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훈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 문학박사.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이다.
저서로 『조선후기 정치사상연구』(혜안, 2004)가 있고 공역서로 『주서백선(朱書百選)』(혜안, 2000), 『주자봉사(朱子封事)』(혜안, 2011)이 있다.
근래에는 『15-6세기 목민서(牧民書)의 전개와 목민학(牧民學)』(2010), 『16-7세기 《소학집주(小學集註)》의 성립과 간행』(2009),『조선후기 《주자봉사(朱子封事)》의 간행과 활용』(2011), 『『규장총목(奎章總目)』과 18세기 후반 조선의 외래지식 집성』(2012) 등의 글을 통해 사상의 보급과 그 매체인 서책의 역할을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외래 학문과 지식을 조선 현실에서 수용하고 활용하는 양상이 어떠했던가 하는 점을 해명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형벌과 법을 만든 것은 모두 옛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그들을 먼저 인도하지 아니하고 법으로 구금 여부를 논한다면,
이 어찌 ‘백성에게 그물질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경민편』,「서문」)
도덕과 법으로 백성을 깨우친 조선 사회의 속살을 엿보다
조선이란 국가가 백성들을 통제하고 이끌어 나가는 방향, 방법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는 책 『경민편』을 완역하고 해설을 곁들였다.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경민편』은 조선의 지방사회와 지방민들의 범죄적 일탈, 그리고 이에 대한 국가의 도덕적 법적 대응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살피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16세기 초반, 수령의 지방 교화를 위해 만들어진 이후, 조선 말기까지 여러 차례 간행되며 꾸준히 활용된 책으로서 1519년(중종 14) 황해도 감사였던 김정국이 처음 만들었다.
『경민편』의 구성과 내용
간행된 시기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변화하지만 향촌민들이 저지르기 쉬운 범죄의 유형을 13가지로 나누고 유형별로 범죄를 저지르면 안 되는 도덕적 이유, 국법에서의 처벌 규정을 간략히 제시하는 틀은 공통적이다. 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은 가족이나 친족 관계와 연관된 범죄(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제자매, 족친 등 모두 네 항목으로 구분), 향촌의 구성원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범죄, 농사일을 부지런히 돌보지 않고 식량을 저축하지 않는 것을 징계하는 내용, 관공서 혹은 공권을 빙자하여 벌이는 범죄, 남녀 간의 성범죄와 도둑질, 노비에 대한 조항 등을 분류된다.
『경민편』에서는 이러한 범죄에 대해 각 주제마다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되는 도덕적 의미를 먼저 밝히고, 그다음으로 죄에 대한 법률의 처벌 규정을 제시했다. 이를테면 ‘부모’조항에서 부모에게 효도를 다해야 하는 이유를 먼저 설명하고, 이어 불효와 관련한 범죄의 처벌 사항을 덧붙이는 방식이다.
아버지는 하늘 같고 어머니는 땅과 같다. 수고로이 나를 낳아 부지런히 젖을 먹여 힘들게 길러내니, 부모의 은덕은 하늘 같이 끝이 없다. 조부모는 나의 부모를 낳았으니, 부모와 다름이 없다. 이런 까닭에 부모를 잘 섬기며 효도하고 순종하여 어기는 일이 없으면, 향리에서 착하다고 칭찬하고 나라에서는 포상을 내린다.
법 : 조부모와 부모를 의도하여 죽이면[謀殺] 능지처사(陵遲處死)하며, (조부모와 부모를) 때리면 목을 베는 형벌[斬刑]을 내리고, (조부모와 부모를) 꾸짖으면 목매달아 죽이는 형벌[絞刑]을 내린다. 가르쳐 시키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힘써 봉양하지 않으면 장(杖) 100대를 친다. 부모를 관청에 고소하면 죄가 지극히 무겁다. 수절한 계모는 친모와 같다.
오늘날의 폭력적인 성범죄, 조선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경민편』에서 거론하는 성과 관련된 범죄는 화간(和姦), 강간(强姦), 친속 간의 상간(相姦) 세 경우인데, 강간이 오늘날에도 문제가 되는 폭력적인 성범죄인 반면, 화간이나 친속 간의 상간은 조선의 문화적 특징과 상관이 있다.
남녀의 정욕은 쉽게 일어나니 막기 어렵다. 삼가고 조심해야 할 것으로 성범죄만한 것이 없다. 조금이라도 참지 못하면 끝내 헤아리기 어려운 죄에 빠질 것이다.
법 : 화간(和姦)하게 되면 장 80대를 치고, 남편이 있는 여자가 화간하면 장 90대를 친다.
강간(强姦)하게 되면 목매달아 죽인다. 12세 이하의 어린 여자애를 고통스럽게 강간하면 또한 목매달아 죽인다.
친속 간 상간(相姦)의 경우, 매우 가까운 친척이면 죽이는 처벌을 내리고, 조금 먼 친척이면 그 관계를 따져 벌의 등급을 낮춘다.
강간 외 기타 간통과 연관된 일은 남녀 모두 같은 등급으로 처벌한다.
화간을 처벌할 경우 남편 있는 여자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구별해서 차등적으로 장형(杖刑)을 가했으며 강간에 비하면 처벌 수위가 낮았다. 강간의 경우는 성인 여자와 어린 여자 아이를 대상으로 한 범죄 행위를 거론했는데, 당시 조선에서도 어린 여자아이를 대상으로 한 강간 사건이 크게 문제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어린 여자아이의 강간범은 모두 사형의 중벌을 내렸다. 성과 관련된 범죄는 다른 범죄 행위에서 신분이나 나이 등을 따지는 것과 다르게 강간을 제외하고는 남녀가 같은 등급으로 처벌받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경민편』의 특성 및 조선 사상사에서의 자리매김
“반드시 근본을 미루어 이(理)를 거론한 것은 백성들이 마음으로 느껴 흥기하기를 바라서였고, 법(法)을 인용하여 참증(參證)한 것은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악을 피할 줄 알기를 바라서였다”
저자에 따르면 이 대목은 『경민편』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며, 『경민편』이 조선 사상사 속에서 나름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이 점과 연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범죄와 관련된 한 주제를 두고 먼저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되, 이때 사용하는 용어와 단어는 평이한 말로 이루어져 유교-성리학과 거리가 먼 듯하지만 그 내용은 실제 유교-성리학의 핵심 명제들이었다. 원저자 김정국이 근본, 이(理)라고 지칭한 것은 인도(人道)의 핵심 원리였다. 즉 김정국이 유의하고 의도한 것은 백성들이 인도의 원리를 알고 이로 인해 본래 마음속에 있던 도덕심-도덕성이 크게 일어나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는 곧 유교 혹은 성리학에서의 대명제를 확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