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 소엽산방 19

시련의 기록이 있어 그 거리는 더욱 아름답다

사진 제주 애월 장한철 거리. 조현 기자

[선시종가1080] (19) 난세에는 좋은 땅 평소에는 모진 땅

선상이우여번분(船上而雨如翻盆)

선중수심몰반요(船中水深沒半腰)

배 위로 쏟아지는 비는 억수같이 퍼붓고

배 밑에서 새는 물은 허리까지 잠기었네

사진 원철 스님 제공

비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전남 완도군 노화도 부근에서 만난 기상악화의 다급함을 이렇게 묘사할 정도다. 제주에서 출항한 후 몇 날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노와 밧줄을 잃어버렸고 배는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폭우가 그치니 다시 강한 바람이 기다리고 있다. 표류의 시작이다. 오키나와(琉球·류쿠제도) 부근까지 떠밀려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무인도에서 구조를 기다리다가 왜구를 만나 봉변을 당한 뒤 다시 안남(安南) 상선을 만났으나 바다 위에서 또 버림받고 천신만고 끝에 겨우 완도군 청산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래 출항 목적이던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바로 한양으로 올라갔으나 낙방한 뒤 비로소 출발지로 돌아왔다.

그런 과정을 기록한 것이〈표해록〉(漂海錄)이다. 필사본은 일제강점기 시절 강원도에 살던 직계 후손이 보관하던 것을 1939년 제주 지역의 후손인 장한규(1880~1942·1939년 동아일보 한시공모전 장원)에게 보냈고 이후 장응선(애월상업고등학교 교장)과 장시영 선생을 거쳐 2001년 국립제주박물관에 기탁된다. 1959년 정병욱 서울대 교수가 장응선의 도움으로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까지 한글본 네다섯 종류가 나왔지만 대부분 절판되고 현재 서점에서 유통되는 것은 2종뿐이다. 일어로 번역된 책도 있다고 한다. 필사본은 2009년 제주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저자 녹담(鹿潭) 장한철(張漢喆·1744~?)거사는 제주도 애월 한담에서 태어났다. 입향조(入鄕祖)인 장일취(張一就)의 7대손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770년 향시(鄕試·초시)에서 수석을 차지했고 1775년 32살 때 과거에 급제했다. 성균관의 여러 직책을 거쳐 강원도 양양지역에서 16개 참역(站驛·운송 및 물류 유통거점)을 관리하는 상운역(祥雲驛) 찰방(察訪)을 맡았으며 1787년 제주 대정(大靜) 현감을 지냈다.

사진 원철 스님 제공

# 해설

섬에서 ‘한달살기’하는 도반을 찾아 애월읍으로 갔다. 숙소 근처에서 함께 버스를 타고서 곽지모물 정류장에 내려 바닷가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니 이내 아름다운 해변길이 나타난다. 해 질 무렵의 풍광을 즐기려고 일부러 이 시간을 맞춰 온 이들의 걸음걸이는 가벼웠고 표정은 밝았으며 목소리는 상쾌했다. 우리 일행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틀 전에는 저녁놀이 엄청 좋았는데 오늘은 그러지 못하다고 ‘한달살기’ 주인공인 그가 더 아쉬워한다. 육지에서 시간을 쪼개 왔기 때문에 일정상 한번 밖에 올 수 없는 우리들에 대한 배려 때문일 것이다. 노을이 없어도 충분히 아름답고 행복하다고 이구동성으로 화답했다.

한담마을이 가까워지면서 ‘표해록’ 과 ‘장한철 산책로’라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선생은 섬이 가지는 양면성을 잘 알고 있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세상의 병화를 피해 도망 나온 이들이 머무는 곳이 되었고 잘 다스려질 때는 제주 사람들이 넘실대는 파도를 헤치고 육지로 가서 벼슬자리를 구하고자 한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지가 어지러울 때는 오히려 섬이 좋은 땅이지만 잘 다스려지는 시기에는 모진 땅이 된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좋은 시대에 과거를 보기 위해 섬을 떠났지만 태풍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고서 다시 모진 땅으로 돌아와야 했다. 함께 승선했던 29명은 어려움이 닥쳐올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한마음으로 부르면서 위기를 이겨냈다. 또 꼬드겨 함께 갔던 친구 김서일에게 “괜히 큰 땅을 찾아 나섰다가 작은 땅마저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원망과 지청구를 조난 당한 배 안에서 몇 번이고 들어야 했다. 날씨가 맑을 때는 좋은 배였지만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배 안 역시 모진 곳인 셈이다.

사진 원철 스님 제공

그 원망보다 더 큰 실망은 청산도에 도착하여 행낭을 열었을 때 일이다. 어려움 속에서 순간순간을 대강 기록한 종이가 떨어져 달아나고 바닷물에 젖어 뭉개지면서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다. 일기를 꺼내 보니 이지러지고 떨어져서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뜻을 더듬어 추측해 되새기면 대략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이 원고가 통째로 사라지지 않는 것만 해도 행운이라 여겼다. 과거에 낙방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표해록 정리였다.

바다는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침몰하게도 한다. 땅에서 넘어진 자는 다시 땅을 딛고서 일어나듯 물에 빠진 사람도 다시 물 위로 자기를 띄워야 했다. 개인의 모진 경험을 모두가 공유하도록 기록으로 남긴 것이 물속에 빠진 자기를 물 위로 건져낸 일이라 하겠다. 2020년 한담마을에 자신의 생가를 지역사회의 노력으로 복원한 것도 그 공덕의 결과라 하겠다. 생가 앞을 지나가며 한 마디 던졌다.

“당신은 좋은 시절에 뭍으로 나갔지만 우리는 좋은 시절에 섬으로 왔습니다.”

원철 스님(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이 시리즈는 한겨레신문 휴심정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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