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소엽산방 1

청백리와 측천무후의 묘비에 글자가 없는 이유

선시종가1080

1.백비(白碑)를 남긴 까닭은

사진 : 청백리 박수량의 백비 (한겨레 신문 휴심정 제공)

(본문)

명고불용전완석(名高不用鐫頑石)이라

노상행인구시비(路上行人口是碑)니라

이름이 높으면 돌덩이에 새길 필요가 없다.

오가는 사람들의 입이 바로 비석이로다.

중국선종의 시조인 달마대사는 파격적인 인물이었다. 삶 자체가 기존 사상의 틀로는 설명이 어려운 격(格)을 뛰어넘는 대장부(大丈夫)였기 때문이다. 그의 평가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들이 분분하자 강소성(江蘇省) 진주(眞州) 장로산(長蘆山)에 머물고 있던 분(賁)선사는 모든 ‘썰’을 일축하는 한 마디 게송을 남겼다. 하긴 고착된 견해를 가진 인물들이 어찌 달마대사에 대해 감히 이러쿵 저러쿵하며 입을 댈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그저 오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에 맡기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다.

사진 : 달마대사와 혜가 (한겨레 신문 휴심정 제공)

(해설)

명함을 모아두는 앨범을 꺼내고선 찾고자 하는 인물을 확인했다. 손에 책먼지를 묻힌 김에 마지막까지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샅샅이 살폈다. 일반적인 형식을 따라 제작한 명함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색깔을 넣거나 사진 혹은 캐리커처를 새긴 것도 있고 갖가지 이력을 앞뒤로 즐비하게 나열해 놓은 것도 있다. 그런데 흰 바탕에 자필로 전화번호와 이름만 달랑 기록된 명함이 나왔다. 오래 전에 받아 둔 것이라 기억마저 가물가물하다. 누굴까?

그 명함을 보니 백비(白碑)가 생각난다. 무자비(無字碑) 혹은 몰자비(沒字碑)로 불리는 글자를 새기지 않는 비석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비석을 세우지 말든지 세웠으면 글자를 제대로 새기든지 둘중에 하나이어야 한다는 이분법에 익숙하다. 하지만 그런 고정적인 생각의 틀을 깨주는 백비는 그 자체로 또다른 존재감을 과시했다. 백지 족자나 백지 답장처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 청백리 박수량의 백비 (한겨레 신문 휴심정 제공)

조선중기 선비인 박수량(朴守良1491~1554) 묘소 앞의 비석은 어떤 글자도 새기지 않았던 까닭에 백비(전남기념물 제198호.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소재)라고 불린다.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그의 공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기념물이라 하겠다. 조정에서 참판 판서 등으로 38년이나 근무했지만 자기집 한 채 없었고 죽은 후에는 장례비용이 모자랄 정도였다. 게다가 유언마저도 청백리답다.

“내가 외람되이 판서의 반열에 올랐으니 영광이 분수에 넘쳤다. 내가 죽거든 절대로 묘비를 세우지 말라”

백비의 이유도 여러가지다. 정말 쓸 것이 없어 비워둔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다. 중국 북경 인근의 명13릉(명나라 임금 13인 무덤) 구역에 있는 만력제 신종(萬曆帝 神宗 1573~1620재위) 비석도 무자비(無字碑)로 유명하다. 스스로 “무위(無爲)의 도(道)로 나라를 다스린다”고 여겼다. 측근 조차 왕의 얼굴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은둔으로 일관하면서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無爲)고 한다. 백성들이 임금의 이름조차 몰랐다는 요순시대가 태평성대라고 오해 아닌 오해를 했던 모양이다. 결국 기록할만한 업적이 없는 탓에 백비가 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농담같은 진담이 전해져 온다.

사진 : 측천무후의 백비 (한겨레 신문 휴심정 제공)
사진 : 드라마 측천무후에서 측천무후로 분한 배우 판빙빙 (한겨레 신문 휴심정 제공)

반대로 극과 극으로 평가가 난무했던 당나라 측천무후(624~705)의 비석도 몰자비(沒字碑)인 백비이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황제로 15년간 재위하면서 당(唐)이라는 국호를 주(周)로 바꿀 만큼 혁명적인 정치일정을 밟았다. 유언은 자기비석을 글자없이 비워두라는 것이였다. 남자들이 지을 비문은 보나마나 여자인 자기에게 결코 후하지 않을 것이며 또 제국을 위한 대인배 정치를 소인배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말의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뒷담화일 것이다. 어쨋거나 이후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에 있는 높이 8m의 거대한 백비는 모든 백비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했다.

비문을 채우든지 비우든지 그건 남은 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그것을 자기 몫이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자찬(自撰 스스로 짓는 것)이 해답이다. 과대평가 혹은 평가절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기 때문이다. 미국 제3대 대통령 제퍼슨(1743~1826)은 묘지명을 스스로 지었다. 대통령을 지냈지만 대통령직도 별 것도 아닌지라(?) 넣지 않았고 가족에게는 한 글자도 추가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자,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제안자, 버지니아 대학의 아버지인 토마스 제퍼슨 여기에 잠들다.”

거쳐 간 자리가 아니라 추구하는 가치에 방점을 찍은 이력서라 하겠다. 자리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다면 벼슬이름을 나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을 하기 위한 자리였기에 직위가 아니라 일의 내용을 열거한 것이리라.

사진 : 선시종가1080 연재를 시작한 원철 스님 (한겨레 신문 휴심정 제공

**사족

어떤 경제신문에 일주일에 한 편씩 6개월 동안 한시(漢詩)를 연재한 적이 있다. 이후 선시(禪詩)를 주제로 한 연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인터넷 매체인지라 원고 글자수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도 되고 탈고하는 날이 자동으로 마감일이 되는 부담없는 조건이었다.

큰제목 때문에 고민했다. 그저 그런 무난한 상호가 아니라 뭔가 좀 새로운 이름을 찾아보려고 두리번거렸다. 어쨋거나 선시도 상품이다. 전시할 공간의 개념으로 이해했다. 쇼핑몰 ‘11번가’에서 힌트를 얻었고 거기에 더해 이즈음 대세라는 ‘새건물 문패에 지번붙이기’ 체제를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가상지번 1080번지를 더해 ‘선시종가(禪詩宗家)1080’이라는 글가게 이름을 지었다.

갖가지 종류의 김치를 만날 수 있는 ‘김치종가’처럼 ‘선시종가’에는 수많은 옛 시인과 도인들의 명품한시를 진열하고자 한다. 하지만 전문(全文)이 아니라 공감력 높은 행(行)만 따로 퍼올 것이다. 어차피 한 편 가운데 고갱이는 한 두줄이 아니겠는가? 바쁜 세상을 살아야 하는 분주한 사람들에게 장문으로 된 한시 한편을 전부 읽으라고 권하는 것도 번뇌가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1080이라는 숫자에 걸맞게 10대부터 80대까지 읽을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내용이라면 더욱 좋겠지.

원철 스님(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이 시리즈는 한겨레신문 휴심정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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