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흔 치유적 신화 13

내 안의 두 자아, 오이디푸스와 나르키소스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미숙한 사랑. 의존적 애착과 자기도취 사이

다시 되새겨보는, 신화와 나

신화와 우리, 더 정확히는 신화와 ‘나’의 관계를 짚어가고 있는 중이다. 문학치료학의 관점을 바탕으로 한 접근이다. 해외에서 들어온 문학치료가 아니라 한국의 문학치료. 한국문학치료학회와 건국대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가 주도하고 있는 한국 문학치료의 핵심 개념은 서사, 특히 자기서사다. 문학치료학은 인간을 하나의 문학으로 본다. 인간의 내면적 심층에 자리한 모종의 이야기가 삶을 움직여 나간다는 것이다. 인간이자 문학으로서의 그 이야기가 곧 자기서사(story-in-depth of self)다.

자기서사는 문학작품의 이면적 심층에 자리한 이야기, 곧 작품서사를 통해서 비춰보고 조정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의 검증을 거친 원형적인 설화는 이를 위한 유력한 거울이 된다. 거기에는 물론 신화가 포함된다. 세계의 신화에 내재한 작품서사를 통해 우리 내면의 자기서사를 성찰함으로써 삶의 새길을 찾아나가는 것이 치유적 신화읽기의 기본 취지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그 삶은 한두 개의 이야기로 설명될 수 없다. 한 사람의 내면에는 수많은 서사가 숨어 있어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작동한다. 천(千)의 얼굴을 가진 인간. 그중 오늘 살펴볼 것은 오이디푸스와 나르키소스의 서사다. 두 인물의 캐릭터와 인생역정은 꽤나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비극적인 사랑과 좌절이라는 외적 유사성 외에 그 안쪽의 질적 공통성을 더 주목하게 된다. 서사 차원의 연결성이다.

불의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뒤 스스로 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 수많은 구애를 다 물리치고 물속에 비친 제 그림자만 바라보다가 목숨은 끊은 나르키소스.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사연은 어떻게 우리의 자기서사로 연결되는 것일까?

 

결핍의 자아와 집착의 폭력

그리스 신화에 비극적 주인공들이 꽤 많지만 오이디푸스는 그 가운데도 첫손에 꼽힌다. 출생부터가 험한 저주였다. 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을 지닌 아이. 오이디푸스는 그 가혹한 신탁을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치지만 신들은 그를 그냥 두지 않는다. 그의 몸부림은 운명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걸음일 따름이었다. 일컬어 운명의 장난! 하지만 이를 운명으로 돌리는 것은, 또는 신들의 장난으로 치부하는 것은 서사적인 해석이 아니다.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오이디푸스는 왕의 아들이었다. 어떤 왕이냐면 극히 권위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폭력적인 왕. 테베의 왕이었던 라이오스는 새로 태어난 아들이 자기를 위협하게 되리라는 예언에 갓난아이 발에 못질을 해서 험산에 내다버린다. 자식의 존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귀찮은 걸림돌로 취급하는 행위다. 출발부터 존재가 훼손돼버린 아이는 정상적으로 걸음을 걸어나갈 수 없다. ‘부풀어오른 발’이라는 뜻의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은 그의 서사적 정체성을 대변한다.

아버지의 못질이나 내버림은 심리적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식에 대한 무참한 공격과 외면. 아버지가 자기 권위와 입지를 위해 자식을 외면하는 일은 현실에서 드물지 않다. 문제는 그러한 억압이 트라우마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심각한 트라우마. 아버지에게 사랑 대신 저버림을 경험한 오이디푸스는 ‘사랑받고 싶은 아이’로서의 나를 마음속에 가두어 숨기게 된다. 그렇게 그는 내면에서 영원한 어린아이 상태로 남는다. 부모의 따뜻한 품이 너무나 그리운, 결핍과 갈망으로 가득한 상처받은 아이. 그 갈망은 아버지의 대척점에 있는 어머니에게로 향한다. 모성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강한 집착은 그렇게 형성되었다고 봐야 한다. 운명이 아닌 관계의 문제로서.

신화는 그가 친부모에게서 버림받은 뒤 코린토스의 왕과 왕비 폴뤼보스와 메르페에게 거두어졌다고 말하며, 그 아들로서 문제없이 성장한 것처럼 서술한다. 역사적 관점이 아닌 서사적 관점에서 이는 심리적 은유로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내면의 결핍과 갈망을 억누른 채 ‘순종하는 아들’이 되어서 부모의 틀에 맞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가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의 가짜의 삶이다. 그렇게 그는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한 듯했으나 이는 겉모습일 따름이었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근원적인 애정 결핍의 자아가,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아는 어느 땐가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억압의 크기에 비례하는 강하고 험한 모습으로.

이야기에서 오이디푸스가 어느 날 좁은 외길에서 라이오스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장면은 바로 그 노출의 지점이 된다. 아버지만큼 몸이 자라고 힘이 커졌던 아들은 자기에게 다시 폭력을 행사하려는 아버지 앞에서 더이상 참지 않는다. 오래 숨겨왔던 본모습을 드러낸다. 단매에 아버지를 쳐서 죽이는 아들. “봐! 이게 나라고!” 그렇게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서 그 대신 왕이 된다. 오랫동안 억눌렸던 내적 존재성의 역전적 발현이다. 왕의 아내를 빼앗아서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된 오이디푸스는 더이상 신음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아니, 그렇지 않다! 한 여자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음에도 오이디푸스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그 서사적 상징이 무엇이냐면 ‘엄마와의 결혼’이다. 그는 인생의 짝으로 맞은 여성에게서 사실은 ‘어머니’를 찾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제라도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품어주는 따뜻한 모성에 대한 집착! 이야기는 오이디푸스가 생모인 줄 모른 채로 이오카스테와 결혼했다고 하지만, 그녀가 제 어머니뻘의 여인이었던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모름지기 이오카스테의 품 안에서 그는 한 명의 ‘아기’였을 것이다. 구순적(口脣的)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그 결과가 무엇인가 하면 역병으로 표현된 저주였다. 표면적으로 보면 아들이 어머니와 결혼한 패륜에 대한 천벌이겠지만, 상징적 맥락으로 풀이하면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인간적 상호존중의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의존적 애착이라는 병증(病症)에 갇혀 버린 상태의 서사적 은유가 된다. 그러한 퇴행(退行)을 통해 삶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오이디푸스의 세상은 (심리적인) 역병이라는 검은 그림자에 갇힌 것이었다.

그 진실 앞에 오이디푸스는 처참히 절망하고 좌절하거니와, 그 비극은 사실 스스로 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여전히 유아로 남아 네 발로 기고 있었던 그는 두 발의 삶을 감당하지 못한 채 타력에 의존하는 세 발의 존재로 전락한 것이었다. 스핑크스가 냈던 수수께끼는 바로 그 자신의 삶의 진실이었던 셈이다. 모성에 대한 퇴행적 집착으로 이어진 결핍과 갈망의 삶……. ‘부풀어오른 발’ 오이디푸스는 끝내 온쪽이 될 수 없었던 존재라 해도 좋겠다. 왜냐하면 스스로 늘 반쪽이었으므로.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이는 멀리 딴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신화를 대략만 살펴봐도 모성에 집착하는 의존적 퇴행의 인물이 수두룩하다. 명월각시에게 늘 어린아이였던 궁산선비, 여산부인의 곁을 떠난 뒤 노일저대의 품에서 아기 노릇을 한 남선비…… 황우양씨나 강림도령 같은 영웅적 인물에게서도 아내에 대한 유아적 의존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어쩌면 그것은 한국 남성들의 하나의 원형적 형상일지도 모르겠다. 민담 속의 나무꾼이나 우렁남편 등에서도 볼 수 있는 바의. 아내에게서 따뜻한 모성적 포용과 보살핌을 기대하는 나. 내가 곧 오이디푸스이고 궁산선비다. 반쪽짜리의……

덧붙이자면 이는 남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외적으로는 성인이 됐으나 실제로는 어린 딸 자리에 머문 많은 여성들이 있다. 오이디푸스의 딸이었던 안티고네만 하더라도 아버지의 그늘과 오빠들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슬픈 아이의 삶을 살다가 자멸하고 만다. 아버지 아가멤논의 그림자에 휩싸인 결과로 ‘엄마 죽이기’에 나섰던, 끝내 제 삶을 살지 못했던 비극적 주인공 엘렉트라도 또 다른 사례가 된다. 스스로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도리를 다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 수는 없다. 스스로 온전해지고 행복할 수 있어야, 더불어 온전해지고 행복할 수 있어야 사랑이 아니겠는가.

자기애가 도취가 될 때…

오이디푸스가 타인과의 관계에 집착한 인물이라면 그리스 신화의 다른 주인공 나르키소스는 관계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인물이다. 기끼어 함께할 만한 사랑의 관계를 나르키소스는 굳이 거부한다. 그리고 자기자신의 삶을 산다. ‘나만의 삶’을……

타인과의 얽힘을 거부하고 자기 삶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나르키소스의 삶은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선택 역시 결핍과 상처에 의한 것일 공산이 크다. 그가 강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도취된 결과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심대한 문제가 내재했음을 말해준다. 그 또한 심리적 문제였을 것이다. 문학치료 식으로 말하면 서사적 문제.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신화에 의하면 나르키소스는 강물의 요정 리리오페가 케피소스 강의 홍수에 휘말린 후 낳은 아들이라고 한다. 요정의 아들이어서인지, 나르키소스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고 한다. 강한 자존감의 바탕이 되었을 요소다. 세상에 나만한 사람은 없다고 하는. 추측건대 그런 심리는 어머니에 의해 조장됐을 가능성이 크다. 홀로 아들을 키운 어머니 리리오페는 늘 그를 걱정하며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그녀에게 아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존재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 네가 최고야. 세상에 너하고 견줄 만한 것은 없어.” 이런 식으로 키우지 않았을까?

이렇게 보는 데는 근거가 있다. 나르키소스는 강물에 비춰진 제 모습을 보고 도취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누군가 하면 바로 강물이다. 그러니까 강물에 비춰진 모습은 어머니에 의해 만들어진 모습인 셈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누구와도 비할 바 없는 나! 문제는 그것이 ‘그림자’라는 사실이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이 사랑해 마지 않았던 대상이 실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며 좌절했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서 다시 돌이키기에 늦어버린 상황에서.

요컨대 나르키소스는 오이디푸스와 마찬가지로 한 명의 ‘어른아이’였다고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애정 결핍에 의해 어린아이로 머물렀다면 나르키소스는 애정 과다로 인해 그렇게 된 경우다. 부모의 지나친 애착과 보호가 자식을 어린아이로 머물게 한다는 것, 어김없는 진실이다. 그런 사례는 우리 사는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은지!

엄마라는 품에서 과도한 자기충족감으로 지내온 나르키소스에게 그 틀을 벗어난 관계 맺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르키소스가 구애를 거절했던 요정의 이름은 ‘에코(Echo)’였다. 일컬어 메아리. 1차적 관계와 자기애에 빠져있는 나르키소스에게 세상의 다른 존재는 실체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지는 메아리일 따름이었다. 단지 남녀관계만이 아니다. 나르키소스에게 구애했던 또 다른 사람은 동성의 친구 아메이니아스였다. 나르키소스 이 또한 냉정히 밀치거니와, 이는 친구와의 관계 형성 실패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자기애에 함몰된 어린아이였던 나르키소스는 성숙된 동반자적 상생의 관계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하면 고독과 우울 속의 자멸이다. 원인을 따지자면 엄마의 탓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 품에 안온히 머무른 선택은 본인의 것이었으니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자기애(自己愛)는 사랑의 시작이자 동력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그것이 외적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혀버리는 일이다. 내가 최고이고 내가 우선인 사람. 또 하나의 유아적 퇴행이다. 그 서사의 길에 타자와의 호혜적 관계는, 진정한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어두운 그림자와 허튼 메아리가 있을 따름이다.

어떤 강연자가 ‘자연인’을 꿈꾸는 한국 남자의 내면에 사랑받음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팬이기도 한 나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며 거기 인정욕구와 회피의 심리가 맞물려 있음을 깨닫는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몸짓이 가르기가 되고 갇힘이 될 때 그 서사의 길은 나르키소스의 전례를 따르게 될 수 있다. 진정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길을 바꾸어야 하리라. 먼산을 바라보기에 앞서서 옆에 있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기!

 

작은 나를 넘어서 큰 나로

문학치료학에서는 자녀서사에서 남녀서사로의 이행을 중요한 서사적 과제로 여긴다.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에서 벗어나 한 명의 나로서 독자적 선택을 하고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일의 중요성이다. ‘독립’의 과제인데, 문제는 그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외적으로는 나이를 먹었으나 내적으로는 어린아이인, 자녀서사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물경 ‘어른아이들의 세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리적 성장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이루어지지만 서사의 성장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자기 안의 어린아이와 싸워나가야 한다. 그것은 단지 젊은 사람들의 일만이 아니다. 나이와 무관한 평생의 서사적 과제다. 흔히들 “나이를 먹으면 아이가 된다”고 하거니와, 인생의 노년기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실감한다. 내 안의 오이디푸스와 나르키소스가 나를 자꾸 뒤로 잡아당기려 하는 중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머물러서 상하게 된다. 여전히 미숙한 나의 사랑을 온전한 것으로 바꿔가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돌아본다. 일단 ‘두 발’로 착착 걸어나가야 하리라. 그러려면 건강해야 하고, 운동이 필요하다. 몸과 마음의 운동, 또는 서사의 운동이. 이제 서사의 운동을 하나 마쳤으니, 밖으로 나가서 몸을 움직여야겠다. 봄이지 않은가!

신동흔 /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한국문학치료학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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