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사회과학부 조교수.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경제학박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4년여 동안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연구교수로 근무했다.
주요 논문으로 , <의 잡세 통계에 대한 비판적 고찰>, , 등이 있다. 고문헌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기초로 하여, 경제학과 역사학의 접목을 통해 한국경제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저희 상전(床廛)은 도성 밖에 있어서 이익은 작고 역(役)은 번잡한데도, 난전(亂廛)의 폐단이 요즈음 더욱 낭자합니다. 무뢰배가 여러 가지 긴요한 물건을 한데 모아 ‘박물전(博物廛)’이라 일컬으며 저희 전(廛) 앞에서 진열하여 팔고 있는데, 세력을 믿고 업신여기며 사납게 굴지만 이를 막을 수 없으니, 이 또한 힘없는 백성에게는 대단히 큰 폐단입니다.” -「문외신상전」에서
영인본 간행 30년 만에 처음 이루어진 『시폐』의 번역과 해설
-조선후기 상업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
비변사에서 서울 시전의 상소와 이에 대한 조처를 각전별로 나누어 기록한 『시폐(市弊)』가 영인본 간행 30년 만에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네 번째 책이다. 역해자에 따르면 이와 유사한 자료의 번역 및 해설이 이뤄진 것은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의 출간은 조선후기 상업사 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역해본 『시폐』는 모두 57개 시전의 85개 상언(백성이 제출한 소장[訴狀])과 각각에 대한 제사(관의 판결이나 지령)로 구성되어 있다.
『시폐』는 공인의 시폐(時弊) 상소와 이에 대한 조처를 기록한 『공폐(貢弊)』와 더불어 1753년 영조 29년에 작성되었다. 총 3책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현재 제2책과 제3책만 남아 있다. 조선후기 당대의 시전과 서울 경제의 실상이 잘 드러나 있어 상인 조직 상호 간의 분쟁과 상인 조직과 비상인간 간의 분쟁, 상인 조직과 권력 기관의 분쟁 등 여러 가지 갈등의 양상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소통 및 그 결과인 변통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주요한 열람자는 영조였다.
조선후기 서울의 시전과 폐단의 이모저모
그렇다면 당시 서울의 시전은 무엇이었으며, 어떠한 폐단이 있었기에 끊임없는 갈등과 소통, 변통이 있었을까? 우선 시전은 국역의 대가로 상품독점에 관한 전매권과 난전을 금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봉건적 특권상인의 총칭이었다. 즉 국역을 부담하는 대신에 정부로부터 자금을 대여 받거나 정부의 물품을 싼 값으로 불하받았으며, 외부의 침탈로부터 보호받았다. 시전의 국역에 대한 최대의 보상은 ‘금난전권'(禁亂廛權)이었으며, 국역의 부담을 지는 대신 특정 물종에 대한 전관권(專管權), 즉 독점적으로 취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조선후기 서울의 시전은 이처럼 국가에 대한 조달 업무를 담당하는 기능 외에 서울 주민에게 물자를 판매하는 도소매상으로서의 성격도 지녔다.
역해자는 당시 시전에서 올린 폐단의 내용과 이에 대한 조치를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국역이 비록 의무였지만 규정된 정도 이상의 국역이 강제되었다. 둘째 관수품을 조달하면서 받는 대금의 지급이나 연체, 헐값이 문제가 되었다. 관청이나 궁궐에 납품한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결국 빚이 쌓일 수밖에 없는 일이 많았다. 셋째 궐내나 각사의 발주에 따라 물품을 조달하고 대가를 받는 과정에서 관원이나 궁녀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개입되어 필요 이상의 부담이 강제되는 경우였다. 넷째 이른바 전매권 분쟁으로서 시전과 시전 또는 시전과 공장 간의 대립이 있었는데, 이는 유통 질서의 교란이나 시장의 발달과 연계되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개별적인 상인들의 개입으로 시전이 침해당하거나 피해를 입는 사례가 있었고 이들 대부분은 군문, 세도가, 왕실의 일부이거나 왕실에서 분가한 궁방 등의 세력에 의탁한 무뢰배였다.
시전 상인과 비변사 간의 소통과 변통의 한 장면
“저희 전은 단지 목화솜[綿花] 한 가지를 겨울철 석 달 동안 사고팖으로써 위로는 국역(國役)에 응하고, 아래로는 처자식을 보살피니, 생계의 잔박(殘薄)이 백각전(百各廛) 중에서 가장 아래입니다. 그런데, 각 군문(軍門)의 군병 및 여러 궁가(宮家)와 세가(勢家)의 사나운 하인들[豪奴悍僕]이 벌이는 난전(亂廛)이 점점 심해져서 시전의 생업을 모조리 빼앗으므로…”(「면화전」, 38쪽)
“저희 전은 곧 백시(百市)의 말단으로서, 폐단 역시 백시 중에서 으뜸입니다. 사복시(司僕寺)에서 소장(所掌)하는 젖소와 송아지, 모두 합해서 36마리[隻]를 해마다 늦가을에 저희 전으로 하여금 담당하여 무납(貿納)하게 하면서, 첨가(添價)라고 칭하며 단지 돈 90냥을 줄 뿐입니다.”(「우전」, 63쪽)
면화전의 상언에 대한 비변사의 제사는 “다른 전에서 이미 금단(禁斷)하였으니, 마찬가지로 시행하라”는 짧은 조치가 있었지만, 우전의 상언에 대해서는 “젖소 18마리를 송아지와 아우르면 36마리가 되는데, 사복시에서 당초에 값을 준 것이 몇 해나 오래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단지 첨가를 주고 진배한 그 사이 우전은 그 사람이 여러 번 바뀌었고, 지급한 소 값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니, 근거 없이 진배하여 원통하다 하소연함이 하늘에 사무친다….” 등 자세한 판결과 조치 내용이 이어진다.
역해자에 따르면 면화전이나 우전의 상언은 피해 상황을 극대화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한 엄살이다. 시전이 호소한 내용은 전형적인 수사법에 해당하는데 “생계의 잔박(殘薄)이 백각전(百各廛) 중에서 가장 아래”라거나 “백시(百市)의 말단으로서, 폐단 역시 백시 중에서 으뜸”이 그 예이다. 면화전은 2푼, 우전은 1푼의 국역을 담당했는데 이러한 규모는 다른 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풍족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