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를 마치며: 윈스턴 처칠, 운명과 함께 걷다

1. 집필의 계기, 혹은 배경은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윈스턴 처칠에 대해 알만큼 안다고 생각한다. 처칠을 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의 위트에 많이 끌린다. 그가 남긴 많은 재치 있는 입담이 여전히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는 처칠은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처칠은 25세에 정계에 입문해 90세에 은퇴할 때까지 65년 동안 지속된 오랜 정치경력을 통해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물론 과도 많았지만 공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는 영제국의 수상으로, 그리고 2차 세계대전기의 지도자로 주로 기억되고 있지만 그 외 그가 행적을 남긴 부문은 대단히 광대했다. 이처럼 많이 안다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알지 못하는 처칠의 면모를 밝히고자 이 책을 썼다. 바람직한 리더십이 부재한 현실에서 처칠의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는 당위도 물론 중요한 동기 중 하나였다.

처칠의 공로는 무엇보다도 히틀러에 굴하지 않고 전쟁을 궁극적인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 사실조차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소련이 이긴 것이라고 간단히 결론짓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이 깨닫지 못한 사실은 유럽이 완전히 히틀러에게 굴복하고 점령당한 1940년 6월에 처칠은 영국 혼자서라도 전쟁을 해나갈 것을 ‘결단’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는지 후세인들은 모른다. 결국 영국을 이길 수 없었던 히틀러는 눈을 동쪽으로 돌려 소련을 침공하는 실책을 벌이고 그러면서 무너져갔다. 만약 그때 처칠이 버티지 않았더라면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포츠담 회담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만일 영국이 버텨주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미국 연안에서 히틀러와 싸우고 있을 것’이라고 처칠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2. 처칠이라는 인물을 다루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우선 처칠의 긴 생애와 그의 다양한 경력이 그에 대한 서술을 어렵게 했다. 그는 두 차례 수상 직을 역임했을 뿐만 아니라 30대 청년시절부터 상무부 장관을 시작으로 내무부, 해군부, 식민부, 재무부 등 여러 부서의 장을 지냈다. 따라서 그의 행적을 쫓는 작업은 국가 운영의 거의 모든 부분을 망라해야 했다. 그 가운데 처칠의 본성과 업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면면을 선정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막상 잘 모르고 있는 처칠 삶의 단면 들을 고르는 작업이 어려웠다.

다음으로 처칠의 정치경력은 20세기 초부터 후반기까지를 망라하는 긴 기간에 거쳐 있었기 때문에 세기적 대 사건들을 거의 모두 다루어야 했다. 문제는 처칠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로 세계사적 배경에 처칠을 위치 지워야 하는데 그 정도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처칠과 영국과 세계를 조화롭게 아울러 서술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3. 책을 집필하며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나 발견한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급진적 개혁가의 모습은 사실 나 자신도 이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처칠의 면모이다. 처칠은 아버지가 속했던 정당인 보수당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지만 1904년에 보수당을 떠나 자유당으로 옮기고 그 후 다시 자유당을 떠나 보수당으로 돌아왔다. 젊은 시절에 한참 사회적 자유주의(New Liberalism)에 빠져있을 때 처칠은 상무부 장관으로 봉직하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표현되는 복지국가의 틀을 마련했다. 노사정이 함께 기여하는 실업보험제가 이때 세계 최초로 제도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해군부 장관이던 처칠은 다르다넬스 전략이 실패하자 장관직에서 물러나 프랑스 전선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는데,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을 여러 번 겪는다. 만약 처칠이 그때 전사했더라면 역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할까? 비록 나라를 구한 위대한 수상으로 기억되지는 않았겠지만 처칠은 복지국가의 초석을 닦은 ‘선구적이고 자비로운’ 정치인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또 하나 나 자신도 자세히 모르던 사실은 처칠이 1920년대 영국과 아일랜드 분쟁을 잠재우고 남북 아일랜드의 분단을 결정한 당사자였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처칠은 식민부 장관으로 임명되는데 그때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영국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어 영-아일랜드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처칠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원래 아일랜드 자치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아일랜드 인들의 강렬한 자치/독립 의지를 확인하게 되고 생각을 바꾸었다. 처칠은 아일랜드 테러리스트들에게 “이제 죽이는 짓은 그만두고 대화를 합시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특히 IRA의 전설적 대장인 마이클 콜린스와 개인적으로 친근해지려 노력했고 콜린스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다. 만약 처칠의 노력이 없었다면 아일랜드의 비극은 더 오래 계속되었을 것이다. 콜린스는 암살되기 직전에 ‘윈스턴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6-25 전쟁과 처칠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이 주제는 이제껏 서양학계나 우리 학계에서 제대로 다루어진 적이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남한을 침공했을 때 영국의 집권정부는 노동당이었다. 결국 노동당정부도 한반도에 군대를 파병하게 되지만 결코 적극적이지 않았다. 처칠은 당시 야당 지도자로서, 그리고 의회 지도자로서 한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애틀리 수상에게 요구하고 지속적으로 한반도 전쟁에 관심을 쏟았다. 그가 6-25 전쟁 중에 남긴 명언에 다음이 있다: ‘허약함이나 공포로부터 나오는 유화는 헛되고 치명적이다. 힘으로부터 나오는 유화는 관대하고 고귀하며 세계 평화를 위한 유일하고 확실한 길이다.’ 이 명언은 1930년대에 히틀러에 대해 펼친 허망한 유화정책과 대비되는 강력한 유화정책이라는 원칙을 극명하게 표현한 말이다.

4. 집필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했나요?

처칠 자신이 엄청난 양의 글을 남겼고, 처칠에 대한 연구 역시 그 어느 인물에 대한 것보다 많이 축적되어 있다.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는 게 학자의 본분이지만 처칠의 경우엔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따라서 다른 측면에서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나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처칠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것에서 접근방법을 찾았다.

5.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신가요?

독자들은 윈스턴 처칠 같이 친숙한 주제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자세를 버리고 일단 이 책을 위시하여 많이 읽을 것을 권한다. 처칠에 관한 영화 한두 편을 보고 그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해 멈추지 말아야 한다. 영화는 단순히 처칠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고 조금 더 심도 있는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자극제일 뿐이다.

또한 처칠의 리더십을 파악했으면 한다. 2차 세계대전 초, 영국 국민들은 나치에 대항해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남기를 원했다. 핼리팩스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국민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만든 것, 강제가 아니라 영감을 주어 기꺼이 하도록 만든 것. 그것이 처칠의 위대한 지도력이다. 위선을 싫어한 처칠은 정직하고 진지함으로 국민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을 설득했다.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6. 이후의 연구 계획은 무엇인가요?

이 책 제6장은 영국 문인들과 처칠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특히 H. G. 웰스, 조지 버나드 쇼는 처칠과 직접 교분이 있었지만 성향이 서로 달랐다. 버나드 쇼는 1930년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소련과 스탈린을 맹목적으로 이상화한 좌파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처칠은 쇼를 ‘지적 광대’라 부르며 그들의 환상을 지적하였다. 나는 이 주제를 확장해서 19~20세기 지식인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 특히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었지만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한계를 지녔던 문인, 예를 들어 찰스 디킨스를 연구해 보고자 한다. 디킨스는 19세기 번영하던 영국사회에서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인간상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표현했지만 막상 대안은 없었다. 한편 일생 사회주의자로 살았지만 스탈린과 소련체제를 누구보다도 꿰뚫어보고 비판했던 지식인은 조지 오웰이었다. 디킨스, 웰스, 쇼, 오웰 등의 현실 비판 및 대안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은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7. 함께 나누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요?

처칠이 사망한지도 어언 60년이 되어간다. 그럼에도 처칠에 대한 책이나 논문이 아직도 끊임없이 발표되고 있다. 요즘 잘못된 유행 가운데 하나는 그의 실수를 과대 해석하고 자극적인 말로 인터넷을 통해 퍼뜨리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공과 과가 있듯 처칠에게도 당연히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공은 과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의 결점을 아무리 세세히 끄집어내도 그의 장점은 그것을 압도한다. 처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 처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좌파 지식인의 거두였던 해럴드 라스키조차 ‘처칠에게 진 빚’을 솔직히 인정하였다. 우리는 오늘날의 잣대를 들이대어 과거의 인물과 시대를 재단하기 전에 일단 그 인물과 시대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후손들의 오만함’을 배제해야 역사가 제대로 보인다.

윈스턴 처칠이라는 인물의 성공의 배경에는 물론 그의 많은 재주와 재능이 있지만 그것만이 그의 성공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영국 국민이 그를 믿고 따랐기 때문에 히틀러를 제압한다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처칠과 영국 국민 사이에 작동한 신뢰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라스키가 표현했듯이 ‘처칠의 완벽한 리더십’을 따라가 보기를 권한다.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처칠은 영감을 주는 지도자였다. 다함께 진정한 리더십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처칠은 역사를 무척 좋아했고 스스로를 역사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더 멀리 과거를 돌아볼수록 더 멀리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1940년의 그 절망적인 순간에도 인류가 만들어온 역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역사적 통찰력은 단견을 버리고 긴 안목에서 현실을 판단하게 만드는 능력을 제공한다. 우리 독자들도 긴 안목으로 역사적 인물과 시대를 공부해 보시기를 권한다.

연구자 박지향 교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서양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뉴욕주립대학교(스토니브룩 소재)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 프랫대학교와 인하대학교를 거쳐 1992년부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도쿄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 연구원으로 활동했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2011~2015), 한국영국사학회 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대통령 소속 인문정신특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 본 연구는 대우재단의 2020년 학술연구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물은 2023년 4월에 641번째 대우학총서로 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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