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문학석사·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분야는 조선시대 법사학 및 정치사상이다. 전북대학교 HK교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등을 거쳐 현재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다. 대표저서로 『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정치』(2010), 『두 얼굴의 영조』(2014), 『법치국가 조선의 탄생』(2016), 『탕평시대 법치주의 유산』(2016), 『정조의 군주상』(2023) 등이 있다. 저서를 비롯한 그간의 연구성과는 한국연구재단 우수논문(2008·2009),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세종도서(2010·2017), 역사학회 논문상(2013),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2015·2018),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2016), 대구경북연구원 우수논문(2022) 등에 선정되었다.
굳건한 조선의 사법체계가 남긴
격동기 일상의 기록들
이 책은 조선 고종 후반, 근대적 사법체계가 개편된 후 작성된 사법 관련 공문서첩인 『사법품보』를 통해 당대 사회상과 함께 근대적 사법개혁 과정을 살펴본다. 1894년 시작된 기록은 1906년에 끝난다. 이듬해 고종의 강제퇴위와 함께 자주적 사법행정도 끝난 것이다. 이 시기에는 농민봉기와 국제전쟁 등 내우외환의 소용돌이가 조선을 뒤흔들었지만, 중앙과 지방의 사법체계는 놀라우리만치 굳건했다.
기록된 사건 1만 4,218건을 분류해보면, 혼란기에 벌어진 신규범죄 14%, 통시대적으로 나타나는 기존범죄 33%, 사법행정을 다루는 일반형정 52%로 나뉜다. 여기서 신규범죄는 외세침탈과 서구문명수용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자명종·조총·전신·전보·전차 등 신문물과 연계된 범죄를 통해 개항기의 역동성을 추론해볼 수 있다. 또한 동학·의병과 무장강도가 혼재된 비적사건과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도망간 관리나 백성소요의 원인이 된 탐관오리 처벌 등 혼란스러운 사회상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특이한 점은 동학·천주교·불교 등의 종교단체가 백성의 재물을 빼앗거나 사적인 형벌을 집행하는 경우, 조정은 종교단체 자체보다 관련자 개인을 처벌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19세기 천주교 박해로 인한 사회적 소요에서 학습한 결과로 보인다.
기존범죄로 분류되는 사건은 빈도가 높은 순서대로 살인, 산송(山訟), 강도·절도, 경제사범, 왕실·관청 관련 범죄, 무고(誣告), 간음, 폭력, 화재가 있다. 여기서 살인사건의 경우 절차에 따른 상세한 시체검시가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조선이 근대적 사법체계의 도입 이전부터 『경국대전』 체제하에서 중앙집권화된 사법체계가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 범죄의 절반을 차지하는 일반형정에는 월별 정기보고뿐만 아니라 형벌의 집행보고, 각종 비용처리 등이 있다. 이를 통해 내우외환의 외부적 환경과는 별개로 조정의 시스템 자체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풍부한 판례로 복원한 전통과 근대의 사법 풍경
가치중립적인 시각으로 우리의 역사를 담다
『사법품보』는 우리 전통법에 대한 풍부한 판례를 담고 있지만, 그동안 전체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미진하였다. 근대적 사법체계에 대한 연구가 법학이나 역사학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분량 자체가 방대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사법품보』 판본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사법품보(갑)』(1894~1906)과 『사법품보(을)』(1897~1906)이 있는데 갑본은 128권, 을본은 52권에 달한다.
이 책은 이처럼 방대한 양의 『사법품보』를 분류하여 근대적 사법체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구체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데, ‘왕정의 근대적 사법체계 등장배경’과 ‘근대 법치사회의 실상’이 그것이다. 1부에서는 동학농민운동, 일제의 왕궁점령, 청일·러일 간 국제전쟁 등 혼란기 속에 왕정이 추진한 근대화정책의 성격을 검토한다.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을 비교 검토하고, 『사법품보』에 실제 활용된 법제서와 자주 인용되는 조문을 토대로 전통적 유산과 근대적 요소를 복합적으로 살펴본다. 2부에서는 『사법품보』에 기록된 판례들을 통해 법치사회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본다. 근대적 사법개혁이 지속되면서 일어난 형정 운영의 변화는 무엇이고, 근대적 사법체계 개편을 통해서 어떤 점이 변화되었고, 어떤 점이 지속되었는지를 검토하면서 전통과 근대의 접합점을 찾는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우리의 기록유산은 집요하리만치 상세하고 구체적이다. 연구에서 이를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책은 『사법품보』에 실린 풍부한 판례를 검토한다. 그 지난한 과정을 해냄으로써 우리의 전통법을 가치중립적인 시각에서 재평가한다. 나아가 우리의 역사를 타자가 아닌 우리의 시각에서 재고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