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를 마치며: 래 모음집

『래 모음집』 연구를 결심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이십여 년 전에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던 중에 중세문학 세미나에서 중세 자국어로 문학 작품을 쓴 최초의 여성 작가로 알려진 마리 드 프랑스(Marie de France)와 그녀가 쓴 래(Lais) 작품들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여성 작가가 써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마리가 작품 활동을 한 12세기라는 시대의 지적, 문화적 풍토가 그런 것인지, 래 작품들은 기존에 제가 읽었던 중세 작품들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났습니다. 오래 전에 쓰인 작품들임에도 불구하고 개인, 사랑, 여성, 자연, 초자연/마법, 인간의 도리 등의 주제에 대한 마리의 해석이 상당히 ‘모던’하고 독자로서도 쉽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박사 학위 논문을 중세 로맨스에 나타난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대해서 썼는데요, 이 주제를 정하는데 마리의 세 번째 래인 『르 프렌』(Le Fresne)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학위를 받고 나서도 마리가 쓴 다른 래 작품들에 대해서 여러 편의 학술 논문을 썼습니다. 제가 학자로서 성장하는데 마리가 쓴 작품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마리 드 프랑스라는 작가에 대한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학위를 받고 나서 대학생/대학원생들에게 마리의 래 작품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학생들이 마리 드 프랑스라는 작가와 그녀가 만들어낸 래 장르에 대해서 재미있어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너무 미진하다는 점에 저도 학생들도 동의하면서 많이 아쉬워했고요. 어쩌면 그 이유가 마리의 작품들이 아직까지 우리말로 번역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모르고, 또 그런 상황이 연구 소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마리의 래(Lais) 작품들을 우리말로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리드 드 프랑스 Marie de France로 추정되는 여성 (출처: 위키)

연구하며 알게 된 가장 큰 발견은 무엇이었나요?

마리의 『래 모음집』은 일부 혹은 전체 작품이 총 다섯 개의 중세 필사본에 수록되어 전해집니다. 그중에서 12편이 모두 수록된 필사본은 영국도서관에 소장된 <할리 978 필사본 Harley MS. 978>이 유일하기에 저도 이 필사본을 원본으로 삼고 번역 작업을 했고, 옥스퍼드 대학 교수였던 앨프리드 에월트(Alfred Ewert)의 전사 방식을 따랐습니다.

중세 필사본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필사가가 양피지에 (깃털) 펜을 사용하여 손으로 한자씩 써내려간 코덱스(codex)입니다. 필사본의 이런 속성상 같은 원본을 사용하더라도 누가 필사했는가에 따라서 구두점이 다르게 표기되고, 또 필사가가 본문을 얼마나 이해했는가에 따라서 텍스트의 정확도에도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필사본을 전사하고 편찬하는 사람에 따라서 같은 원문이 다른 의미로 해되기도 합니다. 

『래 모음집』을 번역하면서 중세 필사본이 갖는 이런 특수성과 그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이슈들을 몸소 경험하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래' 장르만의 특징이나 매력은 무엇일까요?

형식상 래 장르는 짧고 함축적인 시로 된 내러티브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줄거리가 있으면서도 행간을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내용상 래 장르는 전반적으로 신비로운 분위기가 강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초자연적인 존재나 장소가 종종 등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 말을 하는 사슴이나 스스로 목적지를 찾아가는 배(『기주마르』), 일주일의 반은 잘생긴 귀족 영주로 나머지 반은 숲속에서 늑대로 사는 늑대인간 (『비스클라브레』), 가난한 기사를 순식간에 부자로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요정 여왕(『랑발』), 매로 모습을 바꿔서 인간 연인을 찾아오는 기사와 그가 다스리는 신비로운 성(『요넥)』), 목에 편지를 매달고 연인들 사이를 이십 년 동안 오가는 백조(『밀롱』), 죽은 짝을 꽃으로 살려내는 족제비(『엘리뒥)』) 등 래에는 재미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건 아마도 저자 마리가 브르타뉴에서 채집한 것으로 보이는 원래 이야기들의 소재가 켈트 민담/신화에서 유래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요소들이 래 장르의 특징이자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3년간의 연구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모든 번역은 저마다의 어려움과 사연이 있기 마련입니다. 『래 모음집』의 경우, 일단 언어가 12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상류층 사람들이 썼던 앵글로·노르만어(고프랑스 방언 중 하나)이고, 각운이 있는 응축된 운문이라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현대 프랑스어와 비교했을 때 앵글로·노르만어 원문은 철자뿐만 아니라 단어의 의미와 뉘앙스, 그리고 쓰임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다수의 고프랑스어와 앵글로·노르만어 사전에서 각 단어의 의미와 쓰임을 확인하는 과정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원문을 전사·편찬한 앨프리드 에월트와 장 리슈네(Jean Rychner)의 설명과, 현대 영어와 현대 프랑스어 번역, 그리고 래 작품들에 대한 학술서와 논문들도 당연히 도움이 되었고요.

하지만 결국 마지막 선택은 항상 역자의 몫인 것이지요. 또 다른 어려움은 기술적인 문제였는데, 앵글로·노르만어로 된 인명, 지명 같은 고유명사를 어떻게 표기할 것인지, 그리고 동일한 인물이 언어권에 따라서 다르게 표기되는 경우 어떻게 표기할 것인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 경우, 서양 중세사를 연구하시는 전문가 선생님들께 자문을 구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경험했을 서양 중세 관련 기존 번역물을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할리 978 필사본 중 '기주마르(좌)'와 '인동덩굴(우)' 서두 (출처: British Library)

'래'를 만나게 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심각한 고전 작품을 읽는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재미있고 짧은 옛날이야기 열두 편을 즐긴다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제가 『래 모음집』을 지인들에게 선물할 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전’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어렵게 느껴지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지요.

『래 모음집』은 고전이기에 앞서 기본적으로 옛날이야기 모음집입니다. 하여 ‘이야기’로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작품 내에서도 저(화)자 마리가 청중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이니 독자들께서도 그런 상황을 상상하시면서 작품을 감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소리 내어 읽어 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읽어 주는 것도 작품들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연구를 계획하고 계실까요?

『래 모음집』을 옮기는 작업 과정에서 타겟 언어(target language)가 한국어이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해서 옮겨야 하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왕이 신하에게 말하는 경우, 왕비가 남편-왕의 신하에게 말하는 경우, 귀족 영주인 남편이 자신의 부인에게 말하는 경우, 기사가 자신의 주군의 딸에게 말하는 경우 등을 우리말로 옮길 때 모두 다른 톤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것은 이 경우들을 모두 구분하는 존댓말(honorifics)이 한국어에는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하여, 이런 예들을 모아서 분류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논문을 써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래 모음집』을 번역을 하면서 제가 예전에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요—예를 들어, 중세 전투 용어와 문화, 의료 등—이 주제들에 대해서도 앞으로 연구해 볼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나누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21세기에 왜 마리 드 프랑스의 『래 모음집』 같은 오래 전에 쓰인 고전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할까요? 이런 고전 작품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함을 주는 걸까요?

연구자 윤주옥 교수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전문연구원.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중세영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HK연구교수와 서강대학교 대우교수를 지냈다. 마리 드 프랑스와 아서 왕 문학을 포함한 중세문학과 중세 문자문화가 주된 연구 분야이다.

주요 저역서로 『서양의 문자 문명과 매체』(2020, 공저), 『세계의 언어 사전』(2016, 공저), 『커뮤니케이션의 편향』(2016, 역서), The Little Prince(2015, 영어 역서), 『문자를 다시 생각하다』(2013, 역서, 2014년 세종도서)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Disgust and the Werewolf’s Wife in Marie de France’s Bisclavret”(2020), “Medieval Documentary Semiotics and Forged Letters in the Late Middle English Emaré”(2019), 「서양 중세 문학과 여성 지식인: 12세기 마리 드 프랑스를 중심으로」(2019) 외 다수가 있다.

* 본 연구는 대우재단의 2019년 학술연구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물은 2023년 1월에 59번째 대우고전총서로 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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