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흔의 치유적 신화읽기 3

태초에 신과 신, 나와 나의 싸움이 있었다

세상 차지 경쟁 신화의 존재론적 의미

테초 세계의 대극. 영원한 싸움을 낳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 세상은 어떻게 존재했던가. 우리는 이미 그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형체도 없는 원생명을 품은 거대한 알, 하늘과 땅 그리고 빛은 안에 품은 채 물결치는 아득한 어둠의 바다. 나는 이를 일컬어 인간의 존재적 뿌리이고 바탕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거기 대극(對極)이 있었다. 독액의 강과 춥고 탁한 안개의 땅 니플헤임과 용암의 열기로 바위가 녹아내리는 불의 땅 무스펠하임으로 표상되는. 또는 음(陰)과 양(陽)으로, 천(天)과 지(地)로 표상되는. 이 세상은 그 상반된 힘의 부딪침과 어울림 속에서 존재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도. 내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에 땅이 있어서 그 대극의 힘 속에 나는 존재한다. 내 안에 하늘이 있고 땅이 있다. 나는 하늘인 동시에 땅이며, 하늘도 땅도 아닌 그 무엇이다.

그 서로 다른 힘은 어떻게 작용할까? 평화로운 어울림이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들은 본래 성질이 전혀 다르다. 그들은 끊임없이 엇갈리고 부딪치며 소용돌이를 낳고 폭풍우와 천둥번개를 일으킨다. 이 세상은, 그리고 우리는 어느 한 순간도 그 부딪침의 격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평화와 조화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일 따름이다. 당장 오늘도 눈을 뜨는 순간, 삶의 전쟁터로 나아가야 하지 않는가.

전 세계와 인류가 감당해야 하는 가없는 싸움의 시초에, 내가 일시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적 투쟁의 뿌리에 태초의 싸움이 있었다. 신과 신 사이의. 세상의 명운(命運), 또는 역사(歷史)를 좌우하게 된.

브라흐마와 비슈누, 시바. 그리고 세 개의 나.

태초의 대극은 갈라졌고, 부딪쳤다. 그렇게 세상은 생겨났고, 역동했다. 신화는 그 갈라진 기운을, 그리고 그들이 펼쳐내는 역동을 신(神)으로 표현한다. 서로 다른 신들로. 만들어내는 신이 있는가 하면 파괴하는 신이 있다. 지키는 신이 있는가 하면, 흔들어 뒤집는 신이 있다. 파괴하고 뒤집는 신은 흔히 악마(惡魔)나 악귀(惡鬼)로 불린다. 또는 마귀(魔鬼)로도.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면서 벗어나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존재하던 본래적인 힘이다. 영원에서 시작됐고 영원으로 이어질. 그 또한 신(神)이다.

그 신적 역학관계를 인도신화에서 원형적으로 볼 수 있다. 힌두신화에서 세상의 본바탕을 상징하는 삼주신(三主神)은 브라흐마(Brahma)와 비슈누(Vishnu)와 시바(Shiva)다. 각각 창조의 신과 유지의 신, 파괴의 신으로 설명되는 신들이다. 이 중 시원적 바탕이 되는 존재는 비슈누다. 비슈누의 배꼽에서 브라흐마가 나오고, 이마에서 시바가 탄생했다고 한다. 둘은 서로 다른 대극의 작용을 한다. 브라흐마가 만들어낸 만유를 시바가 나서서 파괴한다. 네 개의 얼굴과 여덟 개의 팔로써. 시바는 파괴의 신인 동시에, 물질의 신이고 욕망의 신이다. 그는 모든 것에 위력을 미치면서 그것을 뒤흔들고 깨뜨린다. 그렇게 세상은 끝없이, 변화한다.

창조는 어렵지만 파괴는 쉽다. 시바의 강력한 위력에 브라흐마는 빛을 잃는다. 숨듯이 뒤로 물러난다. 파괴로부터 세상을 지키고 재생하는 것은 비슈누의 역할이다. 시바를 포함해 모든 것의 바탕이었던 큰 힘. 하지만 그가 시바의 위력을 제어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는 시바와 같이 네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팔은 네 개뿐이다. 전방위로 진행되는 파괴 속에서 본래의 생명적 질서를 지키고 되살리기 위해 지금도 분주할 비슈누의 네 팔……. 그것이 오롯이 힘을 내기를 바랄 따름이다. 브라흐마가 함께 제 몫을 해서. 그를 통해 시바의 파괴가 파멸이 아닌 발전적 창조로 이어지기를! 변증법적인.

비슈누와 브라흐마와 시바,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세계 모든 곳에 있다. 그들이 곧 세계다. 그리고 그들은 내 안에 있다. 내가 곧 브라흐마이고 시바이며 비슈누다. 끝없이 이어지는 창조과 파괴와 재생의 역동. 오늘도 내 안에서는 원초적인 생명적 빅뱅이 속속 펼쳐진다.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눈을 감고 돌아본다. 지금 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나를 조종하며 지배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비슈누인가 브라흐마인가 시바인가. 답은 나와 있다. 그것은 시바(Shiva)다. 일컬어, 물신(物神)의 세상. 가없는 욕망의 물결 속에서 오늘도 시바는 검푸른 얼굴에 혀를 내민 채로 여덟 개의 팔을 흔들며 폭주한다. 과연 내 안의 비슈누는 그것을 제어할 수 있을까? 내 안의 브라흐마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을까? 삼위일체의 생명적 조화를, 나는 마침내 이루어낼 수 있을까?

오시리스에서 세트로, 티탄족에서 올림푸스 신으로. 그리고

대극에서 출발한 신과 신. 그들의 상관관계를 서양 신화는 서로 죽고 죽이는 투쟁으로 표현하곤 한다. 수메르신화가 그러하며, 이집트나 그리스 신화도 그렇다. 히브리와 북유럽 신화도. 끝없는 투쟁의 역사. 그렇게 움직여온 것이, 앞으로도 그리 움직여 나갈 것이 이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집트 신화에서 태초의 세계는 고요한 평화였다. 어둡고 쓸쓸한 태초의 바다. 그 속에 깃들어 있던 큰 신 눈(Nun)으로부터 태양신 레(라; Ra)가 눈을 뜨고 그 자손인 땅의 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가 짝을 지으면서 세상에는 생명이 약동한다. 그 생명적 주재자는 슬기롭고 선한 신 오시리스였다. 오시리스가 주재하는 세상은 평화로웠고, 문명은 순조롭게 발전해갔다. 하지만 그 질서는 세트의 등장으로 뒤흔들린다. 욕망과 질투, 그리고 전쟁의 신. 그의 교활한 계략으로 오시리스는 관 속에 갇히고, 잠시 나무에 깃들었다가 열네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긴다. 그렇게 이어진 세트의 세상. 신화는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가 세트를 똑같이 찢어서 죽였다고 하지만, 그를 통해 본래의 평화는 돌아왔을까? 그럴 리 없다. 호루스가 행한 일은 세트와 꼭 닮은 또 하나의 폭력이었다. 그리고 세트는 사라지지 않는다. 독사가 되어 홍수를 일으킨다. 그에 대한 호루스의 재반격…… 그렇게 역사는 투쟁으로 점철된다. 그게 세상이다. 거대한 위력으로 되살아난 21세기 세트의 세상에서 우리의 호루스는, 아니 오시리스는 안녕하신지.

그리스 신화가 그려내는 신들의 투쟁사는, 또는 세계의 문명사는 더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그리고, 가차 없다. 태초의 거대한 신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낳았다는 티탄족 열두 남매와 외눈박이 거인과 백수(百手) 거인들, 그들은 어찌 움직였던가. 싸움과 분란의 연속이었다. 그 혼란을 제어하고자 나선 막내 티탄 크로노스가 한 일은, 낫으로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른 일이었다. 그렇게 생명의 흐름을 끊고 세상의 지배자가 된 크로노스. 하지만 그가 맞이한 것은 자기가 낳은 아들에 의한 가차없는 공격이었고 하늘 끝으로의 유폐였다. 저 유명한 신 ‘제우스’에 의한. 그렇게 펼쳐진 티탄족과 올림푸스 신들 간의 일대 전쟁의 결과는, 젊은 신들의 승리였다. 그렇게 이 세계의 질서는 뒤바뀐다.

그리스 신화에서 티탄족과 거인의 세상은 극복됐어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곤 한다. 상징으로 읽으면 티탄족은 원시의 거대한 자연성이고 야만성이다. 크로노스가 제 자식들을 차례로 삼키는 일은 야만적 폭력성의 표상이다. 야생의 자연이란, 이렇게 가차 없다. 그렇다면 그것을 제어하면서 펼쳐진 새로운 질서는, 올림푸스 신들이 지배하는 세계는 평화로운 낙원이었을까? 그럴 리 없다. 굳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끌어오지 않아도, 다들 잘 알 것이다. 제우스가 어떤 욕망으로 어떻게 권능을 휘두르는지를. 신들이 서로 어떻게 갈등하고 싸우며 갖가지 재앙을 빚어내는지를. 신화는 제우스가 빚어낸 인간이 ‘철의 족속’이었다고 말한다. 노동하고 슬퍼하고 피곤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범죄와 배반, 약탈과 탐욕에 휘둘리고 쓰러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얘기다.

비슈누와 브라흐마와 시바가 우리 안에 있는 것처럼 티탄족과 외눈박이 거인 백수(百手) 거인과 제우스가 우리 안에 있다. 포세이돈과 헤파이스토스와 하데스, 에로스와 타나토스와 나르시소스, 그리고 아테나와 아프로디테와 프쉬케도. 우리는 그 중 올림푸스 신들에게 지워진 존재인 티탄족을 잊곤 한다. 하지만 그들이 더 본원적인 생명이고 질서일 수 있다. 최초로 인간을 빚어낸 것이 티탄족의 프로메테우스라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리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느냐면, 우라노스와 가이아가 있고 태초의 카오스가 있다.

다시 한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본다. 올림푸스를 넘어서 티탄으로. 크나큰 대지의 여신 가이아로. 그리고 그 이전 아득한 태초로.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니라 하나였던…….

미륵과 석가, 또는 대별왕과 소별왕의 길

세상을 놓고 벌이는 신과 신의 싸움은 동아시아 신화에서도 여러 형태로 펼쳐진다. 황제와 치우의 대결이 유명하지만, 그에 앞선 시원적인 싸움이 있으니 태초의 창조신들 간의 다툼이 그것이다. 알타이 신화에서는 윌겐과 에를릭이 부딪치며, 몽골 신화에서는 마이다르 보르항(미륵불)과 샥지투브 보르항(석가불)이 승부를 겨룬다. 창조의 주재자였던 윌겐이나 마이다르 보르항에 보조자나 후발주자였던 에를릭과 샥지투브 보르항이 도전한 형태의 싸움이었다. 그중 진정한 생명력 능력자는 윌겐과 마이다르 보르항이었지만, 그들은 속절없이 패배한다. 그리고 세상은 바뀐다. 모순과 부조리가 만연한 곳으로.

그 싸움은 한국 구전신화에서 미륵과 석가, 또는 대별왕과 소별왕의 대결로 말해진다. 미륵이 누구던가. 전에 이야기했듯이 태초의 크나큰 창조신이다. 하늘과 땅을 갈라서 이 세상을 만든. 그리고 하늘로부터 인간을 받아 내린. 신화는 그가 다스리던 시절이 태평성대였다고 한다. 사람과 동물, 사물 사이에 서로 말이 통하던, 함께 나란히 움직이며 어울리던 자연적 생명성의 시대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대는, 말하자면 원시적 공동체사회는, 영원할 수 없었다. 새로운 지배권력이 등장해서 세상을 흔든다. 그가 곧 석가다.

석가는 미륵 앞에 나타나서 “네 세월은 다 갔으니 이제 내 세월을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미륵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저항한다. 그리하여 펼쳐지는 세 번의 시합. 금줄 은줄 유지하기와 강물 얼리기, 무릎에 꽃피우기까지 모든 싸움의 승자는 미륵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차지한 것은 그가 아닌 석가였다. 미륵이 피운 꽃을 꺾어다가 제 무릎에 꽂은 뒤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미륵이 남긴 것은, 저주에 가까운 예언이었다. 꽃이 피어 열흘을 못 가고 심어서 십년을 못 가리라는. 집집마다 기생 과부와 무당 역적이 나고 갖가지 불구자가 나서 말세가 되리라는. 그리고 그 예언은, 실현된다. 바로 그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중이다. 갖은 차별과 모욕과 갈등과 다툼이 난무하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질병과 노쇠의 고통을 면할 수 없는……. (여기서 석가는 불교의 석가모니불과는 다른 존재다. 태초의 창조신에 대한 현세의 문명신을 표상하는 존재다. 석가가 현세불이기에 신화에서 그 이름을 차용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제주도 신화 속 대별왕과 소별왕의 다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늘과 땅의 힘이 만나서 탄생한 그들 쌍둥이 형제 중 진정한 능력자는 대별왕이었다. 그만이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을 차지한 것은 꽃을 훔친 소별왕이었다. 그는 선악을 분별하고 세상의 체계를 세우지만, 위계의 질서이고 욕망과 배제, 폭력의 체계였다. 그에 의해 도륙되고 빻아진 수명장자는 재앙이 되어 온 세상으로 퍼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신화는 그것을 모기, 파리와 빈대, 각다귀 따위로 말하지만 어찌 그뿐이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며 부대끼게금 하는 것이 세상 한가득이다.

미륵과 석가는, 대별왕과 소별왕은, 그 또한 우리 안에 있다. 지금 우리는 미륵의 길을 가는가 석가의 길을 가는가. 이 시간 나는, 대별왕인가 아니면 소별왕인가. 또는 모기 파리 빈대 각다귀인가. 엄중한 질문 앞에, 아득해진다.

세상을 다시 세우고 나를 살리는 힘

신화의 신들은 시간을 넘어서 공존한다. 시바가 여덟 개의 팔을 휘두르며 세상을 마구 파괴하고 있는 한켠에 브라흐마가 비슈누가 있듯이, 세트에게 갈가리 찢긴 오시리스도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신화는 그가 저승으로 들어가 왕이 되었다고 말한다. 제우스에게 유폐된 크로노스와 대전쟁에서 진 티탄족도, 그리고 그들의 부모인 우라노스와 가이아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지금 이렇게 대지를 밟고서 하늘을 우러르고 있지 않은가.

미륵과 대별왕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잠시 물러났을 따름이다. 소별왕에게 이승을 넘기는 대신 대별왕이 차지한 것은 저승이었다. 대별왕은 저승에 ‘맑고 청량한 법’을 세운다. 이승에서 훼손되고 뒤집힌 모든 것은 저승에서 빠짐없이 바로잡힌다. 욕망과 권세를 탐닉했던 무리는 지옥에 들어 만년의 고통을 겪고, 부조리와 고통을 감내하며 정도(正道)를 걸어간 이들은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

그것은, 단지 죽음 뒤의 일이 아니다. 신화에서 대별왕은 소별왕에게 세상을 넘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잘못하면 재미없으리라”라고.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다. 돌아와 세계 질서를 뒤집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미륵의 일이기도 하다. 부조리와 차별, 고통이 만연한 이 세상은 그렇게 영속할 리 없다. 미륵불이 재림해서 본래의 생명적 질서를 회복할 것이다. 일컬어 후천개벽(後天開闢)! 사람들은 그 믿음과 의지를 가슴 깊이 품고서 꿋꿋이 버텼고, 장렬하게 싸웠다. 스스로 들불이 되어서. 그 순간 그들은, 미륵이었다.

엉클어진 마음을 가다듬으며 내 안의 미륵과 대별왕을 찾아서, 비슈누와 오시리스와 가이아를 찾아서, 길을 나선다. 자꾸만 아득히 숨어버리는 그들을 마침내 찾아내서, 그와 하나 되어서, 싸워 가리라. 정의와 생명의 세상을 향하여. 진정한 나의 삶을 향하여.

신동흔 (건국대 국문과 교수 & 한국문학치료학회회장)

이 시리즈는 한겨레신문 휴심정과 함께합니다.

사진 : 한겨레 신문 휴심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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