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 소엽산방 21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지난해 9월 경북 문경 봉암사에서 거행된 고우 스님 다비식. 조현 기자

(본문)

석우흡강로(石牛洽江路)하고

일리야명등(日裏夜明燈)이라

돌로 조각한 소가 강둑길을 따라 늘어섰고

 

밝은 대낮에 밤을 밝히는 등불을 켰구나

어떤 학인이 “선사가 입적하면 어디로 갑니까?”라고 하는 물음에 반룡가문(盤龍可文) 선사께서 대답 삼아 툭 내뱉은 선시다. 하지만 이 시의 주인공인 반룡의 행적은 남의 이력서에 얹혀 여기저기 한두줄 나올 뿐 오리무중이다. 목평산(木平山)에서 수행하던 선도(善道) 선사의 안목을 열어주었으며, 그 두 선사 사이에 오고갔던 짤막한 선문답이 〈전등록〉 20권에 기록되어 있다. 모두 원주(袁州) 땅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당나라 때 선승들이다.

원주(袁州)는 강서성 북서부 의춘(宜春)의 속칭으로 호남성에서 가장 큰 도시인 장사(長沙) 지방으로 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게다가 북쪽 70리 지점에는 방회(方會 992~1049)가 머물고 있는 양기산(楊岐山)이 있고 남쪽 60리 지점에는 혜적(慧寂 803~887)이 활동한 대앙산(大仰山)이 있었다. 따라서 헤아릴 수 없는 기라성 같은 많은 선사들이 사방팔방에서 오고가면서 마주칠 때마다 선문답을 나눈 광장의 역할을 한 곳이라 하겠다.

반룡 선사의 어려운 말씀에 대하여 뒷날 누군가 해설을 달아 놓았다. ‘돌로 조각한 소’라는 것은 사람과 다른 존재를 나타낸다. ‘강둑길을 따라서 늘어서 있다’라고 한 말은 나고 죽는 반복된 윤회를 가르킨다. 하지만 ‘밝은 대낮에 밤을 밝히는 등불’은 무슨 의미인지 짐작조차 어렵다고 했다. 이미 해설의 대가(大家)도 포기한 부분이라고 하니 각자의 안목으로 그 이치를 터득하는 것 외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겠다.

(해설)

이런저런 일정이 겹쳐 2022년 6월17일 열린 부산 사하구 당리동 관음사(주지 지현 스님)에서 열린 연관(然觀 1949~2022) 선사의 영결식과 경남 양산 통도사로 이어진 다비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7재 가운데 광주 무각사에서 열린 4재에 7월12일 참석할 수 있었다. 송광사 교구에서 방장 현봉 스님, 전 유나 현묵 스님, 무각사 주지 청학 스님, 그리고 전등사 회주 장윤 스님, 또 호상(護喪)인 수덕사 수경 스님을 비롯한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 송광사 전 주지 진화 스님 등 많은 대중이 자리를 함께 하여 고인을 추모했다. 판화가 이철수 선생 부부가 전체 일곱차례 재(齋) 심부름을 위해 시간과 발품을 아끼지 않았다.

당신은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알고서 곡기를 끊었을 뿐만 아니라 물마저 마시기를 포기함으로써 생사(生死)에 여여(如如)한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남아있는 이들에게 잔잔한 울림의 여울이 되었다. 그런 연유로 매번 사찰을 옮겨가며 재를 지낼 때마다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인연 있는 스님들이 적지 않게 참석하여 정성을 보태가는 아름다운 사십구재로 이어졌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비구 연관’ 네글자가 적힌 하얀 위패 앞에 고개 숙여 꽃을 정성스럽게 올렸다.

연관 스님 생전 모습. 자료사진

1990년대 말 경북 영천 팔공산 은해사에서 무비 스님을 모시고 3년간 수학한 후 2000년이 시작될 무렵 전북 남원 지리산 실상사의 화엄학림 강사 소임을 맡게 되었다. 당시 강주(講主 학장)는 연관 스님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화엄경을 총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동시에 각범혜홍(1071~1128)의 〈선림승보전〉 하권을 번역하느라 책상 앞에서 끙끙거리던 시기였다. 상권은 이미 은해사에서 탈고했다. 빨리 번역을 마쳐야겠다는 조급증으로 인하여 무리하다 보니 그만 몸에 탈이 나고 말았다. 한방병원에서 ‘입원하여 한달간 누워있으라’는 처방이 나왔다. 어느 날 연관 스님께서 병문안을 오셨다. 본래 말이 없는 분이다. 나가면서 건네준 봉투의 겉면에 적힌 달필 글씨가 당신의 뜻을 대신했다.

“툭 털고 빨리 일어나시요!”

연관 스님은 인근 골짝골짝에 살고 있는 기인달사(奇人達士)들의 내면 살림살이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지리산의 인문(人文) 전문가였다. 그 사람들을 한사람 한사람 찾아다니면서 대담을 나눌 생각인데 동행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기록 및 정리를 책임지라는 말씀이었다. 나중에 그 자료를 총정리하여 책 한권으로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까지 주셨다. 그 말씀에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키고 말겠다는 무모한 용기마저 발동되었지만 결국 입안 단계에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기록 및 정리를 맡은 필자가 합천 해인사로 거처를 곧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곁에서 2년을 함께 모시고 살았다.

연관 스님이 머물던 경북 문경 봉암사 산내암자 함허당. 사진 원철 스님 제공

뒷날 연관 스님께서 실상사를 떠나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로 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느 날 낯선 054 경북 번호로 시작되는 전화가 왔다. 연관 스님이었다. ○○씨의 전화번호가 있느냐고 물었다. 책 만드는 일에 자문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다. 바로 알려드렸다. 틈틈이 적지 않는 책을 출판하면서 참선 수행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님께서 번역하신 운서주굉(1535~1615)의 〈죽창수필〉을 읽으면서 “스님네 글은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라고 찬탄할 만큼 모범적인 책을 만났고 동시에 유려한 한글번역문에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냥 잘 계시려니 하고 무소식을 희소식 삼아 지내다가 졸지에 입적(入寂)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설봉의존(822~908)에게 신초(神楚) 학인이 물었다.

“죽은 스님은 어디로 갑니까?”

이에 선사는 대답했다.

“얼음이 녹아서 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러자 곁에 있던 현사사비(835~908)가 한마디 더 보탰다.

“물이 물로 돌아간 것과 같다.”

원철 스님(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이 시리즈는 한겨레신문 휴심정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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