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스님의 사사건건 11

실상사 마스코트 개, 다동이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다동 이야기

조주 선사(778~897)에게 어느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부처의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 선사가 답했다. 

“없다” 

 이 문답을 두고 후대의 무문 선사(1183~1260)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선(禪)을 참구함에 있어 옛 조사들이 세워놓은 장벽을 뚫어야 한다. 오도(悟道)하려고 하면 자기가 갖고 있는 차별심을 버려야 한다. 그 장벽을 뚫지 않고 차별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가 초목에 숨어 나타나곤 하는 귀신들이다. 

자, 말해봐라 무엇이 선의 장벽인지, 바로 이 “無” 공안이 선의 장벽이다. 그래서 이것을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 칭한다. <중략> 평생의 힘을 총 동원하여 무자(無字)에 참구하고 무(無)와 하나가 되어라. 만약 중단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계속 투쟁하면 어둠이 즉시 걷히고 법의 촛불이 켜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선종 사서의 최고봉인 『무문관』, 제1칙에 나오는 문답이다. 이른바 ‘조주 무자“(趙州 無字)로 불린다. 지금도 선원에서는 선승들이 이 ’무자‘ 화두를 잡고 치열하게 참구한다. 붓다는 어떤 생명들에게도 숭고하고 지혜로운 부처의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조주 선사는 붓다의 말씀에 거역하고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이 의문을 타파하면 일체 무명이 녹아내리고 생사의 경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인간과 가장 오래 동반자로 살아온 견공들은, 선승들을 절대절명의 절벽으로 몰아 세운다. 때로 인간들은 견공들을 극한으로 낮잡아 본다. 귀여운 내 강아지에서 개 xx, 개무룩까지, 오늘날 개들은 사랑과 폄하의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동물 복지와 동물권을 중요한 과제로 여기는 반려 동물의 시대, 이제 개에 대한 얘기를 할까 한다. 내가 지금 함께하고 있는 반려견을 소개한다. 

견명: 다동(茶童) 

견종: 골든 레트리버 혼종 

견공 번호: 20161103일 

성별: 남 

신장: 높이 60센티 길이 1미터 

성격: 소심, 활달 

취미: 들꽃 향기에 취하기 , 명상 아닌 망상 하기, 둘레길 걷기 

부업: 실상사 농장 근로 감독관

다동이가 어떤 연유로 입산하여 불문에 인연을 맺었는지를 말해야겠다. 다동이는 출생 이후 에는 서울에서 자랐다. 초대 견주, 즉 다동이 엄마는 ‘이루’라는 별호로 불리는 정진단 선생이다. 지금은 서울 정독 독서실 근처에서 향과 차를 공부하고 문하생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다동이는 이루 선생과 그분의 친정어머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아마도 집안에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배려해서 다동이를 데려와 키운 것이다. 다동이는 내가 붙인 이름이다. 서울에 있는 다동이를 대략 한 살부터 봤는데, 그때는 ‘투호우’라고 불렀다. 크게 관심이 없어서 그 뜻을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최근 물어봤는데 우리 말로 옮기면 ‘토호’라고 한다. 헐! 우리가 역사에서 부정적으로 읽은 토호 세력할 때 그 토호(土豪)란다. 지금 중국 본토에서는 신흥 재벌을 뜻한다고 한다. 관셈 보살 ~.. 참고로 이루 선생, 즉 다동이 첫 엄마는 한족 출신의 중국 국적을 가졌다. 다동과 토호, 참 안 어울리는 이름이다. 토호, ‘돈’에서 이제는 다동, ‘차’로 삶의 방향을 바꿨다. 하하하.. 

2년 넘게 이루 선생과 그 어머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투호우의 견생에 시련이 왔다. 집에서 “아이고~ 이쁜 내 강아쥐”하고 키우던 할머니가 돌연 몸이 좋지 않아 더 이상 산책과 운동을 시킬 수가 없었다. 또 대형견인지라 날로 몸집이 불어났다. 이 큰 놈이 하루 종일 집과 가게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 있고 누워지내니 살맛을 잃어갔다. 점점 몸은 시들어가고 생기를 잃어갔다. 우울증 비슷한 증세가 왔다. 그래서 응급 상황은 넘겨보고자 내 살던 암자,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서 입산했다. 아마 그 때 투후우는 수도할 발심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땅끝 일지암까지 온 그날, 대략 눈치를 챈 느낌이었다. 나에게 엄청 애교를 부리고 재롱을 떨었다. 아마 그의 운명을 감지한 모양이다. 이루 선생과 일행들은 일지암에서 하룻 밤을 묶었다. 그런데 다음 날, 이를 어쩌나! 이루 선생이 잠에서 일어나 마루 문을 열고 나오니 투호우가 밤새 엄마의 신발 앞을 지키고 있다가 앞의 두 발을 들어 정신없이 안겼다. 이별을 강하게 예감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그들은 애절하게 아련한 이별을 했다. 

그로부터 투호우는 다동으로 이름을 바꿔 두륜산에 입산하고 일지암에서 수행했다. 차의 성지여서 차 다(茶), 아이 동(童), 다동으로 견생 2막을 열었다. 참조로 녹차를 우려 주면 잘 마시지는 않는다. 다동이 엄마가 가고 난 뒤 은근 걱정을 했다. 이별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음식을 먹지 않고 시름에 빠지면 어찌하나? 혹시 그 머 나면 천리 길을 걸어서 주인 할머니를 찾아왔다던 진돗개와 같이 나 몰래 하산하여, 엄마 찾아 서울 천리하면 어찌하나? 한밤중에 엄마가 그리워 목을 놓아 서럽게 울면 어찌하나? 그러나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다동이는 생기 충천하며 잘 먹고 잘 놀고 사람을 잘 따랐다. 서울에서 운동 부족으로 오른 편 뒷 다리가 눈에 띄게 불안했는데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자식, 그래도 한 사흘이라도 슬픈 척이라도 하지… 관셈 보살~ 

일지암은 해발 5백 미터 높이 상봉에 있다. 마당은 다소 넓지만 다동이가 활달하게 운동하기에는 부족하다. 녀석이 산책은 좋아하는 데 등산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고 SUV에 태우고 평탄한 길을 산책한다. 대흥사 십리 길 숲길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다동이는 열린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불어오는 바람을 즐긴다. 뜻밖의 개를 보고 사람들은 여지없이 놀란다. “우아~ 대박!” 환호하며 사진 찍는다. 사람들의 인기를 다동이가 은근 즐기는 것 같다. 정말이지 대박 아닌 개박! 이 아닐 수 없다.

작년 8월 내 거처를 지금의 실상사로 옮겼는데, 이곳을 다동이는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실상사는 다른 산사와는 달리 논밭이 둘러싸인 평지에 있기 때문에 언제든 산책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모두 생물이다. 생물은 움직여야 하고, 움직일 때 생명이다. 생동할 때 생명의 기운은 순조롭다. 그러므로 생명의 평화는 순조로운 움직임에서 시작한다. 산책은 재미있다. 밝은 햇살 받으며 산과 구름을 보며 산길과 둑 길을 걷는 맛이 좋다. 

이제 다동이는 실상사가 있는 산내면 사람들에게 인기 스타가 되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오, 안녕! 네가 다동이구나. 반가워.”라고 말을 건넨다. 동네 사람들에게 스님이 키우는 개로 화제가 되고 있다. 반려동물 전성시대이기는 하다. 녀석이 워낙 덩치가 커서 거의 송아지 수준인데도 사람들이 레트리버인줄 알고 무서워하지 않는다. 특히 어린이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일요일 어린이 법회에 온 초딩들은 어김없이 내 방 앞까지 와서 쓰다듬고 같이 논다. 5학년 연우는, 내가 사람 나이로 따지면 다동이가 오빠라고 했더니, 꼬박 ‘다동이 오빠’라고 부른다. 연우는 예능으로 말하면 다큐로 받아들이는 정직하고 순진한 아이다. 

존재의 관계라는 것이 참 묘하다. 처음에는 내가 다동이 체력 강화 코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내가 이런저런 핑계로 운동하기 싫을 때가 있다. 그런데 다동이 건강과 즐거움을 위해서 몸이 힘들어도 하루에 최소 한 번은 산책해야 한다. 내가 다동이를 끌고 간다고 생각했는데 살펴보니 아니다. 다동이가 나를 끌고 가고 있다. 어느덧 다동이가 나를 길들이고 있다. 다동이는 산책길에서 꽃과 풀 향기를 맡기 좋아한다. 아마도 첫 엄마가 침향 전문가라서 그런가 보다. 풀꽃 냄새를 충분히 음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밖에서 보면 내가 갑이고 다동이가 을인 것 같지만 내실을 보면 정반대이다.

다동이는 절의 수행견으로 부족함이 없다. 오계(五戒)를 철저하게 지킨다. 첫째, 계율이 불살생이다. 천사견이라는 별명답게 다른 생물을 죽이거나 물지 않는다. 둘째,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 가끔은 농장의 음식물 쓰레기장을 기웃거리기는 하지만 주지 않는 물건을 가져 오지는 않는다. 셋째,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다. 수컷인데 앞의 인간 엄마가 중성화 수술을 해주었다고 하니 본의 아니게 평생 청정 독신으로 사실 것이다.(이 부분은 다동이에게 미안하다). 

또 거짓말도 하지 않고 술도 드시지 않으니 수행견으로 부족함이 없다. 또 공동체 운력에도 꼬박 참석한다. 대중들이 밭에서 일할 때 다동이는 흙바닥에 누워 일하는 풍경을 감상한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실상사 농장 근로감독관’이다. 이러니 절의 대중으로서 결격 사유가 없다. 나와 더불어 수행하는 도반(道伴)으로 자질과 품성이 부족함이 없다. 나무 다동보살 마하살! 내가 다동이를 온전하고 고귀한 생명체로 바라보니 팔정도 수행의 첫째 덕목인 정견(正見) 수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또 다동이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경내에 세워진 황룡사 탑 넓이 만큼의 목탑 터 둘레를 화두를 들거나 염불하며 걷는다. 한 시간 이상을 그렇게 걸어도 다동이는 묵묵하게 따라 걷는다. 실로 길위의 벗, 도반(道伴)이 아닐 수 없다. 또 녀석의 표정과 건강을 살피며 기쁨을 주어야 하니 보시바라밀이 절로 된다.

더불어 살아가는 동반자이고 마음을 나누는 동행자로서 반려견을 생각하니 그 옛날 통일 신라 시대 김교각(696~794) 스님이 떠오른다. 지금도 중국에서 지장 보살의 후신으로 추앙 받고 있는데, 김지장(金地藏) 스님으로 불리기도 한다. 왕자 출신인 스님은 719년 안후이성 구화산에서 수행하고 대중을 교화했다. 지금도 김지장 스님의 썩지 않는 육신을 존상으로 모시고 있는 구화산 절의 벽화에는 스님과 함께 빠짐없이 개가 함께 하고 있다. 바닷길로 유학을 갈 때 신라의 개를 데리고 간 것이다. 개의 이름은 선청(善聽)이라고 한다. 하여 오늘날에도 경북 경산에서는 선청을 삽살개라고 하고, 경주에서는 사냥개인 동경이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이러니 개도 줄을 잘 서야 후세까지 유명세를 탄다. 

본디 절에서는 개를 키우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금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날 타이나 미얀마 등 남방 지역의 절에는 개가 많다. 절이 일종의 유기견 보호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문화재 지킴이로 개들이 함께하고 있다. 

전생의 어떤 지중한 인연으로 나와 인연을 맺은 다동! 내가 스스로 정한 몇 가지 다짐이 있다. 생각과 감정이 온전한 생명체로 바라보고, 다동이의 마음으로 다동이를 바라보고, 다동이의 건강과 기쁨을 위해 함께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동이가 나이를 먹어 병들고 기운이 없을 때에 정성으로 보살펴야 한다. 반려동물을 대할 때, 어리고 귀엽고 건강할 때만 사랑하고, 나이 먹고 시들하면 귀찮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다짐을 굳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동이를 사랑하지만 집착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항상하지 않고 변한다는 무상(無常)의 법칙, 하여 인간의 생로병사를 자연스레 받아들일 때 고뇌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듯이, 언젠가는 다동이와도 금생에는 이별할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되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하여 집착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 

이 글을 마치려는 지금, 가을볕이 좋으니 산책하자고 다동이가 문을 두드린다. 그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데 내가 너를 어찌해보랴. 햇볕 좋으니 너도 좋고 나도 좋다. 나가자~

법인 스님 (전북 남원 지리산 실상사 한주 & 전 참여연대 대표 & 전 조계종 교육부장 & 실상사 작은학교 철학선생님)

이 시리즈는 한겨레신문 휴심정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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