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소엽산방 6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온다

선시종가1080 / 6.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다

사진 픽사베이

(본문)

야정수한어불식(夜靜水寒魚不食)

만선공재월명귀(滿船空載月明歸)

밤은 고요하고 물이 차가워 고기가 물지 않으니

빈배에 가득히 허공의 밝은 달만 싣고 돌아오네.

 

이 시의 저자인 화정덕성(華亭德誠)선사는 절강(浙江저장)성 소주(蘇州쑤저우) 화정현(華亭縣) 오강(吳江)에서 뱃사공 노릇을 하며 수행했다. 도반인 도오(道吾769~835)가 천거한 선회(善會805~881)를 만나자마자 한눈에 인물 됨됨이를 알아보았다. 그 자리에서 물에 빠뜨리고는 배 위에서 생사(生死)에 대한 질문을 던져 그의 안목을 열어준다. 법을 전한 후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얼마 후 당신도 배를 뒤집고는(覆船) 종적을 감추었다. 그로 인해 복선(覆船)이라는 별호가 또 생겼다. 이미 오랫동안 선자(船子) 즉 ‘화정의 뱃사공’으로 불렀다. 생몰연대조차 불분명하지만 삶 자체가 워낙 드라마틱한지라 『조당집』권5 『전등록』권14에 행장이 남아있다. 약산유엄(藥山惟嚴751~834)-화정덕성-협산선회로 그 법맥이 이어졌다.

(해설)

본래 시조나 한시는 제목이 없다. 편의대로 보통 첫줄을 제목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것은 워낙 유명한 작품인지라 뒷날 누군가 ‘귀주재월(歸舟載月 달빛만 싣고 배가 돌아오다)’이란 그럴듯한 제목을 붙였다. 이 시가 불가(佛家)에서 유명해진 것은 금강경 때문이다. 영원한 베스터셀러 금강경에 해설을 달면서 야보도천(冶父道川) 선사가 이 시를 빌려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인용했다. 먼저 6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바른 믿음은 흔하지 않다)에 “물이 차고 밤도 추워 고기 잡기 어려워 빈 배에 머물러 있다가 달만 싣고 돌아오네(水寒夜冷魚難覓 留得空船載月歸)”라고 했다. 31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알음알이를 내지 않다)에는 “천길 낚시줄을 바로 아래 드리우니 한 파도가 일어나자마자 만갈래 파도가 뒤따르네. 밤은 고요하고 물이 차가워 고기가 물지 않으니 빈배에 가득히 허공의 밝은 달만 싣고 돌아오네(千尺絲綸直下垂 一波纔動萬波水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라고 한 것이다. 이 시의 전문은 『오등회원(五燈會元)』권5 ‘선자덕성’선사 편에 나온다. 도발청파(棹撥淸波푸른 파도를 헤치고 노를 젓다)로 시작되는 발도가(撥棹歌노를 저으면서 부르는 노래) 가운데 압권부분이라 하겠다.

(해설)

경북 문경 봉암사를 다녀왔다. 일행과 함께 은암고우(隱庵古愚1937~2021)대선사 문상을 마쳤다. 경북 김천 수도암으로 출가하여 청암사(김천) 남장사(상주) 강원(講院)에서 수학했다. 성철스님이 1947년 시작한 ‘봉암사 결사’가 한국전쟁으로 중단된 것을 다시 이어서 1968년 ‘제2의 봉암사 결사’를 통해 오늘의 봉암사를 만드는 초석을 놓은 어른이다. 그 시절 희양산의 국립공원 지정을 반대했고 봉쇄수도원으로 위상을 공고히 하면서 오늘날 참선수행의 근본도량인 종립선원으로 운영되는 ‘수좌들의 본향’이 되었다. 1987년 학인시절에 ‘제1회 전국선화자(禪和子)대회’가 합천 해인사에서 열렸다. 뒷날 알고보니 이 법회도 고우스님의 작품이라고 했다. 500여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해인사에서 가장 큰 건물인 보경당(普敬堂) 맨뒷문을 기웃거렸던 그 때의 기억이 새롭다. 2005년 <조계종수행의 길 간화선>간행을 위한 편집회의가 몇 번을 거듭하면서 비로소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이라는 실무책임자 자격으로 스님을 가까이서 자주 뵙는 기회를 가졌다.

사진 픽사베이

낚시가 꼭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 본명:姜尙)은 일찍이 곧은 낚시로 세월을 낚다가 서백(西伯)을 만나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무왕(武王)을 도와 주(周)나라 건국에 공헌하였다. 낚시군을 강태공(여상의 본명은 강상이다.)을 가르키는 말이 된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선자덕성도 협산신회를 만나서 “날마다 곧은 낚시로 고기를 낚다가 오늘에야 한 마리 낚았도다.”고 하면서 매우 기뻐했다. 사람을 낚는 것도 낚시질인 것이다. 이제는 인터넷 용어로도 굳어졌다.

시의 원저자는 선자덕성이지만 대중화의 제일공신은 단연 야보도천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도 청원유신(靑源惟信 ?~1117) 등 몇몇 선사들이 즐겨 사용했지만 성철(1912~1993)스님으로 인하여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물론 원저자의 공덕이 가장 크겠지만 대중화의 공로도 그 못지않다고 하겠다. 요즈음 갖가지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이 지기 곡을 리메이크하여 부르는 가수에게 보내는 최고의 칭찬이 “이거 내 노래 맞아요?”라는 심사평이다. 같은 곡이지만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색깔을 내기 때문이다. 같으면서도 다르다.

학인시절에는 의무적으로 외워야 할 과제가 있다. ‘아침종송’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말 그대로 새벽예불 때 법당에서 작은 종을 치면서 하는 염불이다. 그 속에서 이 구절을 처음 만났는데 그 풍광이 눈 앞에 그려지면서 종치는 것 조차 잊어버릴 만큼 전율했다. 뒷날 금강경을 보면서 야보송(冶父頌)이라는 것을 알았고 훗날 선어록을 보다가 원저자가 화정덕성임을 확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시의 감성에 취하다보니 정작 알아야 될 금강경 본문내용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정신줄을 놓는 순간 경(經)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詩)공부가 되기 십상이다. 경구는 경구대로 빛나고 싯구는 싯구대로 아름답지만 같이 합해지니 금상첨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눈길이 오래 머무는 까닭은 논리보다는 감성이 훨씬 더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정서는 특정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송(唐宋) 분위기는 그대로 조선으로 옮겨왔다. 월산대군(1454~1488 조선 제9대왕 성종의 형)도 비슷한 내용으로 시조를 남겼다.

“추강(秋江가을 강물)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라.”

그로부터 삼백년 후 『풍서집(豊墅集)』18권을 남긴 이민보(李敏輔1720~1799 공조·형조판서 역임)는 월산대군의 색깔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시 형식을 빌어 재창작한 문학작품을 남겼다.

추강에 밤이 이미 깊은데(秋江夜已心)

빈 섬에 물결은 참으로 차갑네.(洲虛波正寒)

숨은 물고기에게 미끼를 던져도(投餌與潛漁)

끝내 낚싯줄에 올라오지를 않네.(終不上釣竿)

갈꽃에는 서리가 서걱거리는데(蘆花霜浙瀝)

빈 배에 달빛을 싣고 돌아오네.(空船載月還)

원철 스님(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이 시리즈는 한겨레신문 휴심정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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