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세
경희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 대학교 철학고등연구소(ISP)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모리스 블롱델의 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브뤼셀 통·번역 대학교(ISTI) 강사를 역임하고 귀국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서양근대철학, 프랑스철학이다. 점차 연구의 초점을 동서비교담론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주요 저서로 『효율성, 문명의 편견』(2014), 『철학의 물음들』(2017) 등이 있고, 역서로 『스피노자와 도덕의 문제』(2003), 『변신론』(2014), 『전략: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중국까지』(2015), 『데카르트, 이성과 의심의 계보』(2017) 등이 있다.
연구 논문으로는 『스피노자의 존재론 기초』(2003), 『스피노자의 철학에 있어서 시간성과 윤리』(2006), 『블롱델의 행동철학과 라이프니츠의 실체적 연결고리 가설』(2011), 『프랑수아 줄리앙의 비교철학에서 중국과 서양의 효율성 개념 비교』(2012), 『야코비의 사유구조와 스피노자의 영향』(2013),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서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복종의 관계』(2014), 『모리스 블롱델의 행동철학에서 과학과 기술의 의미』(2014), 『이념의 문제와 글쓰기 전략』(2014), 『동아시아적 이념의 가능성』(2014), 『블롱델의 철학에서 방법론과 실천의 문제』(2015), 『모리스 블롱델의 현상학적 방법론』(2015), 『데카르트와 코기토 논쟁』(2016), 『조선 천주교 박해와 관용의 원리』(2016), 『프랑수아 줄리앙의 중국회화론』(2017), 『로고스와 노장』(2017), 『조선 천주교와 미시정치학』(2018) 외 다수가 있다.
한 철학 안에서 제시된 세계관과 인간관이 그 철학을 산출한
철학자의 삶에서 표현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독보적인 문헌
이 책은 1925년 카를 게브하르트(Carl Gebhardt)가 편집한 『스피노자 전집(SPINOZA OPERA)』의 제4권 『서간집(EPISTOLAE)』에 포함된 84통의 서신들을 완역한 것이다.
17세기의 철학자들이 주고받은 서신들은 오늘날의 논문집과 유사한 역할을 담당했다. 동시에 서신들이 단지 익명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서신들을 통해 당시 철학자들의 구체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서신은 한 철학 안에서 제시된 세계관과 인간관이 그 철학을 산출한 철학자의 삶에서 실질적으로 표현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게 해주는 독보적인 문헌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의 서신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철학 체계를 단지 이론 체계로 보는 한계를 벗어나 철학적 이해에 구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서신도 역시 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철학 체계에 대한 직접적인 해설과 함께 그의 실천적 태도를 보여주는 1차 문헌인 것이다.
모든 커다란 철학이 다양한 해석을 낳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스피노자의 철학만큼 상반된 해석 대상이 되어 온 철학 체계는 드물 것이다. 그의 사후(1677)부터 현대까지 스피노자의 철학은 끊임없이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스피노자는 18세기에는 무신론적 이성론의 원형으로, 19세기에는 특히 독일에서 신비적·범신론적·종교적 철학의 이미지로 나타났다. 1993년 파리1대학에서 35명의 스피노자 전문가들이 발표한 논문집 『20세기의 스피노자』는 스피노자를 “혁명적” 철학자로서 “모든 사유 체계의 변천의 매개자”로 소개하고 있다. 이 저작에 실린 논문들은 스피노자와 베르그손, 브런슈빅, 바슐라르, 들뢰즈, 레비나스, 칼 포퍼, 하이데거, 러셀, 한나 아렌트 등 다른 철학자들의 비교에서부터 시작하여 문학, 마르크스 사상,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 등과의 관계를 조명함으로써 스피노자 철학이 지닌 의미의 함축성과 다
양성을 폭넓게 제시하고 있다. 이런 연구는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연구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스피노자 철학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최근 20여 년간 국내에서도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한편으로는 『소론』, 『지성개선론』,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등의 초기 저작들 및 『에티카』에서 전개되는 존재론, 인식론, 감정론, 윤리학,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신학 및 정치철학으로 크게 구분될 수 있다. 이미 『에티카』나 『신학정치론』 등의 완결된 주저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번역 출간되었고 초기의 미완성 저작들도 부분적으로나마 번역되어 소개되었으며, 다수의 스피노자 관련 연구서 및 교양 저작들도 발간되었다. 그러나 정작 영미, 유럽권의 모든 스피노자 전문가들이 1차 문헌으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해왔으며 스피노자 전집에 당당히 포함되어 있는 서간집은 국내에 전혀 소개되지 않고 있다. 단지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서 전문 논문에서 다루어질 뿐이다. 이 책을 통해 국내 스피노자 연구의 이 같은 공백이 메워졌으면 한다
서신이라는 형식 때문에 철학자들은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서간집은 비교적 쉬운 언어로 그들의 사상이 표현된 값진 자료를 제공해준다. 또한 서신들을 통해 우리는 철학 사상의 진화 과정 및 시대적 배경 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서간집과 함께 철학 작품을 고찰할 경우 철학 체계에 대한 이해도를 극대화할 수 있다. 실제로 스피노자의 서간집은 철학적 토론 외에도 집필 과정, 용어 변화, 출판 현황, 시대 배경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재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철학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주저들을 해독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철학 저작들은 주요 개념이나 체계에 대한 구체적 예를 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철학자의 서신을 통해 주요 개념의 풍부한 예시를 획득함으로써 이론 체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론 체계의 확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스피노자의 서간집이 없었다면, 그의 존재론에서 매우 난해하고도 중요한 개념인 속성이나 무한 양태에 대한 구체적 이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예수의 부활’ 같은 민감한 사안은 그의 신학 저작에서도 잘 다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서신에서는 적극적 설명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서간집은 후대의 연구자들에게 보조적 역할을 넘어서 그의 철학 체계를 온전히 재정립하기 위한 독보적 문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