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흔의 치유적 신화 4

홍수를 부르는 세상, 우리의 방주는 어디에 있나

홍수 신화와 죽음의 통과의례

사진 : 한겨레 휴심정 제공

흔들리는 세계질서에 대한 특단 조치 , 물바다 !

지난 글에서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창세신화가 태초에 수행된 창조의 불완전성에 대해 전하고 있다고 했다 . 모순과 부조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 .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속한 세계의 본원적 숙명이라 할 수 있다 . 대극을 이루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 얽히는 가운데 쉼없이 역동하는 천변만화의 세상 . 하염없이 부딪치고 부대끼면서 나를 살릴 무언가를 찾아 움직여야 하는 것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운명이다 .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 또는 죽어가는 것이 이승 속 인간의 길이다 .

간단없는 생명적 부대낌은 공생의 조화나 평화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 큰 파열음과 함께 파탄으로 치닫는 경우가 더 많다 . 갈등과 쟁투가 극으로 치달아 세계 질서를 위협할 때 ,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선을 넘어설 때 , 신 ( 神 ) 이 움직인다 . 최고 신이 나서서 특단의 조치로 세상을 정리한다 . 그것은 불바다나 눈보라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 가장 일반적인 것은 ‘ 물바다 ’ 다 . 일컬어 대홍수 . 온세상이 물에 휩쓸려 잠들면서 기존의 세계는 닫히고 새 세계가 열린다 . 이러한 갱신과 재창조 과정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창조신화의 서사적 정형이다 .

다른 신화소들이 그렇듯이 대홍수는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을 반영한 것인 한편으로 심리적 상징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 나의 온 존재를 잠가서 사멸시키는 대홍수 ! 하지만 그 전면적인 재앙 속에도 길은 있으니 ‘ 방주 ( 方舟 )’ 가 그것이다 .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방주를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 방주 안에서 , 또는 ‘ 설국열차 ’ 안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

홍수 신화의 오랜 역사와 세계적 보편성

세상을 휩쓴 대홍수에 대한 서사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구약의 창세기일 것이다 . 일컬어 ‘ 노아의 방주 ’. 전능한 신 야훼가 사람들의 무도한 악행에 질려서 세상의 유일한 의인이었던 노아의 가족만 남기고 온세상을 홍수로 휩쓸었다는 그 이야기다 . 노아는 야훼의 계시로 거대한 방주를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감으로써 홍수로 잠긴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다 . 생명을 가진 모든 길짐승 날짐승의 최소 쌍들과 함께 . 장장 사십 일 동안 이어진 홍수로 온 세상은 깨끗이 씻긴다 .

사진 : 한겨레 휴심정 제공

하지만 창세기의 홍수 신화는 최초의 것이 아니었다 . 그에 앞선 수메르 신화에도 대홍수의 서사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 . 인간들의 시끄러운 불평이 문제였다 . 분노한 최고신 엔릴은 세상을 홍수로 휩쓴다 . 인간을 아꼈던 신 엔키의 계시로 미리 커다란 배를 준비했던 지우쑤드라만 살아남아 영생을 얻게 된다 . 그 내용은 바빌론 신화 속 우트나피스팀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 거대한 방주 속에 든 우트나피스팀 일행을 제외한 온 세상은 홍수에 휩쓸려 진흙으로 돌아간다 . 태초의 원상태로 .

그리스 신화에도 대홍수 서사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 인간의 타락과 불경에 대한 제우스의 분노에 따른 것이었다 . 제우스가 포세이돈을 시켜 세상을 휩쓸게 한 물바다의 재앙에서 살아남은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의 계시를 받은 데우칼리온과 퓌라 부부뿐이었다 . 흥미로운 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인류 재탄생의 서사다 . 두 사람은 ‘ 어머니의 뼈 ’ 를 등 뒤로 던져서 신인류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 대지 ( 大地 ) 라는 큰 어머니의 뼈인 돌덩이들을 던져서 . 처음 프로메테우스에 의해 진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인간이 이번에는 돌덩이로 만들어진 상황이다 . 진흙보다 돌이 더 순박하다는 뜻일까 ?

사진 : 한겨레 휴심정 제공

동양의 신화에도 대홍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 인도 신화에는 마누가 물고기로 변한 비슈누 신 덕분에 홍수에서 홀로 살아남은 사연이 전해온다 . 다만 그 재난이 인간의 악행 때문이었던 것으로 명시되지는 않는 것이 특징이다 . 이는 중국의 홍수신화도 마찬가지다 . 한족 외에 좡족이나 먀오족 같은 소수민족의 구비전승에 다양한 홍수 신화가 전해지는데 , 대홍수가 물의 신 공공 ( 共工 ) 이나 우레신 같은 사나운 신의 발호에 의해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 인류의 삶을 뒤흔든 예기치 않은 자연재난에 가까운 형국이다 . 특징적인 것은 그 홍수에서 어느 남매만이 조롱박 속에 들어서 살아났고 , 둘의 결혼에 의해 새 인류가 탄생했다고 말해진다는 사실이다 . 일컬어 ‘ 남매혼 ’ 이거니와 , 그 신화적 의미가 만만치 않다 . 하늘의 뜻에 따른 신성한 결합으로 말해지는 한편으로 , 그 결혼을 통해 둥그런 살덩어리나 커다란 호박 같은 기형적 존재가 태어났다고도 한다 . 세계의 갱신과 인류의 재탄생에 빛과 그림자가 함께 한 상황이다 .

세상을 휩쓴 대홍수와 죽음 속에서 새로 태어난 인류 . 그것은 구원일까 , 아니면 재앙일까 ?

대홍수 , 재앙과 구원 사이

세상을 휩쓴 대홍수와 수많은 생명의 몰살은 그 자체로 크나큰 재앙이다 . 더구나 그 재앙을 신들이 멋대로 일으킨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 중국 신화를 두고 한 얘기지만 , 꼭 그것만은 아니다 . 수메르나 히브리 , 그리스 등에서 인간의 불경에 대한 신의 분노를 말하고 있거니와 , 그 분노와 징벌은 충분히 정당한 것인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 인간이 아닌 신의 입장에서 부린 일방적 권세나 횡포가 아니냐는 것이다 . 신이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인간은 약자일 수밖에 없다 . 어떻게든 스스로를 지키며 살길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인간에게 대홍수나 쓰나미 , 태풍과 한파 등을 앙갚음으로 안기는 일이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지 …… .

하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 인간만이 주인일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인류가 자신만의 욕심에 의해 어떻게 ‘ 선 ( 線 )’ 을 넘어버리는지를 . 그리하여 세계를 결정적인 혼란과 위기에 몰아넣는지를 .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동물은 거의 예외없이 인간이다 . 인간이 유아독존의 독선과 무소불위의 오만으로 날뛸 때 , 신의 징벌은 엄밀한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보일 수 있다 . 그 오만의 귀결이 인간과 세계의 공멸이라고 할 때 , 홍수를 통한 씻김과 갱신은 하나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인류는 완연한 괴물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 아니 , 괴물로 존재할 세상 자체가 무너져 사라진 상태일지도 모른다 .

사진 : 한겨레 휴심정 제공

인간과 세계 , 또는 문명과 자연이라는 관계로 사유할 때 이 화두에 대한 답은 재앙 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 . 인간을 비롯한 뭇 생명이 대홍수에 휩쓸려 비명 속에 몰살하는 모습을 두고서 구원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하지만 이를 심리적 상징 차원에서 볼 때는 , ‘ 자기서사 ’ 차원에서 볼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 욕망과 갈등 속에서 나의 존재가 스스로 허물어져 간다면 , 턱없는 오만이 신 ( 神 ) 으로 표상되는 본원적 규준을 깨고 폭주한다면 ,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재앙일 것이다 . 그때 필요한 것은 , 홍수다 . 가없는 물바다 속에 까뭇 잠겨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 그를 통해 거듭나는 것이 구원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다 . 일컬어 ‘ 죽음의 통과의례 ’ 다 . 나의 존재가 부조리로 가득할 때 , 나는 죽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 .

홍수신화 속의 인간은 방주 속에서 , 또는 조롱박 속에서 긴 잠행의 시간을 거친 뒤 되살아났다고 한다 . 바깥은 온통 물바다 . 거기 떠서 흔들리는 방주나 조롱박에는 어떤 작은 구멍도 없었다고 한다 . 죽음과도 같은 깜깜한 감옥이다 . 일컬어 , 연옥 ( 煉獄 )! 그 시간이 아득히 이어진 끝에 그는 마침내 되살아난 것이었다 . 신을 경배하는 존재로 . 말하자면 그 홍수는 태초의 물이며 , 방주는 태초의 알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렇게 본래의 자기로 아득히 돌아감으로써 그는 갸륵한 새 생명으로 , 영원의 존재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렇다면 이는 진정한 축복이고 구원인 것 아닐까 ?

그것은 먼 옛날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 다름아닌 나 자신 ,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 독선과 오만으로 , 배타적 욕망으로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나 . 홍수를 부르고 있는 중이다 . 그런 나에게 필요한 것은 ? 바로 ‘ 방주의 서사 ’ 다 . 홍수가 이미 밀어닥친 상태에서 깜깜한 방주의 시간을 갖는 것은 최선의 길일 수 없다 . 스스로 방주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 깊은 침잠과 재탄생의 시간을 거침으로써 재난의 도래를 막고 평화를 지켜가는 것이 최선이다 . 시늉으로는 안된다 . 진정한 성찰이고 거듭남이어야 한다 . 저 위에서 , 이 안에서 신 ( 神 ) 이 지켜보고 있다 . 피할 길 바이 없는 형형한 두 눈으로 !

미완의 통과의례와 현 세상의 두 길

한국 신화로 오기까지 길이 멀었다 . 한국에 홍수 신화가 있느냐면 , 물론 그렇다 . 엄밀히 말하면 ‘ 신화적 서사 ’ 들이다 . 홍수신화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 전설과 민담의 형태로 전해왔다 . 먼저 백두산 지역 전설 . 천지 ( 天池 ) 에 대홍수가 발생하자 했을 때 여와의 증손녀가 내려와 바윗돌로 물을 막은 뒤 돌바늘로 기워서 물을 막았다고 한다 . 다음 , 대홍수 전설 . 온세상이 큰물에 잠겨서 모두가 죽었을 때 단둘이 살아남은 남매가 하늘의 뜻을 물어서 서로 결혼한 뒤 자식을 낳아 새로운 인류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 둘 다 동아시아 홍수신화의 맥락 안에 드는 이야기들이다 .

사진 : 한겨레 휴심정 제공

한국의 가장 인상적인 대홍수 서사는 특이하게도 민담 속에 있으니 < 나무도령 ( 목도령 )> 이야기가 그것이다 . 이 설화는 구전으로 널리 전해져 온 것인데 , 타락한 세상을 주요 배경으로 삼는 것이 특징이다 . 제 욕심으로 꽉 찬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 이야기는 그 모든 사람들이 죽어서 사라졌어야 하는 것으로 말한다 . 단 한 사람 , 나무의 아들로서 본래의 자연성을 지키고 있었던 나무도령을 제외하고서 . 세상은 대홍수로 온통 잠겨버리고 나무도령만이 아버지 나무에 올라타 살아남는다 . 그것이 신의 선택이었다 .

하지만 신의 계획은 어긋나버린다 . 아버지 목신 ( 木神 ) 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무도령은 물에 휩쓸려 죽어가던 한 소년을 건져서 나무 위에 올린다 . 그리고 그 소년은 자기를 살려준 나무도령을 보란 듯이 배반한다 . 그를 어떻게든 꺾어 누르고 자기가 세상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 나무도령은 소년의 모략과 폭력을 이겨내고 제 자리를 지키지만 , 소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 나무도령과 함께 인류의 또 다른 조상이 된다 . 지금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은 나무도령의 후손이기도 하고 , 소년의 후손이기도 하다 .

사진 : 한겨레 휴심정 제공

< 나무도령 > 은 신화가 아닌 민담으로 전해온다 . 그것은 이 이야기가 신화라 하기에는 불완전한 미완의 상태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홍수에 의한 씻음과 재창조가 오롯이 완수되지 않은 상황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 재앙을 가져온 욕망과 배반의 삶은 이야기 속에서 현재진행형이다 . 우리가 현실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그대로다 .

매우 신화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기도 한 이 이야기에 대해 나는 이를 또한 자기서사로 사유한다 . 불완전한 갱신은 곧 나의 일이다 . 내 안에 나무도령과 배반의 소년이 공존한다 . 스스로 소년을 건져서 살려두었기 때문이다 . 온전히 나 자신을 죽여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숙명이라 할 수도 있겠다 . 문제는 배반의 소년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 내 안의 나무도령이 자칫 종적을 잃어버릴 상황이다 . 그 결과가 무엇인가 하면 이전보다 더 큰 홍수일 것이다 . 회복 불가능한 진짜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 방주의 시간이 필요하다 . 그 태초의 시간 속에서 내 안의 나무도령을 , 내 안의 신을 찾아야 한다 . 그가 내 삶의 오롯한 주인이 되도록 해야 한다 .

홍수 신화 , 그 완성을 향하여

< 나무도령 > 을 일컬어 미완의 신화라 했지만 , 살펴보면 그만이 아니다 . 세계의 다른 홍수신화들 또한 그 서사가 완성된 상태라고 하기 어렵다 . 수메르나 바빌론 신화에서 인간이 살아난 것은 신의 본래 계획과 달라진 결과였다 . 그리스 신화에서 던져진 돌덩이로부터 다시 태어난 인류는 완전한 존재라 하기 어렵다 . 중국 소수민족 신화에서 기괴한 살덩이나 호박으로부터 생겨난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 그들은 자연적이고 소박한 존재지만 신 ( 神 ) 과 거리가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 히브리 창세기나 인도 신화에서는 인류 재탄생이 훌륭히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 그 또한 완전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 ‘ 의인 ’ 이었다고 하는 그들의 후손은 과연 오늘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 나무도령의 서사는 소년의 서사를 이기고 있는가 하는 서사적 질문 앞에서 말 [ 言 ] 은 자꾸만 길을 잃는다 .

사진 : 한겨레 휴심정 제공

결국 신화를 완성해 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 대지진과 쓰나미 , 태풍과 홍수 , 살인적 폭염과 한파 , 세상을 휩쓸고 있는 감염병 …… 어쩌면 지금 인류는 거대한 홍수의 물결 속에 접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 과연 우리한테 방주는 있는 것인지 . 인간의 지능과 문명은 우리를 살릴 방주 구실을 할 수 있을지 …… 진짜 문제는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임을 말하고 싶다 . 만약 우리가 탄 방주가 광기로 가득한 ‘ 설국열차 ’ 가 돼버린다면 , 항로를 이탈한 채 구멍이 나버린다면 , 더이상 돌아갈 곳은 없을지 모른다 . 신들의 경고는 이미 충분히 주어진 상태다 . 선택은 , 우리의 몫이다 . 나의 몫이다 .

이 한밤 , 마음속 심연으로부터 큰물을 길어올려서 나 자신을 까뭇 죽여본다 . 죽지 않기 위하여 .

혁명은 있어야겠다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썩고 병든 것들을 뿌리째 뽑고

너절한 쓰레기며 누더기 따위 한파람에 몰아다가

서해바다에 갖다 처박는

보아라 , 저 엄청난 힘을 .

온갖 자질구레한 싸움질과 야비한 음모로 얼룩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벌판을

검붉은 빛깔 하나로 뒤덮는

들어보아라 , 저 크고 높은 통곡을 .

– 신경림 시 < 홍수 > 에서

신동흔 (건국대 국문과 교수 & 한국문학치료학회회장)

이 시리즈는 한겨레신문 휴심정과 함께합니다.

사진 : 한겨레 신문 휴심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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