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직후 대청(對淸)외교 최전선의 현장 보고
『심양장계』는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배종 신하들이 청나라의 수도 심양(성경)에서 승정원에 보낸 장계를 모은 것이다. 장계에는 세자나 대군의 안부에서부터 관소에서 벌어진 일, 정축화약의 약조에 따른 양국 간의 현안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명·청 교체기 조선이 처한 현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청나라 군대의 침공으로 쑥대밭이 된 강토와 청으로 끌려간 포로가 수(십)만을 헤아리는 참담한 상황에서 대청외교의 최전선에서 타전한 현장 보고인 것이다.
장계는 1637년 2월 11일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으로 가는 길에 장단(長湍)에서 보낸 것을 시작으로 1643년 12월 15일 세자가 두 번째 일시 귀국길에 보낸 것까지 7년간의 장대한 기록이다. 이번에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의 하나로 출간된 역해본 『심양장계』는 핵심 장계들만을 가려 뽑아 다양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등장인물의 면모, 청나라 중심의 국제관계, 만주족과 심양 사회의 모습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충실한 주석과 깊이 있는 해설을 실었다.
대사관 또는 영사관의 구실도 한 심양관
심양으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배종 신하들이 머물던 관소를 심관(瀋館) 또는 심양관(瀋陽館)으로 부른다. 조선에서 보낸 사신이나 재자관(?咨官)도 심양에 오면 머물게 되었고, 피로인을 속환하려고 심양에 온 그 가족들, 청과 무역에 나선 상인들도 심양관 일대에 머물다 갔다. 또 화약에 따라 삼공육경(삼정승 육판서)도 질자(質子)를 보내야 했는데, 이들은 관소 옆 질자관에 머물렀다. 심양관은 심양에 온 조선인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이들에 대한 관리도 담당해야 했다. 즉 현재의 대사관이나 영사관 역할도 겸하였다.
청나라는 양국의 현안들을 먼저 심양관에 와서 세자와 재신(宰臣)에게 말하고 즉시 본국 조정에 장계로 보고하여 조치하도록 주문하였다. 따라서 심양관의 세자와 재신들은 청나라의 강압을 가장 먼저 대하는 대청외교의 최전선에 자리했다. 이들은 장계를 작성하여 청의 요구를 곧바로 조선에 보고하였다. 또 전란 후 조선의 어려운 실정을 대국 청나라에 호소하여 청의 압박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이 심양에서의 긴급 보고는 청 태종이 조선에 내린 명령, 칙사 행차 소식, 청 군병들이 사로잡은 피로인의 속환, 조선에 살던 향화인의 쇄송, 대명전쟁에 참전할 조선 군병과 군량의 징발, 조선에 대한 불신, 조선과 명의 밀통 사건으로 인한 양국 관계의 경색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었다. 곧 조청관계의 현안들을 본국으로 알리던 보고문이 『심양장계』이다.
패전국 조선의 치욕스러운 역사
가장 중요한 현안은 전후 처리에 관한 것이다. 병자호란 뒤에 두 나라가 맺은 화약(정축화약)에 따라 양국의 사대(事大)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고, 수많은 피로인(被擄人)을 속환(贖還)하는 문제였다. 청나라는 조선에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소국으로서 대국에 사대를 바치고 약조를 이행할 것을 종용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명나라를 침략하는 전쟁(대명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식량을 조달하고, 수군과 포수 등 일부 군병을 조선에서 징발하고자 하였다. 1637년 4월에는 [명나라 도독 모문룡(毛文龍)의 잔당들이 머물던] 가도(?島) 토벌에 동참하도록 명령하였고, 1638년 1월에는 명나라의 금주(錦州) 공격에 군병 5천의 동원을 요구하였다. 결국 1640년 해주 전투에 임경업(林慶業)의 수군이 참전한 일을 시작으로 이후 조선 군병의 참전은 계속되었고, 군량도 조달해야 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또한 청 태종을 수행하여 전장에 나가야 했다.
전란 후 조선은 계속된 재해와 흉년으로 그 피해를 거의 복구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청의 요구대로 신속히 응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대명전쟁에 참전하는 일은 조선 신료들이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하였다. 침공해온 청의 무력에 굴복하였으나, 성리학적 명분론과 대명 의리 의식은 여전히 강고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장계에는 1640년 수군을 이끌고, 많은 군량을 운송하는 임무까지 띠고 참전한 임경업이 일부러 이동을 지연하고 청의 군령을 따르지 않는 태만한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40번 장계). 또한 조정에서 척화신 김상헌(金尙憲)이 대명전쟁 참전 등 청의 명령에 반대하는 논의를 펼치고, 병자호란 이후 조정을 주도한 최명길(崔鳴吉)이 승려 독보(獨步)를 몰래 명으로 들여보내 청에 굴복한 조선의 사정을 알린 사건 등이 밝혀지면서 조청관계는 급속히 경색되었으며, 사건 당사자들은 청나라로 끌려가 신문을 받고 형벌을 당하게 된다(64번 장계). 이처럼 『심양장계』는 청나라의 강압에 시달리는 패전국 조선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자세히 전하고 있다.
피로인 속환을 둘러싼 청인들의 횡포
청 군병이 수(십)만의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간 데는 개인의 소유물이 된 이들 피로인(被擄人)의 몸값을 치르고 개별적으로 속환(贖還)하게 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취하며, 청의 인구수를 늘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청은 피로인 시장을 열고 청인(淸人) 주인과 피로인 가족 간에 개별적으로 속환을 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런 청의 속환책은 자신의 아들딸을 빨리 되찾으려는 일부 조선 고관의 행태와 더 많은 속전(贖錢)을 챙기려는 청인들의 욕구가 맞물려 피로인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는 등 큰 폐단을 낳았다. 준비해온 돈으로는 속환을 할 수 없어 속전을 일부만 주고 가거나, 청인에게 빌려 속환한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들이 조선으로 돌아간 뒤 미수금을 관소에서 받아내려는 청인들의 횡포까지 『심양장계』에서 볼 수 있다(27번 장계).
피로인 가운데 압록강을 건넌 뒤에, 즉 청나라 땅으로 들어온 뒤에 도망간 포로는 주회인(走回人)이라고 하였다. 도망가다 붙잡히면 발꿈치를 잘리는 형벌을 당하였고, 천신만고 끝에 돌아갔다 해도 다시 조선 조정에 의해 심양으로 쇄환되었다. 이것 역시 약조에 따른 일이었다. 조정을 원망하는 민심이 흉흉하였으나, 당시 조정은 피로인·주회인에 대한 대책 없이 청의 압박과 요구에 따라 억지로 이들을 색출해 보내야 했다(17번 장계). 또 조선에 향화(귀화)하여 살고 있는 여진인과 그 자손도 찾아내 돌려보낼 것을 지속적으로 강요하였다(53번 장계). 조선에 정착하여 몇 대에 걸쳐 살고 있는 향화인도 여진족(만주족)의 골육이므로 돌려보내라는 것이었는데, 이 때문에 이산가족이 된 향화인들이 다시 조선으로 도망쳐 돌아오기도 하였다. 향화인 쇄송은 만주족의 인구수를 늘리려는 방도의 하나였다.
소현세자의 현명한 처신 돋보여
청나라의 볼모살이에서 풀려나 8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곧 ‘학질’에 걸려 숨을 거둔다. 소현세자가 청조에 보인 처신과 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이들은 이 ‘의문의 죽음’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청나라의 황제나 관료들을 상대하는 『심양장계』 속 세자의 모습에서도 현명한 대응과 처신이 단연 돋보인다. 세자는 조선의 어려운 형편을 호소하여 청측의 관용을 이끌어냈는가 하면, 조선의 관례를 내세워 이해를 구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황제나 청나라의 요구를 단호하게 물리치는 모습도 보인다.
징병 명령을 따르기 어려움을 호소한 자문의 내용을 두고 청 관료들의 힐책이 이어지자, ‘양국이 한집안이고 부자관계와 같다’라는 황제의 말을 인용하며 조선의 때와 형세가 명령을 따르기 어려우니 아버지께 진정한 것이라며 호소하는 모습(21번 장계),
청나라 장수 만월개(滿月介)가 세자에게 모든 것을 본국에 미루고만 있다고 핀잔하자, 세자는 본디 정사에 관여할 수 없게 되어 있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조정에 보고하여 처리한다고 답하며 이해를 구하는 모습(43번 장계),
봉황성에서 전 영의정 최명길을 신문하는 자리에 참석해야 한다는 청나라 관원 용골대(龍骨大)의 말에, ‘최명길은 자신의 사부이자 부왕(父王)의 대신(大臣)이므로 결코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한 모습(12번 장계) 등을 장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역사를 넘어 동아시아의 사회상을 기록
청은 심양에 머물던 소현세자로 하여금 청조의 여러 행사와 연회에 참여하게 하였다. 세자는 정례 조참(朝參)은 물론, 태묘 제사, 승전 진하례 및 황제와 제왕(諸王)이 베푸는 잔치들, 황제의 사냥 행차 등에도 황제의 명에 따라 참석했다. 또 청 태종은 몽골 일부 세력과 연합하고 일부는 정벌하여 복속시켰는데 몽골과 중첩된 혼인을 맺고 벌인 잔치에도 세자와 대군을 참여하게 하였다. 이들 장계 내용에서 청조의 동향과 아울러 여인의 기마(騎馬) 및 재혼 장려와 화장(火葬) 등 만주족의 풍습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17세기 중국 근세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팔기제(八旗制)를 근간으로 한 만주 사회의 모습 또한 장계에 전한다. 팔기는 사냥 습속에서 유래한 만주족의 군사·행정 조직을 말한다. 황제의 허락을 받아 소를 사들이기 위해 조선의 관원들이 몽골 땅으로 갈 때 팔기에서 파견한 청인들이 동행한 일(15번 장계), 칙사 행차에 팔기에서 각각 가정(家丁)을 딸려보내 필요한 물품을 조선에서 사 오게 한 일(12번 장계) 등이 그 사례다.
한편 청은 조선을 통해 일본의 동향을 파악하고 일본의 산물을 들여오게 하는 등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고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장계에는 청의 관원들이 관소로 찾아와 일본의 대군(쇼군)과 천황, 조선과 일본의 사신 왕래 및 통상, 일본과 명의 교역, 일본의 신앙과 풍속 등에 관하여 세자와 문답한 내용이 나온다(56번 장계). 이처럼 『심양장계』는 조선의 역사를 넘어 동아시아의 사회상을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
정확한 번역, 깊이 있는 해설로 기존 번역의 성과를 보완
『심양장계』는 한자와 이두로 씌어 있고 문장이 매우 길며, 작성자에 따라 문체가 조금씩 다르다. 또 세자와 재신 등이 청나라 관원이나 역관 등과 상대하여 주고받은 말을 그대로 옮겨 적은 부분도 상당히 많다. 역관의 통역으로 전달된 말을 장계로 보고하기 위해 다시 이두문으로 작성한 것이다. 내용에서는 한국사와 중국사의 경계에 있고, 명·청 교체기의 상황을 배경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양자를 잘 읽어내야 하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그러한 탓에 정확히 번역하는 일이 매우 어렵고 까다롭다.
역해자 김남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그동안 문집·동궁일기·의궤·지리지 등 다양한 조선시대 자료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왔으며, 특히 『심양장계』와 같은 시기를 다룬 『심양일기』와 『소현동궁일기』를 역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의 번역을 보완하고 관련 자료와 연구 성과를 폭넓게 활용하여 주석과 해설을 붙였다. 이로써 명·청 교체기의 사회 변화 속에서 장계의 내용을 살펴보게 하여 더욱 풍부한 자료 이해를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