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 스님 소엽산방 18

다산 정약용의 지음자 혜장이 남긴 것은

사진 한겨레 휴심정

선시종가1080 / 17. 책이 천권이요 술은 백병이라

(본문)

엽엽우발(燁燁優鉢)은 조화석쇠(朝華夕衰)요

편편금시(翩翩金翅)는 재지재건(載止載騫)이라

빛나는 우담발라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었네.

펄펄나는 금시조

잠시 앉는가 했더니 곧바로 날아갔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혜장(惠藏1772~1811)이 40세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제자들의 부탁을 받고서 지은 탑명(塔銘)의 첫구절을 이렇게 시작했다. 그를 삼천년만에 한번 피는 우담발라화이며 수미산까지 날개짓 한번으로 단숨에 날아가는 금시조에 비유했다. 고인에 대한 말 인심은 어느 시대나 후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혜장은 재주가 뛰어났다. <능엄경>과 <대승기신론>에 밝았다. 또 공자의 <논어>도 좋아했고 <주역>에 관한 안목은 전문가 수준이었다. 게다가 차를 잘 만들었으며 문장을 짓는 솜씨 역시 빼어났다. 저서에는 <아암집> 3권(1920년 간)이 있으며 탑비는 승탑과 함께 대흥사 입구 부도밭에 남아있다. 서산대사와 초의선사 승탑 사이에 위치한다.

사진 한겨레 휴심정 혜장 스님. 백련사 누리집
다산 정약용. 자료사진

(해설)

나이를 잊어버린 친구관계를 망년지교(忘年之交)라고 한다. 다산과 혜장이 그랬다. 십년이라는 나이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남 해남 화산면 출신인 혜장은 1805년 가을 땅끝으로 유배온 다산과 처음으로 만났다. 다산은 혜장을 만나고서 ‘말세인심이 야박하고 비루한데 요즘도 이렇게 진솔한 사람도 있구나’라고 하면서 엄청 고마워했다. 유배지에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혜장은 당대 제일 지식인인 다산을 만날 수 있었고 다산 역시 아무도 없는 유배지에서 격조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것이다.

다산은 주변과 어울리지 못할만큼 고집스러운 혜장을 향해 “그대는 어린아이처럼 유순해질 수 없는가”라는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서 혜장은 그 자리에서 아암(兒庵)이란 호를 스스로 지어 부를 만큼 믿고 따랐다. 그렇다고 해서 성질머리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절집에서는 이미 연파(蓮坡)로 불리고 있었다. 혜장이 입적한 다음날 쓴 만사(輓詞 만장 글)에는 “관어각(觀魚閣) 위에는 책이 천권이요, 말 기르는 상방(廂房)에는 술이 백병이네”라고 하면서 혜장의 양면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글까지 남길만큼 격의없는 사이이기도 했다.

사진 한겨레 휴심정 혜장 스님이 주석한 전남 강진 백련사 전경. 백련사 누리집

‘음다흥(飮茶興) 음주망(飮酒亡)’도 다산의 명언이다. ‘차 마시기-건강에 아주 좋음’ 후에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말인 ‘술마시기-건강에 매우 나쁨’를 기필코 댓구로 달아놓은 것도 뭔가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혹여 혜장에 대한 안타까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어쨋거나 이 말로 미루어 본다면 결국 혜장은 술 때문에 요절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6년간 만남은 조선후기 승려와 유생의 단순한 개인적 만남이 아니라 조선 개국이후 끊어지다시피한 차(茶)문화의 중흥을 알리는 문화사적인 대사건이었다. 뒷날 초의(艸衣1786~1866)선사와 추사(秋史1786~1856)선생으로 이어진 차 문화 계승도 결국 그 시작은 다산과 혜장이라 하겠다.

2022년 4월23일 대흥사에서 공식일정인 서산(西山1520~1604)대사를 추모하는 향례(享禮)에 참석한 후 돌아오는 길에 인근 강진 백련사를 들렀다. 늘 행사장 혹은 회의석상에서 잠깐 잠깐 뵙는 것으로 만족했던 보각 대화상을 주석처까지 찾아가서 제대로 인사를 올렸다. 불교 복지학계의 선구자이며 복지학과 교수로 정년을 맞은 뒤 백련사 주지로 만덕산을 지키고 있다. 현재 복지계에 몸을 담고 있는 승려들의 대부분이 스님의 제자들이라 하겠다. 그 공로를 인정받은 까닭에 교계에서 가장 상금이 많고 권위있는 ‘만해상(萬海賞)’ 실천부문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차를 나누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백련사(白蓮寺)의 제일 콘텐츠인 다산 선생과 혜장스님의 인연이야기로 화제가 이어졌다. 따끈따끈한 신간 <역주 만덕사지(譯註 萬德寺志)>(2021년 간)한 권을 방문선물로 받았다. 돌아와서 차근차근 살폈다. 그 책의 관계자인 많은 이름들이 나온다.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전체감수는 당연히 다산 몫이다. 편집자로 이름을 올린 학림이청(鶴林李晴1792~1861 이학래)은 정약용의 제자로 다산초당 아랫마을 귤동 출신이며 아전(衙前)인 하급관리의 아들이다. 다산을 제외한다면 유일한 재가자(在家者)이다. 하지만 신분이 세습되며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 서리(書吏)집안인 중인출신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학문에 대한 욕심 뿐만 아니라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에도 집착했다. 다산은 그가 현실의 장벽에 부딪혔을 때 받게 될 상처를 늘 걱정했다. ‘이청이 망령되이 과거를 보려하므로 말렸지만 듣지를 않는다“는 내용을 다른 이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언급할 정도였다.

사진 한겨레 휴심정

<만덕사지>편집에 관여한 스님들은 대부분 혜장의 제자들이다. 기어자굉(騎魚慈宏) 철경응언(掣鯨應彦) 백하근학(白下謹學)등이 편집과 교열에 참여했다. 비슷한 시기에 편집된 <대둔사지(大芚寺志)>에도 수룡색성(袖龍賾性)과 기어자굉이 가담하였다. 특히 수룡색성은 혜장의 제자 중에서 가장 기개가 뛰어났으며 화엄경을 섭렵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보(杜甫712~770)의 시(詩)까지 배운다는 칭송을 다산에게 받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또 차를 잘 만들었고 혜장과 다산 사이의 차심부름까지 맡았다고 한다. 혜장이 입적했을 때 다산은 기어자굉에게 ‘곡하며 혜장의 영전에 산에서 나는 과일과 술 한사발을 올리게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승속을 뛰어넘는 사제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철경응언은 혜장의 의발을 전해받은 제일제자였다. 그에 대하여 다산은 “고래꼬리에 붙여도 얽매이지는 않았지만 도리어 고래(鯨)는 아이처럼 묶여서 끌려(掣) 온다”고 하여 철경에 어울리는 인물평을 남겼다.

어쨋거나 다산과 혜장의 만남 이후 불가와 유가의 제자들이 합심하여 <대둔사지> <만덕사지>편찬작업으로 이어졌다. 대둔사는 현재 대흥사로 부르고 만덕사는 백련사로 불리운다. 절 이름도 앞서 사용하던 명칭으로 다시 바뀌었다. 모든 것은 변해간다는 붓다의 그 말씀을 다시금 되뇌이게 한다.

원철 스님(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이 시리즈는 한겨레신문 휴심정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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