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미수교국을 개척한 건설 외길 60년’ (2부)

2026.2.26.

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미수교국을 개척한 건설 외길 60년’ (2부)

2026.2.26.


1973년, 서울역 앞에는 거대한 회색빛 뼈대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한때 서울의 관문이자 관광 산업의 희망으로 불렸던 교통센터는 공사 중단과 화재를 겪으며 버려진 채 스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모두가 외면하던 그곳에, 젊은 기업가 김우중과 그의 오랜 친구 홍성부가 나타났다. 마치 운명처럼, 홍성부는 김우중의 "건설회사를 한번 해보지 않겠냐?"는 다짜고짜 제안에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쌍용양회에서 잔뼈 굵은 건설본부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그였지만, 김우중과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작은 회사를 인수하며 시작된 대우건설. 12명의 직원이 전부였던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홍성부의 눈은 이미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버려진 교통센터를 오피스 빌딩으로 탈바꿈시키는 혁신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정부의 호텔 계획을 뒤엎는 과감한 결정이었지만, 그의 탁월한 수익성 분석과 "돈은 김 회장님이, 기술과 사람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신뢰로 김우중을 설득했다.

그들은 건물의 단순한 완성을 넘어, 지하 2,400평 공간에 국내 최초로 25m 수영장을 갖춘 최고급 헬스센터를 들이는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이는 직원들의 자부심을 높였고, '대우'라는 이름에 단순히 돈 버는 기업 이상의 가치를 불어넣었다. 대우센터의 성공적인 준공은 대우건설의 실력을 세상에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시 대우다”, “정말 잘 지었다”는 찬사는 단순한 칭찬을 넘어, 대우에 대한 국민과 정부의 신뢰를 쌓는 초석이 되었다.

홍성부는 이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제 드넓은 해외 시장으로 향했다. 당시 수많은 한국 건설업체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래바람 속에서 좌절하고 있을 때, 그는 수단과 리비아라는 아프리카 미수교국에 주목했다. 그는 단순한 건설 하청을 넘어, 자본을 수출하고 건설을 수반하는 선진국형 모델을 제시했다.

(홍성부 회장님 인터뷰는 총 2부작으로 발행되었습니다. 본편은 2부에 해당됩니다.)

  • 박혁진

    박혁진 : 대우센터 준공 이후, 대우건설은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당시 해외 건설 진출 상황과 대우의 전략은 어떠했습니까?

  • 홍성부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5천만 달러 규모의 해외 공사를 수주한 사례가 있었는데, 당시 국내 건설 시장은 경쟁이 매우 치열했고 해외 진출이 대세가 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해외 건설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라고 판단했습니다. 건설업은 지역성이 강해 현지 자재와 인력을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진출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우센터를 마무리하면서 회사의 내부 조직, 실력, 시스템을 제대로 갖춘 후에야 해외 건설로 나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후 1977년 대우센터 준공을 기점으로 해외 진출을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 시장을 공략 대상으로 삼았는데, 특히 인구가 가장 많은 나이지리아, 땅이 가장 넓은 수단, 석유는 많지만 인구가 적어 인프라 구축이 어려운 리비아에 주목했습니다. 당시 이 세 나라는 모두 대한민국과 수교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라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기업 차원에서 먼저 진출했고, 그 진출이 계기가 되어 외교 수교까지 이루어졌습니다.




  • 박혁진

    수단 영빈관 건설 프로젝트와 타이어 공장 건설이 특히 인상 깊은데요, 어떤 과정을 거쳐 이 프로젝트들을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까?

  • 홍성부

    수단 영빈관 프로젝트는 아프리카 정상회담 개최를 앞두고 마땅한 호텔이 없다는 수단 정부의 요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산 1,500만 달러로 영빈관을 지으려 했지만, 설계도 부실했습니다. 제가 문제점을 짚자 니메이리 대통령이 큰 관심을 보였고, 김우중 회장님은 "이 문제점을 반영해서 우리 안을 따로 만들어보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김수근 건축가에게 설계와 브리핑을 맡겨 2,000만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수주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단에 2,000만 달러 차관을 제공했고, 그 자금으로 우리가 건설을 진행한 겁니다. 이는 단순한 해외 건설 공사가 아니라, 선진국들이 해외 건설을 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자본을 수출하여 건설을 수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수단 타이어 공장 건설은 대한민국이 해외에 나가서 건설 공사한 것 중에 가장 모범적인 선진국형 모델이었습니다. 수단이 타이어를 100% 수입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타이어 공장을 직접 지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돈이 없다고 하자, 우리가 자금 마련, 상환 책임, 설계, 기계 조달, 그리고 심지어 생산된 타이어를 팔아서 그 수익으로 상환까지 책임지는 '턴키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이는 정부 차원의 개입 없이, 국제 시장에서 실현한 사업이었고, 이익도 나는 사업이었습니다. 이 타이어들은 수단 국내에 전량 공급하고, 남는 물량은 외국으로 수출했습니다. 공사비는 면화로 받았고, 결국 공장 운영까지도 대우가 맡았던 프로젝트였습니다.




  • 박혁진

    리비아 진출 과정에서는 정부의 제지까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었습니까?

  • 홍성부

    1978년, 리비아 가리니우스 의과대학 프로젝트를 국제 입찰로 수주하려 했지만, 당시 정부 차원에서 입찰을 막았습니다. 수단과 리비아가 적대적인 관계였기에 외교 문제 발생을 우려한 것이었죠.

    하지만 김우중 회장님은 "입찰해라.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셨고, 공항에서 체포될 수도 있다는 우려 속에서도 입찰에 참여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입찰에 성공했고, 리비아 관계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대우센터와 힐튼호텔 등을 보여주며 신뢰를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리비아에서 의과대학 공사를 따낼 수 있었죠.

    이후 우리는 리비아 내륙 지역의 사막에 우조 비행장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도 맡았습니다. 사막이라는 특성상 물 확보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현장에서 지하수를 발견하는 행운이 따랐습니다.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카다피가 비행장에 직접 방문하여 우리 직원들이 일하는걸 보고는 “야 너희들 어떻게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냐. 오래 머물고 일해다오(You stay long in Libya).” 그러고는 떠났어요.

    이후 카다피가 대한민국 정부에 국교 정상화를 제안하기에 이릅니다. 제가 귀국하여 김우중 회장님께 이 내용을 전달했고, 결국 (1980년)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1982년도에 주택, 교실, 도로 공사 등 30억 불 규모의 대규모 사업을 따냈습니다. 이는 대우건설이 세계화 전략의 선봉장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 박혁진

    1980년대 초반 대우그룹이 ㈜대우 체제로 개편되면서 기획조정실장을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기조실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셨습니까?

  • 홍성부

    제가 기조실장을 맡은 것은 1980년, 대우가 ㈜대우 체제로 개편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건설은 리비아에서 30억불 공사 소화하느라고 정신없고, 서울은 서울대로 김우중 회장이 또 그때 대우자동차 대우전자를 인수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저에게 본사에 들어와서 일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건설 분야는 어느 정도 안정되었기에, 서울로 들어와서 새로운 사업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죠. 처음에는 자동차 사업을 제안받았는데, 저는 자동차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거절했습니다. 결국 "자동차, 전자, 기조실 중 하나는 당신이 맡아야 한다"는 얘기에 기조실을 선택했습니다.

    기조실은 그룹 전체 시스템을 구축하고 여러 현장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곳이었기에 제 관심 분야와도 맞았습니다. 제가 기조실에 와서 했던 주요 일 중 하나가 인사제도 개편이었습니다. 당시 대우그룹은 전 직원이 동일한 단일 호봉 제도를 따랐기에 성과나 능력에 따라 빨리 진급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저는 이 인사 제도를 완전히 개편하여 직급별 기준에 따라 인사 고과를 적용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부장급 정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이사부장 제도'를 새로 만들었고, ROTC 출신 신입사원의 직급 체계를 조정하여 직원들 간의 불만을 줄이고 사기를 높였습니다. 이러한 인사 개편은 대우건설에서 먼저 적용되었고, 이후 김우중 회장의 결단으로 이사부장 제도는 전 그룹에 공식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 박혁진

    기조실장으로서 그룹 전체의 사업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경남기업 인수와 같은 중요한 결정들이 있었을 텐데요. 당시 어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 홍성부

    제가 기조실장으로 있으면서 그룹 전체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일을 하긴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사건은 (1984년) 경남기업 인수 건이었어요. 당시 건설은 제 전문 분야니까, 저뿐 아니라 다른 간부들도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경남기업이 3천억 원 적자가 날 것으로 예상됐는데도 정부에서 "그 손실은 우리가 보전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인수를 밀어붙였습니다.

    저는 “3천억이 진짜 적자가 날지, 천억일지, 아니면 그보다 적을지 누가 압니까. 그냥 그쪽에서 하는 말을 믿고는 절대 안 된다”고 주장했죠. 하지만 김우중 회장이 실사를 대충 넘기려고 했고, 외환은행도 실사를 형식적으로만 하려 했습니다.

    저는 150명을 동원하여 경남지역 전 현장에 사람을 보내 발로 뛰는 철저한 실사를 지시했습니다. 그 결과 실제 적자 규모가 5천억 원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이는 경남기업 인수 시 대우가 2천억 원의 추가 손실을 떠안을 수도 있었던 것을 막은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 박혁진

    김대중 정부 시절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된 과정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당시 상황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 홍성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우중 회장님은 처음에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IMF라는 위기 상황에서 '돈을 조여야 한다'는 IMF의 논리와 '돈을 풀어야 한다'는 김우중 회장의 논리가 충돌했습니다. 김우중 회장님은 “지금 돈을 풀어 물건을 만들면 팔린다. 달러가 들어오고, 그걸로 빚을 갚으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금모으기 운동'도 김우중 회장님이 주도한 것이었죠.

    하지만 경제 각료들이 김대중 대통령께 김우중 회장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보고를 올렸고, 강봉균 차관을 대통령 앞에서 야단쳤던 일 등은 김우중 회장님의 '정무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저는 기조실장을 역임하며 대우전자와 자동차 부문에 상당한 분식회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기회에 확실히 공개하고 통합을 시도하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국세청과 은행의 비협조, 그리고 김우중 회장님이 모든 책임을 혼자 감당하려 했던 성향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김대중 대통령께서 김우중 회장에게 "해외로 나가라"고 하신 것이 모든 것을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정말 냉정히 보자면, 대한민국 경제사회 입장에서 어마어마한 손실이 발생한 셈입니다. 당시 다른 대기업들도 분식회계를 했고 회계 구조도 비슷했는데, 유독 대우만 그렇게 몰아서 망하게 한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 박혁진

    회장님께서는 대우를 떠나 ㈜신한을 이끄셨고, 이후에도 대우의 성과와 유산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우가 한국 경제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홍성부

    제가 1989년 개발 부문 사장을 맡았을 때, 미국 부동산 시장에 진출하여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미국은 총 사업비의 20%를 자기 자본으로 가지고 있어야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시스템을 통해 투기보다는 안정적인 개발을 유도한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러한 선진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미국 부동산 사업의 구조 자체를 배우고자 했습니다.

    비록 제가 회사를 그만둔 후의 일이지만, 트럼프와도 사업을 진행하는 등 미국 부동산 시장 진출을 이어갔습니다. 우리나라 업체가 세계 최고의 선진국인 미국까지 넘봤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죠.

    대우는 1973년 매출 '0'으로 시작하여 1983년 매출 1조 원, 건설사 랭킹 2위에 오르며 10년 만에 경이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대우센터 하나를 통해 현대건설, 대림산업 같은 기존 대형 건설사들이 가진 신용도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교보생명 빌딩, 롯데호텔 골조 공사, 울산 종합발전소 턴키 베이스 건설 등 대우는 국내에서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한국 건설 산업의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50분간 진행됐습니다. 회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홍성부 HONG Soung-Bu

  • 1937

    출생,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 1964

    금성방직 입사

  • 1966

    쌍용양회 입사

  • 1973

    대우개발 입사 (전무)

  • 1978

    대창기업 사장

  • 1980

    대우기획조정실 사장 겸 ㈜대우 건설부문 사장

  • 1989

    동우개발 사장

  • 1993

    ㈜신한 회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4월 22일 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 룸 
참석자
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
(촬영 정리) 

1973년, 서울역 앞에는 거대한 회색빛 뼈대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한때 서울의 관문이자 관광 산업의 희망으로 불렸던 교통센터는 공사 중단과 화재를 겪으며 버려진 채 스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모두가 외면하던 그곳에, 젊은 기업가 김우중과 그의 오랜 친구 홍성부가 나타났다. 마치 운명처럼, 홍성부는 김우중의 "건설회사를 한번 해보지 않겠냐?"는 다짜고짜 제안에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쌍용양회에서 잔뼈 굵은 건설본부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그였지만, 김우중과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작은 회사를 인수하며 시작된 대우건설. 12명의 직원이 전부였던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홍성부의 눈은 이미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버려진 교통센터를 오피스 빌딩으로 탈바꿈시키는 혁신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정부의 호텔 계획을 뒤엎는 과감한 결정이었지만, 그의 탁월한 수익성 분석과 "돈은 김 회장님이, 기술과 사람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신뢰로 김우중을 설득했다.

그들은 건물의 단순한 완성을 넘어, 지하 2,400평 공간에 국내 최초로 25m 수영장을 갖춘 최고급 헬스센터를 들이는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이는 직원들의 자부심을 높였고, '대우'라는 이름에 단순히 돈 버는 기업 이상의 가치를 불어넣었다. 대우센터의 성공적인 준공은 대우건설의 실력을 세상에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시 대우다”, “정말 잘 지었다”는 찬사는 단순한 칭찬을 넘어, 대우에 대한 국민과 정부의 신뢰를 쌓는 초석이 되었다.

홍성부는 이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제 드넓은 해외 시장으로 향했다. 당시 수많은 한국 건설업체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래바람 속에서 좌절하고 있을 때, 그는 수단과 리비아라는 아프리카 미수교국에 주목했다. 그는 단순한 건설 하청을 넘어, 자본을 수출하고 건설을 수반하는 선진국형 모델을 제시했다.

(홍성부 회장님 인터뷰는 총 2부작으로 발행됐습니다. 본편은 2부에 해당됩니다.)



  • 박혁진

    대우센터 준공 이후, 대우건설은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당시 해외 건설 진출 상황과 대우의 전략은 어떠했습니까?

  • 홍성부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5천만 달러 규모의 해외 공사를 수주한 사례가 있었는데, 당시 국내 건설 시장은 경쟁이 매우 치열했고 해외 진출이 대세가 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해외 건설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라고 판단했습니다. 건설업은 지역성이 강해 현지 자재와 인력을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진출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우센터를 마무리하면서 회사의 내부 조직, 실력, 시스템을 제대로 갖춘 후에야 해외 건설로 나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후 1977년 대우센터 준공을 기점으로 해외 진출을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 시장을 공략 대상으로 삼았는데, 특히 인구가 가장 많은 나이지리아, 땅이 가장 넓은 수단, 석유는 많지만 인구가 적어 인프라 구축이 어려운 리비아에 주목했습니다. 당시 이 세 나라는 모두 대한민국과 수교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라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기업 차원에서 먼저 진출했고, 그 진출이 계기가 되어 외교 수교까지 이루어졌습니다.



  • 박혁진

    수단 영빈관 건설 프로젝트와 타이어 공장 건설이 특히 인상 깊은데요, 어떤 과정을 거쳐 이 프로젝트들을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까?

  • 홍성부

    수단 영빈관 프로젝트는 아프리카 정상회담 개최를 앞두고 마땅한 호텔이 없다는 수단 정부의 요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산 1,500만 달러로 영빈관을 지으려 했지만, 설계도 부실했습니다. 제가 문제점을 짚자 니메이리 대통령이 큰 관심을 보였고, 김우중 회장님은 "이 문제점을 반영해서 우리 안을 따로 만들어보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김수근 건축가에게 설계와 브리핑을 맡겨 2,000만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수주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단에 2,000만 달러 차관을 제공했고, 그 자금으로 우리가 건설을 진행한 겁니다. 이는 단순한 해외 건설 공사가 아니라, 선진국들이 해외 건설을 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자본을 수출하여 건설을 수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수단 타이어 공장 건설은 대한민국이 해외에 나가서 건설 공사한 것 중에 가장 모범적인 선진국형 모델이었습니다. 수단이 타이어를 100% 수입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타이어 공장을 직접 지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돈이 없다고 하자, 우리가 자금 마련, 상환 책임, 설계, 기계 조달, 그리고 심지어 생산된 타이어를 팔아서 그 수익으로 상환까지 책임지는 '턴키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이는 정부 차원의 개입 없이, 국제 시장에서 실현한 사업이었고, 이익도 나는 사업이었습니다. 이 타이어들은 수단 국내에 전량 공급하고, 남는 물량은 외국으로 수출했습니다. 공사비는 면화로 받았고, 결국 공장 운영까지도 대우가 맡았던 프로젝트였습니다.



  • 박혁진

    리비아 진출 과정에서는 정부의 제지까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었습니까?

  • 홍성부

    1978년, 리비아 가리니우스 의과대학 프로젝트를 국제 입찰로 수주하려 했지만, 당시 정부 차원에서 입찰을 막았습니다. 수단과 리비아가 적대적인 관계였기에 외교 문제 발생을 우려한 것이었죠.

    하지만 김우중 회장님은 "입찰해라.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셨고, 공항에서 체포될 수도 있다는 우려 속에서도 입찰에 참여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입찰에 성공했고, 리비아 관계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대우센터와 힐튼호텔 등을 보여주며 신뢰를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리비아에서 의과대학 공사를 따낼 수 있었죠.

    이후 우리는 리비아 내륙 지역의 사막에 우조 비행장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도 맡았습니다. 사막이라는 특성상 물 확보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현장에서 지하수를 발견하는 행운이 따랐습니다.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카다피가 비행장에 직접 방문하여 우리 직원들이 일하는걸 보고는 “야 너희들 어떻게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냐. 오래 머물고 일해다오(You stay long in Libya).” 그러고는 떠났어요.

    이후 카다피가 대한민국 정부에 국교 정상화를 제안하기에 이릅니다. 제가 귀국하여 김우중 회장님께 이 내용을 전달했고, 결국 (1980년)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1982년도에 주택, 교실, 도로 공사 등 30억 불 규모의 대규모 사업을 따냈습니다. 이는 대우건설이 세계화 전략의 선봉장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 박혁진

    1980년대 초반 대우그룹이 ㈜대우 체제로 개편되면서 기획조정실장을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기조실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셨습니까?

  • 홍성부

    제가 기조실장을 맡은 것은 1980년, 대우가 ㈜대우 체제로 개편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건설은 리비아에서 30억불 공사 소화하느라고 정신없고, 서울은 서울대로 김우중 회장이 또 그때 대우자동차 대우전자를 인수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저에게 본사에 들어와서 일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건설 분야는 어느 정도 안정되었기에, 서울로 들어와서 새로운 사업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죠. 처음에는 자동차 사업을 제안받았는데, 저는 자동차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거절했습니다. 결국 "자동차, 전자, 기조실 중 하나는 당신이 맡아야 한다"는 얘기에 기조실을 선택했습니다.

    기조실은 그룹 전체 시스템을 구축하고 여러 현장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곳이었기에 제 관심 분야와도 맞았습니다. 제가 기조실에 와서 했던 주요 일 중 하나가 인사제도 개편이었습니다. 당시 대우그룹은 전 직원이 동일한 단일 호봉 제도를 따랐기에 성과나 능력에 따라 빨리 진급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저는 이 인사 제도를 완전히 개편하여 직급별 기준에 따라 인사 고과를 적용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부장급 정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이사부장 제도'를 새로 만들었고, ROTC 출신 신입사원의 직급 체계를 조정하여 직원들 간의 불만을 줄이고 사기를 높였습니다. 이러한 인사 개편은 대우건설에서 먼저 적용되었고, 이후 김우중 회장의 결단으로 이사부장 제도는 전 그룹에 공식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 박혁진

    기조실장으로서 그룹 전체의 사업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경남기업 인수와 같은 중요한 결정들이 있었을 텐데요. 당시 어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 홍성부

    제가 기조실장으로 있으면서 그룹 전체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일을 하긴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사건은 (1984년) 경남기업 인수 건이었어요. 당시 건설은 제 전문 분야니까, 저뿐 아니라 다른 간부들도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경남기업이 3천억 원 적자가 날 것으로 예상됐는데도 정부에서 "그 손실은 우리가 보전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인수를 밀어붙였습니다.

    저는 “3천억이 진짜 적자가 날지, 천억일지, 아니면 그보다 적을지 누가 압니까. 그냥 그쪽에서 하는 말을 믿고는 절대 안 된다”고 주장했죠. 하지만 김우중 회장이 실사를 대충 넘기려고 했고, 외환은행도 실사를 형식적으로만 하려 했습니다. 저는 150명을 동원하여 경남지역 전 현장에 사람을 보내 발로 뛰는 철저한 실사를 지시했습니다. 그 결과 실제 적자 규모가 5천억 원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이는 경남기업 인수 시 대우가 2천억 원의 추가 손실을 떠안을 수도 있었던 것을 막은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 박혁진

    김대중 정부 시절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된 과정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당시 상황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 홍성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우중 회장님은 처음에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IMF라는 위기 상황에서 '돈을 조여야 한다'는 IMF의 논리와 '돈을 풀어야 한다'는 김우중 회장의 논리가 충돌했습니다. 김우중 회장님은 “지금 돈을 풀어 물건을 만들면 팔린다. 달러가 들어오고, 그걸로 빚을 갚으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금모으기 운동'도 김우중 회장님이 주도한 것이었죠.

    하지만 경제 각료들이 김대중 대통령께 김우중 회장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보고를 올렸고, 강봉균 차관을 대통령 앞에서 야단쳤던 일 등은 김우중 회장님의 '정무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저는 기조실장을 역임하며 대우전자와 자동차 부문에 상당한 분식회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기회에 확실히 공개하고 통합을 시도하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국세청과 은행의 비협조, 그리고 김우중 회장님이 모든 책임을 혼자 감당하려 했던 성향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김대중 대통령께서 김우중 회장에게 "해외로 나가라"고 하신 것이 모든 것을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정말 냉정히 보자면, 대한민국 경제사회 입장에서 어마어마한 손실이 발생한 셈입니다. 당시 다른 대기업들도 분식회계를 했고 회계 구조도 비슷했는데, 유독 대우만 그렇게 몰아서 망하게 한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 박혁진

    회장님께서는 대우를 떠나 ㈜신한을 이끄셨고, 이후에도 대우의 성과와 유산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우가 한국 경제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홍성부

    제가 1989년 개발 부문 사장을 맡았을 때, 미국 부동산 시장에 진출하여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미국은 총 사업비의 20%를 자기 자본으로 가지고 있어야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시스템을 통해 투기보다는 안정적인 개발을 유도한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러한 선진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미국 부동산 사업의 구조 자체를 배우고자 했습니다. 비록 제가 회사를 그만둔 후의 일이지만, 트럼프와도 사업을 진행하는 등 미국 부동산 시장 진출을 이어갔습니다. 우리나라 업체가 세계 최고의 선진국인 미국까지 넘봤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죠.

    대우는 1973년 매출 '0'으로 시작하여 1983년 매출 1조 원, 건설사 랭킹 2위에 오르며 10년 만에 경이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대우센터 하나를 통해 현대건설, 대림산업 같은 기존 대형 건설사들이 가진 신용도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교보생명 빌딩, 롯데호텔 골조 공사, 울산 종합발전소 턴키 베이스 건설 등 대우는 국내에서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한국 건설 산업의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 구술인터뷰는 총 2시간 50분간 진행됐습니다. 회장님 동의하에 일부 내용만 발췌해 소개합니다.



홍성부 HONG Soung-Bu

  • 1937

    출생,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 1964

    금성방직 입사

  • 1966

    쌍용양회 입사

  • 1973

    대우개발 입사 (전무)

  • 1978

    대창기업 사장

  • 1980

    대우기획조정실 사장 겸 ㈜대우 건설부문 사장

  • 1989

    동우개발 사장

  • 1993

    ㈜신한 회장


구술 인터뷰 진행일지

일시
2025년 4월 22일 화요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우재단빌딩 5층 아카이빙 룸 
참석자
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박혁진 주간조선 편집장
최윤권 대우재단 사무국장
이금화 대우인회 사무국장
장윤석 대우재단 커뮤니케이션팀장(촬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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