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흔 치유적 신화 12

사랑. 더불어 하나 되기라는 신성한 과업

창조신화에서 찾는 욕망과 사랑의 원형

 

신화와 사랑 사이. 멀고도 가까운

감정을 표현하는 수많은 말 가운데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사랑’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사랑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친다. 사랑이 없는 세상을 가히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말이 쓰인 역사를 헤아려보면, 특히나 한국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 유래는 그리 깊고 넓다고 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근대에 들어와 비로소 널리 쓰이기 시작했을 따름이다. 그 전에 ‘괴다’나 ‘다솜’ 같은 말이 있었다지만 이것들도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 전통적인 남녀관계에서 우리가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감정이 생생히 살아난 사례는 흔치 않은 것이었다.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에서 특별한 예외적 사례를 볼 수 있는 정도다.

‘사랑(love)’의 개념은 서구에서 상대적으로 오래전부터 널리 사용됐다.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사랑을 육체적 사랑, 도덕적 사랑, 정신적 사랑, 무조건적 사랑 등으로 단계적으로 유형화한 바 있다. 신화에서도 사랑은 중요한 화두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아프로디테(비너스)와 에로스(큐피드) 같은 ‘사랑의 신’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사랑으로 인식되는 수많은 관계와 만나볼 수 있다.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하지만 신화에서 말하는 사랑은 실체가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제우스와 여러 여신의 관계를, 또는 아폴론과 다프네, 에로스와 프시케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기서 우리가 실제로 보게 되는 것은 ‘욕망’이다. 무엇인가를 원하고 그것을 갖고자 하는.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신화에서 “이 사랑,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감복할 만한 관계를 만나기란 쉽지가 않다. 남녀관계 외에 부모와 자녀 같은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신화’는 후대의 관념이 투사된, 말 그대로의 ‘신화’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을 신화에 덧씌운다면, 이는 정도(正道)라 하기 어렵다. 신화로부터 사랑이라고 지칭할 만한 원형적인 무엇을 찾아내는 것이 바른길이다. 그런 것이 실제로 있다면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있다. 존재와 존재 사이의 본원적 이끌림과 어울림이 ‘신성’이라 이름할 수 있는 형태로 이루어질 때, 그를 통해 존재의 초극적 승화와 상생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이를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신화의 본디 화두다. 멀리 창조신화에서 원형을 볼 수 있는.

 

나! 모두인 동시에 아무도 아니었던…

사랑은 ‘관계’와 관련되는 감정이다. 그것은 나와 너 사이에 성립된다. 이때 ‘너’는 이성일 수도 있고, 부모와 자녀, 친구일 수도 있으며, 동식물이나 자연, 사회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내 안의 나, 또는 내 밖의 나.

 

관계는 존재의 분리로부터 시작된다. 세계의 여러 창조 신화는 태초의 세계를 분리 이전의 원초적 통합의 상태로 이야기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은, 또는 땅과 바다는 둘이 아닌 하나였다. 거대한 한 몸으로 아득히 유동하는 태초의 알과 태초의 바다, 또는 천지혼합의 카오스. 그렇게 꿈틀대는 세계 속에 나와 너는, 주체와 대상은 따로 없었다. 존재는 모두인 동시에 누구도 아니었다. 까마득한 무의미의 세계….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그것은 우주적 형상인 동시에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의 생명으로서 형상을 갖기 이전의 나. 아득한 혼돈 속에서 모두인 동시에 누구도 아닌 상태로 무의미하게 부유했을 따름이다. 하나의 생명으로 화하면서 비로소 내 안에, 그리고 바깥에 하늘과 땅은 생겨난 것이었다. 어머니 자궁에서 나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하늘과 땅은 비로소 열리면서 만물은 생겨난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와 함께. 삶이 시작되는,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존재하는 일이란 관계하는 일이다. 부모 형제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 외에 하늘과 땅 같은 대자연으로부터 눈에 안 보이는 미생물 바이러스까지 우리는 한순간도 쉼 없이 무수한 관계들 속을 움직인다. 그 관계는 기본적으로 양면성을 지닌다. 끝없는 부딪침과 밀어냄. 그리고 끝없는 다가감과 어울림. 부딪침은 하나의 개체로 분리된 모든 존재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이끌림과 다가감, 그리고 어울림은? 그 또한 숙명일까?

그에 대한 신화의 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의 창조 신화 <창세가>는 창조신이 분리된 하늘과 땅 사이에 구리 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중국 창조 신화는 반고가 발로 땅을 딛고 팔로 하늘을 떠받쳤다고 한다. 왜 그렇게 했느냐면 하늘과 땅이 다시 붙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다시 붙으려고 한 이유는? 본래 한몸이었기 때문이다. 본래의 원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 뭇 존재의 근원적인 움직임이다. 말 그대로 신화적인.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그렇게 세상 만유는, 우주는 역동한다. 하늘은 땅으로 간단없이 빛과 볕 따위를 내리고, 땅은 하늘을 향해 생명을 키워 올린다. 바다는 땅을 향하고 땅은 바다를 향한다. 밤은 낮을 향해서 가고 낮은 밤을 향해 움직인다. 세상 모든 것은 그렇게 대상을 잡아당기며, 상대를 향하여 움직인다. 일컬어, 만유인력의 법칙!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그들의 잡아당김과 이끌림은 오묘하고도 역동적이다. 전시간적이며, 전방위적이다.

 

하늘과 땅, 또는 남과 여의 우주적 결합

태초의 혼돈으로부터 처음에 무엇이 생겨났는지에 대한 전언은 신화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갈라져 분립하게 된 존재의 대표적 표상으로는 거의 예외 없이 하늘과 땅을 들 수 있다. 맑고 가볍고 높은 것과 탁하고 무겁고 낮은 것. 하늘과 땅은 완연히 이질적 속성을 지닌 대극의 존재이지만, 세계의 많은 창조 신화는 둘의 다가감과 결합을 말한다. 방금 말한 바 근원적 이끌림이다.

먼저 그리스 신화. 대지의 신인 가이아와 하늘신 우라노스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가이아가 우라노스를 낳았다고 하는데, 둘의 관계는 모자 관계와는 다르다. 둘은 어머니 신과 아버지 신으로 인식되며, 서로 깊은 관계를 맺는 것으로 풀이된다. 신화에 의하면 우라노스가 수시로 가이아를 찾아와 동침했다고 한다. 그 동침은 물론 하늘과 땅의 우주적 결합을 표상한다. 밤이 되면 하늘과 땅의 분간이 없어지거니와 이를 둘의 결합으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다. 드러나 보이는 바로는 서로 분리돼 있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짝을 이루는 하늘과 땅. 또는 여신과 남신. 그 결합은 본래 둘이 아닌 하나였던 상태의 지향이자 구현이었을 것이다.

이집트 신화에서 하늘과 땅의 결합에 대한 서사도 무척 인상적이다. 어둡고 고요한 흐름의 상태였던 태초의 혼융에서 라(La)의 작용으로 해가 떠오르고 바람과 비가 생겨나며, 바람과 비 사이에서 하늘신 누트와 땅의 신 게브가 탄생한다. 하늘신이 여신이고 땅의 신이 남신인 점이 눈길을 끈다. 대극의 존재이자 쌍둥이였던 누트와 게브는 서로를 향해 몸을 뻗치면서 결합을 이룬다. 그림에서 그 형상이 꽤 에로틱한 남성과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된 점이 인상적이다. 천지의 우주적 결합과 남녀의 생명적 결합이 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신화적 원리로서의 만유인력의 원리다. 좀 더 특화해서 표현하면, 대극간 상호유인의 원리라 해도 좋겠다.

대극의 존재로서 하늘과 땅, 또는 남과 여의 결합은 한국 창세 신화에서도 인상적 사례를 볼 수 있다. 한국 신화 속 최초의 결합이라고 할 천지왕과 총명 부인 박이왕의 결연이 그것이다. 인간 세상의 혼란을 제어하려고 내려왔던 하늘신 천지왕은 인가에서 유숙하다가 지상의 여인 총명 부인에게 이끌려 인연을 맺는다. 옥빗으로 머리를 빗는 소리에 반했다고 하니 꽤 낭만적이다. 총명 부인은 뒤에 땅의 신 박이왕이 되거니와, 본래부터 땅의 생명성을 대변하는 존재였다고 봄이 옳다. <단군신화> 속 환웅과 웅녀의 결합과도 의미가 통하는, 하늘·남성과 땅·여성의 본원적 우주적 결합이다. 한국 신화에서 본래 하늘과 땅은 서로 붙거나 뒤섞여서 하나였다고 하니, 그 결합은 태초의 원상태로 향하는 본원적 몸짓임에 틀림이 없다.

세계 여러 창조 신화에서 말하는 바 하늘과 땅, 또는 남과 여 사이의 결합은 이처럼 만유의 본원적 속성과 연결돼 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운명적으로 반쪽이 되어버린 존재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내서 완전해지고자 는 역동이다. 결핍을 충족으로 채우고자 하는,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바꾸고자 하는 존재적 몸짓. 거기서 우리는 ‘사랑’의 신화적 원형을 보게 된다. 게브와 누트가 금슬이 좋아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나 천지왕이 박이왕의 머리 빗는 소리에 반했다는 등의 내용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과 비교해도 위화감이 크지 않다.

사랑의 원형으로서 본원적 지향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바는 그 결합의 결과다. 창조 신화에서 하늘과 땅, 또는 남과 여의 결합은 일시적이다. 둘은 한몸인 상태로 머물지 않으며, 다시 각각으로 분리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환원이 아니다. 둘의 결합은 ‘자녀’로 지칭되는 신령한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서 오케아노스와 레아, 크로노스 등 수많은 신들이 탄생하며, 누트와 게브는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 등 다섯 자식을 낳는다. 천지왕과 박이왕 사이에서는 대별왕 소별왕 형제가 태어난다. 각기 저승과 이승을 맡게 되는 신이다. 잘 알듯이,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는 단군이 태어난다.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하늘과 땅은, 또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자의 자리에서 움직이지만, 자식들은 다르다. 그들 안에는 하늘과 땅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다. 그들이 다시 남과 여,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서 낳을 새로운 생명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세상 만유는 분리된 동시에 연결된다. 세상은 끝없는 단절 속에서 끊김 없이 영속한다. 세계의 본원적인 에네르기로서 ‘사랑’의 힘이다.

충족을 향한 본원적 지향, 그러나…

세상 만물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자신과 짝을 이룰 대상을 찾아서 움직인다. 그 바탕에는 원형적 결여가 있다. 스스로 완전하지 못한 반쪽의 존재로서의 운명이다. 운명의 짝을 찾아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그 본원적인 지향에 대하여 그것을 두루 사랑이라 할 수 있는가 하면 이는 간단치 않다. 엄밀히 말하여, 사랑은 그 중 극히 일부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 지향 전체에 해당하는 것은? 답은 바로 ‘욕망’일 것이다.

앞서 가이아와 우라노스 등의 결합에 대해 사랑의 원형을 말했지만, 그것이 곧 사랑인지에 대해 단언하기는 어렵다. 게브와 누트, 천지왕과 박이왕에서는 상호 교감의 합일을 간취할 수 있지만,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서사에서 부각돼 있는 것은 본능적인 욕망 쪽에 가깝다. 자신의 갈망을 채우기 위한 일방적이고 독점적인 욕망. 우라노스의 그런 집착은 가이아의 반발을 사게 되고, 결국 우라노스는 가이아의 지원 속에 아들 크로노스에게 거세를 당한다. 문화사적으로 보면 세계 체계의 갱신 과정이라고 해석될 수 있거니와, 사랑이라는 화두를 놓고서 말하자면 왜곡된 집착적 사랑의 비극적 말로에 해당한다. 사랑이 욕망에 의해 질식된 형국이다. 오늘날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보는 ‘사랑 아닌 사랑’의 원형적 표상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상대를 일방적으로 대상화하는 소유적 욕망은 ‘권력’이나 ‘술수’와 결합될 때 더욱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수메르 신화나 그리스 신화, 북유럽 신화 등에서 단적인 사례를 널리 만나볼 수 있다. 신화들 속의 힘 있는 신들은 그리 자상하지 않다. 대개 그 반대다. 상대에 대한 배려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예컨대 길가메시는 권력으로써, 로키는 술수로써 원하는 상대를 취한다. 그들에게 여성은 대상일 따름이다. 사랑이 아닌 욕망과 소유의 대상. 그렇게 이루어진 결핍의 충족이란 폭력일 따름이다. 더 큰 결여와 불화를 만들어내는.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그 중의 최악으로 제우스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막강한 권력과 교묘한 술수를 전방위적으로 동원하며 여신을, 또는 인간 여인을 짝으로 삼으려고 하는 절대적 최고신. 제우스가 취했던, 또는 취하고자 했던 여인은 그 목록을 이루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이름이 알려진 이들만 59명이라니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를 위해 동원한 권능과 술수는 또 얼마나 지독했는지. 인간 욕망의 야생적 본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형상이라는 신화적 해석이 가능하거니와, 인간의 내적 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기에 오히려 더 서늘하고 두렵다. 욕망하는 것을 어떻게든 다 가지고 누리고자 하는 마음. 나 자신 안에 제우스의 서사가 도사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음에 오싹해진다.

진정한 동반의 길과 ‘사랑’

신화에서든 현실에서든, 사랑과 욕망의 경계를 가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보는 관계가 실상 욕망에 불과할 수 있고, 욕망이라고 치부하는 행위 속에 사랑이 있을 수 있다. 불완전한 결여의 존재로서 인간의 일이란 참으로 복잡하고도 난해하다. 뒤를 이을 글들에서 구체적 신화들을 통해 짚어 나가게 될 화두다.

미리 한 가지 말해 두자면, 원하는 것을 가지면 결여가 충족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일 따름이다. 욕망은 한도가 없는 법.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낳고, 충족은 더 큰 결여를 낳는다. 그렇게 이어지는 욕망의 폭주는 심각한 관계적 갈등과 어긋남을 낳는다. 커지는 불균형과 부조화. 존재는 완전함에서 더 멀어질 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인간은 ‘반쪽’이 아니다. 독립적 개체로서의 인간은 불완전한 동시에 완전하다. 스스로 완전함을 이루어 나갈 때 비로소 충족은 가능하다. 관계를 단절하고 고립적 자족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관계 맺음은 세상 만유의 본래적이고 신성한 과업이다. 결국 우리 나아갈 길이란 스스로의 불완전한 완전함을 추구하는 한편으로 타자의 불완전한 완전함과 접속하면서 서로 어울려 초극적 합치를 이루어나가는 일일 것이다. 더 크고 의미 있는 완전함을 향하여. 생명적 확장과 영원성을 향하여.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또는 불가능한지에 대해서 주요 신화들을 통해 살펴볼 예정이거니와, 힌트를 미리 준다면 ‘가지는 것’보다 ‘여는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내 안에 갇히지 않고 나를 엶으로써 더 큰 나, 본원적인 나로 나아갈 수 있다. 어울림은 열림을 통해 가능하다. 하늘을 향해 연 땅과 땅을 향해 연 하늘. 여성을 향해 연 남성과 남성을 향해 연 여성. 아름답지 않은가. 아니 남성과 여성보다 ‘사람’이 어울린다. 사람을 향해 연 사람과 사람을 향해 연 사람. 그들이 이루어내는 존재적인 접속과 연결이 곧 사랑 아닐까? 아름다운. 그리고 신령한.

신동흔 /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한국문학치료학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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