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도 무시한 낙방자를 반겨주는이 강아지뿐
- 대우재단
- 2021/11/08
- 2: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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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종가 1080 8. 과거시험장이 아니라 선불장 ( 選佛場 ) 으로 발길을 돌리다

시방동일회 ( 十方同一會 ) 각각학무위 ( 各各學無爲 )
차시선불처 ( 此是選佛處 ) 심공급제귀 ( 心空及第歸 )
여기는 부처를 뽑는 곳 마음을 비워 급제해서 돌아가네 .
과거시험에 몇 번 씩 떨어진 당사자의 심경은 어떨까 ? 당나라 장계 ( 張繼 생몰연대 미상 ) 는 낙방 후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다리 아래 세워 둔 배에서 하룻밤을 묶었다 . 이미 달은 지고 까마귀가 울고 있는 서리가 가득한 하늘 아래에서 잠까지 설쳤다 . 한밤중에 한산사 ( 寒山寺 ) 절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다가 그 처연한 심정을 ‘ 풍교야박 ( 楓橋夜泊 )’ 이란 절창 ( 絶唱 ) 으로 남겼다 . 낙방의 심경을 노래한 것이지만 그 공감력으로 인하여 대대로 전해지면서 유명세를 탔다 . 급제했던 수많은 관료들의 명함은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낙방한 그의 이름은 오늘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
(해설)
경북 문경 봉암사를 다녀왔다. 일행과 함께 은암고우(隱庵古愚1937~2021)대선사 문상을 마쳤다. 경북 김천 수도암으로 출가하여 청암사(김천) 남장사(상주) 강원(講院)에서 수학했다. 성철스님이 1947년 시작한 ‘봉암사 결사’가 한국전쟁으로 중단된 것을 다시 이어서 1968년 ‘제2의 봉암사 결사’를 통해 오늘의 봉암사를 만드는 초석을 놓은 어른이다. 그 시절 희양산의 국립공원 지정을 반대했고 봉쇄수도원으로 위상을 공고히 하면서 오늘날 참선수행의 근본도량인 종립선원으로 운영되는 ‘수좌들의 본향’이 되었다. 1987년 학인시절에 ‘제1회 전국선화자(禪和子)대회’가 합천 해인사에서 열렸다. 뒷날 알고보니 이 법회도 고우스님의 작품이라고 했다. 500여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해인사에서 가장 큰 건물인 보경당(普敬堂) 맨뒷문을 기웃거렸던 그 때의 기억이 새롭다. 2005년 <조계종수행의 길 간화선>간행을 위한 편집회의가 몇 번을 거듭하면서 비로소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이라는 실무책임자 자격으로 스님을 가까이서 자주 뵙는 기회를 가졌다.

홀홀단신이라면 낙방해도 툴툴 털고 다음을 기약하면 되겠지만 식솔이 딸린 가장이라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 아무리 가족은 내 편이라고 하지만 ‘ 낙방 ’ 은 무슨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 당나라 중엽 조씨 ( 趙氏 ) 부인이 지은 ‘ 부하제 ( 夫下第 남편의 낙방 )’ 에 관한 시는 이런 복잡미묘한 심경을 잘 보여준다 . 해마다 낙방이라는 고배를 마시니 가족이야 그렇다치더라도 동네사람 보기에도 민망했다 . 깜깜하여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때 집으로 들어 오라고 부탁아닌 부탁을 해야했다 . 낙방생을 맞이하는 부인의 안타까움과 원망이 동시에 묻어난다 .
낭군께서 분명 남다른 재능있는데 ( 양인적적유기재 良人的的有奇才 )
어찌하여 해마다 그냥 돌아오시나요 .( 하사연년피방회 何事年年被放回 )
이젠 저도 그대 뵙기 민망하오니 ( 여금첩면수군면 如今妾面羞君面 )
오시려거든 날 어둑해지면 그 때 돌아오세요 .( 군약래시근야래 君若來時近夜來 )
제 3 자인 가족이 아니라 시험당사자였던 당청신 ( 唐靑臣 ) 은 대놓고 스스로 ‘ 낙제시 ( 落第詩 )’ 를 썼다 . 그 역시 낙방 후 고향으로 바로 오지 못하고 장계 ( 張繼 ) 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거의 거지몰골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 가족들은 아무리 표정을 감추고서 반갑게 맞이하려고 해도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 그건 부인이건 자식이건 모두 마찬가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에는 무조건 반겨주는 녀석이 있다 . 마당에 있는 누렁이다 . 예나 지금이나 이 맛에 반려견을 키우는 모양이다 . 충견에게는 낙방해도 내 주인이고 급제해도 내 주인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없기 때문이다 .
급제하지 못하고 먼길을 돌아오니 ( 부제원귀래 不第遠歸來 )
처자의 낮빛이 반기는 기색없네 .( 처자색불희 妻子色不喜 )
누렁이만 흡사 반갑다는 듯 ( 황견흡유정 黃犬恰有情 )
문 앞에 드러누운 채 꼬리를 흔드네 .( 당문와요미 當門臥搖尾 )
방거사를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과거장을 포기하고 선불장으로 간 것은 경쟁률도 경쟁률이지만 당시 과거제도의 문란도 한 몫했다 . 실력있는 수험자는 차고 넘치는데 소수의 합격자는 이미 따로 내정되었다 . 모르긴 해도 방거사와 수재 ( 秀才 단하천연 본명 ) 거사도 실력과 상관없이 몇 번씩 낙방이라는 고배를 마셨을 것이다 . ( 물론 자랑할만한 일은 아닌지라 그런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 그래서 ‘ 과거장이 아니라 선불장으로 !’ 란 말 한 마디에 바로 필이 꽂힐 수 있었던 것이다 . 이후 마조대사 문하의 기라성같은 선불 ( 選佛 ) 들은 당나라 사상계와 종교계의 주류로 등장하게 된다 . 어쨋거나 과거장 출신들은 과거장 출신답게 주어진 몫을 다하고 선불장 출신들은 선불장 출신답게 자기본분을 다하면 될 일이다 .
원철 스님(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이 시리즈는 한겨레신문 휴심정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