솟음치고, 용을 타고 고래를 몰며 뗏목에 오르고 학(鶴)을 부리는 뭇 신선들이 한가롭게 와서 노니니 용은 비등하고 고래는 뛰며 내뿜는 물보라가 비와 같다. 혹은 명엽(蓂葉)이 돋아나는 세 층계 섬돌에서 봉인(封人)이 요 임금에게 복을 빌고, 오색구름 요지(瑤池)에서 서왕모(西王母)가 주목왕(周穆王)에게 선도(仙桃)를 바친다. 면류관과 곤룡포가 은은하고 번쩍인다.
(본문 156-157쪽)
『열하기유』의 구성과 내용
『열하기유』는 4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행기』라는 제목의 필사본이 3종 있다.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소장본(오사카본)과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동아시아도서관 소장본(버클리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규장각본)이 있다. 오사카본과 버클리본에는 원래의 지면을 오려내고 다른 종이를 기워 넣은 흔적이 있고, 『열하기유』에는 『연행기』의 세 가지 판본에는 실려 있지 않은 문장이 군데군데 더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열하기유』가 원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시리즈인 『열하기유: 조선 학자의 눈에 비친 열하와 북경』에서는 3권까지의 내용 중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발췌 번역했다.
1권은 「진강성에서 열하까지」로 6월 7일 진강성에 도착한 이후, 다음 달 7월 15일 열하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적었다. 조선과 관련 있는 만주 지역의 주요 지명, 연혁, 지리적 위치를 집중적으로 고증하고 성책의 제도 및 군대배치 상황과 그 지방의 역사적 사건들도 설명하고 있다.
2권은 「열하에서 원명원까지」로 7월 16일 열하에서 머문 이후 같은 달 26일 원명원에 들어간 일을 기록하고 있다. 안남, 대만, 왜와의 관계 및 안남왕조의 역사 등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했다.
3권은 「원명원에서 연경까지」로 7월 27일 원명원에서 머문 이후 9월 2일 연경에서 떠나기 전까지의 일들을 적었다. 북경의 풍물 및 관복제도· 진하예단· 회사품·답례품의 품목· 표문, 원명원 연회 상황과 만수절 예식들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서양력 사용 문제· 서적 구입 문제도 보인다. 또 유득공과 함께 당시 청의 대학자인 옹방강과 교류한 내력도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