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흔 치유적 신화 10

미궁 속의 반인반수, 내면 괴물과의 결전

 테세우스 영웅서사 새로 읽기
사진 한겨레 휴심정 제공

아테네의 최고 영웅? 아니 그 이상!

세계 신화를 말할 때 그리스 신화를 빼놓을 수 없고, 그리스 신화를 말할 때 영웅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중에도 딱 둘을 꼽는다면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일 것이다. 좀더 유명하기로는 헤라클레스겠지만, 서사의 굴곡과 의미 면에서 테세우스의 인생역정에서 받는 특별한 이끌림이 있다.

테세스는 아테네 최고의 영웅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의 아들로서 이역에서 태어나 성장한 뒤 수많은 악당들을 보란 듯이 제압하고서 아테네로 귀환한다. 그리고 아테네 청년들을 제물로 잡아먹던 황소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찾아가 죽이는 데 성공하고 아테네의 왕이 된다. 아테네 국가영웅 내지 종족영웅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 관심사는 역사적 영웅으로서의 면모는 아니다. 테세우스의 서사에 담겨 있는 더 보편적이고 심층적인 의미요소에 주목하게 된다. 핵심은 그가 크레타 섬 미노스의 미궁 속에서 펼친 반인반수 괴물과의 결전이다. 그 싸움이 특정 시공간을 넘어서 우리 모두의 인생투쟁에 해당하는 무엇일 수 있음을 본다.

그 발견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칩거하다 보니 시나브로 심신이 잦아들며 일차원적 본능의 포로가 되어갔다. 먹고 자고 싸고 TV 스마트폰…… 또 먹고 자고 스마트폰…… 휴식과 충전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내적 실체는 극히 동물적인 일상이었다. 여러 날 만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완연한 미로 속이었다. 하염없이 올레길을 걷고 한라산을 오르던 시간과의 아득한 거리! 그때 문득 미노타우로스가 찾아왔다. 나의 자기서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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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괴물 미노타우로스는 어떻게 생겨났나

미노타우로스는 신화에 등장하는 최악의 괴물 중 하나일 것이다. 몸은 인간이되 머리는 황소인 반인반수의 흉한 모습과 난폭한 성질도 그렇지만, 생겨난 내력이 더욱 끔찍하다. 그는 한 여인이 황소와 정을 통해서 낳은 자식이었다. 황소에 혹해서 스스로 암소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은 여인은 한 나라의 왕비였다. 당연히 남편이 있는.

크레타 섬의 미노스는 큰 세력을 지닌 강한 왕이었다. 어느 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미노스로 하여금 아름다운 소를 얻게 한 뒤 그것을 자신에게 제물로 바치도록 한다. 하지만 소를 욕심낸 미노스는 신을 속이고 다른 소를 바친다. 그러자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를 소에게 혹하게 만든다. 소와 관계를 맺기 위해 안달하던 파시파에는 최고 기술자 다이달로스가 만든 가짜 암소 속에 들어가서 원하던 바를 성취한다. 그 동물적 교접의 결과로 반인반수의 끔찍한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탄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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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자체로 엽기 막장이거니와, 의미상으로 보면 더 무섭다. 왜냐하면 그 내적 맥락이 너무나 현실적이므로.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범람한 욕망이 만든 산물이다. 미노스왕의 소유욕과 파시파에의 성욕, 다이달로스의 지배욕이 거짓과 술수를 동반하면서 맞물려 합쳐진 상황이다. 그렇게 탄생한 괴물이 욕망의 덩어리로서 정체성을 지님은 당연한 결과가 된다. 어떤 욕망이냐면 제어 불가능한 뒤틀린 욕망! 그런 욕망의 존재는 우리 사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미노스의 소는 원래 신이 전해준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세상의 모든 동물은 하늘이 낸 고귀한 생명이니 신의 선물인 터다. 인간의 소중한 동반자인 소는 더욱 그러하다. 문제는 그것이 신적 순리에 반하는 소유적 욕망의 대상이 될 때다. 그 극단에 소와 교접하려 한 파시파에가 있지만, 미노스 왕이나 다이달로스의 일도 명백히 역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신화는 바다의 신이 분노해서 파시파에로 하여금 소에게 혹하게 했다고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검은 욕망의 포로가 돼버린 상황을 그리 표현한 것이라고 봄이 옳다. 일컬어 흑화(黑化). 한 인간이 욕망에 사로잡혀 귀(鬼)나 물(物)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얼마나 흔한 일인지…… 그 전락의 속도는 얼마나 걷잡기 어려운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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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괴물 미노타우로스는 동물적으로 뒤틀린 인간의 신화적 상징이다. 한 마리 짐승이 되어서 식식대면서 날뛰는 존재. 그 짐승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깊은 미궁 속에 들어 있다. 다이달로스로 표상되는 교묘한 기술이 그를 보이지 않게 깊이 가둔 상태다. 하지만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음으로 해서 더 거침없고 위험한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인간의 내면이라는 깊고 어두운 미궁 속에서 검은 눈을 번득이고 있다가 먹잇감이 보이면 가차없이 덤벼드는 괴물. 이 괴물을 어찌할 것인가.

테세우스는 어떻게 괴물을 물리쳤나

신화는 아테네의 많은 청춘남녀들이 미노타우로스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한다. 한번 걸리면 벗어날 방법이 없다. 그 괴물이 워낙 무섭다는 사실 외에 한번 미궁에 빠져들면 돌아나올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본래 그러하다. 빠져들기는 쉽지만 헤어나기는 어려운 찐득한 늪…….

괴물 더하기 미궁. 실패로 예정되어 있는 그 싸움을 보란 듯이 승리로 장식한 인물이 우리의 영웅 테세우스다. 그는 라비린토스 깊은 곳을 찾아들어가서 미노타우로스를 맨손으로 때려죽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유유히 귀환한다. 그는 어찌 그리할 수 있었던 걸까?

먼저 테세우스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괴물을 찾아갔다는 데 주목하게 된다. 그는 처음부터 괴물을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다른 남녀들이 희생물이 되어서 보내진 것과 다르다. 그러니까 그는 욕망의 포로가 된 존재가 아니라 욕망을 지배하러 나선 존재에 해당한다. 주체적 의지와 신념, 그리고 투쟁심과 행동력으로. 그가 미궁과 괴물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던 바탕이다.

생각을 좀더 진전시켜 보자면 테세우스 자체를 미노타우로스가 표상하는 본능적이고 파괴적인 욕망의 대척점에 놓이는 냉철한 이성과 의지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안의 미노타우로스’에 대한 ‘우리 안의 테세우스’가 되겠다.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의 싸움이 우리 내면의 싸움, 또는 자기자신과의 싸움에 해당하는 무엇이라는 뜻이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무엇보다 크고 어려운 싸움. 그 싸움을 이겨냈으니 과연 영웅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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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테세우스는 자기 힘만으로 미노타우로스를 제압한 것이 아니었다. 한 명의 특별한 조력자가 있었으니 아리아드네가 그 사람이다. 미노스의 딸로서 테세우스를 사랑하게 된 아리아드네는 미궁으로 들어가는 정인에게 실타래를 전해준다. 실 줄기를 따라서 움직임으로써 테세우스는 미궁에서 길을 찾아 나올 수 있었으니 결정적인 도움이었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에 대해 몇 가지 해석을 해볼 수 있다. 먼저 그것이 이성의 끈이라는 것. 내면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는 무엇이다. 다음은 입구로부터 이어진 실이 하나의 ‘역사’라는 것. 문학치료 식으로 말하면 ‘서사’가 된다. 자신의 서사의 길을 따라 움직임으로 해서 본디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상황이다. 한편으로 그 실타래를 ‘인연’이나 ‘사랑’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신화에서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관계는 본능적 욕망보다 인간적 연결과 합력에 가까운 것으로 표현된다. 괴물 미노타우로스와의 대척점에서 맺어진 관계이니 이를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동물적 욕망을 이겨내는 힘은 인간적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 역설적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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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그렇게 테세우스는 황소괴물을 죽이고 미궁에 길을 낸다. 그렇게 낸 길은 하나의 새로운 서사가 된다. 어떤 서사냐면, 치유와 극복의 서사. 그리고 신성의 서사. 우리는 이를 신화(神話)라 부른다. 도전과 투쟁을 통한 극복의 서사이니 영웅신화!

미궁에 갇힌 또 다른 사내들

헤아려보면 우리 마음속의 길은 참으로 복잡다단하다. 미궁이라는 말이 꼭 어울린다. 고정된 미궁이 아니라 계속 움직여 바뀌는 끝 모를 미궁. 그 미궁을 이루는 길의 8할이 욕망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아니, 9할 이상일지도 모른다.

한국 민간신화의 주인공들 가운데 욕망의 미궁에 갇힌 이들이 있다. 특별히 무인도 섬에서 존재적 방황과 절멸을 경험하는 안심국과 궁산이가 마음에 떠오른다. 안심국은 한 나라 왕자로, 궁산이는 한 고을 젊은 선비로 문제없이 잘 살던 사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순간 절해고도 무인도에 던져진다. 신화는 그들이 누군가에 의해 보내진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 그들은 스스로 제 존재를 유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뿌리는 역시나 욕망이었다. 안심국은 한 여자와 결혼한 뒤 남편의 책무를 외면하고 밖으로 나돌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무인도 황토섬에 갇힌다. 그가 황토섬을 속절없이 몇년간 배회한 결과는 온몸에 털이 나서 한 마리 짐승처럼 된 일이었다. 세상의 기린아와 황토섬의 짐승 사이. 그건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스스로 검은 욕망의 미궁에 찾아 들어간 상황에서 존재적 전락은 정해진 코스였다고 보아도 좋다.

궁산이는 상대적으로 순박한 사람이었으나 역시 욕망의 함정을 피하지 못한다. 그는 유혹을 이겨내기에 너무 나약했다. 교활한 악인이 꾀어서 휘둘렀다지만, 노름놀이에 혹해서 아내까지 걸었다가 빼앗긴 것은 그 자신이 한 일이었다. 통제가 안 되는 안일함과 유아적 욕망. 그 결과는 절해고도에서 외로움과 굶주림에 잦아져가는 너절한 몸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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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궁에는 어떻게든 출구가 있는 법일까? 절망의 끝자락에서 안심국과 궁산이는 가까스로 길을 찾아낸다. 그 바탕은 뼈저린 후회와 반성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욕망의 남용을 좌시하지 않았던 것처럼, 신은 그 발버둥을 외면하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무인도를 벗어나 다시 아내 곁에 선 두 사람, 신이 된다. 엉뚱한 비약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그들이니 그 또한 영웅이라고 여긴다. 자기 안의 괴물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그 괴물이 어떠한가를 떠나서 언제라도 가볍지 않은 일이다. 뼈아픈 성찰은 용맹한 투쟁 못지않게 큰 무엇일 수 있다.

쉼 없이 이어가야 할 싸움

다시 테세우스로 돌아와서, 그 용맹한 투쟁과 승리의 뒷자락을 살펴본다. 그 뒤를 이은 것은 뜻밖에도 크나큰 영광과 성취 쪽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테세우스는 미궁을 나온 뒤 싸움의 결정적 조력자였던 아리아드네와의 접속에 실패한다. 특별히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이유로 아리아드네의 손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운명의 길로 흘러간다. 서사의 단절. 그렇게 테세우스는 실타래를 놓친다. 이성(理性)의 실타래, 또는 사랑의 실타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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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가 놓아버린 이성 또는 인연의 끈은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진다. 결전에서 승리하면 흰 깃발을 달고 오겠다던 약조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아버지 아이게우스가 비탄 속에 자결한다. 테세우스는 아테네 왕이 되지만 문제는 끊이지 않는다. 그의 두번째 아내 파이드라가 첫 아내 안티오페의 아들 히폴리토스를 욕망하다가 자살하고, 히폴리토스도 아버지의 저주 속에 죽어버린다. 테세우스의 결말 또한 허무한 비극이었다. 스파르타의 어린 공주 헬레네를 납치했다가 반격을 자초해 몰락해간 끝에 벼랑에서 쓰라린 최후를 맞이한다. 크레타의 미궁 라비린토스에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일 때의 그 드높던 기세는 간 곳이 없다.

왜 서사가 이렇게 흘러가는 걸까? 역사적 측면을 떠나 심리적 상징으로 풀이해보자면, 그는 진정한 라비린토스가 자기 안에 있음을 몰랐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리아드네의 손을 놓으면서 그는 라비린토스에 갇히기 시작한다. 자식을 저주해서 죽게 할 때의 그는, 또는 헬레네를 납치할 때의 그는 더이상 테세우스가 아니다. 한 마리 괴물짐승 미노타우로스일 따름이다.

내 안의 욕망과의 싸움이란 이렇게 힘든 법이다. 눈에 보이는 크고 중요한 과업 앞에 설 때는 오히려 문제가 아니다. 거기 집중해서 힘을 낼 터이므로. 정말 어렵고 중요한 것은 사소한 일상이다. 일상 속의 소홀함과 범람함이 시나브로 존재를 갉아먹어 결정적으로 무너뜨린다. 테세우스의 비극적 죽음이 미노타우로스의 저주였다고 하면 지나친 일일까? 어떻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미노타우로스는 어딘가에 늘 도사리고 있다고. 죽어도 새로 살아나게 되어 있다고. 그와의 싸움은 평생을 걸쳐 이어가야 할 존재적 숙명이다.

한국 신화 속의 두 사내 안심국과 궁산이는 신이 되었다고 했다. 테세우스보다 약하고 초라한 존재였음을 생각하면 반전적인 결과다. 어쩌면 그 자신 초라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 초라함과 한계를 뼈아프게 느끼며 좌절했기 때문에 미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테세우스와 달리 그들이 자신의 아리아드네에게로 와서, 계화씨와 명월부인에게로 와서 손을 잡은 일도 빼놓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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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외면하고 소외시켰던 아내 계화씨 곁으로 돌아온 안심국이 받은 신직은 가신(家神)이다. 그의 별호는 다름 아닌 ‘성조씨’다. 일컬어 성주신! 집의 대들보에 깃드는, 가정의 대들보 구실을 하는 신이다. 성조씨 안심국을 통해서 내가 움직여 써나가야 할 영웅서사의 길을 본다. 일상적인. 크고도 어려운.

신동흔 /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한국문학치료학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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