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 목사시인의 불편당 일기 8

지렁이가 죽어가는 땅을 살리는 구원자다

고진하 목사시인의 불편당 일기 8: 흙

오랜 장마가 끝나자 마자 김장용 배추씨와 무씨를 서둘러 뿌리기로 했다. 자연농을 하고 있는 터라 무성히 자란 여름풀들을 대충 뽑아내고 씨앗을 심을 참이었다. 밭에 뒤덮인 풀을 뽑아내자 파헤쳐진 흙 속에서 굵은 지렁이들이 꿈틀거렸다. 곁에서 일을 거들던 아내가 지렁이들을 보고 반색을 했다. 

“와~ 지렁이 밭이 됐네요.” 

십여 년 전 귀농할 때만 해도 악귀를 본 듯 소스라치던 여인이 지렁이를 흔감하다니!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아내의 의식의 강산이 변한 것인가. 나는 아내의 표현이 재미있어 킥킥대며 웃다가 대꾸했다. 

“누구는 지구의 정원사라 부르던데?” 

“멋진 호명이네요. 정원사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겠어요.” 지렁이나 땅강아지 같은 생물은 눈을 씻고 보아도 볼 수 없던 황폐해진 밭. 오랜 세월 농약과 비료로 산성화된 밭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애를 썼던가. 들판의 풀들을 베어다 넣고,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 넣고, 아침마다 요강의 오줌을 단지에 모아 썩혀서 넣기를 십여 년. 마침내 지렁이들이 우글우글 붐비는 옥토가 된 것. 

나는 풀을 뽑아낸 후 흙 한 줌을 손으로 움켜잡았다가 손가락을 벌려 본다. 흙이 가루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산의 부엽토가 그렇듯 영양분이 많은 밭의 흙은 부드럽다. 건강한 흙에서는 매혹적이고 싱그러운 향기도 난다. 이 흙냄새는 대지 어머니의 젖 냄새가 아닌가. 이처럼 흙에서 생명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은 다 지렁이 덕분이다. 

세계 역사에서 지렁이를 주목하고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종의 기원>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박물학자이며 진화론자인 찰스 다윈. 그는 지렁이가 오물과 썩은 낙엽을 어떻게 흙으로 바꿔놓는지, 우리 발밑에 있는 땅이 지렁이의 몸을 통해 어떻게 순환되고 있는지를 연구했다. 다윈은 늘그막에 거실에다 큰 항아리를 들여다 놓고 그 안에 지렁이를 키우며 그 습성을 관찰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빈정거렸다. 유명한 학자가 자기 본분을 잊고 미친 짓을 하고 있다고. 그러나 옹고집쟁이 다윈의 지렁이 사랑과 탐구는 멈출 줄 몰랐다. 계속된 연구를 통해 그는 지렁이들이 낙엽을 잘게 갈 뿐 아니라 작은 돌까지 부수어서 똥으로 배출해 건강한 무기질 흙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지렁이는 매일 자기 몸무게의 두 배나 되는 똥을 싼다. 유기물이나 흙을 먹고 그것을 똥으로 배출하는데, 먹은 음식의 20% 정도만 소화되고 나머지는 그냥 잘게 부수어 몸 밖으로 배출하는 것. 지렁이가 배설한 유기물은 일반 유기물보다 더 잘 분해되고 식물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지렁이 똥에는 질소와 탄소, 칼슘, 마그네슘, 칼륨, 나트륨, 망간 등 무기질 양분도 풍부하다. 하여간 다윈은 지렁이를 관찰하면서 지구의 살갗인 흙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을 새롭게 열어놓았다. 

“어떤 벌판이든 지표의 흙 전체가 몇 해 단위로 지렁이 몸통을 거쳐 왔고, 앞으로도 거쳐 갈 것이라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쟁기는 사람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소중한 것에 속한다. 하지만 사실 사람이 지구에 살기 훨씬 오래전부터 지렁이들이 땅을 규칙적으로 쟁기질해 왔고 지금도 변함없이 땅을 갈고 있다. 세계사에서 이 하등동물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일을 한 동물들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다.”(찰스 다윈, <지렁이의 활동과 분변토의 형성>) 

다윈의 글을 읽은 후 나는 지렁이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비가 많이 내린 뒤 길바닥에 나와 있는 지렁이를 보면 ‘너 왜 여기 나왔어? 바퀴에 깔려 죽을라구!’하며 손으로 냉큼 집어 풀밭으로 넣어주곤 했다. 자연스레 농법(農法)도 바뀌었다. 소위 무경운을 첫 번째 원칙으로 삼는 것. 다시 말하면 땅을 갈아엎기 위해 쟁기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지렁이의 쟁기질에 의지해 농사를 짓는다. 지렁이는 일생 동안 모든 것을 바쳐 농삿일에 헌신하는, 마당쇠나 돌쇠를 능가하는 상일꾼이 아닌가. 십여 년 만에 커피색으로 변한 텃밭의 건강한 겉흙은 나의 노력도 있긴 하지만 상일꾼의 부단한 쟁기질 덕분이다. 겉흙의 두께는 기껏해야 5센티를 넘지 않는다. 보통 농부들은 쟁기나 삽으로 땅을 파 뒤집는데, 그렇게 하면 땅을 기름지게 하는 지렁이 개체수가 줄어들고 영양소 풍부한 겉흙을 잃어버리기 쉽다. 건강한 겉흙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려야 한다. 

내가 처음 자연농을 한다고 했을 때 아내는 과연 농작물을 수확이나 할 수 있을지 미심쩍다고 했다. 

“여보, 날 믿어봐요. 그래도 내가 농업고등학교 출신이잖아!” 

그렇다. 나는 강원도 산골에서 농업고등학교를 다녔고, 일찍 홀로 된 어머니를 거들며 농사일을 배웠다. 당시 어머니는 7백 평쯤 되는 밭농사를 지으셨는데, 어느 날 고추밭을 매다가 어머니가 한 말씀이 지금도 새록새록하다. 

“얘야, 고추밭 고랑의 풀은 뽑아야 하지만, 가장자리의 풀은 그냥 둬라!” 

“왜요?” 

“큰비가 내리면 겉흙이 유실되기 때문이지. 영양소가 풍부한 겉흙이 유실되면 농사를 해도 제대로 결실을 거둘 수 없거든.” 

그 당시엔 어머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밭 가장자리의 풀을 뽑거나 베지 않는다. 올여름 우리나라 전역에 큰 홍수가 났다. 우리 마을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어느 날 장맛비가 삐쭘한 틈에 우산을 쓰고 들판으로 나가 보았더니, 몇 해 전 귀농한 젊은 농부의 산밭의 흙이 많이 유실되어 있었다. 콩과 들깨가 심어진 밭이었는데, 그 소중한 겉흙이 길가로 떠밀려와 벌겋게 쌓여 있었다. 좋은 농사꾼은 풀과 벌레들과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낸다. 풀과 벌레는 무찔러야 할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젊은 친구는 농사로 소득을 얻기 위해 풀과 벌레와의 전쟁을 치뤘던 것. 제초제를 뿌려 밭 가의 풀까지 다 죽인 결과 그 소중한 흙을 잃어버린 것이다. 

<흙>이란 책을 쓴 데이비드 몽고메리는 지구의 살갗, 즉 겉흙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름진 겉흙은 그야말로 미생물들의 세상이기도 하다. 미생물은 식물이 유기물질과 무기질 흙에서 양분을 얻도록 돕는다. 겉흙 한 줌 속에 사는 미생물들의 수가 몇 십 억 마리에 이르기도 한다. 500그램도 안 되는 흙 속 미생물들의 수가 지구 전체에 사는 사람 수보다 많다.” 

헉! 한 줌 흙 속에 그렇게 많은 미생물들이 살고 있다니.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생물들은 양분을 배출하고 유기물질을 썩혀 땅을 식물이 살기에 알맞은 곳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런 땅은 농사를 지어 양식을 얻기에 좋은 땅이다. 그런데 우리는 돈벌이에 미쳐 농약과 제초제로 땅을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우리나라 농토 대부분이 지렁이나 미생물들이 살 수 없는 박토로 변했다. 땅을 성스럽게 여기지 않고 단순한 자원으로 보는 삶의 방식 때문에 오늘 우리는 무서운 환경 재앙을 겪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지속가능한’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인류의 삶이 지속될 수 없을 거란 의혹을 품고 있는 말이 아닌가. 나는 생태적 위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인류의 고전들 속에서 지속가능한 삶의 원형을 부단히 찾아 왔다. 고대 유대인들의 삶의 비전이 담긴 성경을 다시 읽다가 그런 원형을 발견하고서 무척 기뻤다. 

유대인들은 나무를 심고 나서 열매가 달리기 시작해도 4년 동안은 열매를 따먹지 않는다고 한다. 땅에 떨어진 열매가 썩어 땅을 비옥하게 하도록 그대로 둔다는 것이다.(레위기 25: 1-5) 그리고 땅에도 안식년 규칙을 두어 6년 동안은 땅에 씨앗을 파종하여 수확을 거두고 7년째 되는 해에는 땅을 갈지도 않고 씨앗도 뿌리지 않고 묵혀 풀만 자라도록 했다.(출 23: 10-11) 얼마나 아름다운 생태적 지혜인가.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는 먹거리가 늘 부족하고 궁핍을 면하기 어려웠을 텐데, 그들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오늘의 고통을 감내하며 건강한 흙의 보존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나는 이런 지혜에 공감하여 뒤란에 심은 매실나무와 대추나무의 열매를 4년이 지나도록 따먹지 않았고, 5년째 되는 해에야 첫 열매를 수확했다. 고대 유대인들이 실천했던 이런 느긋한 삶의 지혜를 복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인류가 직면한 환경 재앙을 극복하고 우리 자식들에게 지속가능한 미래를 물려줄 수 있으리라.

인도의 고전인 우파니샤드에서도 우리 발에 짓밟히는 흙을 ‘참 존재’라며 드높게 칭송한다. “아들아, 한 줌의 흙덩어리를 알면 그 흙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을 알게 된다, 흙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그것을 소리로 부르기 위하여 다른 이름들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중에 오직 흙만이 참 존재인 것이다.” –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

이런 고대인들의 삶의 지혜를 오늘날 자기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일본의 자연농법의 대가인 후쿠오카 마사노부. 그는 그런 삶을 알뜰살뜰 보듬고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농사는 자연이 짓고 농부는 그 시중을 든다.” 후쿠오카의 농사 철학이다. 어설픈 농사꾼이지만 나는 자연이 짓는 농사에 시중 드는 농부로 남은 생을 살고 싶다. 그것이 참 존재인 흙을 닮아 참 사람 되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대지는 단순한 토양이 아니다. 
푸른 하늘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대지는 신의 정원이고, 
푸른 하늘은 신들의 공간이다. 
신의 정원을 가꿔서 얻은 곡식을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며 먹는 
농부의 생활이야말로 
인간의 최선이자 최고의 생활이다.

후쿠오카 마사노부, 『생명의 농업과 대자연의 道』에서

고진하 목사시인 글

이 시리즈는 한겨레신문 휴심정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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