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흔 치유적 신화 11

여성 영웅들이 차별을 뚫고 새길을 냈다

여성 또는 여신이라는 이름의 영웅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지키고 되살렸나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여신과 영웅 사이

영웅신화에 대한 글을 구상하면서 여성영웅을 포함하리라고 마음먹었었다. 왜냐하면 여성이 세상의 숨은 영웅이므로. 쓰고 보니 ‘숨은’이라는 말이 걸린다. 스스로 숨었을 리 없으므로. 숨은 것이 아니라 늘 거기 있었던 것이므로.

‘영웅’과 ‘여성’이라는 말 사이에는 모종의 거리감이 있다. 일반적으로, 영웅이라는 호칭은 남성들의 것이다. 여성영웅이라고 일컬을 만한 이들이 있지만, 예외적이다. 알고 보면 권력적인 양식인 신화의 경우는 더 그렇다. 그리스 신화만 하더라도 전형적인 여성영웅으로는 아틀란타 정도를 들 수 있을 따름이다. 여신들을 포함한 신화 속 여성의 대다수는 주체라기보다 대상이며, 주동자가 아닌 보조자다. 많은 경우 그들은 ‘도구’일 따름이다. 현실의 권력구도가 반영된 형상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권력 이상의 것이다. 표면의 텍스트가 현실을 반영한다면 이면의 서사는 진실을 담지한다. 여성의 억눌리고 지워진 존재성은 그 반작용으로 더 강한 파토스와 울림을 자아내곤 한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질곡에 맞서 자기를 세우고 실현하고자 분투할 때의 일이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은 신화 속에 당연히 있다. 어쩌면 대다수일지도 모른다.

미력한 존재로서 세상의 거대한 벽에 맞서 싸우는 존재가 영웅이라고 했다. 세계라는 벽과 사회라는 벽에 이중으로 갇혀 있는 여성이 움직여 싸울 때 그것은 전면적인 존재적 투쟁일 수 있다. 영웅적인. 나는 신화 속의 많은 여성들에게서 그 일거수일투족 모두를 영웅적이라고 일컬을 만한 사례들을 본다. 나는 그들을 ‘여성영웅’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그냥 ‘영웅’이 더 어울린다. 진짜 영웅! 모든 싸우는 사람들의 빛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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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스에게서 보는 여신의 원형

세계 신화 속에는 수많은 여신들이 있다. 그중 원형적이라고 일컬을 만한 존재로 이집트 신화 속의 이시스(Isis)를 들 수 있다. 여신 중의 여신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신들의 어머니, 마법의 지존, 지혜의 의자, 천상의 성모 등 많은 별명을 가진 여신이다. 그리스 신화의 헤라와 아폴론, 아프로디테, 페르세포네, 아테나, 데메테르를 합친 것과도 같은 신격을 가진 신이라고도 한다.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이시스는 하늘신 누트와 땅의 신 게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누트와 게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들은 서로 결혼해서 짝을 이룬다. 큰아들 오시리스는 이시스와 짝을 이루며, 다른 아들인 세트는 여동생 네프티스와 결혼한다. 이집트 신화의 남매혼 화소는 당대 사회문화의 반영으로 해석되는데, 하늘과 땅의 고귀한 자손들 간의 신성혼(神聖婚)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지상에서 하늘과 땅의 힘이 어우러져 힘을 내게 되는 구도다.

이시스와 오시리스 가운데 세상의 지배자 구실을 하는 이는 남편인 오시리스다. 그는 태양신 라(La)에게서 신성한 지배권을 넘겨받아 파라오가 된다. 중요한 사실은 그 일에 이시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남다른 지혜를 발휘해서 태양신 라의 비밀 이름을 알아냄으로써 그가 인간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내려놓도록 한다. 현실계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이루어냄에 있어 이시스가 핵심적인 구실을 한 형국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보조자였다. 법을 제정하고 신을 모시는 것은 왕인 오시리스의 역할이었다. 이시스는 곡물의 씨앗을 모아 농사를 가르치는 등 많은 일을 해내지만 그 자리는 남성적 지배권 앞에 취약한 것이었다. 세트가 교활한 모략으로 형인 오시리스를 죽이고 파라오 자리를 찬탈함과 동시에 이시스의 자리도 사라진다. 그녀는 한순간에 이역의 습지를 전전하는 피난자 신세가 되고 만다.

세트의 폭력은 가차없는 것이었다. 그는 오시리스의 관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내버림으로써 장례를 통해 저승에 들어가는 일을 막는다. 현실계를 넘어서 우주의 질서를 훼손하는 폭거다. 이시스는 최악의 상황에서 그 역리(逆理)를 바로잡기 위해 나선다.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나무 기둥에 갇힌 남편의 시신을 찾아내지만 다시 잔혹한 폭력에 직면해야 했다. 이시스가 오시리스의 장례를 채 치르기 전에 그 시체를 조각내서 나일강에 버린 것이다. 강물속에 흩어진 조각들을 수습해서 오시리스의 장례를 치르기까지 이시스는 험난한 고난의 역정을 겪어야 했다.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허물어진 세계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역경을 거쳐야 했다. 세트는 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호루스를 죽이기 위한 공격에 나선다. 그 무자비한 공격에서 아들을 지켜내기 위한 이시스의 투쟁은 또다른 가시밭길이었다. 결국 호루스는 세트를 죽여서 그 몸을 조각내는 데 성공하거니와, 그것은 8할 이상 이시스의 분투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실질적인 역할을 이시스가 다 했지만 칼을 휘둘러 원수를 갚은 영광은 아들인 호루스에게 돌아간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남편 보조’에 이은 ‘아들 보조’다. 동양의 삼종지도(三從之道)와 겹쳐지는 면모다.

돌이켜보면 남성들이 만들어낸 영욕이었다. 형인 오시리스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할 것도, 그 자식을 죽이려 한 것도 남성이었다. 권력을 향한 자기중심적 욕망의 폭주. 영혼이 저승에 들지 못하도록 시체를 조각내는 데서 보듯, 그 칼날은 인정사정이 없다. 세트에 이어 호루스도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단순한 내편 네편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생명은 훼손되고 세계질서는 파괴된다. 어떻게든 이를 수습하고 바로잡기 위한 싸움에 나선 것은, 역경 속에 그 일을 이루어낸 것은 이시스로 표상되는 여성이었다. 참을 수 없는 부조리함!

생각하면 슬픈 서사다. 상처로 점철되었을 슬픈 투쟁의 서사. 그 투쟁이야말로 진정 영웅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오시리스도 세트도 호루스도 아닌 이시스 그대가 진짜 영웅이고 신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작은 위로나마 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스스로를 향한 허튼 위로일 것이다.

이시스 여신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나의 자기서사와 관련이 있다. 자기만족을 위한, 나의 빛나는 영광을 위한 거침없는 질주. 내 안의 ‘세트의 서사’를 제동하는 것은, 또는 수습하는 것은 늘 나의 아내였다. 감히 여신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사람. 그 힘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렇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런 생각을 무심중에 떠올리는 나는 더 혼나고 각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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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의 투쟁,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눈을 돌려 우리 신화로 돌아오면 이시스와 겹쳐지는 여신들이 여럿이다. 당금애기와 바리데기, 감은장아기, 자청비, 청정각시, 여산부인, 명월부인, 막막부인…… 그 모두에게서 이시스의 모습을 본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시스를. 우리 민간신화에서 여신의 존재성은 다른 어떤 나라 신화 이상으로 크다. 그 이야기들이 여성이 주체가 되어 전승돼왔다고 하는 사실과 무관치 않으리라.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그들 가운데 딱 한 명을 든다면 바리데기 바리공주일 것이다. 이시스 이상의 이시스라고 표현할 만한 특별한 여신이다. 바리데기의 삶은 한순간의 쉼도 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영웅적인 투쟁! 바리데기는 한국 신화의 대표적 여성영웅으로 손꼽힌다. 말 그대로 ‘여성영웅’.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억압과 요구를 끝간 데 없이 감당해야 했던 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그녀가 수행한 가장 큰 과업은 저승에서 약수를 구해와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린 일이었다. 그 다음은 약수를 지키던 남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9년간 살림을 살면서 자식들을 낳아 키운 일. 그런 그녀에게 학계에서 부여한 또 하나의 호칭은 ‘종속적 영웅’이다. 스스로 세상의 주역이 되는 대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 영웅이라는 뜻이다. 슬픈 호칭인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인 호칭이다. 이시스와 비교해 봐도 바리데기의 서사는 종속적이고 수동적인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바리는 한 나라의 공주였다. 아들을 원하던 나라에서 일곱째로 태어난 공주. 그는 딸이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버려진다. 아버지에 의해서. 멀고 험한 땅에 버려진 채로 외로움과 고통의 날을 보내던 바리가 부모를 다시 만난 것은 아버지가 병으로 누워서 죽어갈 때였다. 바리를 찾아서 저승의 약수를 구해오면 살 수 있다는 신탁을 받은 부모가 내버린 딸을 되찾아온 것이었다. 처음 딸의 얼굴을 본 아버지는 울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를 버린 죄로 나는 죽는다. 저승의 약수를 구해와야 한다는데 네가 어찌 그 일을 할 수가 있겠니.” 가서 약수를 구해오라고 하는 명령보다 더 기가 막힌 말이다. 차라리 강한 모습으로 나오면 대들기라도 해보련만……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결국 바리데기는 저승을 향해 길을 떠난다. 부모가 나를 낳아준 것만으로도 큰 은혜라는 말과 함께. 그 떠남에 대해서 나는 늘 그것이 바리 스스로의 뜻에 의한 것임을 강조해 왔다. 부모가 흘린 눈물이 진정한 사과였고 딸은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진정한 화해를 이룬 것이리라고 했다. 저승을 향하는 바리의 발걸음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한 길인 동시에 자기자신을 세우고 실현하는 몸짓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저승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준 일까지도. 일컬어 자기 초극의 구원행. 바리는 그 순간 이미 자기자신을 훌쩍 넘어서 있는 것이리라고 했다.

그믿음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바리는 부모에게 버림받아 혼자인 상태에서 끝없이 자기자신과 싸웠던 사람이고, 그 싸움을 감당해서 이겨낸 사람이었다. 그 모든 삶의 과정이 자기를 찾고 실현하는 신성의 과정이었다. 약수를 찾아 저승으로 향하는 기나긴 여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리는 길인 동시에 훼손되어 허물어진 세상을 되살리는 과정이었다. 바리의 발걸음에 의해 궂은 지옥은 허물어지고 죄인들은 극락으로 간다. 죽었던 아버지는 되살아나고 저주받은 세상은 새로운 빛을 얻는다. 그렇게 바리는 자기를 실현하고 신이 된다. 세상의 큰 빛이.

바리데기의 삶의 역정에 대해 너무나 억울하고 화가 난다고 반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위해 저승으로 가는 일이 억울하고 이해가 안 되며, 약수를 구하기 위해 남자와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아 키우는 일이, 그렇게 자기 삶을 희생하는 일이 너무나 비참하다고 한다. 그런 반응에 대해 나는 이 신화의 본령에 제대로 스며들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곤 했다. 저승으로 향하는 걸음걸음이, 또는 자식을 낳아 키운 그 일상이 신성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오늘 나는 그러한 나의 판단과 설명이 정당한 것인지 돌아본다. 오시리스나 호루스의 입장에서, 또는 세트의 자리에서 이시스를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다. 과연 나의 그러한 설명에 대해 여신은 무어라고 말할지…… 궂은 일상을 오늘도 묵묵히 감당해가고 있는 내 곁의 여신의 숨은 속마음에 과연 나는 그 끄트머리라도 닿고 있는 것인지…….

약수를 구해와서 자신을 살린 딸에게 아비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나를 살렸구나. 무엇으로 보답을 할까? 금은보화를 줄까? 아니면 이 나라의 반을 떼어줄까?” 나의 한 제자는 바리데기 신화에서 이 대목이 제일 화가 난다고 했다. ‘보상’을 언급하는 그 마음자리 속에 딸은 여전히 하나의 도구로 사유되고 있음을 정확히 간취했기 때문이리라. 나로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핵심 서사다. 양지에 있는 이와 음지에 있는 이 사이의 아득한 거리감. 나라를 다 주는 것도 아니고 ‘반을 떼어서’ 준다니……. 바리가 낳은 아들들을 안고서 좋아하는 모습은 또 어떤지. 진심이라고 믿고 싶지만, 거기 세트 이상의 세트가 비춰보이는 건 어인 일인지…….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다행히도(?) 바리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금은보화도 싫고 나라도 싫다고 딱 잘라서 말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제 갈 곳을 정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이 된다. 구원의 신이. 아버지에게 당당히 제 뜻을 밝힌 첫 장면이다. 실질적인 자기 삶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영원으로 이어질 진짜 삶의. 역설적인 것은 그가 선택한 곳이 어둡고 험한 땅 저승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저승에서 사람들의 넋을 인도하고 구원하는 오구신이 된다. 어떤 넋들인가 하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험한 넋들의. 거기가 자기 있을 자리이기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이었겠지만, 바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그곳일 수 있겠지만 그 선택은 숭고하면서도 아프다. 지금 이 순간도 지옥으로 빠질 영혼들을 구하기 위한 분투를 쉼 없이 계속해 가고 있을 바리데기 여신께 한 명의 미력한 존재로서 감히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그 곁에 저승에서 만난 남자가,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함께 한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받을 따름이다. 어느 날 내가 저승으로 갈 때, 환한 웃음으로 그분을 만날 수 있다면…….

참고로, 바리의 남편인 무장승은 저승으로 온 사람에게 길값을 받으며 길 안내를 한다. 바리가 낳은 일곱 명의 자식은 저승 시왕이 되었다고 한다. 시왕은 어머니 신의 선한 뜻을 가히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 시왕이 부리는 저승차사들도. 저승차사 강림도령이 용맹한 영웅이라지만 어찌 감히 바리와 견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우리 신화 속 최고의 영웅은 단연 바리데기 바리공주다. 여성 영웅이 아닌 진짜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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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 이시스와 바리데기를 넘어서

이시스와 바리데기는 신(神)이다. 끝없는 투쟁의 과정을 거쳐서 빛이 된 존재. 그들이 자신을 세운 과정은 세상을 살려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남성들이 독선과 욕망으로 망쳐놓은 세상은 그들에 의해 생명으로 되살아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지키고 살리는 실질적인 주인공이고 참된 영웅이다.

돌아보면 이시스나 바리데기 외에 많은 여신들이 음지에서 세상을 살린다. 삼신 당금애기와 조왕신 여산부인이 그렇고, 막막부인이나 명월부인이 그렇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일까? 하지만 여신은 그렇게 남성의 그림자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 바리데기 여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은 진정 저승인 것일까? 여성이 ‘나’가 아닌 딸로서, 아내와 어머니로서 살아야 했던 긴 세월 동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신화의 주인공이라 해도 그러한 현실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지 모른다.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아니, 꼭 그렇지는 않다! 그 시절 그 상황에서도 사회의 벽과 부딪쳐 싸우면서 새길을 냈던 이들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경우 아틀란타에 앞서 아테네와 아르테미스가 있었다. 자신의 욕망에 거침없었던 아프로디테도 그렇게 길을 낸 것일 수 있다. 아폴론의 손길을 끝내 거부했던 다프네도. 우리 신화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권력에 복종치 않고 제 길을 찾아낸 감은장아기가 있고, 넓은 세상으로 치고 나아가 갖은 편견에 맞서 분투한 끝에 농사의 신 자리를 차지한 당당한 영웅 자청비가 있다.

차별과 억압의 벽이 없는 세상이란 없다. 인간의 숙명이다. 거기 맞서 싸워야 하는 것도! 우리 사는 지금 이 세상에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벽들이 있다. 어쩌면 과거보다도 더 강고한. 나의 딸들이 살아갈 세상에 더이상 ‘여성영웅’이라는 말이, 또는 ‘여신’이라는 말이 필요없어지기를! 그냥 사람이고 영웅이며 신(神)일 수 있기를! 과연 그런 날이 올지 확실치 않지만 다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의 시작은 언제나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

신동흔 /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한국문학치료학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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