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흔 치유적 신화 15

엄마가 없는 어린아이의 아픔, 어떻게 치유하나

신은 정말로 인간을 사랑할까?
고통과 절망, 그 속에서도 영근 빛을 찾아서

사진 제공 한겨레 휴심정

■ 우리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태어났나

여기 누구나 한 번쯤 들어왔을 만한 노랫말이 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노래를 들으면서 ‘그래. 맞는 말이야!’ 하고 공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득한 거리감이나 이질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냥 지어낸 말일 뿐이야. 산다는 건 외롭고 힘들기만 한걸….’ 소외감과 절망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신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송곳이 될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이 세상에 사랑받기 위하여, 또는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난 것일까? 신은 정말로 인간을 사랑할까?

한 달 전, 또는 열흘 전만 해도 확신 속에 답할 준비가 돼 있었다. 우리가 이런저런 외물(外物)과 상황에 휘둘려서, 또는 스스로에게 갇혀서 그걸 느끼지 못할 뿐이라고. 하지만 지금 나의 마음은 이 질문 앞에 흔들거린다. 회의가 솟아나려고 한다. 그동안 무엇인가에 갇혀버린 것일까? 서사적 자기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문제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갈 신화 속 동반자를 찾아본다. 비극적 운명에 신음한 주인공들이 떠오른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시시포스, 아킬레우스, 다프네, 오르페우스…. 사랑하는 짝 에우리디케를 잃고 쓰라리게 무너진 오르페우스가 마음을 흔든다. 그리고 우리 신화의 주인공들도 줄지어 다가온다. 아비도 없이 종의 자식으로 태어나 분노와 절망의 날을 견뎌야 했던 할락궁이, 풀리는 일이 없는 불운의 삶을 눈물 속에 이어간 지장아기, 첫날밤도 못 치른 상태로 남편을 잃고서 극한의 고통에 몸부림친 청정각시 등이 무겁게 마음에 남는다.

사진 제공 한겨레 휴심정

하지만 결국 내가 고른 이는 바리데기다. 나 자신과의 서사적 연결성 때문일 것이고, 서사의 신화적 원형성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있게 한 부모로부터 무참히 버림받은 자식. 이보다 더 서럽고 저주스러운 운명이 어디 있을까? 억울함과 원망을 가히 가눌 수 없었을 어린 바리에게 ‘사랑’이란 말은 오히려 서럽기만 했을 것이다. 누가 감히 그에게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하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신화는 그렇게 말한다. 너는 버려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하늘은 널 사랑한다고. 만분의 일도 실감하기 어려운 그 존재적 진실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과정이 곧 바리의 서사적 역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밟아 나갈 신화적 여정이기도 하다.

 

■ 금할 수 없는 존재적 질문. 비명과 같은

바리데기 바리공주가 궂은 산중, 또는 거친 피바다에 버려진 것은 철모르는 갓난아기 때였다. 궤에 갇힌 채로 한없이 피바다를 떠돌던 바리는 제 몸에 모래와 흙이 가득했어도, 왕개미와 실뱀이 빽빽이 감쌌어도 그게 무슨 뜻일지 몰랐으리라. 비럭할미 비럭할아비의 거둠을 입어 사랑 속에 성장하면서 바리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사진 제공 한겨레 휴심정

하지만 철이 들면서 할미와 할아비가 제 부모일 수 없음을 알았을 때, 자기는 부모에게 버려진 딸이며 그래서 이름이 ‘바리’가 되었음을 알게 됐을 때, 세상의 색깔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발 딛고 서 있는 한 뼘의 바닥까지,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나 자신이 ‘원치 않는 사람’임을 깨달았을 때의, ‘없는 게 더 나은 사람’이었음을 뒤늦게 감지했을 때의 참담한 절망감을 경험한 적 있으리라. 바리에게는 그것이 태생적인 존재적 정체성이었던 터다. 그건 얼마나 아득한 일이었을지.

“할머니 할아버지요. 날짐승과 길벌레도 다 어미 아비가 있는데 나는 어찌하여 어머니 아버지가 없습니까? 우리 부모님은 누구입니까?”

바리가 가슴 속을 꽉 채워 올라오는 것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비럭할미와 할아비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건 질문이라기보다 하나의 비명(悲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던졌다 던지데기, 버렸다 바리데기! 날짐승과 길벌레만도 못한 존재! 하늘은 버려져 지워질 존재를 왜 세상에 내었나. 왜 공연히 집어 던졌나. 차라리 생겨나지 않았으면 이 고통 없었을 것을….

“이 할미가 어미이고 할아비가 아비니라.”

“그런 말 마십시오. 이렇게 늙으신 분들이 어찌 나 같은 자손을 낳습니까?”

“하늘이 네 아버지이고 땅이 네 어머니니라.”

“할머니. 할아버지요. 어떻게 하늘과 땅이 인간 자손을 낳는단 말입니까?”

“전라도 왕대나무가 아버지이고 뒷동산 잎 많은 나무가 어머니니라.”

“그런 말 마십시오. 어찌 산천초목이 인간을 낳습니까?”

애초에 답이 불가능한 질문이었다. 왜냐면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비명이었으므로. 늙은 할미와 할아비가 애써 만들어내는 답변이 바리의 질문만큼이나 슬프다. 아비 어미가 없다는 객관적 사실 앞에, 무참히 내던져진 존재라는 엄연한 진실 앞에, 할미 할아비의 말은 작은 위로조차 될 수 없었으리라. 오히려 더 억울하고 슬펐을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자신의 은인인 늙은 할미 할아비에게 대놓고 항변할까.

 

■ 나의 어머니, 뒷동산 나무

그런데 신화는 이 지점에서 하나의 반전을 선사한다. 바리의 너무나 당연하고 명확한 항변에 노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허튼 말이 아니라 천지간 산천에 풀과 나무가 우거지면 이슬이 내려서 인간 탄생을 하느니라.”

갖다 붙인 것처럼 보이는 이 말은 실상 천지창조 신화의 압축이다. 하늘과 땅이 갈라진 뒤 하늘에서 청이슬이 내리고 땅에서 흑이슬이 피어나 서로 합쳐져 그 기운으로 뭇 생명이 생겨나고 인간이 태어난 시원적 역사다. 노인들은 바리에게 그 영겁의 역사와 섭리를 말하고 있는 중이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눈앞의 관계를 넘어선 한 생명의 우주적 연결성을.

사진 제공 한겨레 휴심정

무참히 버림받은 존재라는 현실에 신음하는 철부지 아이에게 그 말이 어찌 귀에 들어오랴. 씨알도 안 먹힐 딴 세상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신화는 이 지점에 또 한 번의 큰 반전을 마련한다. 만분의 일도, 천만분의 일도 위로가 안 됐을 노인들의 말에 대한 바리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아이는 그 말을 듣고서 전라도는 멀어서 못 가고 뒷동산 나무에 하루 세 번씩 문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건 무슨 마음이었을까. 그렇게라도 어미 구실을 해줄 무언가를 찾아서 가련한 제 처지를 만분의 일이나마 위로받고자 한 것일까. 생각하면 참 부질없는 일로 여겨지지만, 그것이 객관적 사실에 가깝겠지만, 그건 정말로 아무 부질없는 일일까? 하루 삼세번씩 매일 찾아와 문안하는 아이에게 뒷동산 나무는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어느 날 문득, 나무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니었을까?

“그래, 아가야. 내가 너의 어미야. 어찌 나뿐이겠니. 너를 둘러싼 모든 풀과 나무, 바위와 돌과 바람과 구름, 저 하늘과 땅, 이 모두가 네 아버지이고 어머니란다. 너를 키워준 할미와 할아비는 더 말해서 무엇하겠니. 너는 버림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야. 모두가 너를 바라보며 지켜주고 있단다.”

사실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왔을 그 말 앞에서 바리는 하염없이 울었을지도 모른다. 만분의 일의 위로조차 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천번 만번이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다. 1년 365일, 바리는 그 일을 하루도 그치지 않았다지 않는가!

 

■ 신(神)! 병 주고 약 주는 존재

하루하루를 빠짐없이 산천초목과 소통하면서, 하늘·땅과 대화하면서 바리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존재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비럭할미와 할아비였을 것이다. 흙모래에 뒤덮여 죽어가던 자기를 거두어서 사랑으로 키운 은인이며, 나의 존재가 크나큰 생명적 연결 속에 있음을 삶으로 깨우쳐준 당사자다. 하늘이 무심치 않음을 확인시켜 주는 증인이기도 하다.

바리는 몰랐을 수도 있지만, 신화 속에서 그 일은 하늘의 시킨 바였다. 부처님으로 표현된 신령이 피바다 위를 떠도는 바리를 발견하고서 그를 비럭할미와 할아비에게 인도했던 것이었다. 구원자로서의 신이다. 신은 한 생명을 아들이 아닌 딸로 점지하여 무참히 버려지게 만들고서는 그 생명의 줄을 나서서 이어준 것이니, 말하자면 병 주고 약 주기다. 인간의 명(命)이란 얼마나 얄궂은 것인지!

운명의 장난은 이로써 끝이 아니다. 부모에게 버려진 딸은 어느 날 자기를 내다 버린 부모와 만나게 되거니와, 이 또한 신이 계시하고 이끈 일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큰 병에 대한, 뒤늦게 주어진 약이었다. 얄궂은 것은 그 약이 다시 병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바리가 만난 부모는 병들어 힘없이 죽어가고 있었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었다. 부모를 고칠 약수를 구하기 위해 서천서역 저승으로 홀로 길을 떠나는 딸. 그에게 부모와의 만남은 약이었을까, 아니면 병이었을까?

사진 제공 한겨레 휴심정

바리의 삶의 여정에서 ‘신(神)의 두 얼굴’은 변함없는 상수(常數)였다. 험한 호랑이 모습으로 길을 막던 신은 인자한 노인으로 변해서 꽃을 전해준다. 그렇게 길을 인도하는 듯싶던 신은 어느 날 바리를 지옥에 덜컥 가둬버린다. 남장을 하고 길을 가던 바리가 성별을 속였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서천서역 저승에 도착한 뒤는 또 어떤가. 약수를 구하기 위해서는 한 남자와 결혼해서 나무하기와 빨래하기, 불 때기로 세월을 보내며 자식을 여럿 낳아야만 했다.

그야말로 쉬운 일이 단 하나도 없는 고난의 역정이다. 병 주고 약 주고 또 병을 주는 존재. 그 뒤에 이어질 일이 무엇인가 하면 죽음이다. 사람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그것 말이다. 생각하면 세상은 너무나 엄중하며, 신은 더없이 냉정하다. 늘 내 편인 신은, 언제나 자비로운 신은 없다!

잘 알듯이 이는 바리데기 바리공주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존재적 운명이다. 얼마 전까지 의욕과 열정으로 충만했던 내가 어느새 무기력한 회의에 젖어든 것은 말하자면 신(神)의 장난이다. 나쁜 신 같으니라고! 아무리 원망해 봤자 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신의 일이니까.

 

■ 사랑이라 불러도 좋으리

신화는 말한다. 신은 원래 그렇게 존재하는 법이라고. 천지간 세상을 나아가는 것은 너 자신의 몫이라고. 그 말은 신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지 않는다. 주인공의 행위를 통해서 전해진다. ‘서사’를 통해서.

일련의 얄궂은 운명을 바리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감수한다. 자기를 버린 부모를 위해 험한 저승으로 가기를 마다치 않으며, 호랑이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험한 지옥에 갇힌 일을 원망하는 대신 지옥의 벽을 허무는 길을 찾아낸다. 궂은 저승에서 긴 세월 동안 나무하고 빨래하고 불 때면서 자식을 낳아 키우는 일을 바리는 기꺼이 감당한다. 그러자 그가 빨래하고 밥하던 물은 생명수가 된다. 그는 그 물로 자신을 버린 부모를 살린다.

과연 바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이 오랜 질문에 하나의 새 답을 찾아본다. 어쩌면 그 시작은 바리가 뒷동산 잎 큰 나무에 문안을 드리면서부터였던 것 아닐까. 나의 존재적 부질없음에 대해 만분의 일의 답이라도 찾으려던 미약한 몸짓 말이다. 돌아보면 이 세상에 영속한 것은 없다. 뒷동산 나무의 잎새 또한 마찬가지다. 그 잎이 떨어지고 다시 나고 커가는 것을 보면서, 또는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리며 신음하다가 다시 햇살에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바리는 그 모든 것이 생명이고 신성임을 느꼈던 것 아닐까?

사진 제공 한겨레 휴심정

하나의 나무가 세상에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엄청난 간극! 나뭇잎이 피고 지는 것은, 비에 젖다가 햇살에 빛나는 것은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시들거나 뿌리 뽑혀서 죽는 일도 마찬가지다. 애초 존재가 없었으면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없었다면 어찌 기쁨이든 슬픔이든 기림이든 버림이든 느낄 수 있었을까. 병 주고 약 주는, 약 주고 병 주는 신과 대면할 수 있었을까. 시원의 역사와 섭리로 여기 이렇게 존재하면서 움직이는 나.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나.

어둠을 보는 대신 아닌 빛을 보면, 고통 대신 행복을 보고 절망 대신 희망을 보면, 병(病) 대신 약(藥)을 보면 세상은 달라진다. 우리는 이를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 축복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움직여서 앞으로 나아가야 내 것이 될 수 있다. 문득 순례 여행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궂은 날씨 속의 긴 행군 뒤에 펼쳐진 대자연의 장관을 만나면서, 또는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고 안온한 잠자리에 들면서 마음속으로 외쳤었다.

‘그래. 산다는 건 축복이야!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거야. 아, 헤아릴 수 없는 이 큰 사랑!’

하지만 지금 바리는 나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고. 사랑은 빛이나 행복에, 희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빛과 어둠, 행복과 고통, 희망과 절망은 둘이 아닌 하나라고. 그 모두가 하늘이 우리에게 허락한 사랑의 과정이라고. 여기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사랑이라고.

사진 제공 한겨레 휴심정

구원의 여신이 전해주는 깨우침에 막혔던 마음이 열리면서 나아갈 길이 나타난다. 돌아보면 늘 그렇게 나아온 바였다. 가 없는 사랑 속에서. 나 그렇게 길이 나아가리라. 가 없는 사랑으로. 천 분의 일 또는 만분의 일의 바리데기가 되어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갈 수 있는 데까지.

신동흔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겸 한국문학치료학회장

이 시리즈는 한겨레신문 휴심정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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