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흔의 치유적 신화읽기 2

나의 몸 나의 마음, 어디까지가 진짜 나인가

인간 탄생 신화에 담긴 존재의 비밀

신의 피조물, 한줌 흙으로 빚어진

태초의 혼돈이 나뉘고 걷히면서 , 또는 태초의 알이 깨지고 바다가 속내를 드러내면서 세상이 창조됐다고 한다 . 또는 무정형으로 도사리고 있던 대극 ( 對極 )의 기운이 만나서 부딪치면서 이 세상이 시작됐다고 한다 . 그 세계에 자리 잡게 된 만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존재 , 바로 인간이다 . 인간이 만들어낸 신화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인간은 처음 어떻게 생겨나서 세상에 존재하게 됐을까 ? 이 원형적 질문에 대해 세계의 신화는 가지각색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 구체적인 사연은 다르지만 그 바탕에는 서로 통하는 사유가 있다 . 첫손에 꼽을 사항은 인간의 탄생이 신 ( 神 )의 작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 신들이 직접 나서서 인간을 빚기도 하며 , 신의 뜻에 의해 인간이 태어나기도 한다 . 예외는 거의 없다 .

많은 신화는 모든 생명 가운데 인간을 특별하게 여긴다 . 히브리 창세기에서 야훼는 엿새에 걸쳐 세상 만물을 창조한 뒤 마지막 날 자기자신을 닮은 존재로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 뭇 짐승들을 다스릴 권능을 부여하면서 . 창세기만이 아니다 . 중국신화도 창조여신 여와가 자신을 닮은 존재로서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다 . 그리스 신화는 어떠한가 . 프로메테우스가 정성껏 빚은 인간의 육체에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영혼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 하늘과 땅 사이의 특별한 존재 . 존귀한 신의 분신 ( 分身 ). 그것이 대다수 신화가 말하는 인간의 자기인식이다 . 또는 원형적 자기서사다 .

하지만 인간은 , 신과 닮았을지 몰라도 , 그 자체 신은 아니다 . 인간은 물적인 존재다 . 구체적으로 , 어떤 물질성일까 ? 인간이 처음에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의 문제인데 , 신화들이 전하는 답이 흥미롭다 . 돌 , 나무 , 뼈 , 흙 , 밀랍 , 옥수수 , 버섯 , 눈 [ 雪 ], 그리고 신의 눈물이나 배설물에 이르기까지 , 인간의 재료가 된 물질이 꽤나 다양하다 . 신의 배설물이라니 무슨 일인가 싶지만 , 인도신화에서 그것을 정액 ( 精液 )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 그 또한 인간이 신의 자손이라는 뜻일 테니까 .

여러 물질 가운데 단연 주목할 것은 바로 ‘흙 ’이다 . 세계의 많은 신화들은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고 말한다 . 히브리 창세기나 중국의 여와 신화 , 그리스 신화가 그러하며 , 수메르 신화와 아프리카 요루바족 신화 , 알타이와 몽골신화 등에서도 인간이 점토나 진흙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 한국 구전신화 <셍굿 >에도 황토를 모아서 인간 남녀를 만드는 내용이 담겨 있다 .

인간이 본래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데는 우리의 존재적 정체성에 대한 원초적 사유가 담겨 있다 . 인간이란 본래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 ! 우리가 사는 것은 결국 땅 위에서다 . 땅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 먹은 것을 다시 땅으로 돌려보낸다 . 무엇보다도 , 우리는 죽으면 땅으로 돌아간다 . 돌아가는 곳이 땅이니 , 유래한 곳 또한 땅일 것이다 .

그 신화적 서사를 나의 존재적 속성으로 사유해 본다 . 지금 이렇게 움직이는 나의 몸이 , 내가 애지중지하는 이 신체가 사실은 진흙이고 황토라는 것 . 모기에 물려 가려운 나의 팔 , 땀이 배어 나오려는 목덜미 , 작은 지끈거림이 시작되는 머리 …… 다 흙에서 온 것이고 흙으로 돌아갈 무엇이다 . 잠시 명상에 잠겨보려고 꾹 감은 나의 두 눈도 . 무상하고 무상하다 . 한편으로 , 평화롭다 . 한 줌 흙에 무슨 번뇌가 있으리 .

존재의 역사 . 쓰러지고 스러지며 다시 태어난

나의 존재가 한 줌의 흙이라는 것은 , 절반의 진실이다 . 신화가 말하는 인간은 단순하고 전일적인 존재가 아니다 . 복합적인 존재이며 , 간단없이 전변하면서 거듭나는 존재다 .

그리스 신화 속의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의 진흙과 아테나의 영혼이 어우러진 존재라 했거니와 , 수메르 신화에서 엔키가 만든 인간 또한 점토에 신의 피가 섞임으로써 탄생한 것이었다 . 몽골신화에서 보르항 (부처 )이 만든 진흙 인간도 물이 피가 되고 연기가 숨이 되어 깃듦으로써 살아 움직일 수 있었다 . 히브리 신화는 어떠한가 . 세르기우스 골로빈이 『세계신화 이야기 』에서 소개한 자료에 따르면 , 신은 흙으로 아담의 살을 만들고 돌로 단단한 뼈를 , 물로 피 , 해에서 두 눈을 , 흘러가는 구름에서 생각을 , 불어오는 바람에서 숨결을 만들었다고 한다 . 인간은 흙인 동시에 돌이고 물이며 해와 구름이다 . 불어오는 바람이다 . 지상의 모든 것이다.

여러 신화는 인간이 단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일련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창조되었다고 한다 . 보르네오 두산족은 신이 처음에 돌로 인간이 말을 하지 못하자 다시 나무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 그리고 그가 갈라지고 썩자 다시 흰개미로부터 얻은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 거꾸로 처음에 흙을 썼다가 여의치 않아 다른 재료를 이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중국 야오족 신화에서 창조여신 미뤄퉈는 처음에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려 했으나 결과는 사람이 아닌 물항아리였다 . 이어서 쌀밥을 사용한 결과는 술이었고 , 나뭇잎을 쓴 결과는 메뚜기 , 호박과 고구마를 쓴 결과는 원숭이였다 . 미뤄퉈 여신이 인간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은 벌집을 녹인 밀랍을 통해서였다 .

이러한 신화적 서사에 대하여 인간이 된 최종 재료나 결과만 주목하는 것은 단견이다 . 그 일련의 과정을 인간의 역사로 보는 것이 신화적 독법이다 . 돌과 나무와 진흙 , 또는 진흙과 쌀밥과 나뭇잎과 호박과 고구마와 밀랍 …… 그 모두가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역사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 그것은 개인 차원의 실존적 진실이기도 하다 . 돌이었다가 나무였다가 흙이었던 것이 , 또는 흙이었다가 밥이었다가 나뭇잎이었다가 호박과 고구마이기도 했던 것이 , 그렇게 물항아리나 술이나 메뚜기나 원숭이이기도 했던 것이 , 나의 존재적 역사다 .

인간의 거듭된 창조 과정에 대하여 , 아즈텍 신화는 현세계 이전에 네 번의 선세계가 존재했으며 인간 또한 사멸과 재탄생을 거듭했다고 전한다 . 그 선세계들은 차례로 호랑이의 태양과 바람의 태양 , 화염비의 태양 , 물의 태양이다 (아즈텍 신화는 각 세상을 ‘태양 ’으로 표현한다 ). 인간이 거친 짐승 속에서 , 몰아치는 바람과 쏟아지는 불비 속에서 , 그리고 가없는 물바다 속에서 움직였다는 말이다 . 바람에 날린 인간은 원숭이가 되고 , 불의 비 속의 인간은 칠면조가 되며 , 물에 삼켜진 인간은 물고기가 된다 . 그렇게 다시 시작된 다섯 번째 태양 . 지금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운동의 태양 ’이다 . 현세의 인간은 ‘무 ( 無 )’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물의 태양 ’에서 물고기가 되었던 인간의 뼈를 신들이 아득한 지하세계에서 힘들게 찾아온 뒤 바스러진 뼛가루에 속죄의 피를 떨어뜨려서 현 인류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 아득한 시련과 사멸의 역사이며 , 갸륵한 핏빛 부활의 역사다 .

아즈텍 신화가 전하는 인류 탄생의 서사에서 다시금 나 자신의 역사를 본다 . 호랑이 속이었고 , 바람 속이었으며 , 불의 빗줄기 속이었고 , 끝 모를 물속이었다 . 원숭이였고 , 칠면조였으며 , 물고기였다 . 지하에 갇혀 바스러진 뼈였다 . 그 시간을 통해 지금의 내가 있다 . 그리고 그것은 끝이 아니다 . 일컬어 운동의 태양 ! 쉼없는 운동의 시간 속에 나는 끝없이 유전한다 . 어제 칠면조였고 물고기였으며 오늘 아침 밥쟁이였던 나 , 이 순간 아테나의 지혜를 찾고 있는 중이다 . 저 아득한 영원에서 이어져온 나의 몸짓은 또 다른 영원으로 이어져갈 것이다 . 지금 내가 남기고 있는 이 뼛조각에서 또 다른 생명이 탄생할 수 있다면 …… .

금빛 은빛 신성과 한 마리 벌레 사이

돌아와 우리 신화를 본다 . 앞서 <셍굿 >을 잠깐 언급했지만 , 한국신화의 인간 탄생 서사는 함경도 구전신화 <창세가 >에서 본령을 볼 수 있다 . 태초에 거대한 창조신 미륵이 하나였던 하늘과 땅을 가르고 구리 기둥을 세웠다고 하는 그 이야기 속에서 .

“ 옛날 옛시절에 / 미륵님이 한짝 손에 은쟁반 들고 / 한짝 손에 금쟁반 들고 / 하늘에 축사하니 / 하늘에서 벌레 떨어져 / 금쟁반에도 다섯이오 / 은쟁반에도 다섯이라 . / 그 벌레 자라나서 / 금벌레는 사나이 되고 / 은벌레는 계집으로 마련하고 / 은벌레 금벌레 자라와서 / 부부로 마련하여 / 세상 사람이 낳았어라 .”

<창세가 >에서 인간은 특별히 창조된 존재다 . 창조신 미륵이 직접 나서서 최고 정성의 상징이라 할 금쟁반 은쟁반을 받쳐 들고 하늘을 향해 축원을 올린다 . 그 결과로 생명이 내린다 . 신성한 그곳 , 하늘로부터 . 그렇게 내린 생명은 어김없는 하늘 신의 분신이다 . 더없이 존귀한 . 신화는 금쟁반 은쟁반에 내린 생명을 그 자체 금벌레와 은벌레라고 칭함으로서 신성성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

하지만 그 생명은 금 ( 金 )이고 은 ( 銀 )인 한편으로 , 하나의 ‘벌레 ’다 . 여기서 벌레는 원초적인 생명체를 뜻하는 말이겠지만 , 어떻든 하나의 미력한 물질성의 존재임은 변하지 않는다 . 무언가를 먹어야 움직일 수 있는 존재 , 추위에 떨고 더위에 허덕이는 존재 , 꾹 누르면 힘없이 절명하는 존재 , 그것이 벌레이고 인간이다 . 생사고락과 희로애락에 휘둘리다가 속절없이 스러져 흙으로 돌아갈 한 마리의 짐승 . 그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

금빛 은빛의 고귀함과 한 마리 동물의 미력함 . 이 둘을 추상화해서 표현하면 신성 ( 神性 )과 수성 ( 獸性 )이라 할 수 있다 . 동물 ( 動物 )은 하나의 물 ( 物 )이니 수성은 물성 ( 物性 )으로 일컬어도 좋다 . 사람의 존재적 속성에는 , 곧 인성 ( 人性 )에는 신성과 수성 /물성이 맞물려 있다 . 둘 사이를 끝없이 유동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 어떨 때는 신에 가깝고 어떨 때는 물에 가깝다 . 어떤 이는 신에 가깝고 어떤 이는 물에 가깝다 .

돌아와 자기서사를 반추해본다 . 내가 밟아가고 있는 서사의 길은 신 ( 神 )의 길인가 , 물 ( 物 )의 길인가 ? 이 엄중한 신화적 질문 앞에서 , 나는 그만 아득해진다 . 아무리 헤아려봐도 내가 살아온 시간은 , 그리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간은 8할 이상이 물 ( 物 )이다 . 메뚜기와 원숭이와 칠면조와 물고기의 시간 …… 돌과 나무와 진흙의 시간 …… 그렇게 한 마리의 큰 벌레로 움직이고 있는 나 . 그것이 인간이라고 자위해 보지만 , 그렇게 떠돌다 스러진다면 그건 너무 무의미하지 않은가 .

내 안 어디엔가 깃들어 있을 금빛 은빛 신성을 찾아내야 한다 . 진흙 속에서 신의 피가 돌고 맥이 뛰게 해야 한다 . 창조여신의 젖줄이 흐르고 아테나의 영혼이 뛰놀게 해야 한다 . 신 ( 神 )과 물 ( 神 )이 어우러져 조화와 합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나는 물을 벗어나 신이 될 수 없지만 , 둘의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 . 그래야 하나의 ‘인간 ’이 될 수 있다 .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 신화가 그 길을 비춰주고 이끌어줄 것이다 .

단절과 연결 , 작은 나와 큰 나

한국의 창조신화에서 금벌레 은벌레가 인간으로 자라난 것은 지상에서였다 . 그 자라남이 저절로 된 것일 리 없다 . 하늘과 땅 사이 온갖 기운을 간단없이 머금어 취한 결과였다 . 하늘에서 내리는 햇살과 이슬과 비와 바람과 눈 , 땅에서 나는 풀과 나물과 곡식과 열매들 …… 지금 여기 나의 몸은 그 모든 것들의 집합체다 . 그렇게 나는 흙이고 물이며 옥수수이고 밥이다 . 치킨이고 삼겹살이며 콜라이고 맥주다 .

어찌 몸뿐일까 . 나의 마음과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 내 머리 속의 갖자기 지식과 정보들 , 다 밖에서 온 것이다 . 사람에게서 , 책에서 , 그리고 TV나 인터넷에서 . 움직이는 희로애락 ( 喜怒哀樂 ) 애오구 ( 愛惡懼 ) 뭇 감정들 또한 마찬가지다 . 그 감정 가운데 외물 ( 外物 )로부터 촉발되지 않은 것이 , 밖에서 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될까 . 이 글을 쓰는 나 . 어제는 여유로웠는데 오늘은 조급하다 . 일정 때문에 , 또는 분량 때문에 . 하지만 다시 평정심을 찾는다 . 자유로운 글이므로 . 마쳐가고 있으므로 .

가없는 인연으로 이루어진 나 . 끝없이 변화해가고 있는 나 . 과연 어디까지가 나인가 ? 나 아닌 것과 나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 생각하면 무상 ( 無常 )한 일이지만 , 현실로 말하자면 그것은 ‘생각 ’ 속의 일일 따름이다 . 구체적 실존 속에서 , ‘나 ’라고 하는 존재는 너무나 뚜렷하다 . 압도적일 정도로 . 지금 내가 움직이고 있는 손가락과 노트북 자판 사이의 아득한 심연 . 노트북은 ‘나의 것 ’이지만 , ‘나 ’는 아니다 . 옆에서 발 뻗고 누워 있는 고양이도 ,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아내와 딸도 . 갸륵하고 소중한 존재이지만 , 그들이 곧 나일 수는 없다 . 어찌 나를 대신해서 화장실에 가랴 . 또는 이 글쓰기의 과업을 대신하랴 .

세상 만유와 연결된 존재로서의 나와 한 명의 단절된 개체로서의 나 . 인간이라는 존재의 , 우리 자기서사의 두 측면이다 . 그 중 내 삶을 규정하며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지 돌아본다 . 한 명의 작은 나로서 먹고 싸고 웃고 화내고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8할 이상이다 . 아니 , 9할 이상 ! 나와 남 사이의 , 나의 편과 남의 편 사이의 날카로운 단절 속에서 아둥바둥하는 시간의 연속이다 . 하나라도 더 가져보려고 . 이겨보려고 . 기림을 받아 보려고 …… .

돌이켜 떠올려보는 것은 조화와 합일의 길이다 . 작은 나와 큰 나 사이의 . 눈앞에 있는 나를 넘어서 ,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무수한 연결을 사유해 본다 .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아서 추상적이지만 , 그리하여 너무 쉽게 잊고 외면하지만 , 작은 나를 넘어선 또 다른 큰 나는 , 있다 .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신화적 시간 속에 . 그것과 접속이 내내 끊어질 때 , 나는 하나의 진흙이고 벌레일 따름이다 .

자판에서 손을 놓고 나면 바깥으로 나가보아야겠다 . 하늘과 땅 사이 신령한 생명의 공간 속에서 몸과 마음을 열고 우주의 숨을 찬찬히 호흡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 작은 신화의 시간을 .

신동흔 (건국대 국문과 교수 & 한국문학치료학회회장)

이 시리즈는 한겨레신문 휴심정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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